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州李氏 家門에서 태어난 韓國天主敎會 創立者 曠菴 李檗 聖祖 略傳
韓國天主敎會 創立者 曠菴 李檗 聖祖께서는 1754년 경기도 포천군 內村面 花峴里 新基洞에서, 慶州李氏 李溥萬과 淸州韓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이벽 성조의 가문과 先祖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매우 유명한 救國 忠臣의 집안이니, 우리나라가 元, 明, 淸,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國家가 存亡의 岐路에 처할 때, 國際關係를 담당한 대표적인 學者 출신 忠臣들을 많이 배출한 家門이다. 특히 李檗 聖祖에게 영향을 준 직계 先祖들 중에는, 學文과 思想과 德性과 外交와 治世에 있어, 元, 明, 淸, 3대 강국들의 武力에 맞서서, 국가 민족을 위하여 국왕을 수호한 忠烈의 政治 名臣들이 적지 않다.
高麗 末, 元의 몽고족이 60여년간 高麗를 長期 侵奪할 때의 益齊 李齊賢(1287~1367)과, 壬辰倭亂 7년 전란 때의 知退堂 李廷馨(1549~1607), 丙子胡亂으로 昭顯世子의 인질생활 8년간의 ?菴 李慶相(1603~1647), 등은 국가를 위하여 당시 國王보다 더 유능하였고, 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직계 선조로 모신 이벽 성조께서는 정치, 외교 분야의 선조 학자들의 전통 영향을 모르쇠할 수가 없었고, 사상과 종교적 면에서도 당연히, 다분히, 어느정도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229년부터 반세기 동안 7차에 걸쳐, 元나라가 고려를 침략하여, 거의 57년간이나 고려의 王들이 북경에 인질로 끌려가곤 하였을 때, 익제 이제현의 업적은 엄청나지만, 특히 忠宣王과 함께, 북경에서 [萬卷堂]이라는 書院을 열어, 元나라 北京 학자들과 함께 講學하며, 交分을 두터이 하면서, 人才養成과 國權回復에 힘썼고, 哲學과 思想에 있어서도 高麗에 性理學을 定立하였으며, 충선왕과 함께 머나먼 泗川省 神秘의 名山, 峨眉山에까지 가서, 天地神明께 祖國 高麗의 國權回復을 祈願할 정도로, 宗敎的 性品과 精誠도 갖춘 門下侍中(현 국무총리에 해당)에까지 오른, 익제 이제현은 당시까지만해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장기간 장거리 세계 탐방과 견문을 쌓으며, 국권회복에 희생을 바친 학자 출신 政治家였다.
1593년 말부터 잔인하게 시작된 7년간의 壬辰倭亂 때는, 익제 이제현의 5대손(?)이 되는, 지퇴당 이정형이, 피난 생활의 宣祖 임금을 안전하게 守護하였고, 明나라에까지 파견되어 援兵을 요청하여, 倭敵을 물리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더욱이 이정형은 자신보다 14세 年下의 芝峯 李睡光(1563~1628)과 절친한 선배 정치인으로서, 북경을 왕래하면서, 많은 西洋 書籍들, 특히, 天主實義, 職方外記, 七極 같은 天主敎 서적이 朝鮮에 최초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더욱이, 이수광이 그 후 집필한 [芝峯類說]은 우리나라 實學 胎動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그 배후에는 지퇴당 이정형의 공헌을 무시할 수가 없으니, 韓民族 開化와, 祖國 近代化, 및 社會改革에 큰 업적을 남겼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30여년이 지난 후, 1637년에 滿洲族이 丙子胡亂을 일으켜, 南漢山城이 함락되자, 仁祖 임금의 항복으로, 昭顯世子, 鳳林大君, 등이 볼모로 잡혀 갈 때부터 8년간이나, 묵암 이경상(지퇴당 이정형 친 손자)은 볼모살이의 소현세자를 안전하게 모시고 지켰으며, 1645년 봄 귀국하기 전에는, 북경에 와서 머물며, 세자와 함께 이경상은 당시 南堂 天主敎會 독일인 Adam Schall(中國名, 湯若望) 신부와 소현세자 간의 親分과 友誼를 돈독하게 하였다. 특히, 이경상은, 朝鮮人 수행원 중에 侍從官 3명이 천주교회에 입교하게 하여, 아담 샬 신부한테 洗禮聖事까지 받게 하였다.
