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무스크로 대성당의 천개와 컴퓨터 영상
1986년,대성당 착공 당시 야무스크로의 인구는 불과 2천여명, 주변지역까지합쳐서 겨우 4천여명에 불과하였으나,1990년 聖요한바오로 2세 교황의 방문과 준공식 거행 후, 수도를 당시 150만 인구의 아비쟝에서 야무스크로로 이전하면서, 2011년 현재 30만명이 되었다. 부와니 대통령은 소년시절 천주교로 개종한 후, 프랑스 파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 2회, 장관 1회를 역임하였다.
특히, 국회의원 출마 때, "프랑스 국민 여러분이, 나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주면, 나는 파리의 프랑스 국회에 들어가서,우리나라 코트 디 봐르의 독립운동을 합법적으로 추진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이 나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숲속에서 게릴라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며 외치던 그를, 파리시민들은 2차례나 국회의원에 당선시켰고, 귀국 후, 독립을 완수하였다.불가피하게 절대다수 국민의 지지로 집권을 연속한 부와니 대통령은 거의 1당체재로 통치하면서, 거의 40여년 가까이, 빵 값을 한번도 올리지 않기로 유명하여, 이웃 나라에서 밀입국하는 굶주린 밀입국 인구증가로 골치를 앓았다.
대대로 부유한 집안이었던 부와니 대통령은 천주교 신앙으로 열심한 그의 어머니, 막달렌 여사의 기도와 함께, 수백만평의 사탕수수밭과 커피 밭을 팔아,야무스크로 대성당 건립에 주력하였고, 외채가 많은 나라에서, 2억 달러나 들여가며, 대성당을 건립한다고, 당시의 프랑스와 유롭 언론에서는 거의 매월, 매주 비평과 비난이 계속 극심하였다. 건축회사는 프랑스회사였다. 야무스크로 평화의 성모 대성당이 건축되던 그 당시 전국 인구는 약 850 여만명 중에 천주교신자는 인구의13%에 불과하고, 이슬람과 각종 동물숭배 신앙을 가지고 살던 각양각색의 토착민들이 많았으나, 필자가 아프리카에 가서 원주민들을 만나보며 이야기해보니, 모두가 유롭에서는 만나보기 쉽지 않은, 천사같은 착한 사람들 같았다.
부와니 대통령의 집권과 통치로, Cote d'Ivoire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필자가 1990년,아프리카 초행길에 아비쟝을 갈 때, 한국 내의 박고안 신부님의 제자 임베드로 사장님의 집에 초대받아, 안내와 대접을 잘 받았는데, 그곳 본당신부는 더운 나라라서 벽은 없고 기둥과 지붕만 만드는 성당 건립을 10년째 건축하고 있었으나, 신자들은 숲속에 사는 사람들이라서, 모두 천사들처럼 몸둥이 뿐으로, 필자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며, 나역시 무일푼이어서, 귀국 후에 우리나라 부자 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님 주소를 알려주며, 지원 요청을 해보도록 하여, 김수환 추기경님이 후에(2년 후쯤?), 1만불을 보내주었다고 들었다. 그 시절 8월(1990년?) 초, 아비쟝의 Yago 추기경님이 Dakuri 보좌주교와 함께, 평신도 복장을 하고, 조용히 천진암 성지를 방문, 5위 성현 묘를 참배하고 간 적이 있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코트디 봐르 독립의 아버지 라고 칭하는, Felix Hoophouet Boigny 대통령(1905~1993)이 주도한 대성당 건립은 착공 때부터 완공 때(1986~1990)까지, 유롭 언론의 끈질긴 반대와 비난으로, 그 나라 국내 교회도, 심지어 주교나 신부나 수녀들도, 건축현장을 방문하는 이들이 전혀 없었다.성직자로서는 필자가 최초라는 말을 현장에서 몇번 들을 정도였다.그래서 착공 미사도 못 올린 대성당이 완공되자, 낙성식 미사도 드릴 성직자가 없었으나, 용감하신 聖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유롭 언론들의 비난과 반대를 무릎쓰고,무더위 찜통 기후를 어려워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1990년 9월 10일, 현지을 방문하여, 대성당 축성식 미사를 드리며,유명한 강론 말씀을 교회 안에 남겨주셨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느님의 성전 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다."天主님의 성전(聖殿)은 地上에서 天主님의 표지(標識)다! (Templum Dei est signum Dei super terram !)"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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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은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떻게 되어가고 있고, 또 어떻게 되어가야 하는가? ① 槪括
천진암대성당 건물이 왜 빨리 올라가지 않느냐고 많은 이들이 재촉하며 야단이다. 빨리 보고 싶고, 들어가서 기도하며, 미사드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리라.! 그러나 다른 나라에 이미 건립되었고, 일부는 아직도 진행중인 1,000 여 곳이 넘는, 많은 대성당 건립 과정과 기간에 비하면, 우리나라 천진암대성당 건립은 온갖 어려움과 공격적인 비협조 속에서도 정말 기적적으로, 가장 빨리 진척되고 있는 편이다.
