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요한세자 광암 이벽 성조의 최후
1).이벽 성조의 청소년 시절에 관한 문헌 이해.고문헌을 현대감각으로 풀어가며 역술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왕국에 천주교회를 태동시키기 위하여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운동에 始動을 걸도록, 하느님께서 선택하여 도구로 활용하신 인물은, 字를 덕조(德祖)라 하고, 호를 광암(曠菴)이라고 하는 이벽(李檗)이었다. 이벽은 경주이씨로,고려 왕조 때부터 이미 그의 조상들 가운데에는 지위가 높고, 학문이나 벼슬로 뛰어난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文武를 겸했던 그의 가문은 후손들이 대부분 기골이 장대하여 증조부 이후로는 주로 무관직에 종사하였고, 이 새로운 분야에 있어서도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오고 있었다. 특히, 이벽은 신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뛰어난 많은 자질을 갖추고 태어났다.
무술 연마에 출중한 소년 이벽 - 그래서 이벽은 어렸을 때부터 그의 부친이 이벽을 형 이격과 동생 이석과 더불어, 무관 벼슬을 하는 데 필요한 활쏘기, 말타기, 등, 무사가 되기 위한 체력 훈련을 시키고자 하였으며, 장차 가문과 조정을 빛내는 역사적 큰 인물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벽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문무를 불문하고 벼슬길의 과거 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끈질기게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며 고집을 부리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벽은 부친의 애정을 잃어가게 되었고, 부친은 지나치게 고집이 센 그의 성격을 따라,‘벽(檗)’이라는 족보 항렬의 이름을, 글자의 뜻과는 달리, 발음만 따서, 고집불통을 가리키는 뜻으로, 그를 고집(壁)장이, [벽]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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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은 자라면서 체격과 기골이 아주 더욱 장대하고 힘이 세어져서, 훗날 무관 벼슬의 장군으로 활약한 형 이격(李格)과 동생 이석(李晳)과 더불어 더욱 건장한 체구를 타고난 장군 감으로 성장하면서, 당시 젊은 선비들의 꿈이었던 무술연마에도 뛰어난 수준을 보이며 날로 급성장하였다. 키는 2m가 넘는 8척이었고, 한 손으로도 무쇠 백 근을 번쩍 번쩍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학문에 뛰어났던 젊은 천재 이벽 -“그러면서도 어려운 책의 난해한 글도 10 줄씩을 한꺼번에 비호같이 읽었내려갔으니, 한쪽 눈으로는 책 위쪽 부분을 여러줄씩 읽으면서 동시에 다른 한쪽 눈으로는 같은 책의 아랫 쪽 부분을 여러줄씩 한꺼번에 읽고 이해하였다. 또한, 한쪽 눈으로는 왼 쪽을 보면서 동시에 다른 한 쪽 눈으로는 오른 쪽을 보는 사람이었고, 더욱이, 몸을 날려 펄쩍 뛰어 오르면서, 공중에서 몸을 3바퀴씩 핑글핑글 돌아서 사뿐히 땅에 내려와 서기도 하였고, 사람 키의 2배나 되는 높이까지 뛰어 올라, 일반 어른 키의 2길씩이나 뛰어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벽은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만은 평생토록 항상 즐겨 읽어서, 거기에 아주 심취해 있었으며, 따라서, 그 서양 종교를 믿는 신도들의 교주로서, 그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기도 하였었으나, 30여세에 일찍 요절하였다. 그 후에, 왕세자 익위(翊衛)를 맡은 이들의 추천으로 상소도 하고, 세자 전에 나아가 천주교 이야기를 설법하기도 하였다.”
우아한 인품이 道人다웠던 젊은 학자 이벽 - “매우 활달하고 매우 수려하게 빼어난 용모와 잘 생긴 이벽의 풍채는 아주 늠늠하고 당당하였고, 당연히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게 하였다. 그의 재주도 이처럼 뛰어난 외모에 걸맞게, 유창한 언변은 힘차고 조리에 맞아, 도도히 흐르는 큰 강물에 견줄 만하였으며, 모든 면에서 월등한 智力을 타고난 이벽은 오직 事物의 이치와 모든 학설의 참된 근본과 기본 토대만을 깊히 추구하였다. 언제나 事物의 根本을 파고드는 데 몰두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경전을 공부함에 있어서도, 거기에 들어 있는 깊은 뜻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1784년 겨울에 정헌 이가환 대학자와의 공개토론에 참석하였던 정약용은,“ 이벽의 웅변은 큰 강물과 같이 유유히 그러나 아주 힘차게 흘러내려가듯 하여, 정헌 이가환이 마침내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정헌 이가환 묘지명]에서 기록하고 있다.”
무서운 추진력과 유능한 운영능력의 청년 선비 이벽 - “이벽의 이처럼 출중한 천부적 소질은 개인적으로 빛나는 앞날을 그에게 보장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벽은 일찍부터 당대의 가장 유명한 학자들이 쓴 책들을 정독하며 연구하는 데도 집중하였고, 자신이 하는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관련된 학문 연구에 있어서도, 자신을 도와주고 이끌어줄 수 있는 모든 지식인들과 교분을 맺고자 노력하였다.
이벽은 당시 사회의 고리타분한 형식적인 관습이나 복잡다단한 허례허식적인 예의에 거의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그의 언행과 일거수 일투족은 고결하고도 매우 고상한 품위를 풍기는 인상을 느끼게 하였고, 그러면서도 즐겨 농담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직업적인 학자들과 뚜렷이 구별시켜주는 벼슬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탁월한 인격자 이벽에 관한 당시 여러 자료들을 접하면서, 비록 충분치는 않지만, 어느 정도라도, 이 땅에 매우 드물게 출현하는 그의 특출난 인품에 대한 인식이 다소간이라도 가능하게 되었다.”
2).이벽 성조 가문의 선조들에 관한 역사 소개
충효 정신의 모범이었던 이벽의 선조들 -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광암 이벽성조께서는 1754년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신기동에서, 아버지 경주이씨 이부만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이벽 성조의 가문과 선조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매우 유명한 구국충신(救國忠臣)의 집안이니, 우리나라가 元나라, 明나라, 淸나라, 日本, 등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처해 있을 때, 국제관계를 담당한 대표적인 학자 출신이면서도 文武를 겸한 충신들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다. 후손들과 특히 이벽 성조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준 직계 선조들 중에는, 학문과 사상과 덕망과 무술로, 외교와 治世에 있어, 元, 明, 淸, 日本, 등, 주변 강대국들의 무력 침략에 맞서서, 국가 민족을 위하여,국권과 왕권을 수호한 충렬의 정치가들과 名臣들이 적지 않았다.
고려 말, 元 나라의 몽고족이 60여 년간 고려를 장기적으로 침탈할 때, 익제 이제현(1287~1367)과, 임진왜란 7년 간의 전란 때 지퇴당 이정형(1549~1607),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인질이 되었던 소현세자의 볼모살이 8년간을 이국 땅에서 함께한 묵암 이경상(1603~1647), 등은 국가를 위하여 당시 국왕보다 더 유능하였고, 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도 있다.
국권 회복과 우리나라 건국에 이바지한 가문 - 훗날 이들의 후예들 중에는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형제들이, 3.1.독립운동 이후, 가산을 정리하여 북만주 지역으로 가서, 간도 지방에 항일독립운동의 기본사업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들도 있다. 그 제1기 졸업생들 중에는, 이승만 초대 건국 대통령 시절 변영태 국무총리, 및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정일권 국회의장, 등이 있다. 모두 대한민국 건국의 연혁에 남는 건국의 기둥이 된 이들이다.
이렇게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고려 말과 조선 후기에 이르는 동안 위대한 가문의 출중한 인물들을 선조로 모시고, 그 정신과 체질을 이어받은 후손들 중에 세계적인 大道師로 태어난 이벽 성조께서는 정치, 외교 분야의 선조 학자들의 전통 영향을 받지 아니할 수가 없었고, 사상과 종교적 면에서도 당연히, 다분히, 어느 정도의 정신과 遺德을 받게 되었다.
1229년부터 반세기 동안 7차에 걸쳐, 元나라가 고려를 침략하여, 몽고족이 거의 57년간이나 고려의 王들과 대신들을 북경에 인질로 끌어가곤 하였을 때, 익제 이제현의 업적은 엄청나지만, 특히 충선왕과 함께, 북경에서 [萬卷堂]이라는 서원을 열어, 元나라 북경의 학자들과 함께 강학하며, 교분을 두터이 하면서, 은근히 고려의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양성에도 힘썼고, 철학과 사상에 있어서도 고려에 性理學을 확립하였으며, 충선왕과 함께 머나먼 사천성에 있는 신비의 名山, 아미산에까지 성지를 순례하면서, 天地神明께 조국 고려의 국권회복을 기원할 정도로, 종교적 성품과 정성도 갖춘 문하시중(현 국무총리에 해당)에까지 오른 고난의 충신이었다.
익제 이제현은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인으로서는 최초로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에까지 장기간 최 장거리 서쪽 세계 각국을 탐방하며 견문을 쌓았으며, 조국 독립에 희생을 바친 학자 출신 정치가였다. 특히, 서양 문물의 접경지대였던 중앙 아시아 지역까지 순방하면서, 이미 그곳에 들어와 있던 일부 천주교 성당 관광방문과 주교 신부들과의 相面을 비롯한 동서문화의 相見으로 훗날 귀국 후 이제현은 고려 왕국에 서양의 천주교 문화 소개에 침묵하였으리라고 보는 것은 불합리한 추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애국심과 尙武精神으로 출중한 문하시중(현재의 국무총리 직)으로, 볼모살이하는 신세로, 단순한 세계 유람을 다녔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협소한 소견이다. 몽고족에 대한 반격이 가능한 서방과도 다변외교의 가능성을 엿보며, 유사시에 고려는 동쪽에서 대응하려는 현대의 국제연합군처럼 抗夢思想의 몸부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계 견문으로 해외 선진 문물 수용하던 선구자들 가문 - 고려가 조선으로 정권이 바뀐 후, 1593년 말부터 시작된 7년간의 임진왜란 때는, 익제 이제현의 5대손이 되는 지퇴당 이정형이, 신의주까지 피난하는 선조 임금을 안전하게 경호하였으며, 왕명으로 明나라에까지 파견되어 구원병을 요청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일조를 하였고, 더욱이 이정형은 자신보다 14세 연하의 지봉 이수광(1563~1628)을 아끼고 돌보던 절친한 선배 정치인으로서, 지봉 이수광도 북경을 왕래하면서, 많은 서양 서적들, 특히, 天主實義, 직방외기, 칠극, 같은 천주교 서적이 조선에 최초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더욱이, 이수광이 그 후 집필한 [芝峯類說]은 우리나라 實學의 태동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그 배후에는 지퇴당 이정형의 후원과 공헌을 무시할 수가 없으니, 韓民族의 개화와, 조국 근대화, 및 사회개혁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고, 30여년이 지난 후, 1637년에 만주족이 병자호란을 일으켜,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仁祖 임금의 항복으로,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잡혀 갈 때부터, 지퇴당 이정형의 친 손자였던 묵암 이경상은 8년간이나, 볼모살이하는 소현세자를 안전하게 모시고 지켰으며, 1645년 봄 귀국하기 전에는, 북경에 와서 머물면서, 당시 南堂 천주교회를 세우고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明과 淸의 양 정권 하에서 천문과 기상관측의 국가기관을 맡아 일하던,독일인 Adam Schall(중국명, 湯若望 탕약망) 신부를 소현세자와 함께 찾아가, 친분과 우의를 돈독하게 주선하였고, 특히, 이경상은 서장관으로서 조선인 수행원 중에 시종관 3명이 천주교회에 입교하게 하여, 아담 샬 신부한테 세례성사까지 받고, 이어서 귀국하게 하였다.
이는 1784년 봄 북경에서 이승훈(1756~1801) 진사의 1인 영세보다 135년이나 앞서는 한국천주교회 역사의 한 페이지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소현세자와 이경상은 귀국할 때, 중국인 천주교 영세신자 5명도 함께 더 대동하고 함께 귀국하였으나, 귀국 후 몇 달 안 되어 소현세자가 독살(?)로 의심되는 변고로 급사하자, 중국인 천주교 신자 5명은 바로 추방당하여 중국으로 귀국조치되고,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함께 귀국한 조선인 시종관 천주교 신자 3명은 그 후부터 종적이 묘연하게 되었다.
영웅호걸의 부귀공명보다 布衣道師로서의 이벽 - 그런데 이벽 성조께서는 바로 묵암 이경상의 직계 6대손으로서,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국내외적으로 가장 식견이 넓은 훌륭한 집안에서, 先祖 때부터 내려오는 門中의 많은 국내외 서적들을 접하며, 성장하였다. 또한 이벽 성조의 祖父 이달(1703~1773)도, 武科에 급제하고, 호남병마절도사부총관의 벼슬까지 하였고, 부친 이부만(1727~1817)은 사후에 이조판서를 추증받았으며, 형 이격,(1748~1812)은 무술이 출중하여 21세에 이미 무과에 급제한 후, 별군직관, 황해병마절도사 부총관, 좌포장,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동생 이석(1759~1829)역시 무술이 뛰어나 21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좌포장, 제남병사, 등의 벼슬을 하였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었던 이벽 성조께서는 형이나 동생보다도 출중한 체격과 무술로도 무과나 문과의 과거 시험을 외면하여(大科非吾志也) 아버지의 눈밖에 나기 시작하였다.그러나,이항복(1556~1618), 등과 같이, 같은 경주이씨 문중에서 천재적인 머리와 드넓은 학식과 충효의 정신이 출중하고, 애국심과 기백이 차고넘치는, 영웅호걸의 체질을 타고난 명인명사들 중에, 오직 이벽 성조만이 젊은 布衣道師였음은 당대에도 萬人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武術보다 學識보다 修德에 치중한 이벽 - 이러한 가문에서 태어나(1754),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라 불리던 이벽성조께서는 태어나면서 어린 아기 때부터 다른 아기들과는 달리, 보는 사람들을 마음 편하게 하며, 포근하고 흐믓하며, 온화한 감명을 주므로, 아버지는 이름을,“덕이 있는 할아버지(德祖)”라고 하였는데, 예방의학이 황무지였던 그 시절에는 유아 사망률도 높아서,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이 아무쪼록 죽지만 말고 잘 커서,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린 아이들의 이름을, 돌이(乭喜),철이(鐵喜),무쇠, 돌쇠, 하늘 노인(天老, 李格의 字), 큰 노인(大叟, 李晳의 字), 덕있는 할아버지(德祖,이벽 성조의 字), 덕있는 노인(德叟, 李懋의 字),등으로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소년으로 성장하면서 이벽 성조께서는, 기골이 더욱 장대하여, 3형제 모두가 武術을 연마하거나, 인격도야를 위한 정신 기강 확립의 修道的 훈련에도 전념하였으며, 일부 다른 집안의 소년들처럼 호패를 차게 되는 15세 경의 成人禮를 전후하여, 冠名이나 字를 새로 짖거나 개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벽 성조께서도 자신의 [德祖]라는 字를,[德操]로, 즉,‘덕을 잡고 닦아나가는 志操’를 뜻하는 글자로 바꾸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이벽 성조와 가까이서 친하게 함께하던 정약용이 15세에 결혼을 하고나서 이듬해 봄에, 인사차 천진암 독서처에서 수덕에 열중하던 이벽 성조께 혼인 후 인사차 찾아 뵙고, 정중하게 지어 드린 贈呈詩文은, 광암 이벽 성조의 훈시에 대한 답례문으로 볼 수도 있으니, 俟菴 정약용은 그 贈李檗 시에서, 이벽 성조를 가리켜,[,,,선생님은 만사에 있어서, 庶民이나 常民도 인간차별하지 아니하시고, 부귀영화도 부러워하지 아니하시며, 聖賢君子의 학덕과 영웅호걸의 기백을 골고루 갖추시었으며,,,아주 어려서부터 덕을 닦는데 힘쓰시더니, 지금도 그 강개(慷慨)한 모습이 얼굴에 한결같이 들어나 늘 뵈옵게 됩니다.] 하였다.
