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건설과 천진암 성지 개척이, 지역사회 경제 개발과 활성화에 구심점이 되도록.
- 위대한 정치가들과 행정관들, 훌륭한 공무원들의 공헌을 되새기며,,,!-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는 경기도 광주 산맥의 주봉이 되는 앵자산의 서북쪽 광주군의 퇴촌면 지역이다. 산세가 수려한 명산이라 광주 8경 중의 2경이지만, 산악지대로 농경지가 매우 적고, 주로 산 사태의 토사가 많아 토질이 비옥하지 않으며, 산업시설도 없어서, 퇴촌면, 특히 광주산맥 주봉이 되는 앵자산, 무갑산, 관산, 등 심산궁곡의 관음리 우산리 무갑리 지역민들은 농경지도 소득도 충분치 않아 어려움이 많아서, 산 비탈에는 지금도 火田하던 흔적들이 적지 않다. 급경사면의 경작지화를 위한 화전 밭은 장마철 산사태나 토사의 원인이 되어, 중앙정부의 산림청에서는 조림을 서둘러서, 아시바 감으로 낙엽송 묘목을 심게 하였다. 그런데 곤지암에서 퇴촌, 분원에 이르는 경안천과, 양평에 이르는 한강에는 교량이 없어서, 퇴촌면과 남종면은 국도에서 고립되어 불편이 극심하였다.
특히 주변 도로가 없어서, 분원, 두미 나루터와 마재, 등에 소금배가 운용되던 시대에, 1961년 5.16 군사 혁명 정부는 서울에 전기가 부족하여, 수력발전과 수도 서울의 수해 예방을 겸한 팔당 댐 건설 공사를 추진하였고, 공사용 트럭 통행을 위해, 임시 도로를 우선 번천에서 두미까지 일방통행로를 개설하여, 경안천 서안, 도마치, 이성리, 두미 나루터, 아랫 두미 강가에까지 마차 통행이 좀 수월하게 되었다.
팔당댐 건설 기공식(1966년 착공~1973년 완공)-金光彦 촬영, 사진 제공.- 서울의 전력 수급과 우기 서울의 홍수 피해 예방을 주목적으로 건설된 팔당수력발전소 건설 공사는 국가적으로, 특히 수도권의 한강 수계 안전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국토건설사업이었으나,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의 개척과, 특히, 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을 위한 기반시설-진출입로 확장 개설, 등에도 미리 초석이 되는 하느님 안배의 손길이었다. 앞으로 설명할, 천진암대성당 건립을 위하여, 하늘이 미리 섭리하신 국토건설사업이었다고 확신한다.-Msgr. Byon
팔당댐 건설 기공식 중 박정희 대통령의 기공식 기념식사 (1966년 착공~1973년 완공)-金光彦 촬영
팔당댐 건설 기공식(1966년 착공~1973년 완공)-金光彦 촬영
팔당댐 건설(1966년 착공~1973년 완공)-金光彦 촬영
팔당댐 건설(1966년 착공~1973년 완공)-金光彦 촬영
팔당댐 건설(1966년 착공~1973년 완공) 위 사진 중, <한국전력주식회사 팔당댐 수력발전소 건설공사> 기공식 중, 박정희 대통령의 기공식 기념식사-물길이 치솟는 지점은 지금의 팔당 댐 남쪽 시작 지점이고, 물길 뒤로 약간 오른 쪽은 아랫 두미 마을이다. 30여 면의 사진들은 자료실에서 추후 볼 수 있음.<한국전력주식회사(한전)의 팔당댐 수력발전소 공사 기공식 당시(1966년 6월)부터, 팔당건설사무소 현장에 근무하던 직원, 젊은 날의 金光彦 촬영 제공>
우리나라가 전력부족과, 특히 매년 연례행사처럼 겪는, 장마철 많은 인명피해를 내던 서울 한강의 물난리 수해 방지를 위하여, 1964년(?) 초여름 당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이 팔당댐 건설 후보지 현장 점검(?)을 겸하여, 한강 서울 상류의 남한강, 북한강, 경안천이 합류하는 남종면 분원 주변과 퇴촌면 강변을 둘러보면서, 퇴촌면의 도마리 냇갈 가에서 시골 농부들이 천렵(川獵?)하듯, 아주 소박하게 민물 매운탕으로 점심을 하였는데, 개울 건너 광동리를 바라보며, 농민들이 경안천에 임시로 만들어 건너다니던, 모래 가마니와 기둥감 두줄을 한데 묶은 외나무 겹다리를 보고, “장마철에는 저 다리가 떠내려갈텐데, 그러면 저 건너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통행하느냐?”고 박대통령이 묻자, 동석하였던 도지사(남봉진?이흥배?)가, “퇴촌과 남종(분원) 2개 면민 모두가 완전히 고립되어, 여러날 동안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다리 놓기를 반복하면서 건너다닙니다.”하고 보고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시골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은, “저런 ! 아주 시멘트로 좀 튼튼히 큰 다리를 하나 놓도록 해야지요 !, 그리고, 저 건너 초가집들은 매년 봄에 짚으로 영을 엮어서 지붕을 새로 해야 할텐데, 전국 농민들이 초가집 지붕을 한번 하면 좀 여러해씩 쓰도록 해봅시다!”. 하며 지시하였는데, 평소 좀 과묵한 박정희 대통령의 한마디에, 바로 퇴촌을 건너가는 첫 다리가 처음 착공되었고, 수행원들의 추진으로 상공부에서는 초가집 지붕 개량용 자재로 쓰레트 생산 개발에 착수하여, 처음 제작된 쓰레트로 전국에서 퇴촌면 광동리 마을이 제일 먼저 쓰레트 지붕개량 시범부락이 되었다고, 당시 관계인사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천진암 터가 있는 우산 2리 절막 마을은 당시 심산궁곡 종점이어서, 퇴촌 면사무소에서 천진암 터가 있는 우산리 절막까지 12 Km를 가려면 지그재그 식으로 흐르는 바위돌 무더기 우산천을 건너기 위해, 자주 신발을 벗어들고, 징검다리와 외나무 다리를 13번이나 건너야만 하는 산골이었다.
