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암강학 VI.
2017. 9. 2. 16시 김학렬(약망) 신부.
- 정약용 의 가족관계 -
참고문헌 ; 1. 묘지명. 2. 남보. 3. 벽위편. 4. 순암 안정복의 편지.
5. 교회사 관련 문헌 / 페낭신학교 교과서 + 다블뤼의 비망기 ...
1.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 묘지명
* 다산 시문집 18권> 가계.
= 정약용이 남긴 글의 원칙 ; 가계> 학유에게 노자삼아 준 가계 끝에,
매양 열흘쯤이 되면 집안에 쌓여 있는 편지를 점검하여 번잡스럽거나 남의 눈에 걸릴 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가려내어 심한 것은 불에 태우고 덜한 것은 노를 꼬고 그 다음 것은 찢어진 벽을 바르거나 책의를 만들어 정신이 산뜻해지도록 해야 한다.
편지 한 장을 쓸 때마다 모름지기 두번 세번 읽어보면서 기원하기를,
“이 편지가 사거리의 번화가에 떨어져 있어 원수진 사람이 열어보더라도 나에게 죄가 없을 것인가?” 라고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뒤까지 유전(流傳)되어 허다한 식별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져도 나에게 비난이 없을 것인가?” 라고 한 뒤에 봉함해야 하니, 이것이 군자(君子)가 근신하는 태도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글씨를 빨리 썼으므로 이 계율을 많이 범하였다. 중년에는 화란이 두려워 점차로 이 법도를 지켰더니, 매우 유익하였다. 너희들은 이 점에 명심하라. 경오년(1810, 순조 10년) 2월에 다산의 동암(東庵)에서 쓰다.
#이건방의 방례초본(경세유표) 서에서; “이따금 문장을 대하면, 여러 번 탄식하면서 감히 말을 다하지 못했는바, 이것은 선생이 만났던 시기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이유로 선생이 저 사람들보다 못함이 있다 한다면, 사리에 합당한 말이 아니다. ... 이 점에서 나라가 선생의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나는 거듭 슬퍼하고, 동서양이 서로 비교되지 않음을 깊이 한탄하는 바이다.
그러나 세상이 그 사람의 때를 만나고 못 만남에 따라서 나라의 성쇠와 존망이 매였은즉 내가 선생을 위해 슬퍼함도, 어찌 다만 그의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위한 것뿐이겠는가. ...
무릇 선생의 글이 정사에 시행되어서 질서와 전례의 근본을 밝히게 된다면, 그것이 겨우 한 나라의 법이 될 뿐 아니라 천하 후세의 법이 될 것임도 의심할 바 없다. 그런즉 선생이 비록 당시에는 불우했다 하더라도 후세에 대우받음은 쉽게 요량하지 못했으리라.
무신(戊申1908)년 4월 초하룻날 아침에 후학 이건방(李建芳)은 삼가 서문한다.
**역사학의 원칙有 = 시공상 가까운 기록 + 약용>반대자들의(이기경, 홍낙안) 주장이 우선! (이기경은 정하상의 상재상서도 정약용이 쓴 것이라고 주장 = 김시준역 벽위편 344)
# 여유당전서 해제에, (4) 다산은 해배 이후에 권영좌(權永佐=권진이 아가다 성녀의 부친으로, 대세를 받고 선종한 부친의 권고로 엄마한영이 성녀와 함계 신앙생활 시작 ! ++ 벽위편341,342,389쪽에, 권영좌 진사는 한영이가 그의 처요 두 딸을 언급한다.)와 깊이 교유하였다. 《여유당전서》 제1권 시문집 제7권 《채화정시집(菜花亭詩集)》에 수록된 〈菜花亭新成, 權左衡適至, 次韻東坡, 聊試老筆〉(1821년 5월 5일), 〈우영좌형작수시노필(又令左衡作隨試老筆)〉(앞과 같음) 등이 곧 권영좌와 함께 하면서 지은 시들이다.