이는 1784년 봄 북경에서 李承薰(1756~1801) 進士의 領洗보다 135년이나 앞서는 일이다. 소현세자와 이경상은 귀국할 때, 中國人 천주교 領洗信者 5명도 더 대동하고 함께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소현세자가 몇 달 안되어 毒殺(?)로 急死하자, 중국인 천주교신자 5명은 바로 추방당하여 귀국조치되고,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함께 귀국한 조선인 시종관 천주교 신자 3명은 그 후부터 종적이 묘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벽 성조께서는 바로 묵암 이경상의 직계 6대손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훌륭한 집안에서, 先祖 때부터 내려오는 門中의 많은 國內外 서적들을 접하며, 성장하였다. 또한 이벽 성조의 祖父 李?(1703~1773)도, 武科에 及第하고, 湖南兵馬節度使副摠管의 벼슬을 하였고, 父親 李溥萬(1727~1817)은 死後,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으며, 兄 李格(1748~1812)은 武科에 及第한 후, 別軍職官, 黃海兵馬節度使 副摠管, 左捕將, 등을 하였고, 동생 李晳(1759~1829)역시 武科에 及第한 후, 左捕將, 除南兵使, 등의 벼슬을 하였으며, 李恒福(1556~1618), 李德馨(1561~1613), 등과 같이, 경주이씨 문중에서는 天才的인 머리와 드넓은 學識과 忠孝의 정신이 出衆하고, 愛國心과 氣魄이 넘치는, 豪傑의 體質을 타고난 名人名士들이 많았다.
이러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神童이라 불리던 李檗 聖祖께서는 다섯 살 때(1759) 이미 철이 들어, 사리판단이 어른다웠고, 일곱 살(1761) 때는 經書를 읽고 이해하였으며, 元老 大學者 星湖 李瀷(1681~1763) 선생은 일찌기 10세 미만의 어린 이벽을 보고, ‘이 아이는 장차 반드시 아주 큰 그릇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고 丁學術은, [李檗傳]에서 쓰고 있다. 열다섯 살(1770)을 전후하여, 兵曹判書를 지낸 權巖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당시 양반대가 아들들의 學業慣習대로, 入山修學에 전념하느라, 佛舍나 道場을 찾던 여늬 出家僧들과도 같이, 결혼생활이나 가정생활은 제대로 영위할 겨를이 없었다.
더욱이, 소년 이벽 성조께서는 1770년, 같은 해부터, 경기도 廣州山脈 鶯子山(一名, 鴛鴦山)에 있는 天眞菴 道場에 讀書處를 정하고, 隱居하며, 學業과 修道에 열중하였으니, 天眞菴은 누님 집이 있는 馬峴에서 30여리 내외 밖에 안 되는 비교적 멀지 않은 산속이었다.
누이 慶州李氏(1750~1780)는, 당시 義禁府都事, 화순 군수, 울산군수, 등의 지방 벼슬을 하던 丁載遠(1730~1792)의 長男 丁若鉉(1751~1821)과 결혼하였는데, 당시로서는 名文大家인 경주이씨 가문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羅州丁氏 丁若鉉에게는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마재에 있는 누님 댁, 즉, 丁若鉉의 집에 자주 들리게 되었고, 특히, 정약현의 異腹同生들인, 丁若銓(1756~1816), 丁若鍾(1760~1801), 丁若鏞(1762~1836), 등, 어린 사돈들과 친하였다. 어린 정씨네 소년들이 10여세 전부터, 天眞菴에 놀러가게 되면, 이벽성조께서는 손 아래의 영특한 이 사돈들에게, 天文學과 地理學, 性理學과 醫學, 數學과 曆學, 幾何原本과 天學(天主敎), 등, 서양의 신기하고 새로운 新學問과 天主敎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 줌으로써, 어린 정약용, 정약전의 驚歎과 尊敬과 信望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벽성조께서는 열아홉 살이 될 때(1773), 權相福의 文集을 편찬하면서 [天學考]를 지어, 跋文에 붙였으며, [上天道]라는 글을 지어, 花峴里 부근에 있는 奉先寺 春波臺에 기증하였다고 전한다.