한국천주교회에서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이 될 천진암 대성당 건립의 기초와 골조와 지붕까지만의 공사비는 현재 물가 기준으로 약 1천 500억 내외 추산, 이 때부터 사용 시작 가능 ! 공사기간은 5년 내외 -
근년에 완공된 아프리카 Yamousscro 에 착공 5년만에 완공된 평화의 성모 대성당 건축비는 2억 달러, 미국 로스안젤리스에서 착공 7년만에 최근 완공된 천사의 모후 대성당은 2억 3천만달러,착공 5년만에 1999년 완공된 소련의 모스크바 구세주 대성당은 황금으로 내부 천정과 외부 돔 지붕을 입히느라 7억5천만 달러(?) 이상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예술적 조각품들과 1톤 이상의 황금으로 내외를 입히는 등, 최상의 예술로 금은 寶石物, 등으로 천주께 드리는 정성을 미루고 피하면서, 좀 검소하고 단순하게 하면, 3천평 내외의 대성당 실제 건축 완공에는 대개가 2억 달러 미만 소요 됩니다 ! 우리 모두 기도하며 한 번 해봅시다!
매우 장기간 지속된 한 두 곳의 예를 들면,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대성당은 터닦기에 400 여년(930년 착수~1,330년 완료), 건축에 600 여년(1,330년 착공~1,925년 낙성), 약 1,000년 넘게 걸렸읍니다. 로마의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은 354년 완공된 첫 대성당이 1000 여년간 사용되다가 붕괴 위험이 계속되어, 1450년 경 설계도 작성에 손을 대면서, 중앙부분부터 일부 철거와 착공을 시작, 1506년 두번 째로 현재의 새 대성당이 정식 착공된 후, 330 여년 걸렸으나, 아직 미완성이고, 독일 꾈른대성당은 1160년 경 착공된 후, 지붕 없이 400 여년, 지붕 하고나서 400 여년, 약 800 여년째 계속 사용하면서 지금도 공사 중에 있읍니다.
수 백년씩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속의 국가 정권들은 수없이 바뀌어 왔고,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사상과 예술도 변하여 왔으며, 신자들의 신심과 열심도, 더웠다 식었다, 하며 달라졌지만, 천주님 공경하는 신앙심은 유구한 세월 속에서도 한결같이 꾸준히 이어오며, 계속 성장하여, 주님의 큰 집, 대성당을 쓰면서 지어가고 있으니, 이러한 정신적인 건축물은 건축과정에서도 나라와 겨레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며, 국가와 민족을 지키고 아끼며 가꾸어 나가는 수호신입니다.