권영좌의 《미산시집(米山詩集)》에는 총 208제 341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두호배다산(斗湖拜茶山)〉(5언율시)은 해배 이후 마현(馬峴)에서 지내고 있는 다산을 배알하고 지은 것으로, 다산이 안발(顔髮)은 쇠하였지만 문화(文華)는 아직 다하지 않아 경전을 탐구하여 새로 쓴 책이 서가에 가득하다고 찬미하였다.
권영좌는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 창화한 시도 남아 있다. 〈증유산(贈酉山)〉(7율 2수)이 그것으로, 첫 수는 유산(酉山)(정학연)의 취미였던 ‘합중매(閤中梅)’를 소재로 지었다.
친연성으로 보아 다산과 권영좌 사이에 수창(酬唱)한 시가 적지 않으리라 추정되므로 향후 발견되길 기대한다.( 나의 의견 =성녀 한영이와 권진이 아가다의 순교로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5) 해배 이후 다산은 당색을 넘어서 여러 지식인들과 교유하였다. 앞에서 본 신작이나 홍현주와의 교류는 대표적인 예이다.
# 이상의 사실을 두고 벽위편 274+409쪽에서, 무자 1828년에 윤극배(1810진사,1825 문과)가 상소하기를; <사역의 괴수 정약용은 19년 동안 바닷섬에서 조차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설교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편안히 고향에 돌아가 있을 때에는 원근의 사람들이 그를 신명처럼 받들어 섬겼으며, --가환 관검이 도륙을 당하였음을--->, 하여 권영좌에게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으나, 무턱대고 자기주장이 옳다고 우겨서는 안 되고,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서 진실을 가려내야 한다.
교회사 = 역사학 + 신학 (정약용 요한A.의 종부성사를 모르니 엉뚱한 주장!)
시공상 가까운 기록 + 반대자들의 주장이 진실!
* 시간 = 일기 > 회고록(묘지명=미화) + 공간 = 국내 > 국외 자료
* 박해자들의 주장 > 신자들의 변명 = 이기경의 벽위편 > 정약용의 묘지명
* 고문에 의한 자백 = 증거 효력 상실 + 순교 =박해자들의 신앙증오로, 죽음!
진실 =일기>> 회고록(=정약용의 묘지명=문자 의미가 아니라, 수수께끼를 풀 듯해야!.)
== 그러므로 천주교 박해로 순교한 절친들의 묘지명은 없다 = 정약종, 이벽, 이승훈, 권일신, 이종4촌형 윤지충(=윤모라고만 기록한다.) 등.
*** 다산시문집 제15권 > 묘지명(墓誌銘)
1 정헌(貞軒 이가환)의 묘지명(墓誌銘) / 벽위편267에 활약하는 이가환의 손자 이시자 !
@ 이벽과 이가환, 이기양의 교리 논쟁!
= 이가환: 백서 47-52행/ 갑진-을사무렵(겨울/정헌 묘지명)에 이벽에 굴복당하여, 천학초함과 함께 성년광익까지 가져다 거듭 읽고는 믿기로 결심하고,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아침저녁으로 이벽 등과 비밀리에 왕래하며 열심히 하였다. /1789년에 윤유일이 밀사로 갈 때 은자 500냥(현 5천만원 정도=징의 232)을 봉헌하였고(김시준240), 1799년에 충청도 보령에서 압수된 신자 연명부에 이가환이 우두머리로 실려있고(벽위편), 부연사가 되어 직접 북경에서 영세하려 하였다.(백서) 신유박해를 맞아 권철신과 함께 장폐로 순교하였다.
*-달레상 308/ 이가환이 회담 날자를 정하여 이벽의 집에 모였다. 호사가들의 한떼가 이 굉장한 토론을 참관하여, 사흘 동안 진행된 끝에 이가환이 패배하여, ‘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2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의 묘지명 / 벽위편275에 활약하는 이기양의 손자 이의창 !