스물다섯 살 때(1779), 星湖 李瀷 선생의 學風을 이으려는 선비들 중에 丁若銓, 李承薰(1756~1801), 權相文(1755~1801) 등과 함께 학문 연구와 토론에 힘썻으며, 이때 이미 李檗성조께서는 天學 道理를 아주 깊이 깨닫고, 믿으며, 실행하고 있었다. 특히, 天學에 관한 서적들은 현고조부 이경상 공이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8년간(1637~1645) 있다가 귀국할 때, Adam Schall신부에게서 받은 것들과, 李睡光(1563~1628), 洪大容(1731~1783), 李?命(1658~1722), 같은 중국 왕래 사신단 편에 輸入된 것들도 있었다.
<以上은 慶州李氏宗報, 제228호, 6면, 2010년 10월 25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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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檗 성조께서는 키가 8척이요, 한 손으로 무쇠 백근을 들 수 있었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뛰어났고, 특히 言辯은 기세 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었다.”고, 훗날 프랑스 선교사, Daveluy 주교(1818~1866)는 그가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한국천주교회 순교사 첫머리에서 기록하고 있다.
1779년 기해년 섣달에는 鑑湖의 楊根 葛山에 사는 저명한 학자 權哲身(1736~1801)이, 서울에서 일백여리나 떨어진 심산궁곡의 한 절간에서, 丁若銓, 金源星, 權相學, 李承薰, 丁若鍾, 李寵億, 丁若鏞, 등과 함께 講學會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벽성조께서는 눈길을 걸어, 권철신이 寓居하던 麗州郡 走魚寺에 밤늦게 도착하였으나, 강학회는 뜻밖에도 鶯子山 너머에서 퇴락해가고 있던, 天眞菴 암자에서 열리고 있음을 듣고, 嚴冬雪寒인데도 그 길로 눈 덮인 앵자산을 넘어, 天眞菴에 이르러 촛불을 밝히고 학자들과 經書를 談論하였다.
여러 날 계속된 강학회에서, 학자들은 이벽 성조의 論證으로 천주교 도리를 대강 깨닫고 믿으며, 아는 바를 즉시 실천하였다. 이때 이벽 성조께서는 聖敎要旨를 下筆하시고, 天主恭敬歌를 지어, 부르게 하셨으며, 丁若鍾은 十誡命歌를 지어 불렀다. 더욱이 七日마다 주일 하루는 天主恭敬에 바쳐야 함도 알았으나,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曜日이 없었고, 또 요일을 아직 몰랐으므로, 陰曆으로 매월 초이레, 열나흘, 스무하루, 스무여드레를. 日曜日 主日로 삼아, 온종일 大齋와 小齋, 休息과 祈禱, 讀經과 潛心으로 지냈다. 젊은 선비들의 이러한 임시 음력 주일 제정 실천은, 1890년대에 와서 고종황제가 요일을 선포하던 때보다 100여년이 앞서는 사회개혁 운동의 하나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1784년 봄까지, 약 15년간에 걸친 天眞菴에서의 讀書와 講學을 통하여, 天學을 天主敎로, 天主學을 天主敎會로, 즉 學問的 知識을 宗敎的 信仰으로 昇華 發展시켰다.
1770년 이벽 성조께서 15세 少年으로 天眞菴에 入山 修道를 시작하였을 때는 10세 미만의 정약용을 비롯한 사돈네 兒童들만이 자주 놀러 왔으나, 약 7년 후, 1777부터는 청년 선비들이 모여들었고, 1779년 전후에는 권철신 같은 저명한 학자들도 참석하는 강학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1783년 늦가을, 조선 신도회 대표로 이승훈 진사을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여, 세례도 받고 오는 일을 성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승훈 진사가 1784년 봄 귀국할 때까지, 약 15년간의 천진암 중심 天學 信仰 叢林은 본거지를 서울 수표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벽성조께서는 조선천주교회를 튼튼히 세우기 위하여, 鑑湖의 楊根 葛山에서 書院을 열어, 많은 젊은 선비들을 가르치고 있는, 당대에 아주 저명한 대학자, 權哲身과 權日身 형제들을 천주교회에 入敎시키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金範禹, 崔昌賢, 崔仁吉, 金宗敎, 등도 바로 入敎시켰다.
