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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의 聖 Maubant 신부가, 41세의 聖 丁夏祥 회장 안내로, 死亡 직전의 75세 丁若鏞 선생 訪問,[朝鮮天學逸誌](?)를,,,,.

33세의 聖 Maubant 신부가, 41세의 聖 丁夏祥 회장 안내로, 死亡 직전의 75세 丁若鏞 선생을 訪問하여 問病 人事를 하였을까?! 1836년 이른 봄에 !

-丁若鏞 선생이 저술한, 조선 천주교 창립사 원고가 聖 Maubant 신부와 聖 Daveluy 주교에게 傳達된 경로 추적 분석 시도-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사 중의 첫 부분, 즉, 1770년대부터 1790년대까지에 관하여는, 1872년에 Paris에서 발행된 Dallet(1829~1878)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그 첫 부분이 처음 소개되어, 당시 유롭 교회를 감탄하고 놀라게 한 내용으로서,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우리 한국교회 출발의 초기 역사 중에, 특히,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출발한 진리탐구 講學과 북경 교회에 대표자 파견, 등을 상세하게 알게 하였다.

물론 폴투갈 출신의 북경교구장 Alexander Gouvea 주교(1751~1808)가 당시 중국 북경 지역의 교황청 관리자를 겸직하던, 泗川省 교구장 Caradra 주교에게 보낸 간결한 보고서(1797년 8월 15일)가 있었지만, 거기에는 북경에서의 이승훈 進士 영세부터만 간결히 거론되었다. 그나마 이승훈 진사에게 세례를 준,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원 Joseph de Grammont 신부의 활약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윤유일, 등 5명의 순교자들에 대하여 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천주교회사를 펴낸, Charle Dallet 신부는 한번도 조선에 다녀간 적이 전혀 없는 선교사로서 동남아에서 근무한 사람이었다. 다만, 조선에서 1845년부터 1866년까지 21년간 선교하던 Daveluy(1818-1866) 주교가 보낸, 조선순교자 備忘記(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e)를 원본 자료로 삼아, 조금씩 첨삭하며 한국천주교회사를 편찬하였다. 한국천주교회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진리탐구의 창립사를 교황청과 유롭에 알린 것은 프랑스 출신의 Daveluy 주교 프랑스어 번역 원고와, 이를 가지고, 책으로 펴낸 Dallet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의 공로이며,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다불뤼 주교의 원본에 기초 자료가 된 것은 정약용 선생의 저서였다. 이 저서의 내용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알려져 있으나, 그 책 본래의 한국 書名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혹자는, 천주교 조선 傳來史, 또는, 조선 복음 傳來史, 또는, 조선 천주교 초기역사 備忘記, 등의 현대적 표현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그 시대 학자 층의 用語는 아니므로, 三國志나 南漢誌의 書名처럼, 天學誌, 혹은, 天學事誌, 같은 임시 假書名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정약용 선생의 詩文集과, 蔓川遺稿, 니벽전, 및 推案及鞫案, 闢衛編, 朝鮮王朝實錄, 日省錄과 備邊司謄錄, 등의 여러 문헌에 나타난 片鱗 자료를 가지고도,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시작된 天學運動, 즉, 천진암 강학과 守誡, 심지어 음력 주일 제정과 실천시도, 이승훈 진사 북경 교회 파견, 수표동과 명례방에서의 집회활동, 등의 한국교회 창립사를, 오늘에 우리가 알고 있는 정도까지, 어느정도 확인할 수는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나마 Daveluy 주교의 기록이 없었다면, 박해 중에 무서운 제약 속에서 정약용 선생이 쓴 너무나 간단하고 함축된 표현이나 기록들과, 또 박해자들이 자기네 목적으로 기록한 국내 자료들을 종합, 대조, 연구하기에는 엄청난 노력과 세월을 필요로 하는 업무 분량이다.

그런데 1845년 말에 김대건신부와 함께 입국한 Daveluy 주교는, 자신이 1850년대 말부터 조선순교사 자료를 정식 직무로 정리해나가며 번역한, 위의 조선순교자 備忘記 내용의 대부분이, 정약용 선생이 수집하여 기록한 것(la plupart des faits relatifs aux origines de la religion en Coree ont ete reunis par Tieng Jak iong dont il est parle souvent), 즉, 정약용의저서에 의한 것임을, 그의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e 첫 머리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면 정약용 선생이 기록했다는, 그 저서(Les faits relatifs aux origines de la religion en Coree)는 언제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Daveluy 주교에게 전해졌을까 하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 敎會史學徒들에게 그동안 매우 궁금한 것이였다.

