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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건립현장

  • 대성당 건립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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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성당 건립현장


제67주년(1948~2015) 제헌절에, 헌법 기초자 토마스 유진오 박사 묘와 생가터를 참배하며,

제67회(1948~2015) 제헌절에 헌법 기초 입안자 현민  토마스 유진오 박사(토마스) 묘와 추모비 참배(2015.07.17). 변기영 몬시뇰, 김학렬 신부. - <광주군 동부면 하산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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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에 대한민국 헌법을 초안한 토마스 유진오 박사,
건국 초기 국회의장 신익희 선생, 등을 배출한,
대한민국 헌법태동의 산파역들의 요람, 廣州를,,,!
 
 
대한민국 헌법 초안자 유진오 박사와 건국 초기 국회의장 신익희 선생, 등을 배출한 대한민국 헌법태동 산파역들의 요람 廣州는,,,!
 
제헌절을 맞아, 우리 모두 잠시 우리 헌법 주요 용어의 어원과 본래 의미와 母法에 대한 상식을 넓힙시다. 특히, 대한민국 헌법을 초안한 유진오 박사, 건국 초기 국회의장 신익희 선생, 등을 배출한 대한민국 헌법태동산파역들의 요람, 廣州를 다시한번 살펴봅시다,!
 
7월 17일, 오늘은 대한민국 제헌절이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박사(1906~1987)의 생가 터와 묘소와 기념비는 광주군 동부면 하산곡에 있다. 고려대학교 총장 때,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校訓으로 정하였고, 5.16 군사혁명 이후, 야당이었던 민주당 총재 및 대통령 후보이기도 하였다. 유진오박사보다 12세 위의 신익희 선생(1894~1956) 생가터와 묘소, 기념비는 광주군 중부면 서하리에 있는데, 대한민국 건국시 이승만 박사 다음으로, 초기 국회의장으로서, 또 야당 민주당의 최초 대통령 후보로서 급변사의 변고만 없었다면, 100% 당선이었다고 당시 대부분 국민들과 국내외 識者들의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구호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 !”였다.
 
상해 임시정부 때 내무총장으로, 또 대한민국 건국 초기 제헌국회 의원으로 크게 활약한 신익희 선생은 광주가 낳은 현대의 큰 인물이다. 특히, 구한말에 태어나 왜정 때부터, 국권회복과 만인평등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민주주의 어록을 많이 남긴 분이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재선을 막기 위한,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로서 한강 백사장 유세에서는 당시 일부 기관들의 추산으로, 한국역사상 최초 최대의 정견발표 유세장으로서 이십 여만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하여 국내외를 놀라게 하였다. 신익희 선생이 남부 지역 유세를 위해 내려가다가 호남선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운명하지만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자유선거에 의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것으로 모두가 의심치 않을 정도로 전 국민의 신망을 받았었다.
경기도 광주군에서 이러한 인물들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면,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찌기 지퇴당 이정형(1568~1606, 광암 이벽 성조의 10대조), 지봉 이수광(1563~1628), 등이 광주 현감으로, 부윤으로 재직하면서 實學을 보급시킨 영향이 없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 성리학의 뿌리를 내리게 하여, 조선 건국 이념의 정치학적 기초를 닦으므로써, 자유민주주의 思想과 정신을 젊은 선비들 사이에 보급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고려 말의 익제 이제현(이벽성조의 15대 조부)은 당대로서는 유일한 최고의 풍부한 해외 견문 지식을 제자들에게 전수하게 되어 있었고, 훗날 천진암의 天學道場에서 10여년(1770~1784)간에 걸쳐,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및 당대 저명한 학자 권철신, 권일신, 등, 선구적인 석학들이 천주교 신앙뿐 아니라, 서양의 신학문 연구와 천주교회 창립 등으로, 특히 조선의 근대화를 위하여 행동하던 이른 바, 북학파 선비들의 ‘진리와 자유와 정의’를 기초로 하는, 확고한 사상이 타 지역 선비들에 비하여 일찍 태동된 민주주의 사회 건설을 향하는 개혁 정신의 요람이었다.
 
