鶯子山 동편에 있던
봉태암, 일출암, 주어사, 석이암, 번어사, 소암, 새절에 대한 小考.
1975년 11월 21일, 성모자헌축일에 당시 수원교구 사목국장 겸 교육원장으로 있던 필자는 신장 본당의 동창 김정원 신부의 안내로, 故 선종완 신부님을 모시고 2명의 수녀들과 함께 생전 처음 天眞菴 터를 답사하였다. 선신부님을 모시고 수녀들을 데리고 가게 된 이유는, 교구에 천진암 터를 매입할 돈이 없어서, 선신부님이 세운 수녀회의 수련소 지을 자리로라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너무나 깊은 산골이고, 더구나 차량 진입로가 전혀 없고, 또 바위돌들이 많아서, 새로 도로공사도 불가능하다고 하여, 선신부님은 포기하셨다.
이 때부터 앵자산 둘레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종종 각종 옛 문헌 섭렵과 주변 마을 노인들 한테서 옛부터 마을에 전해내려오는 전설을 들어보는 탐문 답사도 몇차례 한 적이 있었다. 이제 좀 늦었지만 그래도 아직 충분한 자료를 정리하기 전이라도, 글을 쓸 수 있을 때, 몇마디 기록으로 남겨, 한 때 앵자산에 있었던 여러 불교 사찰들에 관한 後學들의 심층 연구에 一助하고자 한다.
⓵ 우선 앵자산의 동편에 있던, 鳳泰庵, 日出庵, 走魚寺, 石伊庵, 樊魚寺, 小庵, 새절, 7개의 절들이 이미 모두 없어졌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단 한 곳이라도 남아 있을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절들이 시작된 것도, 거의 동시에 같은 시기에 생겼었다고 하는데, 그 여러 절들이 사라진 것도 거의 같은 시기에, 동시에 없어졌다는 것이다. 7 곳의 절들이 같은 계곡 안에서 낮은 산자락만을 넘나들며, 불과 5백미터 내외의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도 많은 의문을 갖게 하였다. 특히 그 절들의 이름이 불교계 역사 문헌이나 어떤 기록에도 발견되지 않았다.(寺刹照覽, 與地圖書, 東國輿地勝覽, 南漢誌, 등). 다만, 앵자산 동편 계곡 여러 절 이름 중에 주어사라는 명칭만이 정약용 승지의 문헌에 한 두차례 보일 뿐이다.
② 더구나 절들이 있었다는 7곳의 절터 모두가 너무 비좁은 곳으로, 절터들이 어떻게 모두가 이처럼 불과 30여평 내외의 집터 자리만 있을 뿐일 수 있는지! 번어사 터도, 봉태암 터도, 일출암 터도, 석이암 터도, 주어사 터도,,,! 모두가 일반적인 풍수지리적으로는 절이 앉을만한 터라고 보기는 어려운 곳들이다. 어떤 절터는 20여평도 안되는 곳이 있다. 식수용 우물 자리는 있었어야 할텐데, 대개가 급경사 바위 밑에 군사용 시설물처럼 조금씩 졸졸 흐르는 실또랑물을 썼는지 ! 있었어야 할 대웅전 터나 일주문 터나 요사체 터나 해후소 터나 그 흔한 산신각 터나 여타의 시설물이 있었던 자리가 전무하고, 또 시설자체가 불가능하게 급경사 지역에 비좁은 곳들이라서, 아무런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었다. 현재 거기다가 절을 세운다고 하여도 불가능하게 보인다. 방하나 부엌 하나 뿐인 움막집을 세우기에도 그리 충분히 넓은 지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③ 그리고 절이 있었다면, 돌담이나 돌축대나, 다소간의 石物이 남아 있었어야 할텐데, 흔적이라고는 움막집 터라고만 볼 수 있는 좀 편편하고, 좁은 터에 억새풀만 우거져 있었다. 다만 주어사 터에서는 역시 비좁지만, 그래도, 개와 조각들이 몇 개 좀 흩어져 있었고, 走魚寺海雲堂大師 기념비 작은 돌비석이 있었을 뿐이었다(현재, 절두산에 있음). 그것도 현장의 납작한 바위돌을 찾아가지고, 현장에서 다가네로 다듬어 만든, 아주 거칠고, 소박하고 초라한 표석이 유일하였다.
