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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가 산 사람을 불로 지져죽이던 철원에서 다시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던 왕건태조!
태봉국 궁예 왕이 산 사람을 불로 지져죽이던 철원에서 다시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던 후삼국 통일의 왕건태조!
 
후삼국 통일의 고려 태조 왕건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옛 고향 연고지 관계도 없지 않지만, 특히 전 왕조 태봉국의 왕 궁예가 자신을 神格化하며, 살아있는 미륵으로 자처하고, 관심법(觀心法)을 내세워, 유능하고 무죄한 신하들과 高僧들과 심지어 왕비와 부인들까지도 짐작으로 조작한 누명을 씌워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직접 극악무도하고 잔인하게 철퇴로 타살하거나, 불에 달군 화젖갈(火箸)로 잔인하게 입이나 몸둥이를 지져죽이는 극형을 계속 자행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일찍이 신라 경문왕의 아들로 알려진 궁예는 한 때 世達寺에서 善宗이라는 修道僧으로, 도탄에 빠진 빈민들을 구하고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기치를 들고, 충북과 경기, 강원 지역(충주, 죽산, 경기 광주, 원주, 등)을 함락하여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되어, 國號를 高麗라 하고, 年號를 무태(武泰)라고 했다가, 국호를 다시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후에는 태봉(泰封)으로 또 바꾸며,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면서는 연호를 水德萬世라고도 하였다.
 
민족 자주정신을 내세워 주위의 이웃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당나라 중국 연호를 쓰지 않고, 自主的인 年號를 쓰며, 中原 西土(요동 벌판의 漢族 唐 나라 지역)를 정벌하고 天下統一을 하겠다고 백성들에게 大望의 목표를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칠줄 모르는 후백제와 신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일삼으며, 송악과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2차례에 걸친 왕궁 건설의 온갖 공사에 지쳐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은 아랑곳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폭군 궁예 왕은 엉뚱하게도 자신을 신격화하여 살아있는 미륵으로 자처하고 확신하며, 오늘의 구 철원 평야 도읍지에 대규모 궁궐과 엄청난 부속 건물들과 성곽들을 웅장하게 건설해 나가면서, 극에 달하는 초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계속하여 국법 위에 있는 자신의 觀心法으로 무죄한 충신들과 측근들과 특히 高僧들과 부인들까지도, 궁예 자신이 철퇴를 들고 다니며 너무나 잔인하게 타살하는 비인간적인 극형을 주저하지 않고 가하며, 때로는 숯불에 벌겋게 달군 무쇠부지깡이로 부인들의 입이나 몸을 지져서 죽이는 실로 잔인무도한 참살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백성들과 심복 부하 장군들까지도 견디다 못하여 들고 일어나서, 폭군 궁예 왕을 폐위 축출하고, 王建을 추대하여 高麗 건국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철원의 왕궁 마당과 대궐 앞뒤 뜰 刑場들은 짐작으로 조작된 온갖 누명을 씌워서 연일 타살하던 억울한 충신들의 피로 붉게 물들고,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입과 몸을 지져죽인 신하와 부인들의 사람 살이 타는 냄새가 땅과 주변 건물과 초목에까지 묻어서 짙게 배어 코를 막고 지나야 할 정도로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철원의 웅장하고 요란한 대궐 이곳 저곳에는  왕건 태조와 신하들과 백성들이 몸서리치며 견디기 어려운 한 맺 刑場들의 흔적이 기념물처럼 남아있었다. 마침내 왕건 태조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송악, 즉 오늘의 개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겨서 후삼국 통일의 500년 고려 시대를 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폭군 연산군도 즉위 초에는 매우 건실한 왕이었으나, 후에는 폭정과 주색에 빠져서, 왕의 임무를 하는 임금인 자신이 흥이 나야, 나라가 흥할 것이 아니냐 하며, 전국 고을의 미녀들을 뽑아 올리게 하고, 대궐 안에 큰 집을 지어 머물게 하였는데, 그 집을 당시에는 흥청(興廳)이라고 불렀다. 왕의 흥을 돋구는 집이라는  뜻이다. 요사이 시사용어로 기쁨조들의 본부라고나 할까! 시골에서도 얼굴 예쁘고, 목소리 고운 딸만 하나 낳아 키워서 흥청에 갖다 대기만 하게 되면, 그 부모들은 흥청에 들어간 딸 덕택으로 잘 살며 세도를 부릴 수 있었다. 연산군이 망한 후, 한양의 선비들은, 흥청이 임금을 망하게 한 망청(亡廳)이 되었다 하여, 흥청망청(興廳亡廳)이라는 말이 아직도 종종 쓰이고 있다. Msgr. Byon

Writer : 몬시뇰   Date : 2013-12-16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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