공의 휘(諱)는 기양(基讓)이고,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茯菴)이니, 광주 이씨(廣州李氏)이다. 그 선조(先祖)에 좌의정(左議政) 극균(克均)이 연산군(燕山君) 때 화를 입은 뒤로 4대 동안 떨치지 못하였다가 한음(漢陰) 덕형(德馨)이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공덕(功德)이 매우 드러났다.---자란 뒤에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 선생에게 수학(受學)하고 장천(長川) 이철환(李嚞煥) 선생과 교유(交遊)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성호 선생(星湖先生)의 문인들이다. 공은 이들에게서 천인성명(天人性命)의 학을 듣고 물러나서는 경(經)과 사(史)를 익혀 모두 박식ㆍ정통하였고,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과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등과 학문을 강습하여 덕을 쌓았다. 갑오년(1774, 영조 50) 겨울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하여 4년 뒤 영릉 참봉(寧陵參奉)이 되고 7년 사이에 여러 번 승진하였는데 문의 현령(文義縣令)이 되어서는 자혜(慈惠)로운 정사로 소문이 났다.
현령을 그만두고 돌아와서는 땅 한 마지기 없이 이천(利川 =단내)에 우거(寓居)하니, 초가(草家) 단칸은 지붕도 이지 못하여 서까래가 드러났으며, 낮은 울타리에 비바람이 들이쳐 집안이 썰렁하였다. 공은 양이 커서 한 끼에 몇 사발의 밥을 먹어야 하는데도 밥커녕 시래기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노점[虛勞]과 허기병을 얻었다.
몇 년 뒤 다시 벼슬에 나아가 진산 현감(珍山縣監)이 되니, 이때는 건륭 말년으로 우리 정종대왕께서 채번암(蔡樊菴)을 상국(相國)에 등용하여 붕당을 타파하고 황극(皇極)을 세우시는 한편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현자(賢者)를 구하셨다. 또 8년(을묘1794) 봄에는 이가환을 발탁하시어 정경(正卿 판서 判書)으로 삼고 신 용(鏞)을 하대부(下大夫)로 삼으시니, 악당(惡黨)들이 꺼려 서로 무함하고 헐뜯었다.
여름 6월에 대사헌 권유(權裕)를 사주하여 사학(邪學)을 감싼다는 명목으로 상국을 공격하게 하고, 가을 7월에 산반(散班) 박장설(朴長卨)을 시켜 사학의 우두머리라고 가환을 공격하였다. 근거없이 떠도는 말이 날로 심해지자 상은 괴롭게 여기시어 가환을 충주 목사로 나 용을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내보내셨으니 이는 그들을 조정하여 분쟁을 중재(仲裁)하려는 처사였다.
그리고 진산 현감인 공을 서울로 불러 태학(太學)의 과시(課試)에 응시케 하셨다. 상이 공을 인견(引見)하고는 매우 기뻐하여 즉석에서 부(賦) 한 편을 시험해 보시고 특별히 사제(賜第)하시니, 이때가 9월이었다. 10월에 공을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제수하시고는 상국에게, “경(卿)은 늙고 경을 대신할 만한 사람은 없어 근심하였는데 지금 이기양을 얻으니 나는 아무 걱정이 없다.” 하셨다. 오래지 않아 가환과 나도 부름을 받아 다시 돌아왔고, 고(故) 상국(相國) 허적(許積)도 복관(復官)되었다. 당시 악당들이 가환과 나 두 사람을 제거하려는 사실을 상이 아셨기 때문에 외견(外見)으로는 우리 두 사람을 내치는 것처럼 하셨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한 사람을 더 보태어 세 사람이 되게 하시니, 악당들이 매우 분해하였다. ---공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사위가 되었고, 작은아들은 금옹과 약혼하였다. 그때 공에 대한 악당들의 공격이 날로 심하여 금옹이 겁이 나서 성혼(成婚)하고자 하지 않으니, 상께서 이 소문을 들으시고, “장차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질 것이다. 자기들끼리 불화하는 것이 근심이지 외부의 공격이야 어찌 두려울 게 있겠는가.” 하시고, 이익운(李益運, =계자 이명호 요한 순교자 독살)과 나에게 이가환을 책망하여 언약을 어기지 말고 성혼토록 하라고 하셨다. 오래지 않아 복암이 등용되었으니, 상께서 우리들을 한집안 사람처럼 보심이 이와 같았다.---기미년(1799, 정조 23)에 조정에 들어와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는데, 이해 봄 번옹(樊翁)이 죽었다.