대성당 건립은 인간들의 돈이나 권세나 조직이나 예술이나 행정 기술이나, 관심이나 의욕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하느님의 성전은 성신의 감도로 교회 하느님 백성들의 신앙심에 의해서 시작되고 계속되며, 하느님의 보살피심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또한 대성당 건립은 천주교 신앙 토착화의 결정적인 단계로 보는 것이 역사를 바로보는 史學人들의 인식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지상에서 하느님의 표지다.!(Templum Dei, signum Dei super terram' -
1990년(?), <아프리카 코트 디 봐르의 야무스크로 대성당(3만여명 수용) 낙성식 미사 주례차 현장 방문한 聖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의 강론 내용>
唐나라 시대에 中原과 요동 지역에는 景敎, 또는 十字敎라고도 부르던 그리스도교의 한 교파가 주로 당나라에 전파되어, 약 3천여개의 본당이 있었다고 기록에 나오고 있으나, 지금은 大小 景敎碑 정도 몇개 외에는, 경교의 신앙 자체도 한 때 스쳐가는 바람처럼, 남은 것이 없으니, 대성당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500 여년 동안 이씨조선의 抑佛崇儒 정책으로 불교가 수난을 당할 때, 법주사, 송광사, 해인사, 통도사, 불국사, 같은 5 大 사찰들은, 조선 불교 생존에 있어서뿐 아니라, 나아가, 몽고족 대란이나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현대에 들어오면서 倭賊들의 침탈에 있어서, 국난의 위기에도, 살생을 엄금하는 불교 스님들이 수천명씩僧軍을 자발적으로 결성하여 창을 들고 몽고군과 왜군을 무찔렀으며, 자신들을 억압하는 조선 왕국을 위한 護國佛敎의 위대한 역사적 교과서를 우리에게 남겨주기까지 하였읍니다.
고려 때 몽고족의 침략 대란 중에는 20대 초반의 젊은 김윤후 스님이 용인 處仁城(현재의 남사면 아곡리), 城內가 겨우 3천여평 밖에 안되는 작은 土城을 에워싼 몽고군 부대의 사령관 살례탑 장군을 사살하던 용력이나, 서산대사 사명당 등, 임진란 때의 호국 스님들의 道力이나 덕망 외에도, 전국 불교의 여러 큰 사찰들은 국가수호의 본거지로서 護國佛敎의 큰 힘이 되었읍니다.
대성당의 건립과정은, 그 시작이나 완공 못지 않게, 건축과정도 보다 더 거룩하고 중요한 것이니, 천진암대성당도 건물이 올라가기 전에, 지난 40여년 간, 터전과, 주변 배수로, 하천과 주변 기반 시설, 성역내 신도들 이동공간, 순례자들 신심 예절단의 이동 공간, 상수도와 하수도와 저류지, 조림, 등,,,먼저 하지 않을 수 없는, 얼마나 많은 공사와 행사가 지금까지 그칠 줄 모르고 끝없이 여기에도 있어 왔는지,,,! 이러한 과정들을 돌아보면 실로 땀을 씻는 수건을 손에 들고, 감개무량한 한숨이 저절로 길게 나옵니다.!
그동안 5위 성현들의 묘역 조성과 수녀원, 연구원, 박물관, 외에도, 토목 공사와 건축공사, 순례객 관리, 등에 임시로 불가피한 60 여평씩 되는 일시적인 가건물 시설들, 창고나 사무실만도, 짖고 헐어 옮기고, 다시 짖고, 또 헐어 고치고, 거듭한 것들이 13 동이나 됩니다. 큰 돈이 없으니, 일식(一式)으로 한번에 못하고, 재정상의 큰 부채를 피하며, 조금씩 하나 하나 해나가다 보니 이럴 수 밖에 ! 심지어 40 여년이 되도록 아직도 사제관 없어서, 사제들이 많을 때는 4, 5명씩 되는데, 여기저기 숙직실이나 임시 거처에서 지금도 그냥 살아가면서 일하고 있음니다.
36년 전만 하여도 천주교회 소유의 토지가 단 한평도 없던, 이곳,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그동안 화전하던 토지나 산 자락까지, 조각 땅 270 여 필지를 하나 둘씩 매입하여 모아서, 현재 한 덩어리 36만 여평이 되었고, 거듭된 10 여년간의 무사고 터닦기 공사로, 3 만여평의 대성당 터 수평 대지가 중심부에 2단계로 이루어졌으며, 국내외 최상의 저명한 전문 학자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15 년 여에 걸쳐 입안된 설계도가 확립되고 다듬어져 마침내 완성되고, 지방 행정 기관의 어려운 건축허가와 함께, 교황 聖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몸소 親作하시고 친필 서명하신, [교황강복문]이 하사되어, 마침내 착공되고, 30 톤 통돌에 조각, 완공, 안치되었으며, 또한 100 톤의 통돌 중앙 제대석이 마련되어, 로마 교황대사 대주교와 아시아 및 북남미 대주교들이 함께하는 정초식, 축성식, 등을 거행하였읍니다.