제헌절을 맞아, 오늘의 번영된 대한민국의 헌법이 태동되도록, 왜정 말기의 암흑기에 우리나라 건국의 선조들과, 또 그 뒤를 이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튼튼히 다져준 우리 先人들의 역할과 업적을 되새기면서,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이해와 연구를 위하여서도, 우리 후학들은 광주산맥을 중심으로 하는 위대한 大韓人들의 人脈들이 역사의 전승 위에서 쇄신적인 사회 발전을 이룩하는 그 형성과정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하는 제헌절을 맞아, ‘大韓民國은 民主共和國’이라는 말 중에, ‘共和國’의 어원과 의미에 대하여, 간결하게 잘 정리한 글을 발견하고, 혼자서만 읽기가 아까워서, 여기에 퍼 옮기어 소개하고자 한다.-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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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制憲節)을 맞아 정리한 헌법 이야기
 
1948년 7월17일 국회의사당에서 대한민국 헌법을 공포하는 연설을 한 이는 李承晩 (이승만)국회의장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일반 남녀가 각각 이 헌법에 대한 자기 직책을 다함으로써 자기도 法(법)을 위반하지 않으려니와 남들도 法을 위반하는 사람이 없도록 노력할진대 우리 全민족뿐만 아니라 우리 후세 자손이 같은 자유 복리를 누릴 것이니, 이날 이때에 우리가 여기서 행하는 일이 영원한 기념일이 될 것을 증명하며(중략). 이때에 우리가 한번 더 이북 동포에게 눈물로써 告하고자 하는 바는 아무리 아프고 쓰라린 중이라도 좀더 인내해서 하루바삐 기회를 얻어서, 남북이 동일한 공작으로 이 헌법의 보호를 동일히 받으며 이 헌법에 대한 직책을 우리가 다 같이 분담해서 자유활동에 富强(부강)증진을 같이 누리도록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축도합니다.>
필자가 읽은 '우리 헌법의 탄생'(서해문집, 2006년)이란 책에서 이영록 교수(조선대학교)는 헌법제정의 의의를 이렇게 정리했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를 수 있으랴! 아무리 외견적 입헌주의라 할지라도, 놀라운 점은 입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한 그 실질화의 과정은 피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정신 자체를 말살하지 않는 한 정신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과연 우리의 입헌주의는 내실을 다져가고 있는 중이 아닌가? 입헌주의가 거의 假死(가사)상태에 빠진 듯하다가도 다시 놀라운 복원력을 발휘해온 것이 우리 憲政史(헌정사)가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입헌주의를 향한 결단, 그 자체가 갖는 역사적 의의가 결함 때문에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헌법의 제정은 입헌주의의 불안한, 아니 매우 결함 많은 출발이기는 하였지만, 확실히 출발은 출발이었던 것이다.>
준비기간 없이 103조의 헌법이 적힌 종이 하나를 달랑 들고 시작한 것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였다. 연습과 연극을 동시에 해가면서 실천해야 했던 民主(민주)였다. 타는 목마름으로 民主를 외쳤으나 실천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의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아무리 약한 시민이라도 서울시청 광장에 서서 현직 대통령을 욕하는 연설을 하고도 집에 무사히 돌아간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굶어죽고 얼어죽을 걱정은 없다. 민주주의는 헌법책을 벗어나 이 근사한 나라와 제도를 만들었다. 실로 대견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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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헌법 제정은 필요 없다
 