그런데, Daveluy 주교 보다 15세 年上으로, 9년 먼저 1836년 초에 조선에 입국하여 1839년 박해 때 순교한 Maubant 신부(1803-1839)의 기록을 접하고 보니, 정약용 선생의, 조선성교회 設立에 관한 비망기(Les notes manuscrites sur l'e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enne en Coree)와 源泉이 같은, 동일한 것임이 확실시되는 것으로서, 이 手記 문헌을 비밀히 잘 관리해야한다는 부탁과 함께, Maubant 신부가 회장들한테서 받았음을, 1838년 10월 3일에 쓴 보고서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정약용 선생의 한국교회 출발에 관한 著書의 傳乘에 관하여 불가피하게 더 추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Maubant 신부는, 정하상 회장(1795~1839)의 안내로 1836년 양력 1월 초 조선에 입국하여, 그 달 25일(음력 1835년 말)에 한양에 들어와, 정하상 회장 집에 유숙하였다. 그런데 정약용 선생은 1836년 2월 22일(음력), 결혼 60주년이 되는, 回婚日 아침 10시경에 마재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1836년은 1,2월은 聖모방신부 조선 입국, 丁若鏞 선생 死亡, 그후, 봄 판공 공소 방문, 김대건, 최양업, 최과출 신학생으로 선발, 출국 준비 착수, 12월 6일 중국인 여항덕 신부 출국, 등, 정하상 회장이 가장 분주한 한 해였다.

한마디로, 정약용 선생은 Maubant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후, 약 2개월 후에 사망하였는데, 16년간의 강진 유배생활에서 1818년에 고향에 돌아온 정약용 선생은 박해로 인하여, 유배생활 중에는 마음으로만 信奉하던 천주교 신앙생활을 歸鄕 후에는 다시 열심히 실천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허리에 쇠사슬을 허리띠처럼 감고 살면서, 보속하였다고 후손들(정덕진 신부 증언)도 전하며, 善終하기 전에는, 중국인 余恒德 신부에게서 병자성사까지 받았다.

특히, 정약용 선생이 임종하던 전 날 밤에, 서울의 절친한 文人 李綱會는 큰 집이 무너져내리는 꿈을 꾸고나서 매우 이상히 여겼다고 하며, 임종 당일에는, 큰 바람이 땅을 휩쓸며 불었고, 이상하게도 햇빛이 어두어져서 대낮에도 컴컴하였으며, 갑자기 흙비(土雨)가 내려, 天地가 누렇게 되는, 이상한 黃砂(?) 자연현상을, 당시 사람들은 정약용 선생의 죽음과 연관하여 생각하였다. 예로부터 본래, 巨木이 쓸어지면, 風塵이 일어나고, 日月이 가려져 빛을 잃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하상 회장은 Maubant 신부를 모시고 귀국한 후, 75세의 老年에 병환 중인, 유일하게 생존한 작은 아버지, 정약용 선생을, 귀국 인사 겸 問病 겸, 극비리에라도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의 정약용 선생은 大學者로서, 천주교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조카 정하상 회장의 정신적 지도자였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만한 사실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상항으로 보아, 분명히, Maubant 신부는 정하상 회장의 안내로 정약용 선생을 問病하였으리라고 확신해도 無理는 아니다. 당시 관습상, 他國 먼 여행길을 떠나거나, 돌아오면, 반드시 집안의 어른을 찾아뵙게 마련이고, 부모님과 누이가 모두 순교한 정하상 회장에게는, 생존하신 작은 아버지 정약용 선생이 유일한 집안 어른이었다.

또, Maubant 신부 일행이 서울 근교에 이르렀을 때, 이미 서울에 와 있던 중국인 여항덕 신부가 보낸 10여명의 교우들이 마중나갈 정도로, 박해자들의 감시도 좀 느슨해진 시점이라서, 몇 년 전부터 선교사 영입을 주선하느라고 9회나 북경을 자주 왕래하다가, 마침내 최초로 프랑스 선교사를 성공적으로 영입하였으니, 정하상 회장은 모방신부와 함께 정약용 선생을 반드시, 분명히, 귀국인사 겸, 서양신부 相面 소개 겸, 문병 겸, 방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항이었다고 확신한다. 니벽전역시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앞날이 많이 남지 않아, 죽음을 미리 보면서, 광암 이벽 성조에 관하여, 그 시기에 저술하였다고 보며, 더구나 바로 얼마전 중국인 여항덕 신부에게서 병자성사를 받던 시기이므로, 당시 정하상 회장과 Maubant 신부의 訪問과 3인의 相面 會同은 그리 어렵지 않은, 역사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이 때, 정약용 선생은 기다리고 고대하던, 이른 바, 니벽젼에서 말하던, “셔방샤쟈래도(西方使者來到)”하여 相面하니, 너무나 꿈같고, 감격하여, 고마워서, 자신이 틈틈히, 적어 놨던, 조선성교회 初期 始發에 관한 備忘錄 자료를, 답례삼아, Maubant 신부에게 예물로 바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당시 Maubant신부는, 朝鮮入國 直後라서, 새로운 환경에 긴장하여, 얼떨결에 우선 받아 두고, 지역 공소에 갈 때에도, 지니고 다니며, 읽어본 후, 1838년 10월 초에 가서야 파리 본부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알리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하는 것도 無理는 아니다. 더욱이, Maubant 신부는 입국하기 전에, 비록 약간의 중국어 會話 등을 몇 달간 배우고는 왔어도, 碩學 大文章家인 정약용 선생의 문헌을 금방 해독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믿는다.