李檗 聖祖와 李承薰 進士와 權日身 大學者, 이 3명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주역들은 조선 천주교회 창립에 재산과 목숨과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런데 이 때까지만 해도 별로 큰 방해나 박해를 받지 않고,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入敎者들이 늘어가고, 더욱이, 양반들의 입교자가 중심이 되기 시작하자, 당시 지성인들의 비난과 반대가 시작되었고, 급기야는 천주교를 강력히 반대하는 저명한 인사들과의 토론이나 논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고명한 학자로 평판이 높았던 금대 李家煥이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듣고 “이것은 아주 큰일이다. 저 외국 교리가 이치에 어긋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내가 가서, 이벽을 타일러서,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토론 날짜가 정해져 두 학자의 친구들과 好事家들의 무리가 이 굉장한 토론을 참관하려고 수표동 이벽 성조의 집에 모였다. 사흘동안 계속된 토론회는 마침내, 이가환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같이 말하며, 이가환은 돌아갔고 그때부터 천주교에 관하여 다시는 입을 열어 비평하거나, 상관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두 번째 토론회가 열리게 되었다. 문의현감 伏菴 李基讓과 공개적인 토론을 하였는데, 역시 광암 이벽성조의 大勝으로 막을 내렸고, 그 때부터 서울 장안의 선비들은 술렁거리며, 천주교회를 창립하는 이벽성조께로 쏠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지도층과 조정에서는 더 이상 袖手傍觀하며 방치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1785년, 을사년 이른 봄, 드디어 최초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1년간에 걸쳐 약 500명의 입교 영세자를 낸, 이벽 성조의 수제자들이었던 학자들은, 明禮坊 金範禹 통역관 집에서 집회를 열고 있었다. 교회예절 거행을 위하여 청색도포로 정장하신 이벽 성조께서 안 사랑 벽을 등지고, 좌정하시고, 학자들은 이벽성조 둘레에 무릎을 꿇고, 손에 책을 들고 엄숙한 자세로 모시고 앉아, 강론과 교리해설을 듣고,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1년 전에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되었던 이승훈, 대학자이던 沙右居士 稷菴 權日身, 그 아들 權相文, 丁若鏞과 그 형들인 丁若鍾과 丁若銓, 그 외에 崔昌賢, 崔仁吉, 金宗敎, 池黃, 金範禹, 李寵億 등 한국천주교회창립의 기둥과 같은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이 때 秋曹禁吏들이 갑자기 들어와, 수색을 하고, 聖物과 聖書를 몰수해 가는 동시에, 집주인이며, 中人 계급의 통역관 김범우 선생을 체포하여 가고, 다른 이들은 양반 집안의 자제 신분을 가진 학자들이므로, 그대로 집에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權日身 학자는 몇몇 다른 양반학자들과 함께 秋曹判書 김화진을 찾아가, 김범우와 같은 벌을 받기를 자청하였으나, 추조판서는 이 양반학자들을 잘 달래다시피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김범우 역관만은 계속하여 모진 매를 때려, 감옥에 가두었다가 경상남도 밀양군 丹場面. 丹場里(오늘날의 삼랑진)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양반들을 벌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당시 사회에서 같은 양반들의 문중세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官에서는 양반집 문중마다 宗親會를 열게 하였으며, 天學을 규탄하는 通文이 서울에 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서울 4대문 안과, 문밖, 그리고, 江上 지역과 江下 지역의 여러 대감집들과 識者들에게 이 통문을 돌리는 책임자들이 각각 따로 정해졌을 정도였다. 그 중 경주이씨 문중회가, 당시 사회의 가장 혹심한 반발과 무서운 질투로 인하여 압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고려와 조선 이르는 국권의 중심적 애국 재상들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즉, 사회의 무서운 압력이 경주이씨 문중에, 특히 이벽 성조의 집안에 가해졌다.
그리하여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 공은, 문중회의에 번번이 불려가서, 수치스러운 모욕과 질책을 면하지 못하였다. 아들 이벽 성조의 천학운동을 막든가, 막을 수 없으면, 아예 족보를 빼어버릴 터이니, 어디에 가서나, 경주이씨로 행세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족보에서 삭제되면, 양반에서 常民이 되는 것이고, 벼슬에 있던 다른 아들들까지 하루아침에 脫冠削職에 敗家亡身하는 것이었다.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공은, 가뜩이나 성격이 괄괄하고 쉽게 격분하는 무관기질이었으며, 체면과 위신을 크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사실 당시 한국의 양반들은 거의가 다 그러했다. 이부만공은 아들 이벽 성조를 불러 놓고, 달래고, 야단치고, 위협하고, 갖가지 수단을 다 써 가면서, 天學運動을 하지 말 것과,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잘못을 빌도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평창이씨 집안에서의 이승훈 진사의 사과와, 라주정씨 집안에서의 정약용 등의 사과 소식을 들은지라, 문중에서는,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이벽 성조의 태도에 대하여 한층 더 격분하였다.