西獨(서독)이 東獨(동독)을 흡수통일할 때 통일헌법을 만들지 않았다. 서독의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 체제로 동독을 법적 편입하였을 뿐이다.
통일대박론에 편승, 통일헌법 제정 이야기가 나온다. 識者憂患(식자우환)이다. 우리 헌법 체제 안으로 북한을 끌어들이면 될 일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미 북한지역을 영토로 규정하였으므로 새로 영토조항을 만들 필요도 없고, 자유민주 체제를 고칠 필요도 없다.
아래 핵심적인 조항은 통일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부분적 개헌은 있을 수 있지만 새 헌법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매우 위험하다. 통일헌법을 만들겠다면서 영토와 國體(국체) 조항을 변경, 북한 공산주의자들이나 주변국을 이롭게 할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기본법 23조에 따라 동독이 西獨 연방에 편입하는 식으로 정리하였다. 독일은 동독과 대화하면서도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독일의 일부라고 주장하였다. 한국도 북한정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북한지역을 國土(국토)의 일부로 규정하므로 독일식 편입이 가능하다.
현행 헌법 체제로 통일이 가능한 이유중 하나는 헌법 제3조 덕분이다. 대한민국의 영토에 북한지역까지 포함시켰으므로 對外的(대외적)으로 통일문제를 國內(국내)문제로 선언하고, 민족자결원칙에 의거, 간섭을 배제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있다. 특히 중국이 북한의 혼란을 틈타 개입하려 할 때는 우리 정부가 헌법 3조에 의거, 이를 不法化(불법화)할 수 있다. 통일헌법은 필요 없다. 대한민국 헌법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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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主權(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수령과 黨(당)이 主權을 쥔 북한식 공산주의는 헌법의 敵(적)이다.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대한민국 영토인 북한지역을 불법점거한 김정일 정권은 反국가단체이다.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合法(합법)국가이다. 북한정권을 대한민국과 同格(동격)으로간주해선 안된다.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평화적 방법으로 자유통일하여 한반도 전체를 민주공화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국가의지이고 목표이다. 자유통일이 목표이고 평화통일은 수단이다.
제5조 ①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②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
-국군은 外敵(외적)뿐 아니라 內敵(내적)으로부터도 국가를 보위하여야 한다. 정치적으로 중립하라는 말은 특정 정당 편을 들어선 안 된다는 뜻이다. 軍은 정치를 해선 안 되지만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정치를 알아야 한다.
제8조 ④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된다.
-통진당과 같은 反헌법적 정당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와 국가正體性(정체성)을 부정하고 폭력을 일삼는 違憲(위헌)정당으로 규정, 해산할 수 있다.
제9조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표현수단인 漢字(한자)는 韓國語의 2大 표기수단중 하나이므로 國字(국자)로서 가르쳐야 한다.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人權(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인간존엄성은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개인의 人權을 인정하지 않고 집단의 특권을 강조하는 공산주의와 계급투쟁론은 헌법상 용납할 수 없다.
제11조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性別(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계급적 특권이나 不利(불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국민들에게 평등권을 보장하여야 한다. 노동자 및 농민계급의 특권과 이들에 의한 독재를 인정하는 공산주의는 反헌법적이다.
제23조 ①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私有(사유)재산권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핵심으로서 이를 보장하는 것이다. 私有재산권을 부정하는 북한정권과 從北세력은 공동체의 敵이다.
제37조 ②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헌법敵對(적대)세력에 대하여 자유를 파괴하는 자유를 주어선 안 된다.
*결론: 대한민국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키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자유민주주의-법치주의-시장경제를 수호하고, 불법단체가 점거한 북한지역을 자유통일, 한반도에서 민주공화국을 완성해야 할 의무를 헌법으로부터 받았다. 모든 한국인은 생명을 保全(보전)하고, 자유를 누리며, 평등한 대우를 받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북한 공산정권과 남한의 그 追從(추종)세력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하여 제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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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헌법중 가장 아름다운 문장
 
<대한민국 헌법 第10條: 모든 國民은 人間으로서의 尊嚴(존엄)과 價値(가치)를 가지며, 幸福(행복)을 追求(추구)할 權利를 가진다. 國家는 개인이 가지는 不可侵(불가침)의 基本的 人權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義務(의무)를 진다.>
우리 헌법중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다. 국가의 존재 목적을 감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국가는 국민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행복을 구현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선언이다. 여기서 국민이란 집단 개념이 아니다. 개인이다. 개인이 가지는 기본적 인권(인간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국가도 침해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북한노동당 정권과 이를 추종하는 민노당은 계급정당이므로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人權(자유, 생명, 재산 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배계급의 특권이나 김정일의 人權만 인정한다. 북한에선 2300만 인민이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희생되어야 하고, 한 사람의 생명을 결사옹위하기 위하여 총폭탄이 되어야 한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만큼(또는 그 이상으로) 소중하다는 선언을 한 대한민국의 建國(건국)을 좌익들이 미워하는 것은, 개인의 人權을 간단하게 말살하는 자신들의 正體(정체)를 숨기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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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을 아는가?
 