정하상 회장의 上宰相書 作成에도 정약용 선생의 指導(*筆者 推定)와 감수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이유는, 정하상 회장은 소년시절, 그러한 상재상서 집필 수준의 漢文 공부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삼촌인 정약용 선생이 초안작성이나 혹은 수정 보완하였다고 믿으며(문체를 보아서도), 또 이승훈 進士의 原稿集, 蔓川遺稿 정리 편집과 발문 작성도 정약용선생이었음이 확인되었고(*筆者 確證), 또 정약용 선생은, 니벽전 저술(*筆者 確證)과, 그리고 상당한 분량에 달하는, 조선성교 始作에 관한 備忘錄 저술도 정약용 선생의 업적임을 볼 때, 특히,박해시대에 年老한 상태에서 아직도 감시를 받는 처지에서, 서양인 선교사 영입을 위한 외로운 조카 정하상 회장의 활동 계획과 시나리오 작성 및 지도 조정역시 末年의 정약용 선생의 업적이라고 생각할 때, 앞으로 시성운동을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Maubant 신부가 회장들한테서 받았다는 필기체의 初期 聖敎會 歷史 備忘錄과 그후 Daveluy 주교가 받아서 대부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파리에 보낸, 조선순교자 備忘記(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e의 내용 原本은 동일한 原稿였음이 여러 가지 점에서 立證되고 있다. 다만, Daveluy 주교가 거하던 집의 火災나, 또는 박해 중에 정약용 선생의 그 原稿가 燒失되거나 紛失되었을 수도 없지는 않다.

여간, 故 崔奭祐 몬시뇰은, 정약용 선생이 기록한, 天主敎 朝鮮 傳來史 원본을 찾아보고 싶다는 말씀을, 1980년대 초에 필자에게도 몇차례 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이 무슨 새로운 말을 하면, 우선 반대부터 하기 좋아하는, 일부 일반 學者然하는 이들은, 정약용 선생은 천주교를 신봉하지도 아니하였고, 유배생활 후에는 더구나, 그 지긋지긋한 조선 천주교 역사를 쓸 사람도 아니므로, 그런 저서는 없다고 반대하였었다. 다만, 정약용 선생이 기록한 여러 墓誌銘을 가지고, Daveluy 주교가 그렇게 확대 역술한 것이라고 하는이도 없지 않았다.

? 그러나 Daveluy 주교의 문장을 읽어가다보면, 특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에 관한 첫 부분들은, 처음부터 프랑스어로 써나가는 創作이 아니라, 어떤 原本 書冊이나 原稿를 앞에 놓고, 그대로 따라가면서, 약간씩 添削하며, 번역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고, 筆者는, 이미, 講學場所 再確認 論稿(*이달의 천진암 통권11호, 제11항, 1994. 5. 5.)에서 밝히며, 요약하여 논증한 바 있다.

? 예를 들어, 天眞消搖集을 비롯한, 정약용 선생의 詩文集을 읽어나가다 보면, 蔓川遺稿 跋文에 나오는 같은 文章과 文脈, 및 심지어, 單語까지도, 예컨대, ‘三十餘年’ 간이라는 귀절이 두 글에 몇차례 쓰여지고 있는데, 이러한 추억소감 표현은 그 문맥상에서, 정약용 선생에게만이 해당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蔓川遺稿는 이승훈 進士의 原稿를 정약용 선생이 편집하고, 자신을 無極觀人이라는 이름으로 跋文을 남긴 것이 확인된다(월간 천진암 통권17호, 1979. 9. 30. 蔓川遺稿 논증).