④ 그런데 앵자산 주변 마을에는 오래된 불교 신도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점은 천진암이 있었던 서북쪽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⑤ 또한 절 이름들이 모두 좀 특이하고, 이상하다. 알만한 몇몇 노 스님들에게 물어봐도, “글쎄, 글쎄”하며, 시원한 답이 안나왔다. 한 두 절의 이름을 예로 들면,
⑥ 번어사(樊魚寺)라는 이름의 뜻은 ‘물고기를 불살라 구어서 먹는 절’, 혹은, "불에 태워서 구어먹은 물고기의 절"이라는 뜻이니, 불교적으로는 좀 이상한 절이름이다. 목탁에는 스님들이 염불할 때 졸지 않도록, 눈을 감는 법이 없고, 잠을 자는 법이 없는 [물고기 눈]과 물고기 머리를 조각할 정도인데,,,.그러면, 염불에 쓰는 물고기 머리를 조각한 [목탁을 불살라 버리는 절]이란 뜻인지!? 임진왜란 때 호국불교의 정신으로 승병들이 총 궐기하기를 바라는 뜻인지, 아니면, 병자호란으로 국난을 당하여 소현세자까지 볼모로 붙들려 갔는데, 이런대도 무관심한 당시 불교계 스님들을 비꼬는 표현인지!?
⑦ 또 주어사(走魚寺)라는 절 이름역시, ‘물고기가 달음질쳐 내빼는 절’, 혹은,"달음질쳐 내빼는 물고기의 절"이라는 뜻인데, 그 골짜기와 또랑물이 물고기가 달아나는 형국이라서, 그렇게 절 이름을 지었다고 생각해보는 것역시, 절이름을 산골짜기 또랑물이 비틀배틀한 모양을 가지고 절의 이름을 짖지는 않았을텐데? 봉태암(鳳泰庵)도, 석이암(石伊庵)도, 일출암(日出庵)도, 小庵도, 모두가 地形이나, 규모 같은 것을 근거로 이름을 지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佛心이나 佛道의 요소가 전혀 없는 이름들이라서, 절 이름들이 모두가 얼른 수긍이 가지 않았었다.
⑧ 더구나 유일하게 주어사 터 아래 또랑 곁에서 故 박희봉 신부님이 발견하여 절두산으로 가지고 간 비석에 있는, 해운당대사 의징(義懲)이라는 스님의 호칭역시, 불교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義懲’이라는 말은, [정의로운 징벌을 하는 대사]라는 뜻이니, 이역시, 무슨 정치적이며 군사적이며 사회적인 의미를 더 풍기는 것이다. 다만 그 돌비석을 세운 사람은 海雲堂大師 의징 스님을 굳세게 잘 모시던 天心이라는 上佐라고 새겼다. 비석을 세운 때는 1689년 5월이라고 하였는데, 병자호란(1637~1645)이 끝난 후, 약 40여년 후다.