우리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은 民主共和國이다’고 선언하였다. 민주는 국민이 主權者로서 선거를 통하여 정부(대통령)를 선택하고 국회의원을 뽑는 代議민주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공화국'(Republic)은 뭔가? 한국인들은 국민의 권리를 너무 강조하다가 보니 민주주의를 숭배한 반면 체제의 다른 반쪽인 共和主義를 잊고 산다.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과 운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모델은 1776년에 등장한 미국의 정부형태였다. 미국 독립의 영웅들은 대체로 '민주주의자'라기보다는 자유와 책임을 重視(중시)한 '공화주의자'였다. 그들은, 민주주의 권력의 담보자인 大衆(대중)의 분별력을 의심하고 그들의 변덕을 두려워하였으며, 정부 권력(특히 큰 정부)은 부패하며 억압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 경계한 이들이었다.
토마스 제퍼슨,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공화국이 유지되려면 국민들의 정치적 신념, 관심, 그리고 시민윤리가 함양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시민의 권리 이상으로 시민의 책임과 교양과 자질을 중시하였다. 시민적 德性(civic virtue)이 약하면 민주주의는 권위주의로 퇴보하거나 선동자들의 노리개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한 여인이 프랭클린에게 물었다.
'박사님, 우리가 가진 체제가 공화국입니까, 君主國(군주국)입니까?'
프랭클린의 답은 이러하였다.
'공화국이죠. 단 여러분들이 지켜낼 수 있다면 말입니다.'
 
공화국은 국민들의 것이므로 국민들의 德性과 敎養과 노력이 있어야 유지된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君主國은 통치자인 君主의 德性에 좌우된다. 共和國에선 주권자인 국민의 자질에 의하여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 군주국이나 독재국에선 백성들이 위로부터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권위에 순종, 체제를 유지한다. 공화국은 法治와 法 집행자인 정부에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순종하여야 유지되는 제도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스스로 자신을 ‘제퍼슨 민주주의자’라고 부를 만큼 미국 독립의 정신을 만든 제퍼슨의 사상을 신생 대한민국에 적용하려 하였다. 미국의 3代 대통령이자 독립선언 기초자인 토마스 제퍼슨은 知人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유라는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마심으로써 원기왕성해져야 한다. 이는 자유의 근본 속성이자 거름이기도 하다.>
그는 1810년에 知人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강조했다.
<成文法(성문법)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이 선량한 시민의 고귀한 의무중의 하나임을 의심할 바 없지만 그것이 가장 고귀한 것은 아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지켜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의무이다.>
제퍼슨은 자신의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한 사회의 궁극적 권력을 안전하게 예치할 수 있는 곳은 국민들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국민들이 충분히 開明(개명)하지 못해 신중하게 자신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 권력을 그들로부터 뺏을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하여 그들에게 신중함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李承晩 대통령은 그 어려운 시기에도 교육, 특히 민주주의 교육에 주력하였다. 그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4·19를 통하여 그를 몰아낸 것이다. 李 박사는 자기 성공의 희생자였다.
 