1799년 10월에 공이 호조 참판으로 부사(副使)가 되고 지금의 상국 김재찬(金載瓚)이 정사(正使)가 되어 함께 중국으로 가는데, 정사 김재찬이 공과 이야기를 해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친교(親交)를 맺고, 사행(使行)에서 돌아온 뒤에도 서로 방문하여 매우 사이좋게 지냈다. 김공은 원래 남을 방문하거나 서로 어울리는 성품이 아니었는데, 공 때문에 이런 성품을 고쳤으니 서울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공이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굴대[軸] 끝에 십자(十字)로 된 풍차(風車)를 설치하고 아래에는 횡목(橫木)을 설치하여 만든 박면교거(剝棉攪車)가 있는데 목화(木花) 따는 사람이 그 의자에 앉아 발판을 밟으면 하루에 수백 근의 목화를 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구매(購買)해 와서 조정에 바치니, 상은 삼영문(三營門)에 명하여 각각 그 양식(樣式)에 따라 대여섯 개를 만들어 팔도(八道)에 반포하게 하셨다. 이때 사람들은 박면교거를 구입해 온 공의 공이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공에 비길 만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상이 승하하시니 그 일도 드디어 중지되었다.
경신년(1800, 정조 24) 봄 병조 참판이 되고 우승지(右承旨)가 되었으며, 여름에 형조 참판이 되고 한성 우윤(漢城右尹)이 되고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6월에 정종이 승하하셨고, 가을에는 예조 참판이 되고 겨울에는 좌승지가 되었다. 신유년 2월 9일에 큰 옥사(獄事)가 일어나 금옹(錦翁) 등 일대(一隊)가 이미 옥에 갇혔으나 12월까지 공은 여전히 승지로 있었다. 16일에 목만중(睦萬中) 등이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상소(上疏)하여 공을 공격하게 하니, 사헌부도 잇달아 소(疏)를 올렸다. 마침내 공이 체포ㆍ하옥되니, 물론(物論)은 공을 억울하게 여겼다. 목만중은 곧 스스로 상소하기를, “이기양은 명조(名祖)의 후손으로 평소 그를 아끼는 제우(儕友)가 많았으나, 본래 성품이 음흉하고 거짓되어 잘못을 감추는 데 능합니다. 그러나 기양이 권철신(權哲身)ㆍ홍낙민(洪樂敏)ㆍ이가환 등과 혼인을 맺었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으므로 그에 대한 징치(懲治)는 그저 준동(蠢動)하는 무리와는 더욱 구별이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옥관(獄官)은 드디어 이 목만중의 말에 의거하여 고문(拷問)하였다. 아, 공이 권씨ㆍ홍씨와 혼인한 것은 그들에게 명성만 있고 비방이 없을 때였고, 금옹과 혼인한 것은 선조(先朝)께서도 아시는 바였다. 공은 평생 동안 서서(西書 곧 기독교 서적)를 한 자도 보지 않았건만(나의 의견= 이는 거짓변명으로, 이벽과의 토론과 순암의 편지를 참조) 혼인한 것 때문에 이같은 무함을 입었으니, 이런 일은 기축ㆍ경신 두 옥사(獄事) 때에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옥관이 공을 끝까지 신문하였으나 증거가 나타나지 않자 드디어 단천(端川)으로 귀양보냈다. 단천은 마천령(摩天嶺) 아래 슬해(瑟海) 가에 위치한 곳이므로 기후가 차다. 공은 본래 병이 있는 몸이라서 찬 기후를 견디지 못하여 임술년(1802, 순조 2) 12월 6일에 적지(謫地)에서 죽었으니, 악인(惡人)이 선류(善類)를 해침이 이처럼 혹독했다. 그뒤 8년째 되는 기사년(1809, 순조 9) 가을에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 경연에서 공의 무죄를 아뢰어 마침내 은전(恩典)을 입어 죄명을 씻고 복작되었다. 다음해 경오년 가을 나도 방면의 은전을 받았으나 이기경(李基慶)의 대계(臺啓)로 인하여 9년 뒤인 무인년 가을에야 비로소 방면되었다. 공과 같은 죄목으로 귀양갔던 나는 살아서 돌아왔는데 공은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공의 죽음은 실로 억울한 죽음이었다.----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맏 총억(寵億)은 을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둘째 방억(龐億)은 창상(滄桑)의 변은 거치고 나서 금년(=1822)에 진사가 되니, 사람들은 모두 고목(枯木)에 꽃이 피었다고 하였다. 방억의 아들이 총억의 양자(=이의경)가 되었다. 공의 관(棺)이 단천에서 돌아와 광주(廣州) 율현리(栗峴里)에...
