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자헌축일에 일어나기 시작한 기적은 계속되고 있다! - ①
36년 전(1975년) 11월 21일 오늘, 성모자헌축일은 필자가 천진암에 첫 발을 딛어보고, 기도하며 처음 다녀간 날이라서 잊지를 못한다. 천주교회 땅이 단 한 평도 없던 때다. 또 천진암이라는 이름을 그 마을 사람들 중에도 아는 노인이 겨우 한 두명 밖에 없을 때다. 신장(현재 하남시) 본당주임 김정원 동창 신부는, 당시 수원교구 사목국장 겸 교육원장으로 있던 필자에게, 옛날 학자들이 교리공부하던 천진암 터라는 곳이 산속에 있다는데, 경치가 좋아서, 여름에 경안에서도 노인들이 천렵할 겸 산놀이도 가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교구청에서 매입하도록 권하였다.
사실 필자도 1960년대 초 신학생 때, 故 정원진 신부님과 南相喆 회장님 두 분이 朱在用 신부님의 지도를 받으며, 최초로 답사하였다는 한국천주교 요람지 천진암 주어사 터가 있다는 廣州 앵자산을 넘으면서 손으로 그린 약도와 지도를 답사기와 함께 경향잡지에 寄稿한 것을 읽었을 뿐, 별다른 지식도, 관심도 그리 많지 않을 때였다. 그런데 신장 김신부는 교구청에서 그곳 땅을 몇 평이라도 사 놓도록 몇차례 필자에게 재촉하였으나, 교구 속사정을 모르는 말이었다.
당시 수원교구는 너무나 극빈한 상태였다. 돈이 없어서, 교구청도 필자 신부 혼자서 지키며 있을 때다. 심지어 서울 신학교에 가 있는 수원교구 소속 신학생들을,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대주지 못하여, 귀가시킨다고까지 하던 때다. 새로 부임한 교구장 김남수 주교님도 교구 재정을 절약하시려고 교구청에 들어오시지도 않고, 빈센트 병원 원목신부 사제관에서, 수녀원 미사를 드리며, 당시 표현으로 알바이트(?)로 벌어서 생활하셨고, 총대리 정덕진 신부님도 북수동 본당신부 하면서 1주일에 한번 정도 교구청에 한 두 시간 들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김신부는 교구에서 산골 땅 몇 평도 못 사느냐고 하면서, 교구청에 근무하는 나에게 우선 변신부가 와보기라도 하라는 재촉이었다. 그러나 교구는 교육원을 세운다고 받은 오지리 원조금으로 교구청을 교육원으로 개조하였는데, 부실공사로 물이 새는 데다가 공사비를 못주어, 쩔쩔 매었다. 그래서 미8군 군종 Lennon 신부의 주선과 보증으로, 미국에 있는 벤쯔 대출업 전문회사에서 2만불을 빌려서 국내은행에서 환전하여, 예치한 후, 그 이자를 따서 1년에 약 4천불 정도 이익금을 얻어서 쓰며 살 때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은행이자가 연리 3%인데, 한국에서는 연리 22%였다). 그나마 교회라서 암시장이 주는 이익을 단념하고, 법규대로 하여 이른 바 불이익이 좀 아깝게 느껴지던 시대다.
그런데, 교회 역사가 서려있는 연고지를 와서 현장을 보고서도 땅 한평도 안산다고 잔 소리를 들을까봐, 필자는 자꾸 이 핑계 저핑게 대며 미루고 또 미루다가, 마침내 성모자헌 축일에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그 이유는 실낱같은 신심으로, 성모님이 어떻게 좀 해주시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과천에서 수녀원 창립하시는 선종완 신부님이 수련원 자리를 찾는다기에, 선신부님께서 사시도록, 物主(?)로 모시고 가기로 하였다.
마침내, 김신부의 안내로 선종완 신부님과 수녀들 2명과 함께 창문 없는 곳간 트럭을 타고, 1975년 11월 21일, 좀 춥고, 힌 눈이 약간 뿌리고 지나간 길을 따라, 처음으로 천진암 터를 와보았다. 당시에는 신장(현재 하남시)에서부터 광주, 여주 가는 길이 모두 비포장 흙길이었고, 하루에 시외 버스가 오전 오후로 어쩌다가 몇 번 지나가던 때다. 퇴촌부터 천진암 마을까지는 마차 길이었는데, 그래도 버-스가 하루에 한 번 오고 가지만, 길이 좁아서 마차나 경운기와 마주치면 비켜서서 한참씩 서 있어야 했다.
천진암 터(현재 5위 성현 묘역)에 와보니, 산골 논 다랑이 15 필지였는데, 가을 걷이가 끝난 볏짚들이 여기저기 있었고, 약간 첫눈이 瑞雪처럼 내렸다. 천주교회는 물론, 아무도 관심이 없는 땅이라서, 땅 1평에 100원이라도 사는 사람이 없던 때다. 그나마 그 싸구려 땅도 천주교회는 단 1평도 없던 때다. 당시에는 교회 內外에서 천진암이라는 이름을 아는 이들조차 거의 없을 때다. 선신부님은 수녀들을 위해 수련원 자리로 사볼까 하고 오셨으나, 너무 먼 거리를 차 다니는 길도 닦을 수가 없다고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논 다랑이 하나라도 살 수 있으면, 한 조각 돌이라도 비석 삼아 세우련만 !
이듬해 필자가 신장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후에도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좀 크고 재력이 있다는 5개 큰 수녀회 장상들이 5차례나 와서 보고는, 마을까지 길이 좋지 않고, 산골 마을 사람들의 작은 밭들과 논 다랑이가 많아서, 매입하기가 어렵다고, 모두 포기하였다. 돈들은 있어보였다. ! 꾸어주기라도 하면 좋을텐데 하면서도, 차마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단체나 기관의 일이 그리 쉽지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
필자는 3년동안 그림의 떡같은 그 싼 산골 땅들을 당시 본당 신학생들(김학렬, 김학무)을 데리고, 가끔씩 가보기만 하였다. 산골 마을 사람들은 자기네 땅을 사달라고 신장까지 찾아와 계속 내게 졸라댔다. 지금은 총 270여 필지 40여만평이 확보되었다. 얼마나 시달리고, 쪼들리며, 들볶이고, 애태웠는지 ! 여북하면 오기선 신부님이 FRP로 만든 성모상을 가지고 와서 동산에 세워주시며, 이제 필요한 땅을 성모님이 다 사게 해주실 꺼야! 하셨는데, 사실 그대로 성모님은 큰 기적을 해 주셨다! 내일의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를 위하여, 성모님께서 요긴히 쓰실데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모자헌축일에 시작된 기적은 점점 더 크게 계속되었다. 천진암 성지를 근거지로 인하여, 교회 창립성조들의 묘찾기와 이장, 유물과 각종 자료 수집, 200주년 한국천주교회 행사계획 수립과 시행, 103위 시성, 교황 방한, 대성당 건립사업, 선조들의 시복시성 추진, 등,,,. 그동안, 우연이다, 요행이다 라고 하기에는 번수가 너무 여러번이다. 성모님 축일의 신비를 부정할 수가 없다.
일은 많고, 돈은 없으나, 그래도 일은 되어 왔고, 또 되어가고 있다! 온갖 반대와 방해와 비난과 비평과 비협조도 적지 않았으나, 난관과 역경과 장애물이 아무리 심하여도, 그런 장애물과 장애를 주는 사람들 때문에, 일이 안되고, 덜 되고, 잘못된 적은 없다. 성모자헌 축일에 시작된 기적이기에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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