*제퍼슨과 李承晩
 
제퍼슨이 1950년대의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李承晩보다 더 민주적으로 할 순 없었을 것이다.
6.25 동란기에 주한미국대사였던 무초는 퇴임후 역사기록을 위한 증언을 하는 가운데 李承晩 대통령을 '국제정세에 관해서 최고의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격찬했다. 무초는 또 李 대통령이 Jeffersonian democrats를 자처했다고 말했다.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고, 3代 대통령을 지냈으며 루이지애나 매입(2300만 달러를 주고 프랑스로부터 한반도의 10배나 되는 지역을 사들임)을 통하여 당시의 미국 영토를 두 배로 넓혔다. 미국 독립정신의 핵심을 만든 인물이다. 그가 주장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을 Jeffersonian democrats라고 부른다. 우리의 建國 대통령이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신념화한 인물이었다면 그 흔적이 한국에 남아 있을 것이다.
제퍼슨은 민주주의의 약점과 대중의 우매함을 잘 안 사람이었다. 그는 性善說의 신봉자가 아니었다. 그는 국민들의 분별력이 약하여 민주주의를 운영할 자질이 부족할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제퍼슨은 그런 국민들로부터 主權을 회수하여 독재정치를 펼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을 교육할 것인가 自問했다. 결론은 後者였다.
제퍼슨 민주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작은 정부와 代義 민주주의 존중: 미국 헌법 조문의 엄격한 해석으로 정부의 권력남용을 막는다.
2. 국민의 재산과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의무이다.
3. 국민의 알 권리와 정부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존중한다.
4. 정부는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고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5. 교육을 중시한다.
6. 미국이 자유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7.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종교의 자유 보호책이다. 종교는 정치부패로부터 자유로와지며, 정치는 종교갈등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
李承晩 대통령이 新生 대한민국에서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구현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李承晩 대통령의 정책엔 제퍼슨식 민주주의와 유사한 면이 많다.
1. 政敎분리: 李承晩 대통령은 기독교 신도였으나 정치에 기독교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기독교적 민주주의만이 공산주의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믿었으나 기독교 국가를 만들거나 기독교를 우대하진 않았다.
2. 교육重視: 李 대통령은 언론과 학교를 통하여 한국인을 깨우치면 一流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3. 私有재산권의 신성시: 李 대통령은 농지개혁 때도 地主들에게 보상을 하도록 했고, 화폐개혁 때도 일정 액수 이상의 예금동결 계획에 반대했다.
4. 代義민주주의 존중: 李 대통령은 국회와 많이 갈등했으나 국회의 기능을 정지시킨 적이 없다. 戰時에도 국회는 정부를 맹렬히 비판했고, 대통령을 퇴진시키려 했다. 戰時에도 대통령 선거는 이뤄졌고, 특히 시, 읍, 면의회, 도의회 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지방선거 투표율은 90%나 되었다. 이때 선거로 뽑힌 의원들은 1만 명을 넘었다.
5. 언론자유의 존중: 李 대통령은 정부 비판을 많이 하는 언론에 불만이 많았으나 조직적인 탄압을 거의 하지 않았다. 탄압사례는 경향신문 폐간 정도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가 경찰이 쏜 총을 맞고 부상한 젊은이들을 위문하곤 '不義를 보고 일어나지 않는 젊은이들은 희망이 없다'고 말한 뒤 下野를 결단했다. 제퍼슨이 1950년대의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李承晩보다 더 민주적으로 할 순 없었을 것이다.
 
,,,,,,,,,,,,,,‘공화국(共和國)’ 용어의 유래와 정신(2011년 작성 글),,,,,,,,,,,,,,
 
厲王(여왕)은 중국 周나라의 제10대왕이었다. 賢臣(현신)인 周公、召公 등의 諫言(간언)을 무시하고 暴政을 하다가 백성들의 분노를 샀다. 朝廷의 부패에 화가 난 백성들이 서기 전 842년에 왕궁을 습격, 왕을 죽이려 하였다. 일종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왕은 鎬京(호경)을 탈출, 黄河를 넘어 지금의 산서성으로 피했다. 召公은 백성들이 몰려와서 태자 靜을 죽이려 할 때 그를 보호하고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하였다. 그 뒤 周公과 召公이 교대로 國政을 관리하게게 되었다. 이를 司馬遷은 史記에서 共和라고 불렀다. 서기 전 828년(共和14年)에 厲王이 죽자 周公 및 召公은 厲王의 아들 静을 즉위시켜 宣王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竹書紀年’이란 책은 편년체의 中国 역사서인데 전설시대부터 魏나라까지의 이야기가 씌어져 있다. 작자는 不明이고, 漢代에 이미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다. 西晋 279년에 河南省에 있던 魏의 襄王(양왕)의 墓를 도굴하였을 때 대량의 문자가 적힌 竹簡이 출토되어 정리한 책 중 하나가 『竹書紀年』이다. 史記에 나오지 않는 일화들이 많이 실려 있다. 『史記』의 年表를 수정하는 데도 쓰인다. 이 책은 共和制라는 명칭의 유래를 史記와는 달리 설명한다. 厲王(여왕)이 쫓겨난 뒤 제후로 추대된 共伯和라는 인물이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 데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영어의 Republic을 ‘共和國’이라고 번역한 것은 明治維新 이후 일본인들이었다. 중국의 古事를 참고한 것이다. 공화국은 세습 군주가 아닌 귀족이나 국민들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국민들이 선거로 뽑은 사람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민주공화국이라 부른다.
共和國은 또한 共和하는 나라이다. ‘국민들이 함께 화목하게 사는 공동체’이다. 그렇게 되려면 다양한 국민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아우르는 논리가 있어야 한다. 그게 共和主義이다. 共和를 위하여서는 안보, 법치, 평등, 자유, 복지의 개념이 필요하다. 노동자와 大企業主는 역할과 권력이 다르지만 인간존엄성을 가진 점에서, 그리고 법 앞에선 평등하다.
孔子가 論語에서 君子和而不同(군자화이부동)이라고 했는데, 이게 바로 공화주의이다. ‘君子는 같지 않아도 화목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다양성, 사상의 다양성, 역할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이가 바로 君子이다. 이런 君子의 마음을 가져야 공화국의 국민이 될 자격이 있다.
孔子는 또 小人同而不和(소인동이불화)라는 말을 했다. 小人輩들은 같으면서도 不和한다는 뜻이다. 같은 말을 쓰는 同族이면서도 계급주의를 내세워 민족을 분열시키는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이런 小人輩이다. 한국의 좌익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싫어한다. 자유민주주의는 공화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좌익들은 민중민주주의란 말을 쓴다. 민중만이 나라의 主權을 독점하여 독재를 해야 하고 이게 민주주의라고 억지를 부린다. 좌익들이 말하는 민중은 노동자, 농민, 貧民인데, 그 가운데서도 노동자가 헤게모니를 잡는다. 민중민주주의는 대한민국 헌법이 명시한 國民主權을 부인하는 반역 이념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특정 계급의 特權을 인정하지 않는다. 민중민주주의는 민중이란 계급의 독재권을 인정하고 이를 다수에 의한 소수의 지배, 즉 민주주의라고 호도한다. 우리 대법원은 민중민주주의는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하는 이념으로서 처벌대상임을 여러 차례의 판례를 통하여 명확히 해왔다. 좌파정권 시절에도.
민노당 등 從北세력은 계급투쟁의 논리로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서로 적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公共의 敵이고, 共和의 敵인 셈이다.
 