서울 시내 양반들의 통문은 사방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규탄 모임과 반대회합이 빈번하였다. 당시 사회가 경주이씨 문중과 이벽성조의 가정에 무서운 압력을 가하므로서, 가정의 박해는 더 더욱 격렬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부만 공은 펄펄 뛰며 발을 굴렸다. 온갖 수단 방법으로도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는 아들의 굳은 마음과 의지를 보고, 마침내 대들보에 밧줄을 걸어, 목을 매달아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부만 공이 목을 매달게 되자, 어머니와 형제들과 친척들과 벗들이 모두 이벽 성조에게 달려들어, 아버지의 목매달은 모습을 가리키며 야단을 쳤다. 특히 그 어머니는 아들 이벽 성조에게, “天學이 아무리 좋은 道라지만, 아버지를 목매달아 죽게 하는 그런 道를 누가 따른단 말이냐? 아버지가 목매달아 죽는데도, 그래도 天學運動을 하러 다니겠다는 말이냐?” 하며 애원과 탄식과 절규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이벽 성조께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사회윤리의 제일로 삼는 때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우선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하여, “그럼 밖에 나가 다니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하였는데, 즉, 집안과 문중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까지, 좀 고요히 있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 바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목을 매달고 있는 이부만 공은 자살기도를 중단하고, 아들이 천학을 하러 다니지 않겠다고 하였음을 문중과 밖의 선비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문중에서는 이를 신용하지 않고, 이부만 공에게 이벽성조 자신이 직접 문중회의에 나와서 자명소를 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벽 성조께서는 아버지에게, “문중에 나가서 天主學을 배척하거나 그만두겠다는 말대신, 오히려 宗親들에게 天主敎를 이해시키고, 경주이씨 문중이 모두가 먼저 천주를 공경해야 함을 알리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대학자 이가환, 이기양, 권철신, 정약용, 이승훈, 등을 설득시킨 이벽 성조의 학식과 논리와 언변으로는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 이부만공은 아들이 천학운동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문중에 이미 성급하게 통고한 후였기 때문에 입장이 난처하였다. 이부만공은 아들의 외출을 금지하고, 문중 어른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들이 병으로 갑자기 앓아 누어서, 문중회의에 나가 자명소를 할 수 없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며, 예나 지금이나 으레 할 수 있는 핑계를 대는 동시에, 아들이 앞으로 天主學을 안하기로 하였으니, 믿어달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문중에서는, ‘이벽 자신이 직접 글로 써서, 천주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도록 하라’고 요구하였다. 아버지가 아들 이벽에게, “천주학을 하러 나가다니지도 않을 것이고, 또 천주학을 하지도 않겠다”고 자신이 붓으로, 직접 써서, 종친회에 보내라고 하자, 이벽 성조께서는,「令得敬神記」라는 글을 지어, 아버지에게 보여 드리니, 이것은, 天主恭敬의 필요성과 방법과 순서를 간략하게 알리는 내용이었다. 아버지 이부만은 이 글을 보고 크게 분노하며, ‘이는 내 자식이 아니라(非吾子 大言’고까지 아버지로서 아니할 말까지 하였다. 할 수 없이 이부만 공은 아들이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위중하며, 이벽이 이미 천주학을 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믿어줄 것을 거듭 부탁하였다.
그러자, 외부에서 몰려오는 선비들은, 더욱 의심하며 격분하였다. 그렇게 건강하고, 그렇게 활달한 광암 이벽이 무슨 병에 거렸길 래, 갑자기 글도 쓸 수 없을 정도로 앓는다는 것은 믿을 수 없으므로, 문중에서 대표를 보내니, 그 대표에게 확약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이부만은 이벽 성조를 후원 별당에 감금하게 하고, 출입문에 빗장을 치고, 집밖에는 새끼줄로 금줄을 매고, 하인들을 시켜 지키게 하고는, 아들 이벽이 天主學을 하다가 天罰을 받아, 熱病(속칭 疫病)에 걸려서 다 죽어가나, 가족들도 전염될까 두려워 출입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때에, 천주교 신자들이 이벽 성조를 만나 뵈오러 찾아와도, 면회가 엄금되었으니, 아버지 이부만은 종들과 집안 젊은이들과 李格, 李晳의 부하들 중 일부를 시켜서, 문전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거절하며 야단을 쳐서 돌려보냈다.