대성당은 순례하는 이들과 관광하는 이들을 거룩하고 올바르게 淨化하며 聖化시키므로써, 국가와 민족의 정신적 聖德 敎育場이 되고, 지주가 되고, 千年 세월을 두고 우리나라를 지키는 하느님의 보우하심과 백성들의 애국심을 키우는 터전이 되며, 종종 계속되는 경제 불경기 속에서도 끊임없는 신앙의 순례로 인하여, 경제적으로도 국내외의 관광객들을 불러 들이므로써, 국가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고, 관광자원 확보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 됩니다. 해외 여러 성지 순례자들은 대성당 참배를 최우선으로 하여, 반드시 빼놓지 않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도 유롭에 가면, 으레 대성당 참배가 여행 주요 순서로 되어 있읍니다.
유롭에서 빈국이던 폴투갈의 빈민촌 Fatima 성지는 2년 전 15,000여명 수용하는 두번째 대성당이 준공되었는데, 매년 5백 여만명 이상의 국내외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이 다녀가면서, 폴투갈은 주변에 고속도로 건설을 비롯한 국제적 기반 편의시설로, 연간 25억 불 내외의 관광수입을 얻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1인당 2주간 체류하며, 평균 5천불내외 사용 추산), 프랑스도 서남부의 피레네 산맥 심산궁곡의 극빈 지역, Lourdes 성지에는 대성당이 4 동째 완공되어, 매년 6 백 여만명의 순례자들과 관광객들로, 프랑스는 연평균 30 억불 이상의 관광 수입을 얻게 되자, 중앙 정부는 그 험한 산맥의 실로 난공사 지형을 무릅쓰고, 가까운 읍내 Tarbre 에까지도 떼제베 고속 기차 철로까지 수백 km를 연결하였고, 성지에서 16 km 이상의 지점 산맥 입구 읍내 Pau에는 작은 국제공항까지 개설하였읍니다. 20 여 차례 유롭 각 성지를 순례하던 필자도, 스페인 Madrid에서 비행기로 파리를 경유하지 않고, 작은 여객기로 30 여분만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Pau 공항에 내려서 Lourdes에 다녀 본 적이 있읍니다.
관광수입은 원자재 구입비나, 과중한 공장 건설비나 가공비, 포장, 선전 광고비, 운반비, 등이 필요없는, 거의 전액 순수익으로, 이태리와 폴투갈, 스페인, 프랑스, 등의 국민들의 최대 수입원입니다. 열강들의 대량살상 무기 제조 밀매 수익처럼, 핵폐기물 처리, 등의 위해잔여물도 없는, 영구적 문화 수익사업입니다. 무력에 의한 수입이 아닌, 문화력에 의한 민족현양 수익사업입니다. 이러한 국익 장기 사업을, 이 시대는 어찌하여 무능하고 못난 시골 신부들 한 두명의 어깨에 얹어놓고, 수수방관하며, 심지어 일부는 훼방이나 일삼으며 최대의 파괴적인 비협조를 아끼지 않고 있는지 !!?
한마디로, 100년 장기 계획의 대성당 건립은 신앙심이나 애국심을 키우는 국민정신 면에서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건전하고 거룩한 수익성이 있는 사업입니다. 천주교회는 비영리단체로서 천진암대성당 건립에서 얻는 모든 수익사업은 국가와 지역 사회가 챙기고 취하는데, 우리 시골에,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대국 사람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는 속담이 있지만, 재주부리는 곰에게도 공마단 주인 대국 양반은 곰에게 먹이와 휴식을 주기라도 하고 있음을, 이 시대 우리 사회는 알고나 있는지?!
