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眞菴은 韓國 天主敎會 發祥地이며, 정약용 등 청소년들의 母校
天眞菴은, 古朝鮮 시대 祭政一致의 관습으로, 本來 檀君影幀 天眞을 모시고 山祭祀, 堂山祭, 山神祭 등을 올리던 天眞閣 혹은 天眞堂이라는 작은 草家 堂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특히 일부 先史時代의 石造痕跡으로 추정되는 현상을 볼 때,三國時代 그 이전부터 소박한 토속신앙의 현장으로 여겨지며, 훗날 天眞菴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廢刹이 되었었으니, 丁若鏞 선생의 글에, "天眞菴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요사체는 반이나 무너져 빈 터가 되었네(寺破無舊觀,樓前僚舍半虛舊)" 하였고, 1797년 丁巳年 당시 洪敬謨의 南漢志에서는, "天眞菴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司饔院에서 관리하고 있다(天眞菴爲古寺造紙物今屬司饔院)"고 함으로써, 사찰로서의 기능을 言及하지 않고 있으며, 聖다블뤼 主敎는 1850년 경 기록한 글에서, 李檗聖祖께서 젊은 선비들과 함께 修道와 講學을 하던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居處(廢家屋)이었다(l'edifice isole et perdu)고 하였다.
1779년 당시 李檗 聖祖 25세, 丁若鏞 17세, 丁若鍾 19세, 丁若銓 21세, 李承薰 22세, 李寵億 14세, 權哲身 44세, 등 주로 10代와 20代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이상한 天主敎 책을 읽고 토론하는 내용을 일반 儒敎 書堂에서나 正常的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실천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허가 된 天眞菴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pour s'y livrer ensemble a des etudes profondes), 天主敎 眞理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天眞菴은 바로 韓民族의 유교 선비들이 불교 암자에서 천주교를 연구하고 실천하기 시작한, 儒·佛·天이 사람과 장소와 사상을 合流한 곳이고, 朝鮮天主敎會가 태동된 韓國天主敎 發祥地이다.
그런데 丁若鏞 선생은 종종 [天眞菴]에서 [菴] 字를 빼고 그냥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으니, "共詣天眞" 또는 "天眞之游" 등이 그 예다. 또 일반적으로 庵子는 늘 [庵]이라는 글자를 쓰는데, 유독히 정약용 선생만이, 특히 天眞菴에 대해서만 종종 [菴]이라는 "풀로 가리울 암"이라는 글자를 쓰는 것도, 南人계 자기네 젊은 선비들 학자 호가 모두 稷菴 권일신, 鹿菴 권철신, 曠菴 이벽, 巽菴 정약전, 俟菴 丁若鏞, 伏菴 李基讓, 順菴 安鼎福, 등에서처럼. 또한 은연 중에 이곳 天眞菴은 자기네 南人 學者들의 隱居地요, 本據地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자이신 曠菴 李檗 聖祖께서 천진암을 根據地로 활동하신 바가, 丁若鏞 선생의 글에 적잖이 보이고 있으니, "己亥年(1779년)에 天眞菴에서 講學을 할 때(己亥冬講學于天眞菴), 李檗이 밤중에 와서 여럿이 촛불들을 밝히고 經書를 談論하였으며(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 그후 "丁巳年(1797) 端午날에 2분 형님들(丁若銓)과 天眞菴에 와보니, 李檗의 讀書處, 곧 이벽의 修學 道場 건물이 아직도 그저 있구나 !(端午日陪二兄游天眞庵 李檗讀書猶有處)"하고 詩를 읊어 밝히고 있다.
丁學術의 李檗傳에서는, "戊戌(1778) 己亥(1779) 년에 李檗 曠菴 선생이 廣州 鴛鴦山寺 곧 天眞菴에 隱居하시며 丁氏 李氏네들과 어진 벗들(賢友)과 학문에 열중하였으며(勉學), 그 당시, 道友가 衆徒를 이루어,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공동체가 되기에 이르니(其門下如叢林),저들에게 聖敎要旨를 下筆하시었다."고 밝히고 있다. 즉 천진암을 본거지로 [天學 叢林]이 젊은 선비들 중심으로 형성되었었다는 것이다.
1827년에 65세의 노인이 된 정약용 선생은 옛날의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와 현장에서 지은 시에서, "이 곳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사이로 난 실같은 오솔길은 내가 어린 아이 적에 오르내리며 놀던 길인데(昔我童時遊), 여기서 우리는 중용, 대학, 서전, 주역, 즉 상서를 다 외운 후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마시는 소련을 하였었지(尙書此燒鍊)! 더우기 저명한 호걸들과 선비들이 모여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던 곳이 바로 여기였지(豪士昔講讀) !" 하며, 옛 추억을 회고하였다. 한문에서,“童時”라고 하면, 10세 미만을 뜻하며, 10세가 넘어 11세 이상은 少年이라고 부르며, 당시에는 장가를 들기 시작하였다.