그런데 당시 동부면의 구산 성지 마을은 천수답이 많고 토질도 과히 좋지 않아 농민들 생활이 어려운 편이었으나, 비닐하우스의 상추 재배를 처음 시작하여, 겨울 농사로 큰 성과를 내자, 순교성인 김성우 안당 형제들의 7대 후손이 되는 젊은 김학성, 새마을 지도자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고, 전국 최연소 면장(당시 31세?)으로 임용되어, 당시 광주군에서 가장 낙후되어 있던 퇴촌면 면장으로 부임하면서,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참여로, 면내의 새마을 사업, 특히, 관음리와 우산리에 이르는 산골 통행로와 간이교량들이 대폭 신규축조, 개선되었다.
그래도, 군이나 도의 예산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삼륜차나 대형 차량의 교차가 힘들어서, 중간 중간 한 편에서 기다려야 하는 곳들이 적지 않았다. 1975년 말, 필자가 수원교구청 사목국장 재직 시에 처음 천진암을 다녀갈 때만 해도, 퇴촌면 사무소의 건물 외벽은 송판으로 비늘처럼 붙이고, 빗물에 썩지 않게 검은 골탈(?) 칠을 하고, 지붕은 붉게 녹쓸은 함석 조각으로 되어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5.16 군사혁명 정부가 추진한, “새마을 운동”으로 마을과 마을로 가는 마찻길들은 좀 넓게 개선되었다. 1982년 천진암 마을 취락구조 개선으로 새로 지은 11동 건물이 퇴촌면 내의 최초 붉은 벽돌과 조선 개와(개량용 시멘트 제)로 되어서, 면 내의 여러 마을에서 구경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1960년 남상철 회장님과 정원진 신부님이 처음으로 앵자산의 천진암 터와 주어사 터, 번어사 터, 일출암 터, 봉태암 터, 석이암 터, 등을 찾아 답사하고, 1963년 1월 경향잡지에 게재하여 알렸었으나, 당시 관활교구(수원교구)는 너무나 빈약하여, 22개 본당 중 대부분이 외국 교회의 미사예물 원조를 필요로 하였었고, 천진암 성지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더욱이, 천진암 계곡과 퇴촌면 내에는 천주교회 토지가 단 한 평도 없었을 뿐 아니라, 천주교회 신자가 한명도 없었다. 몇 년 후, 훗날 북쪽 염티 고개 산맥너머 영동리의 석둔이 좁은 계곡에 양평 용문 산골에서 이사온 교우들 서너집이 배를 타고 일년에 한두번 양평성당으로 다니고 있음이 알려졌다.
필자가 두 번째 교구청 근무를 마치고, 1976년 봄, 광주군 동부면 신장본당(신자 수 450여명, 일년예산 80여만원) 주임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천진암 터에 단 50평~100여평 만이라도 확보하여, 한조각 돌이라도 기념비를 세우고자, 주머니에는 지금이나 그 때나 돈도 없으면서, 신장 본당 대신학생들(차부제품 받은 김학렬, 동생 김학무, 형제)을 데리고, 천진암 터를 한두 차례 재답사하였으나, 산골 논 다랑이었던 천진암 터를 대대로 경작하던 근면하고 선량한 소유권자, 이창룡씨(새마을 지도자)는 대토(代土)를 바라고 있었고, 가난한 신장본당에 새로 부임한 필자는, 마음뿐이지, 그나마 무일푼으로서, 천진암 터 산골 논 50평이나 100평을 매입할 돈도 없었을뿐더러, 아주 간소하고 작은 기념비석 하나 세울 돈이 없었다.