이벽 성조께서는 모든 것이 다되어, 때가 이르렀음을 아시고, 목욕하고, 깨끗한 의복을 갈아입은 다음, 의관을 바르게 한 후, 방안에서, 좌정하여, 바람벽에, “巫峽中峯之勢死入重泉, 銀河列宿之년絲入天國”이라 써붙인 후, 食飮을 전폐하고, 衣冠을 갈아입니 아니하며, 잠을 자지 않고,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셨다.
당시 한국인들의 예의상, 부모가 격노한 경우, 자녀들이 며칠씩 식사를 안하거나 못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天主密驗記, 來世預言記, 등, 3권이 이때 저술되었다는 설이 있고, 혹은 달포간이나 문중의 몇몇 인사들과 함께 몰려온 외부 선비들과 겨루면서, 집안에 감금당하여 있는 동안에 집필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마지막에 가서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고, 고요히 기도에 열중하면서, 천주를 생각하고 명상하다가, 단식 10여일이 지나자, 완전 탈진하여, 그 자리에서 운명하시니, 1785년 음력 6월 14일 밤 12시였다고 丁學術의 李檗傳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문중에는, 당시 한양의 선비들이 천주교로 몰리고 있었으므로, 이벽성조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장차 나라와 사회가 뒤집히게 되고, 경주이씨 문중이 멸문지화를 입는다 하여, 정조와 소현세자의 독살설처럼, 선비들이 이벽성조를 독살하였다는 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1979년 6월 21일 이장 때 발굴한 시신을 검시하면서, 당시 이장위원회의 유해관리 책임자였던 가톨릭의과대학 해부학 주임교수 권흥식박사도 검시하면서, 독살의 가능성을 언급하였었다. 어떻든 이벽성조께서 천주교 신앙 때문에 당시 우리나라 사회의 혹독한 압력으로 집안에서 순교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정이나 문중의 박해라기보다도, 慶州李氏 家門을 猜忌하고 嫉妬하던 당시 사회의 선비들이 주동이 되어, 문중과 가정에 무서운 압력을 가하여, 마침내 이벽 성조께서는 32세로(1754~1785) 세상을 떠났다.
이벽성조께서 운명하셨을 때, 양반대가의 집안이므로 사돈간이던 정약용 선생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만사(輓詞)를 지었다. “신선(神仙) 나라 학(鶴)이 인간세(人間世)에 내려오사, 신성(神聖)한 풍채(風采)를 보이셨네(仙鶴下人間 軒然見風神), 희고 흰 날개와 깃털, 눈같이도 하얗더니, 닭과 오리 떼들 샘내며 골부리고 미워했었네(羽?皎如雪 鷄鶩生嫌嗔), 울음소리 구중천(九重天)을 진동(振動)시키고, 부르짖던 소리는 풍진세상(風塵世上)에 出衆하셨었지(鳴聲動九? ?亮出風塵), 어느덧 가을되어 문득 날아가시니, 애닲아 탄식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乘秋忽飛去 ??空勞人).”
일찍이 조선교구 제5대교구장이었던 다블뤼 안주교는 그의 「조선순교사비망록(朝鮮殉敎史備忘記)」머리말 첫 페이지에서,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회 역사는 이벽의 저 위대한 강학에서 시작하였다”고 기록하면서,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이벽성조의 역할과 위치를 강조하였으며, 정약용도, “이벽이 수령이 되어 천주교회를 전파하였다”고 기록하였고(李檗首先西敎), 김대건 신부도 조선천주교회 창립에 있어 이벽박사(李檗博士)의 역할을 먼저 다루었다. 闢衛編과 朝鮮王朝實錄에서도, “李檗은 朝鮮天主敎會의 始祖라는 것은 萬人이 다같이 알고 있는 바로다”(一世之也共知也) 하였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聖賢, 曠菴 李檗聖祖의 죽음은, 당시 조선 사회 전체가 그 문중과 그 가정에 무서운 압력을 가하므로써 일어난 박해의 결과이므로, 결코, 그 가정과 문중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외부의 선비들 사회가 동원되어,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압력을 가하는 상태에서, 가정도 문중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길로 몰고가던 상항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전 세계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선교사없이 한국천주교회를 세운 이벽성조에 관하여는 현재 諡福諡聖이 추진되고 있고, Paris Institute Catholique de Paris 대학과 臺灣 輔仁大學에서 1977년부터 현재까지 博士學位 논문이 이미 4개 나왔고,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 聖地에 모셔진 墓 앞에는 매일 國內外 많은 천주교 신도들과 사회 인사들의 참배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또한 이벽성조를 기념하는,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건립이 착공되어, 로마 교황 요한바오로2세성하께서는 1993년에 이미 천진암대성당 건립 머릿돌에, [敎皇降福文]을 하사하시어, 조각되어 있다.