천주교 용어가 아직 없었던 시절, “묵상하고 기도하던 방에서 참선하던 그 옛날의 친구들(이벽, 이승훈, 권상문, 정약종, 정약전, 등)은 모두 죽어 떠났으니, 이 세상 어디가서 그 옛 벗들을 구해올 수 있으랴!(禪房無處舊人求)”, “그 때 그 시절 여기서 공부하던생활 지금 다시는 해볼수 없네그려!(前躅凄迷不可求)”, “저녁 죽 먹으라고 치던 북소리에도 해질녘에 함께 같이 놀던 어릴적 옛 동무들 생각나네! (粥鼓斜陽念舊游)” 하며, 노인 정약용 승지가 현장에 와서 지은 여러 편의 詩文을 읽어보면, 천진암은 정약용이 7세나 8세(?) 시절부터 22세(?)가 되던 1784년 봄까지, 광암 공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던 그의 母校하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天眞菴 書堂(天學道場)에서 청소년 시절의 정약용 등은 이벽 성조를 따라, 天文學, 地理學, 數學, 幾何原本, 曆學, 醫學, 新敎之說(天主敎), 등을 배웠다고 자신의 글에서 밝히고 있다.
1836년에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 聖 Maubant신부는 1838년에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본부로 보낸 보고서에서,"李檗은 천주교에 푹빠져서,몇몇 改宗者들과 힘을 합쳐(de concert avec quelques proselites),1783년에 북경으로 李라는 姓을 가진 사람을 자기들 공동체의 대표자로 파견하여(il envoya un autre delegue) 이듬해 즉 1784년 2월에 영세하고 돌아왔다."하였으니, 이승훈 성현을 파견하던 이벽 曠菴公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의 단체가 있던 본거지가 바로 天眞菴으로 이 젊은 작은 공동체가 한국교회의 출발이 된 叢林이었다.이 [강학회]를,[叢林],[少林],[講學],등으로 정약용 선생은 표현하였고, 영국의 Longford 교수는 1800년대 말에 그의 연구서에서, 젊은 양반 선비들의 연구모임 [同好人會]라고 하였으며, Daveluy 주교는,[講學會]라고 표현하였고, 김대건 신학생은, [철학자들의 모임]으로 표현하였으며, 聖 Pierre Maubant 신부는 새로운 [改宗者들의 단체]라고 보고 하고 있다.
“眞正한 意味의 朝鮮天主敎會의 歷史는 李檗의 저 偉大한 講學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왕국에 처음으로 천주교를 시작하기 위하여 天主께서 간택하여 쓰신 道具는 李檗이라는 사람인데, 이름을 德祖라고 부르고, 호는 曠菴이었으며, 경주이씨 가문이었다.”
“이벽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창립하기 위하여 주초로 삼고자 대학자 암브로시오 권철신을 선택하였다.(Mgr.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 martyrs en Coree. Vol IV. manuscript copies, 1-2면 :“ L'histoire proprement dite commence aux conferences de Ni Pieki. Les grandes conferences de Ni Pieki”)
1925년 교황 비오11세께서는 79위 조선순교자 諡福式 강론 첫머리에서, 이벽의 업적과 이승훈의 활동을 擧名하며 조선천주교회가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가기 전에 성직자없이 조선 평신도들이 세웠음을 격찬하셨다.
1968년 교황 바오로6세께서도 한국순교자 24위 시복식 강론 첫 머리에서 같은 내용으로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창립을 말씀하시며, 전 세계 교회사에 없는 기묘한 위업을 밝히시며 한국교회를 들어 높혀 말씀하셨다.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2세께는 103위 諡聖을 계기로 하시는 강론에서 다음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강론으로 한국천주교회의 신비롭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자발적인 교회창립활동을 강론 첫머리에서 강조하셨다.
즉,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호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이 없이-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L'Osservatore Romano).
1993년 동 교황 요한바오로2세께서는 韓民族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머릿돌에 친히 작성하셔서 친필 서명하여 주신 교황강복문에서 좀더 명확히 또 우리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한반도 평화통일 사목시책을 밝혀주셨습니다.
즉,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건립되는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강복을 베푸노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
天眞菴 聖地는 韓國天主敎會 創立先祖들께서 선교사 없이 성직자없이 自發的으로 眞理를 探究하고 福音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韓國天主敎 發祥地일뿐더러, 陰曆主日 제정과 실천으로 국내에서는 최초로 근로자들의 정기적인 휴식을 겸한 敬神禮節과 社會階級打破, 男女平等 實踐 등이 敎會創立과 더불어 시작되어, 훗날 民族開化와 祖國近代化 및 조선 社會改革 運動의 싹이 트기 시작한, 온 겨레의 精神文化 聖地이기도 하다.
이 聖地에 한국의 民族宗敎들과 儒敎, 佛敎, 天主敎 등의 建築美 일부씩을 참고하면서 韓民族 100年計劃 天眞菴大聖堂을 세우고 있다. 千年歲月을 두고 한겨레의 精神的 기둥이 될 이 대성당 건립에 政權을 超越하여 各界 各層에서, 온 겨레가 子子孫孫이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모으며, 다같이 정성을 바쳐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