동양 최초의 共和政을 부른 여왕의 虐政에 대하여 召公이 간언한 내용이 史記에 적혀 있다.
'백성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은 흐르는 강물을 막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을 막았다가 한 번 둑이 무너지면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물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水路를 내어 강물을 원활히 소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일깨우고 敎化하여 그들로 하여금 말을 할 수 있게끔 해주어야 합니다. 백성들이 입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大地가 山과 河川을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모든 재물과 富는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높고 낮고 건조하고 습하고 비옥하고 척박한 땅 등 여러 가지 유형의 땅에서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의식주가 생산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마음 놓고 말하는 가운데 政事의 善惡과 得失 등이 반영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召公은 요사이 기준으로 共和주의자 내지 시장경제주의자란 생각이 든다. 언론자유를 모든 자유의 근본으로 본 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 자유가 있어야 物的 생산력이 왕성해진다고 본 점 등이 그렇다.
나중에 위대한 공화주의자가 된 李承晩은 스물아홉 살 때 獄中에서 '독립정신이란 책을 썼다. 거기 실린 아래 글이 2800년 전 중국의 賢臣이 한 말과 같다. 진리는 古今이 크게 다르지 않는 모양이다.
'개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서 폐단이 있더라도 윗사람들이 어느 정도 손해를 보는 것이 옳다. 부디 깊이 생각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活力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도 活力이 생겨서 몇 십 년 후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위 글은 이 시대 우리가 종종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고 존경하는
趙甲濟 기자의 닷컴(2015-07-16), ‘制憲節을 맞아 정리한 헌법 이야기’에서 퍼온 글입니다>.  Msgr. Byon


현민 유진오 박사 묘 참배(2015.03.25) 광주군 동부면 하산곡리 - 천진암성지 박희찬 관리국장, 변기영 몬시뇰, 고옥자 실장.


현민 유진오 박사 묘 참배(2015.03.25) 광주군 동부면 하산곡리 -
천진암성지 박희찬 관리국장, 변기영 몬시뇰,


대한민국 헌법 기초자 현민 토마스 유진오 박사 묘와 추모비 참배(2015.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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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회(1948~2015) 제헌절에 헌법 기초자 현민  유진오 박사(토마스) 묘와 추모비 참배(2015.07.17).
변기영 몬시뇰,김학렬 신부. 광주군 동부면 하산곡리.



제67회(1948~2015) 제헌절에 헌법 기초자 현민  유진오 박사(토마스) 묘와 추모비 참배(2015.07.17).
변기영 몬시뇰,김학렬 신부.<광주군 동부면 하산곡리.소재>

Writer : 변기영 몬시뇰    Date : 2015-07-17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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