家庭과 慣例를 넘어 神의 세계로 향한 이벽 - 이제, 이벽 성조의 어린 시절에 대한 몇가지 전하는 조각 글들을 더 붙이면, 이벽 성조께서는 다섯 살 때(1759) 이미 철이 들어 사리판단이 어른다웠고, 일곱 살(1761) 때는 사서삼경을 읽고 이해하였다고 李檗傳이 알려주고 있는데, 그 당시의 양반대가의 어린이들 중에는 총명한 꼬마들이 종종 있었으니, 권철신은 字가 旣明으로, (이미 明悟가 열려 어른답다는 뜻) 불렀고, 동생 권일신은 省悟라고 하였으니, 이역시, 매사를 어른답게 두두 살피고 깨닫는 다는 뜻이었다.
그 당시의 원로 대학자 성호 이익(1681~1763) 선생은 일찍이 10세 미만의 어린 이벽을 보고, “이 아이는 자라서 장차 반드시 아주 큰 그릇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고 丁學術(정학술)은, [李檗傳(이벽전)]에서 밝히고 있다.
열다섯 살(1770)을 전후하여, 훗날 병조판서, 한성판윤, 등의 고위직을 한 권엄의 딸 柳閑堂權氏와 혼인하였으나, 당시 양반대가의 관습대로, 결혼하는 당사자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들끼리 결정하는 혼인이었으며, 특히 벼슬에 오르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던 양반가의 아들들은 혼례 후 불과 몇일 후에 대부분 즉시 훌륭한 스승들을 찾거나 스님들을 찾아, 入山하여 학업과 무술연마나 修道에 전념하도록 부모들이 강요하던 시대였으므로, 이벽 성조께서는 누님 댁이 있는 마재에서 비교적 그리 멀지 않은 광주산맥의 주봉이 되는 앵자산 천진암 계곡으로 자의반 타의반 입산하여, 은거하며 학문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천진암에 入山 隱居, 天學道場의 布衣道師 이벽 - 열고 오늘의 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의 고등교육기관이 없던 시대에, 마치 佛舍나 道場을 찾던 여느 출가승(出家僧)들과도 같이, 결혼생활이나 가정생활에는 마음도 없고, 겨를도 없었던 때였다. 또 당시에 과거 시험 준비나 무술연마 등에 열중하는 소년들 중에 과거에 급제하는 이들은 대개가 7년내지 10여년의 공부와 체력단련과 무술연마에 몰두해야 하므로, 혼례는 비록 15세 전후에 올리지만, 부인들이 첫 아이를 낳는 것은 혼례 후 10여년이 지나서 25세 이후에서나 족보상으로 확인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은, 이른 바, 10년 공부 때문이었다.
더욱이, 소년 이벽 성조께서는 1770년부터, 경기도 광주산맥 앵자산(一名,원앙산)에 있는 天眞菴에 讀書處 道場을 마련하고, 은거하면서, 학업과 修道에 열중하였으니, 천진암은 누님 집이 있는 마현에서 30여리 내외 밖에 안 되는 비교적 멀지 않은 심산궁곡에 있었다. 누님 경주이씨(1750~1780)는, 당시 의금부도사, 화순 군수, 울산군수, 등의 지방 벼슬을 하던 정재원(1730~1792)의 장남 정약현(1751~1821)과 결혼하였는데, 당시로서는 명문대가 경주이씨 가문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라주정씨 정약현에게는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 스승의 그 弟子 이벽 성조와 정약용 승지 - 이벽 성조께서는 마재에 있는 누님 댁, 즉, 정약현의 집에 자주 들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한 살 위의 매형이 되는 정약현의 이복 동생들,정약전 (1756~1816), 정약종 (1760~1801), 정약용 (1762~1836),3명이 매우 영리하고 학구적인 어린 사돈들이어서 말이 서로 통하는 친한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丁氏네 어린 사돈 소년들이 10여세 전부터, 천진암에 놀러가게 되면, 이벽 성조께서는 손 아래의 영특한 이 사돈들에게, 천문학과 지리학, 性理學과 의학, 수학과 曆學(역학), 기하원본과 天學, 즉, 天主敎, 등, 서양의 신기하고 새로운 新學問(신학문)과 특히,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러한 새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줌으로써, 어린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3형제의 경탄과 존경과 신망을 받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자연스레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벽 성조께서 15세 되던 1769년 기축년에, 이벽 성조보다 6세 연상의 맡형 李格(1748~1812)이 21세로 무과에 급제하여 한양에서 살기 시작하였는데, 이벽 성조께서는 포천에 있는 아버지 집과 광주 땅 검단산 아래 斗尾에도 시골집(鄕邸)있었으나, 종종 서울에 가서 형님 댁에 들려 서울의 지성인들과도 친분을 쌓게 되었다.
柳閑堂權氏의 無育과 兵判監 權嚴의 이벽 원망과 天學 증오 - 성조께서 21세 되던 1775년 경(?),약 5년 전에 혼례만 치르고 있던 상태에서 남편을 본받아 학문에만 열중하던 허약한 몸의 유한당권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높은 관직에 있던 장인 권엄과 처가에서는 이벽성조께 대한 원망과 증오가 폭팔하였으니, 옛날에 시집간 여성이 아기를 낳지 못하는 무육(無育=不姙)으로 사망하면, 친정집 문중에까지, 오명이 되어,“그 집 딸들 중에는 불임여성이 있다”고하여, 혼인기피 대상이 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유교 孔孟의 사상으로 효도를 제일로 삼았고, 불효 중에는 후사를 잇는 자손을 낳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불효는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五刑之屬而三千 以第二莫大於不孝, 無後爲大>
그리하여, 처갓집, 특히 장인 권엄은 자기 딸이 아기를 못낳는 것이 아니라, 사위 광암 이벽이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고, 산속에 들어가 도닦는 데만 열중하느라고, 아예 집에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니, 자신의 부인 평양조씨는 아이를 이미 여럿 낳아 잘 길렀고, 둘째 딸도 시집가서 자녀를 잘 낳아 길렀으니, 큰 딸 유한당이 아기를 못낳고, 학문에만 열중하다가 죽은 것은 사위 이벽의 탓이며, 그 훌륭하던 사위 이벽이 저렇게 된 것은 天主學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확신하며, 천주교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이 날로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이벽 성조와 혼례를 한 딸도, 사위를 본받아 공부만 하다가 불임 여성으로 세상을 떠난 후부터는 더욱 천주교를 무척 반대하였다. 물론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던 시대에, 높은 관직에 있던 자신은 천주교와 관련이 없음을 확인시켜야만 자신의 관직이 무사할 수도 있었겠지만, 집안의 과년한 여자들을 위해서 불임여성 집안이라는 오명 때문에도 사위 이벽과 이벽이 굳게 신앙하는 천주교를 증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도,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며, 과거 시험에 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얼출신들과 어울리는 것도, 모두가 천주교 공격의 충분한 이유였다.
그러나, 족보에까지 無育으로 나오는 이벽 성조의 첫째 부인 유한당권씨는 학문과 수덕에 열중하는 비범한 인격자 이벽 성조를 본받아, 학문에 열중하면서, 유한당언행실록,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몸이 허약해져서, 20대 전후에 젊어서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10여년이 지나서, 이벽 성조의 순교 후에, 묘를 이장하여, 화현리에 합장되었다.
이벽 성조 묘 발굴 이장 때, 유한당 권씨의 유해는 히검은 뼈 가루와 검붉은 진토만 조금 나왔는데, 당시 이장전문가와 법의학 교수는, 20여세 이전에 일찍 젊어서 죽으면, 뼈가 쉽게 삭기 때문이므로, 이벽 성조보다 10여년 먼저 사망하고,매장하였다가 발굴하여 합장한 것이 분명하다고 판정하였다.
그런데, 이벽 성조 순교 후, 60여년이 지난 후에 편찬된 족보에, 둘째 부인으로 기록된 해주정씨도 無育, 즉 불임여성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벽 성조 묘 발굴 이장 때, 유골이 굵은 채로 그대로 있어, 이장 전문가와 법의학 교수가 검시한 후, 적어도 60여세가 넘어서 사망한 할머니로 단정하였다. 그렇다면 이벽 성조께서는 불임여성들만 선별하여 혼인하였을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정약용의 표현대로 수덕에 열중하며, 박제가의 표현대로, 가정을 돌보지 않고,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몰두하기 위하여, 출가승이나 현재 전 세계 45만여명의 사제들처럼 평생 독신자로 살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1785년 을사년 박해 때부터, 1791년 신해년 박해, 1795년 을묘년 박해, 1801년 신유년 박해, 등 항상 박해가 있을 때마다 권엄은 천주교 박해에 앞장섰다. 심지어, 1801년, 신유박해 때는, 병판대감으로서 권엄이 평소 아끼고 칭찬하던, 정약용, 이승훈, 등을 아주 극형에 처해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을 정도였다.
이벽 성조께서 26세 되던 1780년 庚子년에는, 이벽 성조보다 5세 연하의 동생 李晳(1759~1829)도, 21세로 무과에 급제하여, 한양에 살기 시작하였는데, 무술이 뛰어났던 이벽 성조는 아버지의 강권에도 불고하고, 그 전에도, 이 후에도 끝내 과거시험, 특히 武科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노여움을 더 사게 되었으며, 가끔씩 아버지한테 불려가서 천진암 天學道場에서 내려와도, 포천 부모님 집에는 인사차 잠시 들릴 뿐, 마재 누님 집에를 더 자주 들리게 되었고, 종종 서울에 올라가서, 형과 동생의 집에 머물게 되어도, 당시 조선사회 개혁에 관심이 많던 북학파의 박제가, 이덕무, 등 서자 출신의 대석학들을 만나서, 중국 북경 여행담을 들으며, 서양의 新學問에 관한 토론이나 天主實義 독해에 시간을 보낼 뿐, 과거응시와 결혼생활에는 마음이 전혀 없어서, 포천 아버지의 노여움을 더하게 하였다.
청년무인에서 학자로, 새 종교의 개척자로 활략하는 이벽 - 이벽성조께서는 열아홉 살이 될 때(1773), 권상복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天學考]를 지어, 跋文(발문)에 붙였으며, [上天道]라는 글을 지어, 화현리에서 마재로 오는 중간 광능 입구에 있는 奉先寺 춘파대에 기증하였다고, 정학술의 [李檗傳]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벽 성조께서는 스물다섯 살 때(1779), 성호 이익 선생의 학풍을 이으려는 선비들 중에 정약전, 이승훈(1756~1801), 권상문(1755~1801) 등과도 함께 학문 연구와 토론에 힘썼으며, 이때 이미 이벽성조께서는 天學의 道理를 아주 깊이 깨닫고, 믿으며, 실행하고 있었으니, 특히, 당시에 天學이라고 부르던 천주교에 관한 서적들은 현고조부 이경상 공이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8년간(1637~1645) 있다가 귀국할 때, Adam Schall 신부에게서 받은 것들과, 지봉 이수광(1563~1628), 홍대용(1731~1783), 이이명(1658~1722), 같은 중국 왕래 사신단 편에 들어온 것들도 있었지만, 다불뤼 주교의 저술울 보면, 이벽의 강학보다 200여년 앞서서, 1593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지퇴당 이정형과 지봉 이수광과 30여년 후, 즉, 1637년 병자호란 이후, 묵암 이경상, 등 조선의 사신들이 북경에 빈번히 왕래하면서, 서양서적들과 천주교 서적들은 이미 조선에 들어와 학계에 많이 알려져 있었다고, 정약용은 말한다는 사실을, Daveluy 신부는 그의 저서 서론 첫머리에서 밝히고 있읍니다.
3). 이벽 성조의 천주교 연구와 강학 및 첫 신도단체
1770년 天眞菴 天學道場 이벽 성조의 天學叢林 소년 선비들 -“조선에는 학문 연구에 매진하는 학자들이나 博士들이 있었는데, ”요한세자 광암 이벽은 1770년부터, 조용한 산속에 들어가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철학적이며 사상적인 학문연구와 수덕에 몰두하였으며, 다른 학자들보다도 이벽은 널리 알려진 가장 출중한 젊은 학자였다. 이벽은 대학자 권철신과 젊은 丁氏네 젊은 소년 사돈 형제들, 특히 정약전과 정약종, 정약용, 등과 함께 인간의 본성과 하늘과 땅에 대한 갖가지 의문을 서로 던지고, 서로 답하면서, 천주교의 서적들도 섭렵하게 되었으며, 사람의 영혼과 덕행, 악습과 神의 섭리에 대한 천주교 교리가 가장 합리적이고 훌륭하다고 판단하고 나서는, 즉시 자신들의 평소 일상생활 관습까지도 십계명 같은 하느님의 계명에 맞게 일치시켜 살아나가기로 결정하고, 즉시 실천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1880년대의 동남아 천주교회 여러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천주교회 역사 교과서 증보판]에까지 실려있을 정도였다.
이벽성조의 천주교 연구와 신앙 실천에 대하여는 文度公 요한 정약용 승지의 여러 문헌, 특히 詩文集과 墓誌銘, 天眞消搖集, 등에도 매우 명확하게 나오고 있으니, 무서운 박해 시절에 쓰여진 문헌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벽 성조께서 순교하신(1785년) 후, 12년이나 지난 1797년에, 문도공이 조정에서 정조 임금을 모시는 동부승지로 재직하던 말기에 이르러, 즉, 1797년 정사년 봄, 정약전, 정약종, 두 분 형님들과 함께 천진암에 와서 이틀을 머물면서 지은 詩文에서는, 꽤 오래간만에 천진암에 오니,“이벽 선생이 독서하던 독서처(연구소)는 아직도 저기 그대로 있는데, 온 세상에 한바탕 돌풍을 일으키던 원공(苑公)의 발자취는 아득하여, 다시는 찾아보기 어렵도다. 풍류와 문채는 모름지기 신령한 경지에 이르러서야 할 수 있으리니, 그 때 그 시절 추억하며, 한나절 내 술마시며, 또 한나절 내 시를 읊어보노라.”하였다.