역대 교황님들이 공인하고 격찬하는 한국천주교회의 自發的인 創立史 現場, 특히, 선교사들이 오기 전에, 한국인들이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며 자발적으로 세운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의 대성당은 한민족의 정신문화를 세계화시키는, 빛나는 민족정신사업이 아닐 수 없으며. 그동안 그칠 줄 모르고 닥쳐오는, 실로 얼마나 많은 난관들을 교회는 지금까지 극복하며 나왔는가 !
이 시대 자신들과 후손들을 위한 역사적인 기념사업에, 물심양면으로 함께하지는 못할 망정, 사사로운 개인들의 무리한 폭리추구를 위하여 억지 시도나 무경오 시도를 위하여, 욕심과 투기심으로 종종 최대의 비협조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과, 일부 무법자들의 불법까지 계속 끼어들어, 떼를 쓰며 억지를 부리는 서글픈 시대 !!! 無經緯와, 온갖 비난과 비평과 반대와 훼방, 등을, 장애물 경기하듯, 교회는 실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서운 인내를 가지고 계속 허덕이며 이를 거듭 극복하면서, 주님의 집, 하느님의 성전,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건립은, 하느님이 보우하사 꾸준히, 줄기차게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전국 순례자들의 성금으로 이렇게 되어 가고 있읍니다.
'100년 계획' 이란, 99년 다음 100년이라는 수학적인 의미의 100년이 아니니, 100년 계획이라고 하여, 게으름을 피우지ㄷㅗ 않고, 그렇다고 서두르지도 않으며, 누가 박수를 쳐준다고 일하는 실무자들이 우쭐대지도 않고, 손가락질한다고 시무룩해 하지도 말아야 하겠읍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아, 교회는 오늘도 여기 주님의 집 건축 현장을, 우리의 殉敎現場으로 삼고, 우리의 殉敎刑場으로 믿고, 황소 걸음처럼, 뚜벅뚜벅 같은 발걸음으로, 후퇴나 정지나 노선 이탈을 모른 채, 한 걸음씩 내딛고 나아갈 뿐입니다 ! 흐르던 땀이 마르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라도 다할 때까지 바치려는 각오와 결심으로, 전국의 천진회원들은 자자손손히 계속 해 나가고 있읍니다.!
지난 1989년 아프리카 아이보리 코스트의 야무스크로(Yamuscro) 대성당 건립 현장을 며칠간 답사하면서(현재 완공, 聖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祝聖), 필자는 아프리카 구원의 희망과 신앙을 實感하였었읍니다. 인구 4천여명의 작은 시골 면소재지의 허허벌판이었던 야무스크로는 1990년대 초에 당시 인구 150만의 아비쟝 대교구에서 분리 독립되어 바로 교구로 승격되었고, 현재는 대주교 1인과 보좌주교 2명이 상주하는 큰 교구가 되었으며, 아프리카의 유일한 최고의 현대적인 명승지가 되었읍니다.아프리카의 천주교 신앙 토착화의 중심이 되었읍니다.
130 여년 전, 1886년 봄, 서울 명동 대성당(427평, 1천 500여명 수용) 터닦기가 착공될 때, 우리 나라에는 교황청에 보고된 전국 신자들 수가 1만 4천 5백 여명뿐이었고, 사제들은 모두 10명, 주교 1명, 성직자들은 모두가 프랑스 선교사들만 11명 뿐이고, 수녀들은 단 한명도 없던 시절, 서울 장안에는 천주교 신자 수가 불과 250명~300여명에 불과했었는데, 이제 만시지탄이 있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는 적어도 수도권에 대성당 하나쯤은 세워야 한다고 믿습니다.극심한 난관을 극복하며 명동대성당을 건립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에 감사를 드립시다. 명동대성당 건립이 없이, 지나간 100년의 세월을 생각해봅시다.!!
선조들의 殉敎 鮮血도 이를 재촉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할 수 있는 것(기도와 강론)을 함께하여 봅시다. ① - 추후 계속 - Msgr. By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