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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대성당안의 구유 |
1962년 10월 11일에 개막되어 1965년 12월 8일 폐막될 때까지 3년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개최된다. 이 동안 총 약 10주 동안, 즉, 매해 가을 총 4번의 회기에 공의회의 교부들은 모여서 주제를 논의, 의결하고 교황의 인준하에 공식 문헌들을 선포하였다. 공의회를 개막했던 요한 23세가 1963년 6월, 아직 공식 문헌이 하나도 선포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거하자, 바오로 6세가 그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공의회는 교황이 서거했을 때 자동 중단되기 때문에, 새 교황이 공의회를 계속할 것인지 잠시 불안한 기운이 돌긴 했지만, 바오로 6세는 취임 후 즉시 공의회의 재개를 선언하였고 1963년 9월 29일 공의회 제 2기가 개막된다. 이때 했던 교황 바오로 6세의 개막연설은, 이후의 공의회 작업의 방향을 결정짓는 나침반 역할을 할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에 다루고자 한다.
우선 살펴볼 문제는, 왜 <제 2차> 라는 말이 <바티칸 공의회> 라는 말 앞에 붙었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 공의회 처음부터 교부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되었었다. 단순히 <바티칸> 에서 열리는 두번째 공의회라고 해석하기에는 명쾌하지 않는 점이 있었는데, 우선은 바로 1869-1870 년에 열렸던 제 1차 바티칸공의회가 종결되지 않은 상태로 끝났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유럽사회의 격변기에 열렸던 이 공의회에서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교의 헌장>과 <교회에 대한 첫번째 교의헌장, 즉 로마교황에 대한 교의 헌장> 이 선포되었지만, 프러시아간 전쟁의 발발로 공의회 자체가 중단된 데다가, 이후 이탈리아의 통일운동으로 인한 로마교황청의 상황이 매우 어려워지면서, 공식적으로 <폐막> 되지도 못한 채, 말 그대로 <무기한 연기 sine die>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962년에 개막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사적 연장선> 에 있다고 규정되어야 하는지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신학적>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역사적 연장> 의 선상에서 이해된다면, 어쩌면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준비했지만 전혀 토론조차 하지 못했던 스케마들, 이를테면 <교회에 관한 두번째 헌장> (여기서는 교회의 본성문제, 교회의 구조, 대 사회 및 국가 관계 등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가톨릭 신앙에 대한 두번째 헌장> (여기에는 가톨릭교회의 주요 신앙교리를 다루었다) 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어서 다루었어야 했을 것이다. 문제는, 교회도, 사회도, 세상도 변했다는 데에 있다. 더욱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선포한 교황에 관한 교의헌장은, 상당히 곡해되고 잘못 이해된 상태에서, 교회 안팎에서 그 가치를 충분히, 또 제대로 평가 받고 있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러나 일부 신학자들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에 이것을 이미 극복했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의 수용이 어떻게 있을 수 있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사실, <구가톨릭교회> 라는 교회분열이 일어나기도 했었으며, 100년 전과 비교했을 때, 교회는 자신에 대해서도, 또 세상에 대해서도 이미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공의회 교부들에게,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를 단순히 <이어서> 한다는 것은, 그렇게 환영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 부분의 역사적 사실들과 그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간단하게나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을 준비함에 있어서, 많은 이들은 이 헌장이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것을 <이어서> 완성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공의회 준비위원회에서 준비했던 교회헌장 스케마는 이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이 스케마의 구성 자체는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작성해 놓았던 스케마의 구성과 형식, 언어표현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 스케마는 교부들 대다수의 반발을 사며 거부되었다. 이에 대하여, 요한 23세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새로운 공의회> 라고 선언함으로써, 이 스케마 거부사태를 해결하였고, 신학위원회는 새로운 스케마를 준비하였으며, 교부들의 토론을 거쳐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교회헌장 Lumen Gentium> 이 나오게 된 것이다 (cf. N. Tanner, I concili della Chiesa, p. 112). 물론, 주의할 것은 이 <새로운 공의회> 라는 말이, 결코 앞선 공의회들의 가르침과의 <단절>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요한 23세의 개막연설에서 강조되었던, <아죠르나멘토 aggiornamento> 의 정신으로 보나, 실제 교회헌장의 내용으로 보나 분명히 나타난다.