특히,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가 1827년 65세가 되던 해 정초부터 120일 동안을 앓다가 일어나서, 옛 친구들과 함께 늦은 봄, 일생에 마지막으로 천진암에 와서 3일간을 머물면서, 옛날 천진암에서 공부하던 10여세 전후의 어린시절을 추억하며, 현장에서 아주 많은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그 중 몇 귀절을 뽑아서 의역해 보면, 이벽 성조께서 정약용 형제들과 함께 하던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다.
“천진암에 오르는 바위돌 사이로 난 이 돌밭 오솔길은 내가 어려서 놀던 길인데 !,,,그 때 바로 이곳 천진암, 여기서는 일찌기 호걸다운 선비들이 강학하며 독서하였었지 !,,,그러나 참선하던 저 방에서 기도하던 옛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으니, 어디 가서 다시 구해서 데려올 수 있으랴!,,,그 옛날 공부하던 추억의 그 시절 그 생활, 다시는 해볼 수 없겠네 그려!,,,저녁 죽 먹으라고 치던 북소리도 들리는 듯한데, 그때 해질녘에 같이 놀던 옛 동무도 생각나네!,,,”
文度公 요한 丁若鏞 承旨의 母校 天眞菴의 李檗 聖祖 - 이처럼 천진암은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가 10세 이전 어려서부터 종종 와서 놀며, 8세 위의 사돈이 되는 스승 광암 이벽 성조의 가르침을 받으며 공부하던 정든 母校였기에, 젊어서도 자주 들렸었지만, 늙어서도 마지막으로 찾아와, 무너진 절간에서는 머물 수가 없어서, 천진암 터에서 왼편의 남쪽 낮은 고개 너머에 있던 옆 마을에 사는, 이포(伊蒲) 지위의 계를 받은 佛子의 호의로, 그 집에서 3일을 머물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특히, 정약용 승지는 형 정약전과 함께 어려서부터 이벽 성조를 따라다니며 같이 공부하고 함께 놀았으며, 이벽 성조한테서는 달력, 특히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매우 생소한 태양력과 수학, 천문학과 지리학, 의학, 심지어, 기하원본과 새로운 종교(천주교)의 학설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이벽 성조께서는 1770년부터 입산하여, 천진암의 독서처를 본거지로 삼아, 천주교 교리 연구와 신앙을 실천하면서, 찾아오는 청소년 선비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천주교신앙의 젊은 소년들 단체가 이루어지는데 있어서 웃어른으로서 구심점이 되었다. 신자도, 사제도 없이 갖 태어난 젊은이들의 신앙 모임을 자발적으로 탄생시킨 이벽 성조께서는 중국 북경 천주교회 사제들에게 천주교회 예절에 관하여 물어보고, 좀더 알아보고자, 연락관계를 맺으려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몇차례나 시도하였고, 번번히 아무런 결실을 내지 못하였다.
蔓川 이승훈 진사의 북경 파견과 이벽 성조의 천학총림 공동체 - 그러다가 마침내 1783년 늦 가을, 이벽 성조께서는, 천주교회에 입교하기를 원하는 몇몇 改宗者들과 힘을 합하여, 이승훈 진사를 자신의 대리자로, 즉 자신들의 신도단체 대표자로,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하였고, 이승훈 진사는 북경에서 1784년 2월에,북경 북당에 와서 머물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 예수회원, Joseph de Grammont 신부한테서 세례성사까지 받고 귀국하므로써, 천진암 깊은 산속에서 갖 태어난 한국천주교회의 젊고 작은 신앙의 첫 단체는 민족구원을 위하여 용감히 수도 서울로 본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800년대 말, 일찌기 영국 황실대학의 교수로서, 주일본 영국대사관에 머물면서 20여년간이나 일본 문화와 조선 문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귀중한 저서를 남긴, H.Longford 교수의 글에서도 더욱 자세히 들어나고 있으며, 또한 천진암의 이벽독서처를 본거지로 하여, 이벽성조를 중심으로 하는 젊은 선비들이 모여 강학하며, 천주교를 배우고, 실천하던 시기에 대한, [니벽전]의 기록은 비록 간단하지만 매우 중요한 면을 알게 하고 있다.
이벽 성조께서는,“戊戌年(1778) 25세 때, 성호 이익 선생을 따르는 학도들, 賢友賢士, 李氏, 丁氏네와 학문에 힘썼다.”,,, 이벽 성조께서는, 일찍이 북경에 다녀온, 홍군사한테서 천학서적함을 받아, 주야로 정독하며 깊히 심사숙고 하므로써, 의심나는 점이 없게 되자, 산수 좋은 곳들을 찾아 주유천하하였으며, 광주 땅에 있는 앵자산에 있는 절에 은거하자, 道를 닦겠다는 벗들이 무리를 지어 모였으며, 聖敎要旨를 불러주어 받아쓰게 하였다. 성교요지는 신구약 성경을 약술한 교과서처럼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천진암 천학총림의 강학 수준은 출발 때에 비하여 비약적인 발전,,,, 己亥年(1779) 26세 때는 어진 벗들(賢友)과 힘써 배우려는 학도들(勉學)이 이벽 선생을 웃어른으로 모시어(爲上), 山寺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으며, 이벽 선생은 기묘한 학식을 아주 많이 넓게 알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天文과 地理, 醫藥과 복술(周易), 性命(性理學과 命理), 등에도 모두 통달하시므로, 제자들이 무슨 질문을 하여도, 아주 쉽게 풀어서 대답해주시는 것이 흐르는 청산유수와 같았고, 그 門下에는 제자들이 총림(叢林)을 이루게 되었으며, 巷間에 명성이 자자하게 전파되고 있었다.
1779년 기해년의 천진암 天學堂 모습은 이미 천주교회가 신흥종교의 형식을 갖추고,힘차게 움이 트고 싹이 돋아나는 모습이다. 이 때부터 젊은이들의 이 천주교 단체(天學 叢林)는 명실 공히, 한민족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천주교회를 창립하는 결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벽 성조께서는 이 때부터 거의 3년간 북경 천주교회에 사람을 파견하여, 좀더 많은 지식, 특히, 천주공경 예식서 등을 구입하기 위하여 시도하기 시작하였으나, 번번히 결과가 없었던 차에, 1783년 늦가을 이승훈 진사 파견이 대성공을 거두는 희소식이었다.
이승훈 진사가 아버지 이동욱의 冬至使 사절단에 합류하여 북경에 가게 되는 기회에, 한국 천주교회를 위하여, 이벽 성조께서 부여하는 사명을 받고 북경으로 파견된 역사는, 국내외 여러 자료에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그 중에, 황사영 진사가 1801년 10월 말에 쓴 백서(帛書)의 문귀만 되살펴보자.
“이승훈은 이벽 道師님이 기특히 여기던 사람인데, 이승훈에게 이벽 선생님은 말씀하셨읍니다,“북경에 가면 천주당이라는 집이 있고, 그 집을 찾아가면, 서양에서 와 있는 선비들이 있을 것이니, 천주교를 전하는 사람이 어느 분이냐고 물어서, 기도서를 한권 구하러 왔노라고 하게. 그리고, 아울러 洗禮를 받게 하여 달라고 청하게, 그러면 서양 선비가 자네를 무척 환대하며 사랑할걸세. 결코 빈손으로 돌아와서는 안되네!”
그런데, 이승훈 진사 파견이 처음이 아니었음을 A.Daveluy 주교는 그의 한국순교자 역사 비망록에서 언급하고 있다. 북경에 갔던 이승훈 진사가 1784년 봄에 귀국하면서, 이벽 성조께서는 용기백배하여, 천진암의 천학총림, 즉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젊은 신앙의 첫 공동체는 본거지를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조선 양반 가정의 귀공자 소년으로서 실로 위대한 인물이었던 광암 이벽은 고요한 산속에 들어가서 1770년부터 천주교 연구와 신앙실천에 전념하였으며, 정확히 13년간 천주교 연구와 실천에 집중한 후, 자기 친구 아버지가 북경에 사신으로 가는 기회에, 그를 따라가게 하였고, 그 친구는 북경에서 이듬해 영세하고 귀국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4). 이벽성조의 천진암 강학과 천학총림(天學叢林)의 서울 이전.
1784년 갑진년 봄 음력 4월 15일, 이벽 성조께서는 입산한지 15년 째 되는 해에 마침내 下山하시어 한양으로 가신다고 아래 마을에 있던 몇몇 새 입교자들에게도 알려지자, 이른 아침부터 몇몇 사람들이 두미 나루터에 모이게 되었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와 몇몇 동료 제자들이 이벽성조를 모시고 같은 배를 타고 서울로 떠나게 되었는데, 바로 이날, 배 위에서 당시 22세의 정약용 선비가 읊은 詩는 매우 감격적이다.
우선 詩의 제목부터, [同友人 李德操 檗 乘舟入京]이라고 하였는데, 만일 그 시의 제목을, 혹시라도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 보았다면,얼굴이 死色이 되어, 막내둥이 정약용을 몹시 야단쳤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 하면, 상감 마마가 계시는 도성, 서울에 간다는 말은, 부산에서나 신의주에서나, 전국 어디서나 [上京]한다고 해야지, [入京]한다고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홍경래 같은 역적 반란군이나, 혹은 중국에서 오는 사신단이나, [漢陽入城]이라고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시험에서 이미 2차례나 낙방한 당시 22세의 정약용은 그 당시 서울 남산 아래 회현동 산비탈에 무허가 법률사무소 같은 기능을 하는 허술한 집에 방을 하나 얻어서 억울한 서민들의 법률구제 활동을 하던 때로 알려졌는데, 당시 조정의 부패한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고, 더욱이 매형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 가서 서양인들을 만나보고, 영세까지 하고 왔기에, 박학다식하며 동시에 초인간적인 면모를 풀기는 이벽 성조를 모시고 함께 서울에 들어가는 것은 여러모로 정신적 힘이 솟구치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지금도 대부분 국민들은 ‘서울로 올라간다’고 하거나,‘上京한다’고 말하지, “서울로 들어간다”고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그런데 200여년 전 그 시대에는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천진암에서 이벽성조께 많은 학문을 깊히 배운 정약용은 당시 자신들이 天學道理로 무장하였으며, 조선사회 개혁을 거론한다는 초정 박제가와 이덕무, 등의 서출 출신의 북학파 저명인사들과도 친분을 나누고 있는 이벽성조를 모시고, 정조 임금의 사회개혁 정책 구현에 一助라도 바치기 위하여, 한양에 당당히 入城한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1784년 4월 중순, 정약용 22세 때 李檗 鄕邸 斗米 나루터에서 지은 詩-
[同友人 李德操 檗 乘舟入京]
벗 이덕조 벽과 서울 가는 배를 함께타고 가면서, 지은 정약용의 이 시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역술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시도해보면 다음과 같다.
배로 떠나려는 우리를 보고 숲속 꾀꼬리들이 서울에 잘 다녀 오시라고 부르는 환송가 노래소리 뒤로하고, 우리 나그네들을 태운 배는 서울로 떠나는데, (제수황리역객선) /
두미 여울의 양쪽 강가 마을에는 아침밥 짓는 연기가 마치 상서로운 香煙처럼 하늘로 피어오르며 높히 퍼지네 (수변촌락시조연) /
어느덧 봄은 깊어 완연하여 강 양쪽 밭기슭에 활짝 핀 복사꽃은 마치 花童들이 뿌리는 환영 꽃잎들처럼, 실바람에 날리는 붉은 꽃잎이 붉은 비 뿌리는 듯 하구나 (춘심양안간홍우) /
오늘따라 이른 아침 배라서 바람이 잠자는 듯 하니, 흐르는 강 물살도 잔잔하여,강물은 거울같아 하늘도 강물 속에 들어와 잠겨있네.(풍정중류부경천) /
일찌기 中原의 천재시인 소식은 지상의 물과 하늘의 달을 노래하였었지(소식재고담수월)*①/
또한 이응 도사님은 덕이 높아 그 명성이 백성들 사이에 신선으로 소문났었지.(이응명중약신선)*②/
그런데 내 자신을 돌아보니, 나야말로 별 재주도 없고, 덕망도 없어, 너무도 부족함을 깊히 알게 되도다./ (심지졸렬락무뢰) /
그리하여 이벽 선생님과 옛 성현들이 남겨주고 가시는 글이라도 읽어서, 옛 성현들 뜻에 보답코자 하노라!(욕파잔경보석현)
*① 소식(蘇軾)은 이태백 같은 중국의 유명한 시인이었는데, 人間事와 世波를 물에 비유하고, 천상의 초자연적 신비의 세계에 관한 일을 달에 비유하여 시를 읊었었다.
*② 이응(李膺)은 덕이 높아서, 세속을 떠나 泰山으로 아주 입산할 때, 이응 도사님이 태산으로 입산하시는 마지막 모습 뵈오려고, 수백리 밖에서도 환송인사차 모여온 백성들의 수레가 백여리 길 양쪽 가에 늘어서 있었다는 고사를 연상하며, 정약용은 이벽 성조께서 천진암 천학도장에서 下山하여 한양성으로 입성하시는 것을 감격스럽게 느끼고 있음을 노래한 詩다.
5) 1785년 을사년 박해(乙巳年 迫害)와 이벽성조의 순교
서울로 본거지를 옮긴 천진암에서의 신앙공동체는 - 고요한 앵자산의 천진암 산속 천학도장에서 천학총림을 이루며 갓태어난 천주교 신앙의 실로 순수하고 소박하고 아주 진솔한 젊은이들의 이 신앙단체는,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서 귀국한 후, 이벽 성조의 뜻을 따라, 서울로 본거지를 옮겼으나, 사제도 없고, 성당도 없던 시절이니, 모두가 몯근 일을 이벽 성조에만 의지하였으므로,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예상치 못한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이벽 성조의 인격과 설법으로 새 입교 지원자들은 늘어갔다. 이 어린 한국천주교회는 박해가 기다리고 있 줄은 미쳐 몰랐을 것이다.
서울로 용감히 입성하여, 우선은 수표동에 있던 이벽 성조의 자택을 집회소로 삼아,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천주교회에서는 양반 상민, 남녀노소 빈부귀천, 만인이 모두 같은 한 형제들처럼 서로 위하며 사랑하면서 지내고자 하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남존여비 사상이 극심하여, 여자들은 이름조차 없을 때였다. 그런데 천주교를 믿고 세례를 받는 여자들에게는 이름을 지어주므로, 난생 처음 자신의 이름을 가진 기쁨에서, 곱돌에 이름을 새겨 부인들도 몸에 지니고 다니며 자랑하였다.
더욱이, 한번 결혼하면 이혼하지 않고, 부인이 나쁜 병에 걸려도 소박하여 친정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부자나 양반도 소실을 두지 않는다는 말은 여성들에게 실로 감격스러운 복음이었다. 이벽 성조의 천주교 가르침을 전해 듣고, 대학자이며 부유한 권철신도 본 처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데도, 소실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는 소문은 더욱 힘있는 복음이었다.
