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경 그리스도교 유적물(遺跡物 ?) 土器, 남한산성에서 발굴 !
[天主]라는 명확한 글씨가 陽刻된 蓋瓦 무늬 개와가 南漢山城 행궁터 개발에서 통일신라 때의 지층에서 발굴된 것은 이미 언론에 보도된 바 있었다. 그런데 같은 개와의 상단 무늬에는 十字架 지고 가다가 넘어지시는 예수님(제1차 엎더지심?) 像으로 보이는 陽刻 무늬가 계속 있어서, 7세기 말 경, 우리나라 중부 지방에도 그리스도교가 알려지고, 신봉되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物證으로 보인다.
특히, 慶州에서는 이미 1900년대 들어와서 발굴된 7세기경의 신라 고분 속에서 이미 石製 十字架와 瓦製 東方博士 등의 土偶 들이 두 세 곳에서 발굴된 적이 있고, 같은 瓦製 聖物이 만주 지역에서도 출토된 기록이 있는데, 같은 시기에 唐나라에서 꽤 번성하던 景敎(Nestorius 派 그리스도교)의 碑石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당시 중국 先儒들은, 하느님을, ‘上帝’라고 불렀으나, 지방에 따라, 때로는, ‘天主’, ‘天王’, ‘天帝’, 등으로 칭하기도 하였었다. 오늘날처럼 用語가 명확히 규정되지는 않았었다. 17세기 초에 Michell Ruggieri나 Matteo Ricci 등도 上帝, 天主, 등의 용어로 매우 고민하였었다.
統一新羅 때 우리나라는 당나라와 교역이 활발하였고, 700년대 초에 漢山州(현재의 南漢山城) 총관으로 있던 통일신라의 金大問은 여러 권의 역사서를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 高僧傳은 훗날 고려 때에 와서 海東高僧傳의 전신으로, 거기에 수록된 高僧들 중에는 마라난타(摩羅難陀)나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같은 非新羅人 外國人들(주로 인도와 중동 지역 출신 ?)의 이름도 끼어 있는데, 이들 중에는 景敎派 선교사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에 日本에까지 가서 선교한 경교파 선교사 중에는 Millis 같이 그 이름이 日本 史記에 남아 있는 이들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통일신라 때의 漢山州 즉 남한산성에는 오늘의 서울(당시 漢陽郡)을 포함하여, 지금의 충주, 죽산, 여주, 이천, 용인, 해주, 등이 예속되어 있었으며, 이 넓은 지역을 총괄하는 행정 본부가 있던 한산주는 신라의 몇 안 되는 주요 도청소재지(?)중의 하나였다. 어느 文獻 기록보다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金石文인데, 극동에까지 왔던 景敎의 흔적이 慶州, 滿洲, 漢山州, 日本, 등지에서 발견되는 것은, 敎派를 떠나서 매우 반가운 일이다.
앞으로 고문헌 발굴과 연구가 더 발전하면, 문헌상으로도 적잖은 진척이 있을 것이다. 비석이나 석조 건물이 역사를 증언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왕건태조의 집권 후, 고려 시대에 오면서 景敎는 고려의 國敎가 되었던 佛敎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 후 蒙古大亂 60년의 大火災와 壬辰倭亂 7년간의 약탈, 등으로 國史 자료들도 대부분 소실되던 것을 생각하면, 경교 자료가 많이 남아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 시리아, 리비아, 알렉산드리아, 등 중동에서 사도시대부터 이어진 교부들, 성 아오스딩을 비롯하여 저 많은 교구의 흔적과 자료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과 같다. 宗敎無常이랄까? 그러나, 좀 세밀히 살펴보면, 우리겨레와 우리나라의 정신문화사와 종교 신앙사의 각가지 표현과 발전의 역사 속에 저들의 영향과 흔적이 큰 영향을 주고, 아직도 남아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예컨대, 다른 나라에서 보기드문 축일이나 애국가에서.
上帝는 우리 皇帝를 도우사 聖壽無疆케 하시고,,,<大韓帝國의 최초 愛國歌 첫 머리> 하느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만세!,,,<愛國歌 후렴> 하늘이 열린 날, 혹은 하늘이 열은 날,,,<開天節> 등,,,. 오늘의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처럼 보여도, 어제의 역사는 우리의 母胎요, 발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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