부 한화(閒話)
일찍이 대교초당(碓橋草堂)에서 나와 《역대전(易大全)》 몇 구절을 강론하였는데, 공이,
“형이상(形而上)을 도(道)라 하고 형이하(形而下)를 기(器)라 하니, 도와 기가 모두 형(形)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인가?” 하기에, 내가, “도는 형을 초월(超越)하지만, 기는 형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하니, 공은, “형이하가 스스로 형이하가 되는 것이라면 형이상도 스스로 형이상이 되는 것이다. 형이상과 형이하의 글의 예(例)가 똑 같은데 자네는 곧 도는 형에서 초월하지만 기는 형에서 떠나지 못한다 하니, 어찌 공언(公言)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내가, “형에서 초월하기 때문에 형이상이라 하고, 형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형이하라 하는 것이다.” ---
사랑실천의 일화 // 선중씨가 일찍이 충주(忠州)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 단천초옥(丹川草屋) 이천(利川)에 있다. 으로 공을 방문하니 공이 집에 없었다. 동자(童子)에게 물어 그 동자와 함께 그가 갔다는 이웃집으로 갔더니, 다 쓰러져가는 한 칸의 초가집에 비가 새어 부엌에 흙탕물이 가득하였다. 공은 그 부엌에 솥을 걸어놓고 미음을 끓이는데 나무가 물에 젖어 타지 않으니 다 망가진 부채로 부치느라 애쓰고 있었다. 중씨께서 무엇하느냐고 묻자, 복암은 인사할 것 없다 하고는 조금 뒤 미음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귀신 꼴을 한 노파가 알몸으로 누워 있었는데 똥 오줌을 마구 싸대어 악취(惡臭)를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복암은 그 노파를 부축해 일으켜 미음을 먹이며 좋은 말로 위로하니 노파는 한숨을 내쉬어가며 팔자 타령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복암은 노파를 달래고 비위를 맞추어 끝내 그 미음을 다 먹인 다음 자리에 눕히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중씨가 어떤 노파냐고 물으니, 복암이, “나는 본래 종이 없으므로 내가 병이 생겼을 적에 이 노파 덕으로 살아났다. 그런데 이 노파에게는 자녀도 친척도 없으며, 또 마을이 작아 가까운 이웃도 없기 때문에 내가 돌보아 주는 것이다.” 하고는 크게 웃었다. 선중씨께서는 매양 이 일은 사람을 감복케 한다고 하였다.
@ 이벽과 이가환, 이기양의 교리 논쟁!
*-달레상 310 / 그 후 이기양도 토론을 견뎌낼 수 없었고, 이기양이 안순암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안정복도 신자가 되도록 설득하려고 하였다.
1. 안순암이 권철신과 이사흥에게 보내는 편지 1784년 (12월?)
2. 안순암이 이사흥에게 답하는 편지 을사 1785년 봄
-저번에1784년? 성오 (권일신)이 힘써 이 학문을 내게 권하였지만, 내가 귓전에 지나가는 바람을 듣듯이 하였네!
3.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묘지명
성호 선생(星湖先生)은 독학(篤學)ㆍ역행(力行)하여 정주(程朱)를 따르고 근원을 찾아 공자(孔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성문(聖門)의 심오한 뜻을 계발하여 후학(後學)들에게 보여주셨다. 선생이 만년에 한 제자를 얻었으니 그가 바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이다. 공은 영민하고 지혜로우며 어질고 화순(和順)하여 재덕(才德)을 겸비하였으므로 선생이 매우 사랑하여 문학(文學)은 자하(子夏) 같고 포양(布揚)은 자공(子貢) 같을 것이라 믿으셨더니, 선생이 죽은 뒤로는 과연 재주 있고 준수한 후배(後輩)들이 모두 공에게 모여들었다.