? 니벽젼 역시, 천천히 또 좀 자세히 한글 古文을 漢文 原本化를 시도해가면서 살펴보면, 그 내용 자체와 문체와, 심지어 유배지에서의 귀향 후 기록에서 약간씩 나타난, 老年期의 연도 착오기록까지도 두 글에서 그대로 반복하고 있듯이, 두 글이 모두 정약용 선생의 著作임을 自證하고 있다. 後學들이 참고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 * Maubant신부의 문서

Extrait d'une lettre de Mr Maubant miss. Ap. en Coree a Mr Langlois Superieur du Seminaire des Missions Etrangeres Yangtchi 3 Xbre 1838.자료수집 제공: 최승룡 신부):

"[…]Nous avons pu cette annee nous procurer secretement des notes manuscrites sur l'e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nne en Coree. Elles differents peu de celles que j'avais composees d'apres la tradition orale,,,,,En 1720 la 58e annee du fameux Kanghi, un autre ambassadeur Coreen nomme Y eut une entrevue avec les Missres. de Pekin et recut d'eux des livres Chretinne qu‘il emporta en Coree. Un nomme Koang, qui recut le surnom de Jean, ayant lu ces livres, eut le bonneur de sentir et de gouter les verites qu’ils renfermaient. Il embrassa la religion Chreti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elytes il envoya en 1783 a Peking un autre delegue egalemant nomme Y,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Y s'adressa aux Missres. frainc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e, sous le nom de Pierre[,,,]

? * Daveluy 주교의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e 첫머리 글:

Les documents dans lesquels nous avons puise la plupart des faits relatifs aux origines de la religion en Coree ont ete reunis par Tieng Jak iong dont il est parle souvent. Il fut nomme Jean au bapteme. Il eut part a presque toutes les affaires de la religion ab initio et etait parent ou ami de presque tous les principaux chefs. Homme distingue dans les lettres et les charges publiques, il eut la faiblesse d'abandonner la Religion, ce qui ne lui evita pas l'exil en 1801. Gracie plusieurs annees apres, il pratiqua avec ferveur, se livra longtemps a tous les exercices de la piete et d'une grande mortification exemplaire et mourut fort chretiennement. Il a laisse en outre quelques ecrits religieux. Nous n'avons fait que copier et relier ces notes malheureusement trop brieves, mais fort bien ecrites,,,,.

* 폴투갈 출신의 北京 敎區長 Alexander Gouvea 주교(1751~1808)가 당시 중국 북경 지역의 교황청 관리자(Administrator Apostolicus)로 겸직하고 있던, 泗川省 교구장 Caradra 주교에게 보낸 간결한 보고서(1797년 8월 15일 자), CARTA do Excellentissimo e Reverendissimo BISPO DE PEKIM, D. Fr. ALEXANDRE DE GOUVEA A o ILLUSTRISSMO E REVERRENDISSIMO BISPO DE CALANDRO는, ‘壬辰亂史 國外資料’라는 제목으로 이미 1971년 12월 30일, 서울대학교 文理科大學 東亞文化硏究所에서 인쇄, 발행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당시 筆者가 大神學生으로 있을 때, 오기선 신부의 추천과 金芳漢 교수(서울대학교 蒙古語 전문 학자)의 청탁으로, 위 보고서 소책자를 이태리어에서 번역하고, 원문에 없는, 한국어판의 註解까지 추가한 것이다. 이 보고서 후편에 첨가된 임진왜란 중의 천주교에 관한 자료는 당시 대신학교 후배이던 성염 군이 맡겠다고 자청하여, 알바이트 삼아 라틴어에서 번역한 것이다. 문화공보부의 지원금으로 착수된 이 책은 실제로 1969년에 번역을 마치고 번역료도 충분히 받았는데, 인쇄소에서 교정하는 분들이, 이태리어를 잘 몰랐는지, 지금 보면, 번역원고와 달리, 인쇄된 곳들이 몇군데씩 눈에 띠고 있다.

간결한 이 보고서는 주로 조선의 순교자 소개 위주로 작성되었는데, 1808년부터, 폴투갈語와, 이태리語, 라틴語, 프랑스語, 스페인語, 등으로 번역, 출판되어, 조선에 선교사로 입국하던 유롭계통, 특히 프랑스 선교사들에게는 한동안 유일한 必讀의 소책자 중 하나처럼 읽혀지기도 하였다. Msgr. Byon

결국, 조선천주교회 창립사는 정약용 선생 원저, 다불뤼 주교 역술이라 함이 옳겠으며, 만천유고 편집과 이벽전 저술, 그리고, 정하상의 상재상서 지도감수 및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들 영입의 중심적 배후 인물로서도 정약용 선생님의 위치를 거의 확신하게 되는 현 단계에 이르러, 이제 정약용 선생이 기록한, 朝鮮聖敎 創立史 자료원본이, 國內外 어디엔가 분명히 있으리라는 예감을 금치 못한다. 曠菴 李檗日誌 4권과 함께, 하루 속히 발견되었으면, 거룩하고 자랑스러운, 한국천주교회의 뿌리를 보다 정확히 정립하는데 최종적인 재확인 자료가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2010/2/10. Msgr. Byon


Writer : 변기영   Date : 2012-04-04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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