더구나 과로하여 몸에 병이 나서 누어야만 하루 이틀 쉴 뿐, 명절이나 잔치날 같은 큰일을 치르는 날은 양반들에게 축일이지, 종들과 상민들에게는 일만 더 많아져서 지치도록 일하는데, 천주교를 믿으면 일곱날마다 하루씩은 쉬면서 기도한다는 새로운 종교의 복음에 대하여, 서울 장안의 중인들 천민들과 많은 여성들도 관심을 가지고 입교하고자 교리를 배우려고 모여들었다. 특히, 이벽 성조의 인격과 덕망과 박학다식한 언변으로 전교활동은 마른 봄의 산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우선 북경 성당에 가서 서양 신부한테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 진사가 이벽 성조를 위시하여 권일신네 형제들과, 정약전, 정약용네 형제들에게, 그리고 최창현, 김범우, 등 중인 계급과 종들 중의 자유 입교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때 일부 부인들도 적지 않게 세례를 받았으므로, 부인들 전도활성화로 신도들은 급증가하였다. 불과 1년도 채 안되는 동안 500여명의 신도들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일곱날마다 천주 공경하는 날, 즉 주일을 지키기 위하여, 할수없이 우선은 이벽 성조의 집에 모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벽 성조의 집은 경주이씨 양반 가문의 집이라서, 양반네들은 자유로이 출입하며 모일 수 있으나, 일반 常民들, 특히 庶民들이나 천민들과 종들과 아녀자들의 출입은 당연히 자유롭지 못하였다. 또한 사회 계급 차별이 극심하고 남녀칠세부동석의 시절이라서, 음력으로 따져서 주일을 맞아 새 입교자들이 모여도, 안채에서는 양반집 안악네들이, 밖앝 사랑채에서는 양반출신의 남정네들이 각각 따로 모여, 기도를 바쳐야 했고, 그나마 중인계급과 천민 계급의 상민들과 양반집의 종들은 양반들과 한방에서 한자리에 같이 앉아서, 기도를 바친다는 것이 당시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큰 흉이므로, 매우 불편하고, 불안하며 힘든 일이었다.
수표동 이벽 성조 자택에서 시작한 서울에서의 첫 집회소는 명례방 김범우 역관의 집으로 -그리하여, 소년시절부터 계급 차별을 하지 않고, 만인을 평등하게 대하며 함께 어울리던 이벽 성조와 초대 신앙의 선조들은 우선 당면 문제 해결을 위하여, 연일 머리를 짜며 고민해야 하였다. 집회소를 常民이나 賤民 집으로 옮기면,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출입하겠지만, 지체가 높은 양반층에서는 오기를 꺼려하고, 신앙집회에 불참할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양반 상민, 남녀노소가 자유롭게 출입하며 함께할 수 있는 중인계급의 집 중에서도, 의원이나 역관 직업을 가진 곳을 택하게 되었고, 평소 이벽 성조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르던 김범우 토마스 역관은 의원을 겸하고 있어서, 남녀가 유별한 사회에서 진맥과 치료를 위하여, 여러 채의 집들이 있었고, 살림도 부유한 편이어서, 신입 교우들을 접대하는 것도 큰 부담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김범우는 아주 기꺼이 자기 집에서 집회를 하도록 봉헌하였다. 바로 오늘의 명동대성당 아래 둘레 지역이다.
김범우네 8형제(범우, 이우, 관우, 명우, 현우, 성우, 등)는 어렵지 않게 입교하였고, 비교적 생활도 넉넉한 편이고, 중인계급에다가 통역관 겸 한의원과 한약방을 겸하는 집안으로, 집도 여러 채씩 가지고 있는 큰 보람을 느끼었다. 그래서, 양반, 상민, 남녀 노소가 진맥과 치료를 빙자하며, 일반 가정집보다 보다 훨씬 자유로이 출입하며, 모일 수 있었다. 따라서, 새 입교자들이 더욱 늘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천진암 강학회가 한창이던 때를 전후하여, 천주교에 관한 소문은 이미 장안에 널리 알려져 있던 터에, 순암 안정복은 사위 권일신도 이벽이 선전하는 천주교에 푹 빠졌다는 소리를 듣고, 권철신네 형제들에게 경고 서찰을 보내기도 하였다.
특히 당시 정조 임금은 조선사회의 개혁 정책을 펴나가고 있었는데, 북학파라고 흔히 부르는 박제가 이덕무 등의 서출 출신 젊은이들도 이벽 성조와 교분이 두터우며, 이벽성조께서 열열히 선전하는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이던 때라서, 완고한 유교 집안의 일부 양반들은 그대로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이가환, 이기양, 같은 저명한 학자들을 움직여, 주동자 이벽을 불러 타이를 겸 공개토론회를 열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도록 하려고 주선하였으나, 뜻밖에도, 이가환, 이기양, 대 학자들이 공개토론회에서 모두 젊은 이벽 성조의 해박한 지식과 합리적 논거에 의한 언변에 굴복하자, 이제는 서울 장안의 젊은 선비들까지도 이벽 성조께서 부르짖는 천주교 신앙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서울 양반 사회가 전복될 위기에 직면하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신흥 서양 종교로 인하여 당혹감과 위기감을 느끼던 양반 유림들과 반대파에서는 드디어 권력으로 처리하기로 정하였다.
우선 주동자 天學道師 이벽을 없애버리려 했다. 첫 단계로 주동자로 본 이벽성조를 신도들과 격리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천주교 신도들이 명례방 김범우 역관의 집에 모일 때, 현장을 급습하여 집회도 해산시키는데도, 양반 자제들은 함부로 관에서 손을 댈 수가 없어서, 집주인 김범우만을 형조로 잡아다가 가두고 매질을 하여, 며칠 후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단장리로 귀양을 보내고, 집회를 주관하던 이벽 성조와 거기에 참석하였던 권일신, 이승훈, 정약용, 등 양반집 자제들은 각각 그 양반 가문의 종친회 원로들을 움직여서 천주학을 못하도록 부모들이 조치하게 하고, 천주학 책들은 빼앗아 불사르게 하는 대소동을 이르켰다.
그래도 대학자 권일신은 추조판서 김화진 앞에 나아가서, 중인 계급의 김범우를 잡아다가 벌을 주려면, 우리 양반들도 똑같이 하라고 강력히 주장하며, 부당하게 압수하여 뺏어간, 천주교 聖物과 聖書들을 즉시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승훈 진사의 가정과 정약용 집안 및 권철신 집안에서는 모두, 문중 원로 노인들의 심한 꾸증과 호령을 받고는, 우선 집안네 웃어른에 대한 예의상,“집안에 소란을 끼쳐서 죄송합니다”하는 자제들의 사죄로 조용히 수그러들었으나, 한국천주교의 始祖라고까지 부르던 주동자 광암 이벽성조의 집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고,점점 확대되고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주모자로 지목된 이벽성조는 이가환, 이기양 같은 대학자들도 굴복시키는 뛰어난 인물이므로, 사실 박해자들 편에서는 이벽 성조에게 대항할 인물이 없었다. 또한 박제가, 이덕무, 같은 조선사회 개혁을 꿈꾸며 외치는 북학파 대표급 인사들과 교분이 있는 이벽 성조의 비중으로 인하여 반대파에서는, 우선 이벽 성조를 추종세력과 격리시키기 위하여, 아버지 이부만에게 압력을 가중시키는 연합 집중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벽 성조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에 굴복하지 않고, 천주교를 계속 신앙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부자지간의 충돌역시 한층 더욱 악화될 수 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아들의 천주교 신앙을 말리다 못하여, 할 수없이 대청 마루 뜰에서 대들보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하기에까지 이르렀으랴!.
그도 그럴 것이, 을사년 박해 때, 천주교를 박해하는 양반들이 서울 문안과 4대문 문밖으로까지 돌린 [통문]을 보면, 서양 오랑캐의 법을 따르는 저 西學人 5,6명은 오랑캐 무리들이니, 양반의 문중에서 담장 밖으로 내쫓아 몰아내야만 한다고 동네방네 거리마다 방도 부치고, 통문도 돌리며, 일부 선비들은 규탄집회도 거론하였다. 양반이 상민들과 겸상하여 밥을 먹고, 모여 앉으면 모두가 함께 손으로 얼굴에 헛손질을 하며, 남녀칠세부동석인데, 아낙네들이 남정네들과 한집에 모여, 주문을 같이 외우고, 창가를 함께 부르기도 하며, 일곱날마다 하루씩은 일도 아니하고 낮잠을 싫건 자게 한다니, 이는 道를 닦는 것이 아니라, 亡國을 부채질하는 것이라고 야단이었다.
그리하여,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를 믿는 5,6명의 가장들에게 공격은 집중되었으니, 바로 이 5,6명이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기둥과도 같이 중심이 된 창립선조 5위다. 즉,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 등이었다. 이 분들이 속한 가정은 부모들이 책임을 지고, 저들을 집에서 속히, 엄히, 내쫓아,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거든, 반드시 천민화하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오랑캐 무리들은 양반이 아니므로, 각 양반 문중에서는 저들을 양반 가문의 담장 밖으로 내쫓는다는 말은, 양반 족보에서 저들 이름을 삭제하여, 아주 빼내어 버리게 하라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은 천민이 되어, 탈관삭직에 패가망신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不時에 하던 벼슬도 떨어지고, 집안은 파산할 수 밖에 없었다.
탈관삭직에 패가망신하게 되면, 이벽 성조 가정의 경우, 이격과 이석의 벼슬이 떨어지고, 온 가족이 천민이 되는 것 아닌가?! 불같은 성격의 이부만은 아들 이벽이 천주교를 버리도록 하지 못하면 문중에서 쫓겨나게 되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벽의 천주교 신앙포기를 받아내야만 하게 되어 있으나, 이벽의 고집을 잘 앎으로,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다불뤼 주교의 기록을 살펴보자.
“이벽의 아버지는 天性이 격정적인 사람으로, 천주교에 연루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었는데, 천주교에 깊이 빠진 듯이 보이는 자기 아들의 마음으로부터 그러한 종교적 心性을 뿌리뽑기 위하여 최상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자기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자, 끝내는 자살하기 위해 목을 매달기에 이르렀다. 檗은 그러한 광경에 당황하였고, 무감각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버틸 수도 없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굴복한 상태는 아니었다.
천주교인이라고 부르기도 부당한 어떤 교인 하나가 그에게 찾아와, 그가 느끼고 있는 듯 보이던 동요를 완결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檗을 배교시키는 데 성공하기 위해 가능한 온갖 수단을 다 썼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하였다. 檗은 지치고, 그토록 시달림을 받아 정신이 혼미해졌어도 공개적으로 분명한 배교를 선언하라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아버지의 자살이나 형제들의 탈관삭직이나 집안의 패가망신 같은, 자기 앞에 다쳐오고 있는 모든 불행을 물리치기 위하여, 완곡하면서도 유연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의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오호라!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그를 감금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신앙을 막기 위하여 목을 매달고 있을 때, 그가 잃지 않고 간직한 신앙심은 그의 가슴속에서 자연적인 인정에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다. 한 편에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셨고, 다른 한 편에는 친 아버지가 계셨다. 어찌 천주를 부인하겠는가? 어찌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하겠는가? 이러한 끊임없는 싸움은 그를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서글프고 우울해졌으며 말이 없어졌다. 밤낮으로 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시간마다 신음소리가 들렸다. 의관도 더이상 벗지 않았고, 잠은 눈에서 멀리 달아나 버렸다. 아직은 가끔 음식에 손을 대기는 했지만, 입맛을 완전히 잃었으므로, 아무 맛도 없고, 몸을 위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치열한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불행하게도 본성이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차츰 회한과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았고, 은총의 마지막 노력이 간신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평소의 건강상태로 되돌아왔으며, 벼슬에 대한 욕심이 되살아났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에게는 아무 것도 시도해볼 시간이 없었다.
1786년(병오년) 봄 당시 유행하던 흑사병(중국인들 말로 역병)에 걸렸고, 8, 9일 후, 그가 땀을 흘리기 시작하자 간호하던 사람들이 여러 겹의 이불로 덮어서 몸을 멍석처럼 말아서 양쪽 마구리를 막아 호흡을 못하게 되자, 무거운 이불 속에서 숨이 막힌데다가 땀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였으므로, 온갖 간호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여기서 염병이라 부르던 역병이 유행한 것은 1838년 무술년이었으니, 다불뤼 주교의 이 대목은 틀린 것이다. 이벽 성조께서 돌아가신 해는 1786년 병오년이 아니라, 1785년 을사년으로 경주이씨 족보 戊申譜가 명시하고 있으며, 1785년 을사년의 이벽 성조 장례식에 참석한 정약용의 만사(輓詞) 저작년도가 1785년 乙巳年으로 기재되어 있고, 정약용의 만사를 따라 같은 해에 초정 박제가의 李檗 哀悼詩, 즉 만사가 저작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또 열병에는 땀을 흘려야만 살 수 있는데, 오히려 땀을 흘리지 못하도록 이불로 아주 막아버렸다는 것도 우리나라 염병 간호의 치료관습을 모르는 기록이다. 만일 이벽 성조께서 아버지의 요구대로,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배교를 선언하였다면, 밖앝 출입을 못하도록 방에 감금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벽 성조를 그 추종자들과 격리시키라는 문중과 친지들의 압박에 의해 아버지가 아들을 집으로 불러들였고, 온갖 수단을 다하여 배교시키려 하였으나, 듣지 않자, 너의 천주교 신앙 때문에 네 형과 동생의 벼슬이 떨어지고, 우리 집안이 탈관삭직에 패가망신하는 것을 보며 사느니보다, 네가 보는 앞에서 차라리 내가 먼저 목매달아 죽는 꼴을 보여주겠다고 하며, 아버지는 실제로 목을 매달았다. 국사대사전에서는 이부만이 아들의 천주교 신앙을 막기 위하여 목매달아 죽었다고 하였으나, 이벽 성조의 유연한 말씀에 자살은 미수에 그쳐, 그 후 17년이나 더 살았다. 그 대신 아들 이벽 성조께서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판국에 아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잘 먹고, 잠을 잘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효성이 지극한 가문에서, 불철주야로 식음을 전폐하고 의관을 바꿀 수도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배교는 할 수 없으나, 당분간 명례방 김범우네 집에는 나가지 않겠다는 말로, 아버지가 목매달고 있던 밧줄을 가족들이 풀게 하였으리라고 일부 학자들은 설명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다.