天眞菴 聖地 主任 卞基榮 몬시뇰.
<以上은 慶州李氏宗報, 제229호, 7면, 2010년 11월 25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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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年歲月을 두고 國家 民族을 지키는 天眞菴大聖堂 !
千年歲月을 두고, 國家와 民族을 지키는, 韓民族100年計劃天眞菴大聖堂 建立의 歷史的인 紀念事業에 우리 모두 함께 참여합시다.
天眞菴 聖地는 세계적인 종교, 천주교회가 이 땅에서 曠菴 李檗聖祖를 중심으로 自生的으로 움이 트고 싹이 돋은, 한국천주교회 發祥地로서, 우리 겨레의 종교정신과 문화적 자질을 전 세계에 들어낸, 韓民族의 얼굴이오, 자랑이며, 우리겨레의 거룩한 얼이 깃들어 있는 聖地입니다.
또한 이 天眞菴 聖地는 韓民族 改化와 우리나라 社會改革, 및 祖國近代化의 정신과 지식이 曠菴 李檗聖祖를 중심으로, 당시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은 선비들에 의하여 실천되기 시작한 곳이며, 이미 200 여 년 전에 朝鮮의 近代化를 착수한 젊은 先賢들의 실로 거룩한 道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天眞菴 聖地는, 200여 년 전에, 儒學의 젊은 知性人들이, 佛敎의 庵子에서, 天主敎 敎理와 思想을 연구하고 실천함으로서, 儒. 佛. 天이 합류한, 세계적으로 유일한 宗敎的 名勝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天眞菴 聖地의 曠菴 李檗聖祖 記念事業은, 한국 儒學의 자랑이오, 佛敎의 자랑이며, 한국 天主敎會의 불가피한 본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天眞菴 聖地는 曠菴 李檗聖祖의 가르침을 받은 丁若鏞 先生의 天眞消搖集을 위시하여, 實學思想과 丁若鏞 先生文學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여 만발한 生長鄕이니, 단순한 문학이 아니라, 당시 역사와 사상과 신앙과 대자연을 사랑하고 음미하는 내용으로 가득찬, 名文章이 집필된 현장이기도 합니다. 즉, 정약용 선생은, 1777년 15세로 결혼하던 때부터 1827년 65세 때까지, 50 여 년간이나 天眞菴을 종종 찾아와서, 思索하고, 觀想하며, 자신의 심정을 眞率하고, 素朴하게 표현하던 母校이기도 합니다.