결국,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를 단순히, 시간적으로든, 신학적으로든, <연장해서> <바티칸> 이라는 장송에서 하는 공의회가 아니라, 그 가르침과 단절되지는 않지만, 새 시대에 맞게, 새롭게, 새로운 방식으로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공의회가 된다는 의미에서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공의회에는 전체 약 2800여명이 소집되는데, 전세계에 퍼져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 주교들, 몇몇의 수도회 총장들이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공의회 회기 중 죽은 사람들도 있고, 이들의 자리는 그 후임자들에 의해 채워졌다. 매 회기마다 약 2300여명이 실제로 회의에 참석했다. 전세계에서 116개국의 주교가 참석했고 대부분은 (933명) 아메리카 대륙에서 왔으며, 서유럽에서는 859명, 아시아와 남부 아프리카에서 250명, 아랍에서 95명과 오세아니아에서 70명 등이다. 이런 면에서 사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2000년 교회 역사에서 처음으로 전세계에서 참여한 공의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대부분의 주교들은 한 두 명 정도의 신학전문가(periti) 를 동반했고, 이들은 공의회에서 어느 정도의 공식적 위치를 가질 수 있었으며, 비록 투표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의회 문헌의 스케마 준비에 참여하였다. 당시 35살의 젊은 신학교수였던 요셉 라찡거 (지금의 교황 베네딕또 16세)도 퀼른의 대주교였던 프링 추기경(card. Jeseph Frings) 이 자신의 신학전문가 자격으로 공의회에 데리고 갔고, 그는 공의회 문헌 형성에, 특히 교회헌장 형성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공의회에는 당시 신학을 움직이던 대 학자들이 모여든다: 벨지움의 제라르 필립스(현재의 교회헌장의 첫번째 스케마를 만들었고 이후 교회헌장이 만들어질 때까지 전체 과정에 관여한다), 스위스의 한스 큉, 독일의 버나드 헤링과 칼 라너, 프랑스의 이브 꽁가르, 앙리 드 뤼박, 쟝 다니엘루, 미국의 죤 커트리 머레이, 등등. 더욱이, 로마 가톨릭교회 이외의 개신교의 대표자들과 정교회의 대표자들도 참관자(Osservatori) 로서 참여했는데, 사실 이들의 참여는 교회일치에 대한 교령이 나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해서 공의회는 3년동안,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문 등, 16개의 문헌을 선포한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막했을 때, 그리고 작업하는 동안, 비록 전세계에서 주교들이 참석하기는 하였지만, 공의회에서 다루어진 주제들 면에서 볼 때, 유럽과 아메리카 이외의 상황들은 사실상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선 공의회 신학 전문가들이 모두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 공의회에서 다루어진 당면한 문제들은 이들 지역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주로였지, 그 외의 지역, 즉,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서 처한 문제들은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우리, 극동아시아인 한국에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가?
공의회 가르침들이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수도회성소와 사제성소의 급격한 감소 등과 같은 문제에서 보듯이, 유럽이나 미국에서조차 난관과 문제들이 무척 않았다. 그럼 우리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원론적인,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가톨릭 교회의 근본적 믿음이 있음을 생각해야한다. 즉 공의회는 인간 역사 안에서 일어난 여타의 사건과 같은 성격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히 인간역사에서 20세기 중반이라는 특정 시대와, 그 시대의 사람들과 상황 등등이 모두 관여되어 있는 사건이지만, 공의회는 무엇보다도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었던 사건이다. 즉, 모으신 분도, 그런 가르침들을 선언하게 하신 분도, 궁극적으로는 성령이다. 이것은, 공의회의 가르침이 왜 우리에게, 유럽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극동의 우리에게도 충분한 중요성을 지닌 것인지를 설명한다.
2천년 전, 팔레스티나 이스라엘의 나자렛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았던 청년 예수는, 단 한번도, 이집트 피난을 제외하고는, 중동 땅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33년이라는 시간적, 그리고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기껏해야 예루살렘을 활동무대로 삼았던, 공간적 제한 범위 안에 살았던 청년이다. 그러나 이 청년의 삶과 죽음이, 2천년이 지나도록,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에까지, 또한 온 세계와 온 우주에까지 그 결정적 구원의 가치를 지닌다고 고백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 사건이, 삼위일체 하느님에 의해 역사 안에 일어났던 사건이요, 그의 탄생과 삶과 죽음, 부활까지도 성령이 관통하여 함께 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특수성이 어떻게 해서 보편성을 지닐 수 있는가를 본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 신앙은 공의회라는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요구된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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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탄 - Giotto 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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