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神父가 된지 만 13 개월 만에, 25세 젊은 나이로 새남터에서 칼에 목이 잘린 김대건 신부님 殉敎 165주년이 되는 날이다.!
丁亥年(1827년)에 慶南, 全南의 해안지방(울산, 부산, 진해, 강진, 등)에 박해가 일어나자, 忠南 해안 內浦 지역 솔뫼에 살던 김제준 이냐시오는 6살 된 김대건(1821~1846) 꼬마를 데리고 경기도 용인, 한덕골로, 성애골로, 굴암, 장촌, 등 산골로 이사 와서 피난살이를 시작하였다.
같은 해, 같은 시기에, 즉 1827년 丁亥年 늦은 봄, 65세의 정약용 선생은 옛 친구들 2명과 함께 자신을 포함한 3가정의 아들들 3명과 옛 노비(?)들 3명을 데리고, 10여명이 천진암에 와서 3일간을 머물며, 아주 중요한 많은 詩文을 지어 남겼다(天眞消搖集).
정약용 선생은 유배지 강진의 의리 있는 湖南人 옛 제자들 편에, 三南 지방에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年初부터 듣고 걱정하던 차에 병을 얻어, 4 개월 간을 누어 있다가, 옛 친구들의 권유로, 바람도 쐴 겸, 천진암을 마지막으로 찾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대건 소년은 15세 동갑네 최양업, 한 살 아래 최과출과 함께 스승이신 정하상 회장(1795~1839)의 지도와 안내로, 사제가 되기 위하여, 1836년 12월 9일 서울을 출발하여, 엄동설한에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거쳐, 6개월간 걸어서, 이듬해 즉 1837년 6월 6일에 무더운 남쪽나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어린이들로서는 실로 영웅적인 여행이었다.
6월 초에 마카오에 도착한 3명의 어린 우리 선배 신학생들은 路毒에 시달리고, 이상 기후, 등으로 병이 들어 약 달포가까이 심히 앓다가, 마카오에 民亂이 일어나, 7월 초에 마닐라로 피난하였다가 8월에야 다시 마카오로 돌아왔으나, 한 살 아래의 동료 최과출 프란치스꼬는 허약한 몸으로 계속 앓다가 이듬 해, 즉, 1838년 11월 말에 마카오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한 소년이었다 !
김대건 신학생은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가 되어, 귀국한 후, 1846년 6월 5일에 체포되어, 모진 형벌을 당하다가, 1846년 9월 16일 오늘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으니, 사제생활 만 13개월 중, 3개월 반 가량은 감옥에서 형벌을 받으며 보내셨다. 정해년 박해의 피난 길부터 한평생 실로 천신만고의 십자가의 길 인생이었다.!
오늘 우리는 후배 사제들로서 너무나 호강하고 있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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