그러나 박해의 압력은 더 처절하게 심화되어 같다. 하여간 이부만의 자살은 미수로 그쳐서, 이벽 성조께서는 아버지의 목숨을 건졌다. 아버지를 자살하여 죽게 만드는 종교라면, 당시 아무도 따르지 않고, 믿지 않을 것이다. 이벽성조께서는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면서, 아버지의 목숨을 살리면서 순교하신 것이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친지들이, 그러면 차라리 주동자 이벽이 밖에 나와서 천주교를 버린다고 명확히 사람들에게 밝히라고 하자, 배교하라는 이 요구에, 이벽성조께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배교할 수는 없지만, 배교가 아닌, 아버지의 말씀대로 명례방에 나가지 않겠다는 말로, 목을 매달던 아버지를 구하였으나, 공개적으로 진심으로 배교하라는 요구에는 강경하게 거부하자, 친지들의 면회도 금지하면서, 역병에 걸렸다고 소문을 내게 하고, 문을 밖에서 못질하고, 별당 둘레를 금줄로 띠어, 일체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훗날 이벽 성조께서 역병으로 사망하였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벽 성조의 천주교 신앙 때문에 문중이 멸문지화를 입는 것보다 차라리 이벽 한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옳다고 하여, 문중과 친지들의 압력으로 餓死罰을 주게 되었으니, 당시 正祖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父王 英祖가 아사벌로 10여일을 굶겨 죽게 하였듯이, 양반대가에서는 아들이 父命을 끝까지 거스리면, 차마 칼로 아들을 죽일 수가 없으며, 그렇다고, 친 아들을 개를 잡듯이 밧줄 올가미로 목을 옭아서 매달아 죽일수도 없으므로, 이런 경우,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 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밥도 주지 말라"고 하여, 아사벌로 피흘리지 않고, 조용히, 굶겨서 죽이는 것이 더 큰 불행과 비극을 예방하기 위하여, 궁중에서나 큰 양반대가의 뒤뜰 별관에서 있었던, 종종 있었던 비극의 역사였다..
박해 중에, 우리말과 우리 풍속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서양 선교사가, 일부 신도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기술한 것으로, 잘못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몇가지 확실한 것은;
① 1785년 乙巳年 봄에 명례방 김범우 통역관의 집에서 집회를 하다가 형조판서 김화진이 보낸 추조금리들에 의해 해산되고, 성물과 성서도 압수당하였으며, 이벽 성조는 아버지의 집으로 호출되어 배교를 강요받았고, 서울의 온 장안 반대 세력층에서 들고 일어나서, 4대문 안팎으로 통문까지 돌리며, 이부만에게 무서운 압력을 계속 가중하였다.
② 배교 강요를 끝끝내 거부하자, 아버지 이부만은 대청 마루 들보에 밧줄을 걸어 자살하기 위하여 목을 매었다. 당황한 가족들은 이벽 성조를 꾸짖으며, 배교는 아니더라도, 아버지 말씀을 따라, 명례방 집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말로 아버지는 자살미수로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③ 그러나, 이벽 성조께서 밖에 나가기 시작하면, 분명히 천주교 추종자들이 다시 집결하게 되고, 추조판서 김화진 대감이 있는 데까지 들어가서, 자신들도 천주교 신자이니, 김범우와 같은 벌을 받게 해 달라고 항의하며 성서와 성물을 내놓으라고 대들던, 사우거사(沙右居士) 권일신과 그 제자들이 다시 뭉쳐서, 더 큰 소란을 다시 일으키게 될 터이므로, 사태가 더욱 악화되지 않도록, 주동자 이벽만은 집안에 감금하게 조치하고, 신자들은 물론이고, 문중이나 어떤 친지도 만나지 못하도록, 대면을 금지시키면서, “이벽은 천벌을 받아서, 염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퍼트리게 하였으며, 달포가 넘도록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을 자지도 못하여, 지칠대로 지친 이벽에게는 아사벌로 조용히 죽도록 굶기게 하였다.
④ 형조판서가 추조금리들을 동원하여 천주교를 막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무서운 고문으로계속 엄히 조치해 나가면,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벽 때문에 문중이 멸문지화를 면하기 어려우니, 이벽 한 사람을 없애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은 모아지게 되었다.
⑤ 감금상태에서 아사벌로 굶기기 시작하자, 통찰력이 빠른 이벽성조께서는 때가 된 것을 아시고, 방안의 벽에다가 붓으로,“무협중봉지세 사입중천, 은하열숙지년 금환천국(巫峽中峯之勢死入重泉/ 銀河列宿之年錦還天國)이라고, 굵은 붓글씨로 크게 特筆大書한 후, 굶주림으로 허기져 가면서 천주님께 기도를 올리는 수 밖에 다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협 중봉에 서있는 형세로다, 이제는 죽어서 황천 길로 들어가야 하나,
은하수 별자리에 둥근 달 떠오르듯, 비단옷 곱게 차려 입고서 하늘나라 가노라.
⑥ 열흘가까이 지나도록 운명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부만도 이제는 허탈한 상태에서,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하자, 이제 다시 살아나서 회복되기도 불가능할 정도이며, 또 어렵게 또 살아나도, 그 천주학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후환이 더 커질 것이니, 기왕에 버린 자식이고, 아무래도 이 세상을 떠나는 아들 이벽을 어서 빨리 가도록, 당시 마치 死境을 헤매는 죄인들에게 대하는 관례처럼, 빨리 죽도록 음독시켜 도와주게 하였고, 기골이 장대한 장수 체질의 이벽 성조께서는 음독상태에서도 숨이 속히 넘어가지 않고 계속 운명 직전 신음하며 몸부림하는 것이 길어지자, 처참한 광경을 속히 매듭짓도록, 마지막으로, 두꺼운 이불 여러겹으로 이벽성조의 몸을 멍석처럼 말아서, 발과 머리가 있는 상하 양쪽 마구리를 눌러 막아서, 숨을 아주 못 쉬도록 막아 질식사시켜 운명하게 하였으니, 1785년 을사년 7월 5일이었다. 이른 봄부터 서울 장안이 떠들썩하게 시작된 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최초 박해, 당쟁과 사회여론과 공권력과 문중의 가세와 가정에 집중된 박해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께서는 가장 혹독하고, 고독한, 실로 처참한 최후를 마치었다.
⑦ 천주교 신앙 때문에 미움을 받아 이벽 성조께서는 가장 참혹하고 무서운 餓死罰에 이어 飮毒罰과 최종적으로 窒息罰로 최후를 마치었으니, 순교자들 중에 가장 혹심한 3重 死刑벌을 받은 것이다.
⑧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는, 그래도 하늘과 땅을 볼 수 있었고, 공기를 마시며,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 요한과 이모 마리아를 보며, 유언도 하실 수 있었고, “다 이루었다”고 최후의 말씀도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벽 성조께서는, 신도들과 격리되어, 배교를 강요하는 시달림으로 한달이상 거의 두 달정도 시달리다가, 목을 매어 자살하려는 아버지의 모습과, 감금되어 굶기는 형벌에 이어, 죽음의 문에 들어서는 그에게는 아무도 손을 잡고 임종을 돕는 이가 곁에 없는 상태에서, 아무도 볼 수도 없고, 아무 말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겹겹이 두껍게 몸을 휘감아 이불말이한 속에서, 고통과 함께 무서운 고독과 고립상태에서, 가족들 누구의 손도 잡을 수없이, 유언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숨도 쉬지 못하게 하는, 극심한 고통 중에, 가중되는 독약과 빨리 저 세상으로 떠나기를 재촉하는, 숨도 더 이상 못 쉬게 막아버리는 상태에서, 오로지 마음 속으로만 천주님을 찾으며, 짧은 일생 만 31세(1754~1785)로 운명하셨다.
⑨ 이벽 성조께서 운명하시던 날, 이 때, 아직 벼슬에 오르지 못한 23세의 정약용과, 서출이라 벼슬에 오를 수 없었더 35세의 절친한 벅 박제가만은 적어도 사랑채에라도 와서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근거는, 저 두 벗들은 문인들로서, 弟子와 學兄으로서 각자 우리에게 남겨준 만사(輓詞)와 애도시(哀悼詩)에 나오는 文句와 표현 때문이다.
⑩ 사실, 1주일이상 굶어서 다 죽어가는 아들을 본다는 것이 괴로운 부모는, 이왕에 죽어가는 자식이니, 차라리 빨리 죽도록 도와주는 방법으로, 바로 음독시키는 것이었는데, 그 시절 신유박해 때 경기감사 이익운이 아들의 천주교 신앙 때문에 자신의 벼슬이 떨어지고,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위험에 처하자, 아들을 잡아다가 집에 가두고 배교하도록 달래도 소용이 없자, 종래에는 아들을 결박하여, 마당에서 공개적으로 강제로 입을 벌리고 음독시켜 죽게 하였던 것처럼, 아사벌 끝에 가서는 飮毒罰로 마치게 하는 것이 사형수를 돕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음독시켜도 얼는 운명하지 않는 경우에는 숨을 쉬지 못하여 빨리 죽도록, 목을 졸라서 죽이는 경우도 있는데, 아예 질식사(窒息死)시키는 것으로, 동시대의 신유박해 때, 남한산성으로 붙들려온 천주교신자들을 하루에 돼지 감자 한 개씩만 먹여서 10여일 이상 지나면, 피골이 상접하고, 온 몸은 두들겨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고, 지칠대로 지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며 비틀거리는 신도들을 사형시킬 때, 칼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신자들을 결박하여 줄을 맟춰서 무뤂꿀린 후에, 얼굴에 물을 붓고나서 韓紙로 3번 얼굴을 겹겹이 바르면, 힘이 없어 입을 벌릴 수가 없어서, 입과 코가 막힌 채로, 바로 숨이 막혀 숨을 거두게 하였다. 이것을 도모지(塗貌紙) 사형법이라 하였다.
하느님의 종,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세자요한 광암 이벽성조께서는, 1785년 을사년 늦봄, 한국의 첫 박해로, 추종하던 신도들과 격리당하여 집안에 감금당한 후, 배교하라는 혹심한 시달림과 불면과 굶주림으로 적어도 달포내지 두어달가량 가내연금상태에서 고통을 받아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아사벌로 10여일간 더 굶긴 후에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강제로 음독시켰으나, 그래도 계속 몸부림을 치며, 숨을 쉬므로, 두꺼운 이불로 겹겹이 여러겹 멍성처럼 몸을 말아서 발과 머리 양쪽 입구를 막아 질식사시켰던 것이다.
순교자들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3 중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아 중첩되 죽음의 고통 속에서 순교하셨다. 이를 미리 아셨는지, 운명시에서 사입중천(死入重泉)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황천길 중에 가장 무겁고, 무서운 고통이 중첩된 죽음의 길로 들어가고 있음 표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십자가 상의 예수님보다 더 외롭고, 괴로운 캄캄한 고통 속에서 순교하셨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아래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과 이모 마리아, 등이 있었고, 하늘과 땅과 앞을 보면서 유언을 하시면서 운명하셨으나, 이벽 성조께서는 달포가 넘는 동안 온갖 시달림 속에서 아버지의 진노와 미움 속에서, 물 한모금 없이 목이 타들어가는 아사벌의 고통 속에서, 캄캄하게, 가족도 아무도 못 보는 암흑의 여러겹 이불말이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게 막는 질식사를 당하시어 순교하셨기 때문이다.
6) 하느님의 종 이벽 성조의 장례 때 지은 정약용의 만사(輓詞)와 박제가의 애도시(李檗 哀悼詩)- 만사나 애도시는 가장 절친한 사람이나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문상한 후에, 객실에 나와 짖는 것이 보통이다. 이벽 성조의 장례식에 참석한 두 학자들의 만사는 매우 진지하고 중요한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1785년, 23세의 俟菴 丁若鏞(1762~1836)이 李檗 聖祖 葬禮 때 와서 지은
[友人 李德操 輓詞]
仙鶴下人間선학하인간 신선나라 학이 인간세계에 내려오니
軒然見風神헌연견풍신 그 찬란한 모습에서 우리는 神의 풍채를 보았도다
羽翮皎如雪우핵교여설 그 날개와 깃털은 모두가 눈처럼 온통 흰색이었기에
鷄鶩生嫌嗔계목생혐진 닭과 오리떼들이 모두 시새움하며 골을 부렸었지!
鳴聲動九霄명성동구소 그 학의 울음소리는 아홉하늘 끝까지 울려 퍼졌고,
嘹亮出風塵료량출풍진 그 맑고 밝게 외치던 목소리는 풍진세상에 뛰어났었네.
乘秋忽飛去승추홀비거 가을이 되어 찬바람 타고 문득 훌쩍 날아가 버리니,
怊悵空勞人초창공로인 창자까지 끊어지듯 아무리 애닲아한들 무슨 소용있으랴!
1785년, 35세의 楚亭 朴齊家(1750~1805) 李檗 葬禮 때 지은 [李檗 哀悼詩]
晉人尙名理 진인상명리/진나라 때 사람들은 늘 명분과 의리를 내세우며,
淸譚亂厥世 청담난궐세/맑은 말로 밝힌다고 그 때 세상 더 어지럽히며 더럽혔지만!①
德操議六合 덕조의육합/덕조는 오히려 上下左右先後內外 萬人과함께 늘 議合하였는데,
何嘗離實際 하상이실제/어찌 이리도 일찍 實際를 버리고 떠나야 하나 ?②
匹夫關時運 필부관시운/세상 돌아가는 時運에 매인 凡夫로서,
破屋志經濟 파옥지경제/집안 일 모두 破하고, 백성들 구하려는 뜻만 두고 다하였었지!③
胸中大璣衡 흉중대기형/가슴 속 깊히 품고 있던 크나큰 옥구슬 저울같은 心志는
四海一孤詣 사해일고예/東西南北 드넓은 天地에 외로히 높히도 홀로 올라 자리하였으니,④
物物喩性體 물물유성체/만물의 근원과 본질을 깨닫게 하고,
形形明比例 형형명비례/온갖 조물들을 서로 견주며 형상과 체질의 뜻 밝혀주더니!⑤
鴻荒諒未開 홍황양미개/황량한 벌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일에도 그 참뜻에 신념을 두더니,
名言孰相契 명언숙상계/이제 그 유명한 말로라도 누가 서로 믿고 다시 모이게 하랴?⑥
天風吹鸚鵡 천풍취앵무/아무도 피할 수 없는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 앵무새에게 닥치면,
翻成出籠計 번성출농계/바닥에 등을 대고 거꾸러 누어, 새장을 빠져나갈 길 찾지만,⑦
遽廬罷殘夢 거려파잔몽/다급하게 마련한 오두막에서 못다 이룬 남은 꿈마저 다 내버리고,
靑山葬靈慧 청산장영혜/청산에 그 영특한 지혜를 파묻고 떠나가려하네 그려! ⑧
春秋不暫停 춘추부잠정/봄 가을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흘러가니,
萬化無非逝 만화무비서/萬有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어 萬物이 되어가게 마련이라네.⑨
高嘯送飛鴻 고소송비홍/높이 울리는 휘파람 소리에, 나르는 기러기 떠나 보내려 하노라니,
乾坤暗雙涕 건곤암쌍체/하늘과 땅도 한 쌍이 되어, 속으로 눈물 흘리며 울고 있고나!⑩
註
① 중국인들처럼, 조선 선비들도 명분과 체면과 위신을 내세워, 말들은 잘하나, 사회는 더욱 당쟁으로 갈등과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는 비유적인 문구.
② 그런데 덕조(이벽 성조의 자)는 권철신, 이승훈, 정약용, 이가환, 이기양, 등, 지체 높은 양반 선배들과, 김범우, 최창현, 등 중인들과도, 또 박제가, 이덕무, 같은 서얼출신들과도 함께 어울리며 벗하였음을 말한다. 이를 議六合이라 하였다.