며
그래서 아주 작은 기념사업을 하도록, 어느 수도회에라도 맡겨보려고, 이곳 저곳 7개 수도회 책임자들에게 부탁하여 보았으나, 함께 현지 답사를 하며 현장을 보고 나면, 처음 답사하며 겪은 도로 불편을 내세워, 번번히 진출입 도로가 없어서 불가능하다며, 모두들 천진암 성지기념사업을 맡지 않는다고, 일언지하에 거부하였다.
그런데 당시 서울 某 저명인사가 전답 한평에 100원씩 주고 지금의 빙천담 터 주변 몇 백평을 매입하였을 정도로, 도무지 토지매매가 없던 산골이었다. 그 당시 퇴촌면 소재지는 도로 옆의 전답이 1천200원 내외로 어쩌다가 매매되었었다. 면내의 인구도 불과 몇천명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울며 겨자먹기란 말처럼, 필자는 할 수 없이 우선 내 자신이 천진암 터에 땅이라도 몇 평 사놓고 돌 한조각이라도 세워보자는 심정으로, 우선 토사로 뒤덮힌 빙천 터 불모지 가시덩굴로 덮힌 경사지의 400여평 沓을 평당 2천원(?)씩에 매입하였다(1978.9.16). 그러자, 마을 사람들 몇이 자기네 전답도 사 달라고, 밤중에 지금의 하남시 신장성당까지 몇 번이나 찾아왔으나, 필자는 무일푼으로 아주 난처하였었다. 산골에서 살기가 힘들어서 도시로 이사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살레시오회 출신으로 수원교구에 입적한 벨지움 태생의 Raymond Spies(한국 姓 파신부)신부의 성금 지원으로, 천진암 터 15필지 계단식 논다랑이부터 강학 터 750여평 田, 암자 터 150여평 沓, 주변 火田畓 터, 등 土砂로 뒤덮힌 불모지를 하나씩 둘씩 매입하였으나, 지게지고 오르는 바위돌 사이로 난 산비탈길 외에는 진입로가 없어서 불편이 극심하였다. 그 후, 1980년 봄, 필자가 한국주교회의의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 준비 주교특별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는,한국천주교회 역사상 최초, 최대의 국제적인 기념행사 준비로, 필자의 서울사무실 일이 너무나 폭주하여, 그 때부터 5년간 필자는 주일 오후에만 잠간씩 천진암을 방문할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학생 때부터 책 번역하며 글 쓰던 버릇으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와 발상지 천진암 터에 관하여 글을 써서, 교회 내 정기 간행물로 전국 성당에 알리기 시작하였고, 전국 각처에서 천진암 성지를 찾는 순례단들이 급증하여, 특히 대구대교구의 박창수 신부를 비롯한 순례자들이 버스 3대~5대씩 이끌고 간신히 우산리까지는 들어왔으나, 회차를 못하여, 시골길에서 후진을 계속하느라, 새벽 4시경에서야 대구에 귀가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통행로가 불편하여, 대구 부산 등, 남부지방 관광운수업체들의 불만토로와 진정으로 경기도에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81년 새로 부임한 염보현 경기도 지사의 관심과, 실로 고마운 협조로, 우선 번천리부터 천진암 성지 마을까지 시골길 15 Km 도로포장을, 종점 우산 2리 천진암 입구부터 착공하여, 우선 1.7Km를 마치게 되었는데, 특히, 평소 민족정신과 애국심이 투철하고, 유능한 행정관으로서, 私心이 전혀 없는 염지사는 중앙정부에 건의하여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 조성을 위하여, 성역 내의 국토이용관리법을 변경 정비하였으며, 마을 취락구조 개선 사업, 등, 성지 기반 시설 추진을 지원, 완수케 하였다. 그 후, 서울특별시장으로 전임하자, 서울 올림픽 준비를 완벽하게 수행하여, 한민족사에 기리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경기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으로서, 주변의 낙후지역 도로개설과 서울올림픽 준비에 만전을 기한 점은, 그 어렵던 시절, 이 시대 우리나라 정부의 가장 위대하고 유능한 행정관이었다고, 필자는 확신하며 존경하고 있다.
그 후,1982년 초에 후임 김태호 지사가 계속하여 번천리까지 천진암로 도로의 포장공사를 연결, 마무리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1983년 봄, 버스 2대로 서울 관훈클럽 외신 기자들의 천진암 성지 순례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 후, 1983년 11월 초 로마 교황의 한국 방문이 확정발표되었는데, 그 후에 일부 거리의 사람들은 단순한 짐작으로, 교황방한 덕으로 천진암로 도로 포장이 된 것처럼 말하지만, 당시의 날짜별 각 신문 보도와 천진암 가는 도로 확장 지적의 공부상 지목 변경 연월일을 보면, 사실상 천진암 성지 진입로 확장과 포장은 교황방문이 거론되기 훨씬 전에, 즉, 그보다 3년 전에 착수되었고, 완공되었었음을 알 수 있다. 교황 방한 결정 발표와는 무관하게, 훨씬 먼저 착수되고 완공되었음이 공부상으로도 확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