다만, 의징이라는 이름의 한자어를, 義懲이라고 필자가 變字하였는데, 본래 비문에는 義澄이라고, 적혀 있으나, 혹시 上佐가 여러 가지 이유로 誤記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옛 사람들은, 의징이라고 읽지 않고, 으징이라고 발음하며 불렀을 것이니, ‘으징대사’라고 말할 때, 당시 국어상, 膺懲의 의미와 어감,이 전제되어 있던 뉴앙스를 밝히고자 함이다. 특히, 義士, 義冢(의총), 義人,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으징, 즉, 의징이라는 말뜻이, ‘정의의 맑은 물‘ 즉 혹은 정의로써 물을 맑게 한다는 유사한 뜻을 지닌 이름을 마음에 두고 지을 수도 있으나, 이는 본인이 作名한 自號로 봄이 합당한 文理이며, 혼을 내준다는 의미의, 義懲大師로 당시 측근들 사이에 쓰였으리라고 생각하며, 自號가, 義懲 의미에서 義澂이라는 글자로, 또 義澄이라는 글씨로 바뀌어 쓰인 것으로 본다. 마치, 광암 공의 字가 본래는 족보에 나오는대로, 德祖였는데, 天學에 집중하느라, 과거시험을 보라는 父命에 끝내 고집을 부리며 불응하여, 정약용을 비롯한 제자들이,德操라고 變字하여 부르며 썼었듯이. 후학들의 연구와 보완이 필요한 사항이다. 글자 자체만을 보면 부족하며, 당시 作文者와 語文 사용 현장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현대의 識者들에게 요구된다. 국어가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이다.
⑨ 그런데 앵자산 동편 마을, 즉 상품 건너, 곤지암에서 양평으로 가는 우편에는 天德山이라고 부르는 큰 산이 있는데, 전에는 그 산을 한 때 원적산이라고도 불렀다. 산이 험하고 계곡이 좁고 깊어서 끝까지 들어가 보기가 힘든 곳이다. 전설에는 예전에 산적들이나 의병들이 머물기도 하였다는 말이 전해온다. 구한말과 왜정 때, 동학교도들이 대거 운집하여 꽤 오랫동안 거하던 곳으로, 지금은 동학의 2세 교주, 해월신사 최시형의 묘가 모셔져 있다. 관군의 출입이 극히 드물고 어려운 곳들이다.
⑩ 필자가 그동안 살펴본 바로는, 앵자산 동편에 있었다는 7개의 절들은, 이름을 절이라고 불렀을 뿐, 실제로는 불도와 관련이 적은 사람들의 은신처로 생각된다. 특히,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송파 삼전도에 나와 청태종에게 항복하자,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斥和派의 결사항전을 부르짖던 일부 軍 將兵들이, 절 이름을 내걸고, 은거하며, 길목을 지키면서, 게릴라식 항전이라도 하려던 거처가 아닐까 생각된다. 병자호란(1637년) 30 여년 전에 있었던 임진왜란(1592년) 때 護國佛敎의 정신과 참여를 기대하며, 四溟堂 大師처럼, 海雲堂 大師라는 이름을 쓰는 것도 연상이 된다.
더우기, 횡성, 양평, 양지, 죽산 지역으로 통하던 이 길목은 고려 때 몽고족의 수십년에 걸친 원나라 대군들이 내려오고, 올라가던 군사 통로 중의 하나였고, 임진왜란 7년 간에도 왜적들이 북진하던 길목이며, 병자호란 때도 십만대군의 일부 만주족의 군부대가 남한산성을 원거리로 둘러서 남하하면서, 이천 지역의 의병들을 사전에 토벌하려는 길목이었기에,,,! 또, 지난 1950년, 6.25 사변 때도 북한 공산군들과 중공군들이 내려오던 길목이었다.
또, 7개 절의 위치를 보아도, 모두가 불도를 닦기 위한 장소나 시설물이 있던 곳이라기보다는, 계곡을 내려다보는 군인들의 초소같은 곳들이며, 특히, 병자호란 때, 主和派와 靑 나라 편에서 꺼려하며 증오하던, 斥和派의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충성스럽고 용감한 일부 게릴라식 패잔병들이 거처하던 곳이 맞을 것 같다. 그 중에 주어사 터가 가장 안전한(?) 바위 절벽을 등진 최종 중대본부(?)처럼, 당시 중심적이며 본부의 기능을 하였고, 의징대사가 입멸하자, 의징을 지키는 후예들이 늦게까지 지키던 곳인지도 모른다
앵자산 동편에 있었다는 7개 절터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려는 後代 史學徒들이 염두에 두고 생각해볼만 한 현장 관련 사항들이다. Msgr. By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