③ 아버지 뜻따라 혼인은 하였으나, 가정을 꾸리고 돌볼 생각 아니하고, 천진암 독서처 동료 학우들과, 마재 누님 집의 정약용 사돈들과, 양근 권철신 대석학 형제분들과, 한양의 이격, 이석, 형제들 집에 머물며, 조선의 개혁을 갈망하던 북학파의 박제가 등과 사회 제도 개선과 민족 구원사업에만 열중하였다는 뜻이다.
④ 마음 속에는 천주교 신앙을 간직한 채, 아무도 알아주려하지 않는 큰 뜻을 홀로 품고 있었다.
⑤ 피조물을 보고 창조주 천주를 알도록, 천차만별 만물의 근본과 형체와 본질을 서로 견주며, 그 존재의 원인과 존재 목적을 밝히고 풀어 주던 이벽이었다는 뜻.
⑥ 그런데, 황량한 잡풀 벌판 같은 당시의 사회 실상을 볼 때, 덕조가 세상을 떠나면 이제 이 세상에, 대체 누가 있어, 덕조 대신 그런 해설을 해주며 사람들을 모아서 묶어줄 수 있으랴?
⑦ 그러나 떠날 때가 되어, 피할수 없는 하늘 바람이 앵무새에게 불어오니, 새가 새장을 빠져 나가려고, 새는 새장안의 천정을 두 발로 잡고 등을 새장의 바닥 쪽에 대듯 누워가며, 나갈 구멍이라도 있는지 찾아보듯 하지만 탈출구가 없듯이.- 여기서 이벽 성조를 앵무새에 비유한 것은, 천주교를 버리라는 아버지의 말씀이나, 친구들의 애절한 말에도, 대답은 앵무새처럼 항상 [천주님]만을 말한다는 뜻이며, 새장은 가정에 감금된 현실을, 또 새가 누운 자세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듯, 이불로 겹겹이 말이하듯 몸을 말아서 死境을 헤매던 모습을 표현한 듯 하다. 이벽 성조의 運命詩 내용과 일맥상통한다.즉, 巫峽中峯之勢死入重泉,<무협 험산의 중봉에 서 있는 형세로다.사면팔방 어디로도 갈 수 없어, 두 번 세 번 죽는듯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속으로 들어가고 있으나> 銀河列宿之年錦還天國<그러나 높고 넓은 하늘 은하수 별자리에 둥근 달 떠오르듯, 나 비단옷 곱게 차려 입고 하늘나라 가노라>
⑧ 天眞菴 讀書處의 天學叢林을 의미하는 듯.
⑨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만물이 쉬지 않고 진행됨을 의미한 듯.
⑩ 정약용의 李檗輓詞 끝말과 같다. 乘秋忽飛去, 怊悵空勞人 보다 더욱 폭넓은, <하늘과 땅이 한 쌍이 되어, 속으로 슬피 울며 눈물짖는다>는 말에는, 가정과 친지들과 천주교 신도들과 북학과 선비들을 총 망라하여, 모두가 아까워하고 애닲아함을 표현한 것이다.
2015/10/31. 천진암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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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원문:
1)
L'instrument dont Dieu se servit pour donner le premier branle à la Religion dans le royaume de Corée fut Ni Pieki appelé Tektso et surnommé par lui-même Koang am. Pieki descendait de la famille des Ni des Kieng Tsiou et parmi ses ancêtres qui étaient déjà dans les dignités sous la dynastie Korie on comptait plusieurs membres distingués dans les lettres et par les dignités civiles qu'ils avaient obtenues. Depuis trois générations cette famille s'était livré aux exercices militaires et avait occupé des charges importantes dans cette nouvelle carrière. Pieki naquit doué de mille belles qualités du corps et de l'esprit. Dès l'enfance son père voulut l'appliquer aux exercices de l'arc, de l'équitation et autres qui puissent lui faire obtenir les degrés militaires; mais celui-ci s'y refusa constamment au point de dire que dut-il mourir il ne s'y livrerait pas. De là il perdit en partie l'affection de son père qui l'appela Pieki voulant par là désigner son caractère trop attaché à ses idées.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manuscript copies, pp.1~2)
2)
En grandissant Pieki devint d'une force et d'une stature énorme. Il avait une taille de huit pieds et d'une seule main pouvait enlever cent livres. (ibidem). 이벽선생 묘 발굴 및 이장화보특집 천진암 통권 제15호, 천진암 신장성당 변기영 신부 발행,1979. 7. 31./, 이벽 성조의 묘를 발굴 당시, 유해 측정 담당 법의학 전문 교수, 가톨릭의대 권흥식박사의 측정결과, <신발이나 의관을 하지 않은, 1979년 6월 21일 발굴 당시의 순수 신체 유골의 발에서 머리 끝까지,이벽 성조 유해의 키는 1m 78cm 였다. 천진암성지 자료집 제5권 104면.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소 변기영 신부 발행,1979. 7. 31.
3)
余問 羅君曰 今世都氏 亦有聽明特達之士乎 曰有李蘗者 月川君廷馣之後 兵史鐽之子格之兄也 看苦十行俱下繙閱如飛 目能一上視一下視 一左視一右視 甓骨不雙 而單能三次回斡 能上跳二丈 .(頤齊亂藁 38책 병오(1786, 正祖 10), 5월5일 丁未). 천주교 서울대교구순교자현양위원회 2015. 9. 24. 심포지엄<이벽 새벽을 열다> 48면-서종태 교수. * 筆者 再譯述. 참고: 현재 이 글을 쓰는 필자의 큰 형이 1945년 해방 직후, 양평 지역의 벌목하는 산판에서 1년간 일하다가 집에 와서 우리 동생들에게 하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택견(?)’이라는 조선의 고유무술 연마하는 이들이 몇 명 함께 일하였는데, 장정 한 길 정도의 웬만한 나무는 훌쩍훌쩍 뛰어넘기도 하고, 성곽이나 왕궁의 높은 담도 뛰어넘을 수 있다며, 절간 대웅전 지붕을 단번에 뛰어 오르고 내릴 수 있는 체력과 재주가 있는 청년들이라는 것이다.
4)
平生酷好西洋之天主實義 爲一時其徒之冠 年三十而夭 近年上命西洋文學 自律曆數學三種以外 其爲天主實義之學者 自刑曹聚其書焚之 嚴禁中外 李君時入桂坊別薦 上疏自列天主之說云. (頤齊亂藁 38책 병오(1786, 正祖 10), 5월5일 丁未). 천주교 서울대교구순교자현양위원회 2015. 9. 24. 심포지엄<이벽 새벽을 열다> 48면,서종태 교수.* 筆者 再意譯.
5)
甲辰之冬 亡友李檗在水表橋 始宣西敎 公聞之曰 噫 實義七克之書 我昔見之 雖有名喩 終非正學 檗欲以此易吾道何哉 遂往詰之 檗雄辯如長河 固守鐵壁 公知不可以口舌爭 遂止不往,,,. 丁若鏞의 貞軒墓誌銘. 與猶堂全書 2권 詩文集 591면. 1985, 驪江出版社.
6)
Large et bien fait, son extérieur était imposant et attirait naturellement tous les regards. Ses talents ne le cédaient pas à un extérieur si avantageux. Sa facilité de parole pouvait se comparer à l'écoulement majestueux d'un fleuve et doué d'une intelligence supérieure en tout il ne cherchait que la raison des choses et les vrais fondements de la doctrine. Partout il s'occupait à pénétrer le fond des choses et dans l'études des livres sacrés du pays, dès sa jeunesse, il s'efforçait d'en saisir les sens profonds.
De si heureuses dispositions lui permettaient personnellement un avenir brillant. Il se livra de bonne heure à l'étude des livres des plus fameux docteurs de ce temps et pour assurer le succès de ses travaux il chercha à se lier avec tous les gens instruits qui voulaient l'aider et le diriger dans la science. Se souciant peu des usages et de l'étiquette, il avait quelque chose de grand et élevé, mais aimait les paroles plaisantes, il n'eut jamais la noble dignité qui distingue les docteurs de profession(hak tsia). Tel nous est représenté Pieki par les documents du temps.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manuscript copies, pp.1~2).
7)
李晩菜, 闢衛編 辛酉治邪(1801년), 悅話堂, 1971, 289면 : “水使李晳卽一物怪人妖也,[…]其兄李檗之最先溺邪一世之耶共知也”/朝鮮王朝實錄 47권(1801년), 375면 : “執義柳丼疏略曰若論邪黨之巨魁厠李檗是已檗之兄格尙厠朝籍[…]”/朝鮮王朝實錄47권, (1801년), 374면, :“正言李毅采疏略曰憶彼李檗者最是邪黨中巨魁諸賊之挌狼籍無餘以其罪塊誅之先加雖李家煥輩之同律而李格以邪魁之同氣尙在宿위之列[…]邪魁李檗之兄李格宜先施放逐之典[…]”
8)
慶州李氏 世譜(菊堂公派) 戊申譜(1848년) 제5권, 丙編
9)
二儀雖不改,,,庶物無偏頗,,,貴達安所羨,,,賢豪氣相投,,,令德勉早修,,,慷慨常見面. 1776년 정약용이 14세에 결혼한 후 이듬해 봄, 15세 때 23세의 이벽성조께 지어 드린 시. 與猶堂全書 1권, 詩文集, 12면, 贈李檗 字 德操. 1985. 驪江出版社. “어려서부터 덕을 닦는데 힘Tm셨다”는 말에는, 술과 여성을 가까이하지 않음을 전제하는 뜻이 있다. “혹 友人이 來往談笑하면 酒를 禁하게 하고, 天地之說을 묵묵히 시작하여 장시간 지속하였다” 정학술의 [니벽전] 19면, 1996.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연구원
10)
위의 동 정학술의 [니벽전] 19면, 1996.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연구원
11)
이벽선생 묘 발굴 및 이장화보특집 천진암 통권 제15호, 천진암 신장성당 변기영 신부 발행,1979. 7. 31. 천진암성지 자료집 제5권 104면.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소 변기영 신부 발행,1979. 7. 31.
12)
정학술의 [니벽전],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자료집 제3권 17면, 1996.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
13)
Tieng Jean, dit iak-iong, dit que la religion était connue en Corée près de 200 an savant les conférences de Ni Pieki.-
14)
In illo tempore, nonnulli Doctores Coreani secesserant in solitudinem, ut studiis philosocis vacarent: inter eos eminebant Ni-T다-Tso, cognominatus Pi다-i(id est obstinatus), Kuen-Tsiel-Sin-i, et duo fratres Tieng(Tieng-Jak-Tsien et Tieng -Jak-Jong). Postquam varias quaestiones de natura humana, de coelo, de mundo examinassent, inceperunt persecutari libros christianos. Porro doctrinam de providentia, de anima, de visrtutibus et vitiis adeo pulchram judicavere ut statim suos mores divinis praeceptis conformare decreverint(1770). Most Rev. Eduardus, COMPENDIUM HISTORIAE ECCLESISTICAE, Pullo-Pinang, 1885. supplementum 136면
15)
[,,,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吟]. 與猶堂全書 1권, 詩文集, 199면, 端午日陪二兄游天眞庵,初四日宿寺. 1985. 驪江出版社. * 讀書는 讀經과는 달리, 여러 책을 연구하는 것을 말하며, 讀書處는 오늘의 연구소와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苑公은 莊子가 말하는 동해바다에 해일까지 일으키는 颱風처럼, 갑자기 회오리바람같이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놓고나서 갑자기 사라지는 인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In illo tempore, nonnulli Doctores Coreani secesserant in solitudinem, ut studiis philosocis vacarent: inter eos eminebant Ni-T다-Tso, cognominatus Pi다-i(id est obstinatus), Kuen-Tsiel-Sin-i, et duo fratres Tieng(Tieng-Jak-Tsien et Tieng -Jak-Jong). Postquam varias quaestiones de natura humana, de coelo, de mundo examinassent, inceperunt persecutari libros christianos. Porro doctrinam de providentia, de anima, de visrtutibus et vitiis adeo pulchram judicavere ut statim suos mores divinis praeceptis conformare decreverint(1770). Most Rev. Eduardus, COMPENDIUM HISTORIAE ECCLESISTICAE, Pullo-Pinang, 1885. supplementum 136면
15)
[,,,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吟]. 與猶堂全書 1권, 詩文集, 199면, 端午日陪二兄游天眞庵,初四日宿寺. 1985. 驪江出版社. * 讀書는 讀經과는 달리, 여러 책을 연구하는 것을 말하며, 讀書處는 오늘의 연구소와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苑公은 莊子가 말하는 동해바다에 해일까지 일으키는 颱風처럼, 갑자기 회오리바람같이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놓고나서 갑자기 사라지는 인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벽선생 묘 발굴 및 이장화보특집 천진암 통권 제15호, 천진암 신장성당 변기영 신부 발행,1979. 7. 31. 천진암성지 자료집 제5권 104면.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소 변기영 신부 발행,1979. 7. 31.