이제 온 겨레가 子子孫孫이 지키고, 아끼고, 가꾸어야만 할, 우리 겨레의 영원한 자랑, 이 天眞菴 聖地에, 紀念建築物 과 각종 紀念像 건립 뿐 아니라, 우리 信仰先祖들의 그 思想과 精神과 德行을 본받아, 天主를 恭敬하고 백성들을 위하며, 國家와 民族과 社會 발전의 源泉으로 삼고, 미래를 開拓하는 原動力의 영원한 터전이 될, 韓民族100年計劃天眞菴大聖堂 건립이 힘차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韓民族의 위대한 精神的인 先驅者 曠菴 李檗聖祖를 顯揚하는, 天主敎會의 諡聖運動과 함께, 전 세계에 길이 빛날, 영원한 紀念事業이, 지난 30 여 년간 실로 기적적으로, 갖가지 난관을 극복하면서 추진되어 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유롭의 여러 先進國들을 찾는 이들은, 으레, 로마의 聖 베드로 大聖堂과, 파리의 노트르담 大聖堂, 독일의 쾰른 大聖堂, 등의 방문을 최우선으로 빼놓지 않습니다. 유롭 민족들의 창조적인 역사정신과 희생의 교과서와 같은, 인류역사의 기념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韓國天主敎會 創立者 曠菴 李檗聖祖에 의하여 천주교회가 創立된지 이미 200여년이 흘렀으나, 이렇다 할 紀念物이나 紀念的인 大聖堂 하나가 없는 것이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明洞大聖堂은 188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나, 당시, 우리나라 전국에는 천주교신자들이 1만4천5백여 명, 성직자는 프랑스 선교사들만 11명, 그리고, 수녀들이 한명도 없던 때로서, 서울 시내 신자는 250여명 내외에 불과하던 때였읍니다. 그 시절에 프랑스 신자들의 誠金과 援助로 그나마 13년에 걸쳐 세워진 명동대성당은, 바닥 면적이 모두 427평 건물로서, 약 1,500 여명의 신도들을 수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明洞大聖堂이라고 부르지만, 유롭 여러나라의 대성당들이 대부분, 건평 3천여 평 내지 5천여 평인데 비하면, 韓民族 固有文化의 예술적 紀念裝飾 與否는 且置하고라도, 너무나 왜소한 편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전국 신도들이 5백만 명이 넘고, 성직자들도 5천여 명, 대신학생들이 3천여 명, 수녀들도 1만 여명에 달하는 한국천주교회와, 위대한 대한민국으로서는 매우 부족하고 부끄러운 감마저 금할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당장은 물론, 향 후, 10년, 50년, 100년 후, 통일한국을 내다볼 때, 1천만 이상의 한민족 천주교 신도들이 살고 있을 내일의 한국천주교회를 위해서 뿐 아니라, 내일의 우리나라와 우리 겨레를 위해서도,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건립이 시작된, 韓民族100年計劃天眞菴大聖堂은 이미 많은 이들의 성금봉헌으로 마련된, 30 여만 평의 聖域 안에, 3만 여 평의 대성당 터전 위에서, 설계와 건축허가와 머릿돌 축성 및 중앙 祭臺石 축성이 완료되어, 이제는, 직경 7m 굵기의 높이 45m로 세워지는 48개의 기둥이 본 모습을 드러낼 차례입니다.
오늘날, 오락과 유흥과 사치와 향락에 많은 국민들이 깊히 빠져들어 가고 있는 이 시대의 우리나라 사회에는, 갖가지 필요한 산업시설, 상업시설, 여가 선용시설, 체육시설, 등, 훌륭한 건물들이 많이 건립되고 있습니다만, 일시적인 時事性을 띤 필요하고 다급한 건축물 뿐 아니라, 千年歲月을 두고, 우리 국가와 민족을 위한 마음의 정신적 고향이 되고, 국가와 민족의 얼굴이 될 만한, 기념건축물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각 나라의 安保最于先을 위한 국방력 강화의 터전 위에서, 시급한 경제발전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經濟發展만이 國家存立의 唯一한 目的은 아니며, 분명히, 우리나라의 경우, 國民精神과 社會倫理의 터전이 되고, 중심이 되는, 宗敎精神文化의 現代的 里程標가 되는 紀念建築物도 있어야만, 國家와 社會가 均衡과 調和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전 세계 10대 대성당에 들 만한, 대표적인 종교건물로서, 천진암 성지의 韓民族100年計劃天眞菴大聖堂 건립은, 그 의미와 가치와 교훈이, 국가와 민족의 한 시대를 넘어서, 영원히 빛날 것이다. 마치, 프랑스인들에게는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이 있고, 독일인들에게는 쾰른 대성당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 우리와 우리후손들에게는, 儒. 佛. 天을 合流시킨, 天眞菴大聖堂이 길이길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살고 지나가는 우리 모두는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 선조들과 후손들을 위해서도 영원히 자랑스러운, 韓民族100年計劃天眞菴大聖堂 建立의 이 精神文化 紀念事業에도, 개인과 가정과 단체와 기관들에게 큰 지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예컨대, 매년 수익의 1% 내외씩만이라도, 성금봉헌에 참여하도록 노력하여, 千年歲月을 두고, 우리와 우리 후손들을 지키는, 韓民族100年計劃天眞菴大聖堂 建立의 역사적인 기념사업에 모두가 참여하도록 합니다.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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