12)
정학술의 [니벽전],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자료집 제3권 17면, 1996.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
13)
Tieng Jean, dit iak-iong, dit que la religion était connue en Corée près de 200 an savant les conférences de Ni Pieki.-
14)
In illo tempore, nonnulli Doctores Coreani secesserant in solitudinem, ut studiis philosocis vacarent: inter eos eminebant Ni-T다-Tso, cognominatus Pi다-i(id est obstinatus), Kuen-Tsiel-Sin-i, et duo fratres Tieng(Tieng-Jak-Tsien et Tieng -Jak-Jong). Postquam varias quaestiones de natura humana, de coelo, de mundo examinassent, inceperunt persecutari libros christianos. Porro doctrinam de providentia, de anima, de visrtutibus et vitiis adeo pulchram judicavere ut statim suos mores divinis praeceptis conformare decreverint(1770). Most Rev. Eduardus, COMPENDIUM HISTORIAE ECCLESISTICAE, Pullo-Pinang, 1885. supplementum 1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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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吟]. 與猶堂全書 1권, 詩文集, 199면, 端午日陪二兄游天眞庵,初四日宿寺. 1985. 驪江出版社. * 讀書는 讀經과는 달리, 여러 책을 연구하는 것을 말하며, 讀書處는 오늘의 연구소와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苑公은 莊子가 말하는 동해바다에 해일까지 일으키는 颱風처럼, 갑자기 회오리바람같이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놓고나서 갑자기 사라지는 인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In illo tempore, nonnulli Doctores Coreani secesserant in solitudinem, ut studiis philosocis vacarent: inter eos eminebant Ni-T다-Tso, cognominatus Pi다-i(id est obstinatus), Kuen-Tsiel-Sin-i, et duo fratres Tieng(Tieng-Jak-Tsien et Tieng -Jak-Jong). Postquam varias quaestiones de natura humana, de coelo, de mundo examinassent, inceperunt persecutari libros christianos. Porro doctrinam de providentia, de anima, de visrtutibus et vitiis adeo pulchram judicavere ut statim suos mores divinis praeceptis conformare decreverint(1770). Most Rev. Eduardus, COMPENDIUM HISTORIAE ECCLESISTICAE, Pullo-Pinang, 1885. supplementum 1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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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吟]. 與猶堂全書 1권, 詩文集, 199면, 端午日陪二兄游天眞庵,初四日宿寺. 1985. 驪江出版社. * 讀書는 讀經과는 달리, 여러 책을 연구하는 것을 말하며, 讀書處는 오늘의 연구소와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苑公은 莊子가 말하는 동해바다에 해일까지 일으키는 颱風처럼, 갑자기 회오리바람같이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놓고나서 갑자기 사라지는 인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위의 동 정학술의 [니벽전] 19면, 1996.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연구원
11)
이벽선생 묘 발굴 및 이장화보특집 천진암 통권 제15호, 천진암 신장성당 변기영 신부 발행,1979. 7. 31. 천진암성지 자료집 제5권 104면.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소 변기영 신부 발행,1979.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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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술의 [니벽전],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자료집 제3권 17면, 1996.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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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eng Jean, dit iak-iong, dit que la religion était connue en Corée près de 200 an savant les conférences de Ni Pie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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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illo tempore, nonnulli Doctores Coreani secesserant in solitudinem, ut studiis philosocis vacarent: inter eos eminebant Ni-T다-Tso, cognominatus Pi다-i(id est obstinatus), Kuen-Tsiel-Sin-i, et duo fratres Tieng(Tieng-Jak-Tsien et Tieng -Jak-Jong). Postquam varias quaestiones de natura humana, de coelo, de mundo examinassent, inceperunt persecutari libros christianos. Porro doctrinam de providentia, de anima, de visrtutibus et vitiis adeo pulchram judicavere ut statim suos mores divinis praeceptis conformare decreverint(1770). Most Rev. Eduardus, COMPENDIUM HISTORIAE ECCLESISTICAE, Pullo-Pinang, 1885. supplementum 1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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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illo tempore, nonnulli Doctores Coreani secesserant in solitudinem, ut studiis philosocis vacarent: inter eos eminebant Ni-T다-Tso, cognominatus Pi다-i(id est obstinatus), Kuen-Tsiel-Sin-i, et duo fratres Tieng(Tieng-Jak-Tsien et Tieng -Jak-Jong). Postquam varias quaestiones de natura humana, de coelo, de mundo examinassent, inceperunt persecutari libros christianos. Porro doctrinam de providentia, de anima, de visrtutibus et vitiis adeo pulchram judicavere ut statim suos mores divinis praeceptis conformare decreverint(1770). Most Rev. Eduardus, COMPENDIUM HISTORIAE ECCLESISTICAE, Pullo-Pinang, 1885. supplementum 136면
15)
[,,,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吟]. 與猶堂全書 1권, 詩文集, 199면, 端午日陪二兄游天眞庵,初四日宿寺. 1985. 驪江出版社. * 讀書는 讀經과는 달리, 여러 책을 연구하는 것을 말하며, 讀書處는 오늘의 연구소와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苑公은 莊子가 말하는 동해바다에 해일까지 일으키는 颱風처럼, 갑자기 회오리바람같이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놓고나서 갑자기 사라지는 인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벽선생 묘 발굴 및 이장화보특집 천진암 통권 제15호, 천진암 신장성당 변기영 신부 발행,1979. 7. 31. 천진암성지 자료집 제5권 104면.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소 변기영 신부 발행,1979. 7. 31.
12)
정학술의 [니벽전],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자료집 제3권 17면, 1996.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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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eng Jean, dit iak-iong, dit que la religion était connue en Corée près de 200 an savant les conférences de Ni Pieki.-
14)
In illo tempore, nonnulli Doctores Coreani secesserant in solitudinem, ut studiis philosocis vacarent: inter eos eminebant Ni-T다-Tso, cognominatus Pi다-i(id est obstinatus), Kuen-Tsiel-Sin-i, et duo fratres Tieng(Tieng-Jak-Tsien et Tieng -Jak-Jong). Postquam varias quaestiones de natura humana, de coelo, de mundo examinassent, inceperunt persecutari libros christianos. Porro doctrinam de providentia, de anima, de visrtutibus et vitiis adeo pulchram judicavere ut statim suos mores divinis praeceptis conformare decreverint(1770). Most Rev. Eduardus, COMPENDIUM HISTORIAE ECCLESISTICAE, Pullo-Pinang, 1885. supplementum 1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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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吟]. 與猶堂全書 1권, 詩文集, 199면, 端午日陪二兄游天眞庵,初四日宿寺. 1985. 驪江出版社. * 讀書는 讀經과는 달리, 여러 책을 연구하는 것을 말하며, 讀書處는 오늘의 연구소와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苑公은 莊子가 말하는 동해바다에 해일까지 일으키는 颱風처럼, 갑자기 회오리바람같이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놓고나서 갑자기 사라지는 인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In illo tempore, nonnulli Doctores Coreani secesserant in solitudinem, ut studiis philosocis vacarent: inter eos eminebant Ni-T다-Tso, cognominatus Pi다-i(id est obstinatus), Kuen-Tsiel-Sin-i, et duo fratres Tieng(Tieng-Jak-Tsien et Tieng -Jak-Jong). Postquam varias quaestiones de natura humana, de coelo, de mundo examinassent, inceperunt persecutari libros christianos. Porro doctrinam de providentia, de anima, de visrtutibus et vitiis adeo pulchram judicavere ut statim suos mores divinis praeceptis conformare decreverint(1770). Most Rev. Eduardus, COMPENDIUM HISTORIAE ECCLESISTICAE, Pullo-Pinang, 1885. supplementum 136면
15)
[,,,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吟]. 與猶堂全書 1권, 詩文集, 199면, 端午日陪二兄游天眞庵,初四日宿寺. 1985. 驪江出版社. * 讀書는 讀經과는 달리, 여러 책을 연구하는 것을 말하며, 讀書處는 오늘의 연구소와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苑公은 莊子가 말하는 동해바다에 해일까지 일으키는 颱風처럼, 갑자기 회오리바람같이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놓고나서 갑자기 사라지는 인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16)
[,,,石徑細如線,,,昔我童時遊,,,豪士昔講讀,,,禪房無處舊人求,,,前躅凄迷不可求,,,粥鼓斜陽念舊游,,,] 同 與猶堂全書 1권, 詩文集, 503면, 天眞消搖集. * 童時는 10세이하를 말하며, 11세부터는 少年이라 하고, 장가를 들기 시작합니다. 문도공은 15세에 장가를 들었습니다
17)
[,,,嘗從李檗,,,游聞曆數之學 究幾何原本 剖其精奧遂 聞新敎之說 欣然以悅然 不以身從事庚戌夏,,,] 同 與猶堂全書 2권, 詩文集, 622면, 先仲氏墓誌銘.
[,,,嘗從李檗,,,游聞曆數之學 究幾何原本 剖其精奧遂 聞新敎之說 欣然以悅然 不以身從事庚戌夏,,,] 同 與猶堂全書 2권, 詩文集, 622면, 先仲氏墓誌銘.
18)
e annèe du fameux Kanghi, un autre ambassadeur Corèen nommé Y eut une entrevue avec les Missres. de Pekin et reçut d'eux des livres Chretinne qu‘il emporta en Corée. Un nommé Koang, qui reçut le surnom de Jean, ayant lu ces livres, eut le bonneur de sentir et de gouter les verités qu’ils renfermaient. Il embrassa la religion Chretie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élytes il envoya en 1783 à Peking un autre délégué égalemant nommé Y,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Y s'adressa aux Missres. frainç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é, sous le nom de Pierre[…]">
<Extrait d'une lettre de Mr Maubant miss. Ap. en Corée à Mr Langlois Superieur du Seminaire des Missions Etrangères Yangtchi 3 Xbre 1838>
19)
니벽전, 20면. 한국천주교회창립사자료집 제3권. 1996.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
20)
니벽전, 20면. 한국천주교회창립사자료집 제3권. 1996.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
20)
<Extrait d'une lettre de Mr Maubant miss. Ap. en Corée à Mr Langlois Superieur du Seminaire des Missions Etrangères Yangtchi 3 Xbre 1838>
19)
니벽전, 20면. 한국천주교회창립사자료집 제3권. 1996.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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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벽전, 20면. 한국천주교회창립사자료집 제3권. 1996.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
20)
[,,,plusieres annees,,,infructuosese,,,]
21)
[,,,李承薰 李檗大奇之 檗曰, 北京有天主堂 天主堂有西洋西士傳敎者, 求信經一部, 幷請領洗,,,必勿空還,,,]黃嗣永 帛書.
22)
There was a young scion of a noble family,,,Piek-i , he was of great stature,,,. For thirteen years he pondered over them, longing for further enlightenment on the subject of which they treated. At last, in 1783, the father of one of his friends,,,, was nominated third ambassador to Peking,,,. Joseph H. Longford, The story of Korea. Unwin(London), 1911, 245면
23)
啼樹黃鸝逆客船,水邊村落始朝煙,春深兩岸看紅雨,風靜中流俯鏡天,蘇軾才高談水月,李膺名重若神仙,深知拙劣絡無賴,欲把殘經報昔賢.與猶堂全書 1권, 詩文集, 31면, 同友人 李德操 檗 乘舟入京. 四月十五日 ,1985. 驪江出版社.
24)
, :"諸君平日常斥佛而, 今束手於此, 則必有別般文字, 可以動人者而然也, 是故前書之請有以也, 今聞德操抱多少書而進去, 今者過此不見, 未知其故也[…]" 安鼎福, 順菴全集, 1권 民族文化推進會, 1996년, 125面
25)
彼西學五六人擯以夷狄揮之門墻之外云云.李晩采 편찬, 闢衛編 三卷, 乙巳秋曹摘發 107면,悅話堂, 1971.
26)
Le père de Ni Pieki homme naturellement vif et emporté qui d'ailleurs n'avait jamais voulu se mêler à la Religion fit de son côté les plus grands efforts pour arracher du cœur de son fils les sentiments religieux qu'il y voyait profondément imprimés, et ne réussissant pas dans ses projets il en vint jusqu'à se lier le cou pour se donner la mort. Pieki ne pouvait être insensible à de pareilles scènes. Il n'y tenait plus et toutefois ne s'était pas rendu. Un chrétien, indigne de ce nom, vint près de lui pour tâcher d'achever l'ébranlement où il semblait se trouver. Il employa toutes les ressources possibles et usa de toutes les ruses imaginables pour réussir à le faire apostasier.
Pieki fatigué, abasourdi de tant de vexations n'apostasia pas ouvertement, mais il usa de paroles de détours pour écarter tous les malheurs qu'il avait devant les yeux. Son cœur avait failli. Hélas! Depuis ce temps on l'empécha de mettre les pieds dehors. La foi qu'il n'avait pas perdu livrait dans son cœur des assauts continuels à ses affections naturelles.
D'une part, il voyait son Dieu, de l'autre, c'était son père. Comment renier son Dieu? Comment faire périr son père? Ces assauts continuels le jettèrent dans un état que la plume ne peut décrire. Il devint morne, silencieux, mélancholique. Jour et nuit ses pleurs ne discontinuaient plus, ses gémissements se faisaient entendre d'une heure en heure. Il n'ôtait plus ses habits et le sommeil fuyait loin de sa paupière. Il mangeait encore quelquefois, mais tout appétit étant perdu, c'était sans goût et sans profit pour le corps. Cet état violent ne pouvait durer et par avance on entrevoyait que la nature avait malheureusement pris le dessus. Peu à peu les remords, les agitations de la conscience se calmèrent, les derniers efforts de la grâce étaient à peine sentis. Il se remit en son état ordinaire de santé, et on prétend même que le désir des dignités vint à renaître chez lui. Quoiqu'il en soit il n'eut pas le temps de rien essayer.
Au printemps de l'année 1786(Piengo) il fut pris de la peste courante (le Jo ping des Chinois) et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26)
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Le père de Ni Pieki homme naturellement vif et emporté qui d'ailleurs n'avait jamais voulu se mêler à la Religion fit de son côté les plus grands efforts pour arracher du cœur de son fils les sentiments religieux qu'il y voyait profondément imprimés, et ne réussissant pas dans ses projets il en vint jusqu'à se lier le cou pour se donner la mort. Pieki ne pouvait être insensible à de pareilles scènes. Il n'y tenait plus et toutefois ne s'était pas rendu. Un chrétien, indigne de ce nom, vint près de lui pour tâcher d'achever l'ébranlement où il semblait se trouver. Il employa toutes les ressources possibles et usa de toutes les ruses imaginables pour réussir à le faire apostasier.
Pieki fatigué, abasourdi de tant de vexations n'apostasia pas ouvertement, mais il usa de paroles de détours pour écarter tous les malheurs qu'il avait devant les yeux. Son cœur avait failli. Hélas! Depuis ce temps on l'empécha de mettre les pieds dehors. La foi qu'il n'avait pas perdu livrait dans son cœur des assauts continuels à ses affections naturelles.
D'une part, il voyait son Dieu, de l'autre, c'était son père. Comment renier son Dieu? Comment faire périr son père? Ces assauts continuels le jettèrent dans un état que la plume ne peut décrire. Il devint morne, silencieux, mélancholique. Jour et nuit ses pleurs ne discontinuaient plus, ses gémissements se faisaient entendre d'une heure en heure. Il n'ôtait plus ses habits et le sommeil fuyait loin de sa paupière. Il mangeait encore quelquefois, mais tout appétit étant perdu, c'était sans goût et sans profit pour le corps. Cet état violent ne pouvait durer et par avance on entrevoyait que la nature avait malheureusement pris le dessus. Peu à peu les remords, les agitations de la conscience se calmèrent, les derniers efforts de la grâce étaient à peine sentis. Il se remit en son état ordinaire de santé, et on prétend même que le désir des dignités vint à renaître chez lui. Quoiqu'il en soit il n'eut pas le temps de rien essayer.
Au printemps de l'année 1786(Piengo) il fut pris de la peste courante (le Jo ping des Chinois) et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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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 :"諸君平日常斥佛而, 今束手於此, 則必有別般文字, 可以動人者而然也, 是故前書之請有以也, 今聞德操抱多少書而進去, 今者過此不見, 未知其故也[…]" 安鼎福, 順菴全集, 1권 民族文化推進會, 1996년, 125面
25)
彼西學五六人擯以夷狄揮之門墻之外云云.李晩采 편찬, 闢衛編 三卷, 乙巳秋曹摘發 107면,悅話堂, 1971.
26)
Le père de Ni Pieki homme naturellement vif et emporté qui d'ailleurs n'avait jamais voulu se mêler à la Religion fit de son côté les plus grands efforts pour arracher du cœur de son fils les sentiments religieux qu'il y voyait profondément imprimés, et ne réussissant pas dans ses projets il en vint jusqu'à se lier le cou pour se donner la mort. Pieki ne pouvait être insensible à de pareilles scènes. Il n'y tenait plus et toutefois ne s'était pas rendu. Un chrétien, indigne de ce nom, vint près de lui pour tâcher d'achever l'ébranlement où il semblait se trouver. Il employa toutes les ressources possibles et usa de toutes les ruses imaginables pour réussir à le faire apostasier.
Pieki fatigué, abasourdi de tant de vexations n'apostasia pas ouvertement, mais il usa de paroles de détours pour écarter tous les malheurs qu'il avait devant les yeux. Son cœur avait failli. Hélas! Depuis ce temps on l'empécha de mettre les pieds dehors. La foi qu'il n'avait pas perdu livrait dans son cœur des assauts continuels à ses affections naturelles.
D'une part, il voyait son Dieu, de l'autre, c'était son père. Comment renier son Dieu? Comment faire périr son père? Ces assauts continuels le jettèrent dans un état que la plume ne peut décrire. Il devint morne, silencieux, mélancholique. Jour et nuit ses pleurs ne discontinuaient plus, ses gémissements se faisaient entendre d'une heure en heure. Il n'ôtait plus ses habits et le sommeil fuyait loin de sa paupière. Il mangeait encore quelquefois, mais tout appétit étant perdu, c'était sans goût et sans profit pour le corps. Cet état violent ne pouvait durer et par avance on entrevoyait que la nature avait malheureusement pris le dessus. Peu à peu les remords, les agitations de la conscience se calmèrent, les derniers efforts de la grâce étaient à peine sentis. Il se remit en son état ordinaire de santé, et on prétend même que le désir des dignités vint à renaître chez lui. Quoiqu'il en soit il n'eut pas le temps de rien essayer.
Au printemps de l'année 1786(Piengo) il fut pris de la peste courante (le Jo ping des Chinois) et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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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Le père de Ni Pieki homme naturellement vif et emporté qui d'ailleurs n'avait jamais voulu se mêler à la Religion fit de son côté les plus grands efforts pour arracher du cœur de son fils les sentiments religieux qu'il y voyait profondément imprimés, et ne réussissant pas dans ses projets il en vint jusqu'à se lier le cou pour se donner la mort. Pieki ne pouvait être insensible à de pareilles scènes. Il n'y tenait plus et toutefois ne s'était pas rendu. Un chrétien, indigne de ce nom, vint près de lui pour tâcher d'achever l'ébranlement où il semblait se trouver. Il employa toutes les ressources possibles et usa de toutes les ruses imaginables pour réussir à le faire apostasier.
Pieki fatigué, abasourdi de tant de vexations n'apostasia pas ouvertement, mais il usa de paroles de détours pour écarter tous les malheurs qu'il avait devant les yeux. Son cœur avait failli. Hélas! Depuis ce temps on l'empécha de mettre les pieds dehors. La foi qu'il n'avait pas perdu livrait dans son cœur des assauts continuels à ses affections naturelles.
D'une part, il voyait son Dieu, de l'autre, c'était son père. Comment renier son Dieu? Comment faire périr son père? Ces assauts continuels le jettèrent dans un état que la plume ne peut décrire. Il devint morne, silencieux, mélancholique. Jour et nuit ses pleurs ne discontinuaient plus, ses gémissements se faisaient entendre d'une heure en heure. Il n'ôtait plus ses habits et le sommeil fuyait loin de sa paupière. Il mangeait encore quelquefois, mais tout appétit étant perdu, c'était sans goût et sans profit pour le corps. Cet état violent ne pouvait durer et par avance on entrevoyait que la nature avait malheureusement pris le dessus. Peu à peu les remords, les agitations de la conscience se calmèrent, les derniers efforts de la grâce étaient à peine sentis. Il se remit en son état ordinaire de santé, et on prétend même que le désir des dignités vint à renaître chez lui. Quoiqu'il en soit il n'eut pas le temps de rien essayer.
Au printemps de l'année 1786(Piengo) il fut pris de la peste courante (le Jo ping des Chinois) et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26)
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李承薰 李檗大奇之 檗曰, 北京有天主堂 天主堂有西洋西士傳敎者, 求信經一部, 幷請領洗,,,必勿空還,,,]黃嗣永 帛書.
22)
There was a young scion of a noble family,,,Piek-i , he was of great stature,,,. For thirteen years he pondered over them, longing for further enlightenment on the subject of which they treated. At last, in 1783, the father of one of his friends,,,, was nominated third ambassador to Peking,,,. Joseph H. Longford, The story of Korea. Unwin(London), 1911, 245면
23)
啼樹黃鸝逆客船,水邊村落始朝煙,春深兩岸看紅雨,風靜中流俯鏡天,蘇軾才高談水月,李膺名重若神仙,深知拙劣絡無賴,欲把殘經報昔賢.與猶堂全書 1권, 詩文集, 31면, 同友人 李德操 檗 乘舟入京. 四月十五日 ,1985. 驪江出版社.
24)
, :"諸君平日常斥佛而, 今束手於此, 則必有別般文字, 可以動人者而然也, 是故前書之請有以也, 今聞德操抱多少書而進去, 今者過此不見, 未知其故也[…]" 安鼎福, 順菴全集, 1권 民族文化推進會, 1996년, 125面
25)
彼西學五六人擯以夷狄揮之門墻之外云云.李晩采 편찬, 闢衛編 三卷, 乙巳秋曹摘發 107면,悅話堂, 1971.
26)
Le père de Ni Pieki homme naturellement vif et emporté qui d'ailleurs n'avait jamais voulu se mêler à la Religion fit de son côté les plus grands efforts pour arracher du cœur de son fils les sentiments religieux qu'il y voyait profondément imprimés, et ne réussissant pas dans ses projets il en vint jusqu'à se lier le cou pour se donner la mort. Pieki ne pouvait être insensible à de pareilles scènes. Il n'y tenait plus et toutefois ne s'était pas rendu. Un chrétien, indigne de ce nom, vint près de lui pour tâcher d'achever l'ébranlement où il semblait se trouver. Il employa toutes les ressources possibles et usa de toutes les ruses imaginables pour réussir à le faire apostasier.
Pieki fatigué, abasourdi de tant de vexations n'apostasia pas ouvertement, mais il usa de paroles de détours pour écarter tous les malheurs qu'il avait devant les yeux. Son cœur avait failli. Hélas! Depuis ce temps on l'empécha de mettre les pieds dehors. La foi qu'il n'avait pas perdu livrait dans son cœur des assauts continuels à ses affections naturelles.
D'une part, il voyait son Dieu, de l'autre, c'était son père. Comment renier son Dieu? Comment faire périr son père? Ces assauts continuels le jettèrent dans un état que la plume ne peut décrire. Il devint morne, silencieux, mélancholique. Jour et nuit ses pleurs ne discontinuaient plus, ses gémissements se faisaient entendre d'une heure en heure. Il n'ôtait plus ses habits et le sommeil fuyait loin de sa paupière. Il mangeait encore quelquefois, mais tout appétit étant perdu, c'était sans goût et sans profit pour le corps. Cet état violent ne pouvait durer et par avance on entrevoyait que la nature avait malheureusement pris le dessus. Peu à peu les remords, les agitations de la conscience se calmèrent, les derniers efforts de la grâce étaient à peine sentis. Il se remit en son état ordinaire de santé, et on prétend même que le désir des dignités vint à renaître chez lui. Quoiqu'il en soit il n'eut pas le temps de rien essayer.
Au printemps de l'année 1786(Piengo) il fut pris de la peste courante (le Jo ping des Chinois) et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26)
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Le père de Ni Pieki homme naturellement vif et emporté qui d'ailleurs n'avait jamais voulu se mêler à la Religion fit de son côté les plus grands efforts pour arracher du cœur de son fils les sentiments religieux qu'il y voyait profondément imprimés, et ne réussissant pas dans ses projets il en vint jusqu'à se lier le cou pour se donner la mort. Pieki ne pouvait être insensible à de pareilles scènes. Il n'y tenait plus et toutefois ne s'était pas rendu. Un chrétien, indigne de ce nom, vint près de lui pour tâcher d'achever l'ébranlement où il semblait se trouver. Il employa toutes les ressources possibles et usa de toutes les ruses imaginables pour réussir à le faire apostasier.
Pieki fatigué, abasourdi de tant de vexations n'apostasia pas ouvertement, mais il usa de paroles de détours pour écarter tous les malheurs qu'il avait devant les yeux. Son cœur avait failli. Hélas! Depuis ce temps on l'empécha de mettre les pieds dehors. La foi qu'il n'avait pas perdu livrait dans son cœur des assauts continuels à ses affections naturelles.
D'une part, il voyait son Dieu, de l'autre, c'était son père. Comment renier son Dieu? Comment faire périr son père? Ces assauts continuels le jettèrent dans un état que la plume ne peut décrire. Il devint morne, silencieux, mélancholique. Jour et nuit ses pleurs ne discontinuaient plus, ses gémissements se faisaient entendre d'une heure en heure. Il n'ôtait plus ses habits et le sommeil fuyait loin de sa paupière. Il mangeait encore quelquefois, mais tout appétit étant perdu, c'était sans goût et sans profit pour le corps. Cet état violent ne pouvait durer et par avance on entrevoyait que la nature avait malheureusement pris le dessus. Peu à peu les remords, les agitations de la conscience se calmèrent, les derniers efforts de la grâce étaient à peine sentis. Il se remit en son état ordinaire de santé, et on prétend même que le désir des dignités vint à renaître chez lui. Quoiqu'il en soit il n'eut pas le temps de rien essayer.
Au printemps de l'année 1786(Piengo) il fut pris de la peste courante (le Jo ping des Chinois) et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26)
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 :"諸君平日常斥佛而, 今束手於此, 則必有別般文字, 可以動人者而然也, 是故前書之請有以也, 今聞德操抱多少書而進去, 今者過此不見, 未知其故也[…]" 安鼎福, 順菴全集, 1권 民族文化推進會, 1996년, 125面
25)
彼西學五六人擯以夷狄揮之門墻之外云云.李晩采 편찬, 闢衛編 三卷, 乙巳秋曹摘發 107면,悅話堂, 1971.
26)
Le père de Ni Pieki homme naturellement vif et emporté qui d'ailleurs n'avait jamais voulu se mêler à la Religion fit de son côté les plus grands efforts pour arracher du cœur de son fils les sentiments religieux qu'il y voyait profondément imprimés, et ne réussissant pas dans ses projets il en vint jusqu'à se lier le cou pour se donner la mort. Pieki ne pouvait être insensible à de pareilles scènes. Il n'y tenait plus et toutefois ne s'était pas rendu. Un chrétien, indigne de ce nom, vint près de lui pour tâcher d'achever l'ébranlement où il semblait se trouver. Il employa toutes les ressources possibles et usa de toutes les ruses imaginables pour réussir à le faire apostasier.
Pieki fatigué, abasourdi de tant de vexations n'apostasia pas ouvertement, mais il usa de paroles de détours pour écarter tous les malheurs qu'il avait devant les yeux. Son cœur avait failli. Hélas! Depuis ce temps on l'empécha de mettre les pieds dehors. La foi qu'il n'avait pas perdu livrait dans son cœur des assauts continuels à ses affections naturelles.
D'une part, il voyait son Dieu, de l'autre, c'était son père. Comment renier son Dieu? Comment faire périr son père? Ces assauts continuels le jettèrent dans un état que la plume ne peut décrire. Il devint morne, silencieux, mélancholique. Jour et nuit ses pleurs ne discontinuaient plus, ses gémissements se faisaient entendre d'une heure en heure. Il n'ôtait plus ses habits et le sommeil fuyait loin de sa paupière. Il mangeait encore quelquefois, mais tout appétit étant perdu, c'était sans goût et sans profit pour le corps. Cet état violent ne pouvait durer et par avance on entrevoyait que la nature avait malheureusement pris le dessus. Peu à peu les remords, les agitations de la conscience se calmèrent, les derniers efforts de la grâce étaient à peine sentis. Il se remit en son état ordinaire de santé, et on prétend même que le désir des dignités vint à renaître chez lui. Quoiqu'il en soit il n'eut pas le temps de rien essayer.
Au printemps de l'année 1786(Piengo) il fut pris de la peste courante (le Jo ping des Chinois) et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26)
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Le père de Ni Pieki homme naturellement vif et emporté qui d'ailleurs n'avait jamais voulu se mêler à la Religion fit de son côté les plus grands efforts pour arracher du cœur de son fils les sentiments religieux qu'il y voyait profondément imprimés, et ne réussissant pas dans ses projets il en vint jusqu'à se lier le cou pour se donner la mort. Pieki ne pouvait être insensible à de pareilles scènes. Il n'y tenait plus et toutefois ne s'était pas rendu. Un chrétien, indigne de ce nom, vint près de lui pour tâcher d'achever l'ébranlement où il semblait se trouver. Il employa toutes les ressources possibles et usa de toutes les ruses imaginables pour réussir à le faire apostasier.
Pieki fatigué, abasourdi de tant de vexations n'apostasia pas ouvertement, mais il usa de paroles de détours pour écarter tous les malheurs qu'il avait devant les yeux. Son cœur avait failli. Hélas! Depuis ce temps on l'empécha de mettre les pieds dehors. La foi qu'il n'avait pas perdu livrait dans son cœur des assauts continuels à ses affections naturelles.
D'une part, il voyait son Dieu, de l'autre, c'était son père. Comment renier son Dieu? Comment faire périr son père? Ces assauts continuels le jettèrent dans un état que la plume ne peut décrire. Il devint morne, silencieux, mélancholique. Jour et nuit ses pleurs ne discontinuaient plus, ses gémissements se faisaient entendre d'une heure en heure. Il n'ôtait plus ses habits et le sommeil fuyait loin de sa paupière. Il mangeait encore quelquefois, mais tout appétit étant perdu, c'était sans goût et sans profit pour le corps. Cet état violent ne pouvait durer et par avance on entrevoyait que la nature avait malheureusement pris le dessus. Peu à peu les remords, les agitations de la conscience se calmèrent, les derniers efforts de la grâce étaient à peine sentis. Il se remit en son état ordinaire de santé, et on prétend même que le désir des dignités vint à renaître chez lui. Quoiqu'il en soit il n'eut pas le temps de rien essayer.
Au printemps de l'année 1786(Piengo) il fut pris de la peste courante (le Jo ping des Chinois) et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p. 519 copies, pp.22.>
26)
이벽 선생이 두문불출하면서 天主密驗記를 지어서 보여드리니, 아버지가 크게 진노하여,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非吾子也)”라고 아니할 말을 큰 소리로 하였다. -니벽전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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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 교황청에 새로운 부서(部=Dicastero=Ministry), 즉,
평신도 성성(聖省,Congregazione per Laici ?)을 신설하신다고, 2015. 10. 22., 오늘 아침에 발표하셨습니다.
Il Papa ha annunciato l’istituzione di un nuovo Dicastero !
Il Papa ha annunciato l’istituzione di un nuovo Dicastero !
Oggi, all’inizio della Congregazione generale pomeridiana del Sinodo, il Santo Padre ha preso la parola e ha fatto il seguente annuncio:
“Ho deciso di instituire un nuovo Dicastero con competenza sui laici, la famiglia e la vita, che sostituirà il Pontificio Consiglio per i laici e il Pontificio Consiglio per la famiglia, e al quale sarà connessa la Pontificia Accademia per la vita. A tale riguardo ho costituito un’apposita commissione che provvederà a redigere un testo che delinei canonicamente le competenze del nuovo Dicastero, e che sarà sottoposto alla discussione del Consiglio di Cardinali,che si terrà nel prossimo mese di dicemb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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