서서(西書)가 나오자 녹암의 동생 일신(日身)이 처음으로 화에 걸려 임자년(1792, 정조 16) 봄에 죽음을 당하였고 온 집안이 모두 서교(西敎)를 믿는다는 지목(指目)을 받았으나 녹암이 능히 금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녹암 역시 신유년 봄에 죽음을 당하여 드디어 학맥(學脈)이 단절되어 성호의 문하에 다시 학맥을 이을 만한 이가 없게 되었으니, 이는 녹암 한 집안의 비운(悲運)일 뿐 아니라 일세의 비운이었다. 공의 휘는 철신, 자는 기명(旣明)이며, 자호(自號)는 녹암이고 재호(齋號)는 감호(鑑湖)이니(‘명기소거왈 감호’를 이렇게 번역할 수는 없다.)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아버지 시암(尸菴) 암(巖, 맹용)은 논의(論議)가 준엄하고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집안 분위기 <=칠극의 실천 사례 // 그 문하에 들어간 자는 다만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가 사방으로 퍼져 마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것이 지란(芝蘭)의 방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아들과 조카들이 집안에 가득하나 마치 친형제처럼 화합하니, 그 집에 10여 일이나 한 달을 머문 뒤에야 비로소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비(奴婢)와 전원(田園), 또는 비축된 곡식을 서로 함께 사용하여 내것 네것의 구별이 조금도 없으니,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까지도 모두 길이 잘 들고 순하여 서로 싸우는 소리가 없었다.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비록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고루 나누어 종들에게까지 돌려주었다. 그러므로 친척과 이웃이 감화(感化)되고 향리(鄕里)가 사모하였으며, 먼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우러러 보니, 학문과 행검(行檢)을 힘쓰는 상류 사족(士族)들까지 모두 공을 사표(師表)로 삼아 자제(子弟)를 문하에 들여보냈다. 그에 따라 명성(名聲)이 자자하여 세상에서 정백순(程伯淳 명도 선생(明道先生) 정호(程顥)의 자)이 다시 태어났다고 하였다.
건륭(乾隆) 갑진년(1784, 정조 8)에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책봉(冊封)하고 경재(卿宰)들에게 동궁(東宮)의 관원(官員)이 될 만한 학행(學行)과 조리(操履)를 가진 사람을 각각 천거하게 하니, 판서 홍수보(洪秀輔)와 참판 채홍리(蔡弘履)가 함께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여졌다고 공을 천거하였으나 마침 세자가 5세에 죽었기 때문에 그 일은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경연관(經筵官)으로 초선(抄選)되었으니 끝내 그 벼슬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과거 이벽(李檗)이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宣敎)할 때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벽은,“감호(鑑湖)는 사류(士類)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감호를 방문하여 10여 일을 묵은 뒤에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공의 동생 일신(日身)이 열심히 이벽을 따랐다. 그러나 공은 서교를 믿지 않고 《우제의(虞祭義)》 1편을 지어 제사의 뜻을 밝혔다.(CF. 안순암과의 편지 토론과 여주의 김건순이 제사관련하여 상의함) 신해년 겨울 호남옥사(湖南獄事)가 일어나자 목만중(睦萬中)과 홍낙안(洪樂安)이 일신을 지적하여 고발하였으니, 일신이 끝내 죄를 자백하지 않으므로 제주(濟州)로 귀양보냈다. 상께서 타이르고 깨우치시니 일신이 옥중(獄中)에서 회오문(悔悟文)을 지어 올렸으므로 죄를 조금 감하여 예산(禮山)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일신이 옥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으니, 이때부터 문도(門徒)가 다 끊어졌다. 공은 문을 닫아걸고 슬픔을 지닌 채 10여 년 동안이나 산문(山門)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신유년 봄 공이 체포되어 옥에 갇혀 국문(鞫問)을 받았으나 증거가 나타나지 않자, 어떤 자가, “을묘년에 죽은 윤유일(尹有一)이 본시 그의 제자였으니, 그 비밀스러운 속사정을 알지 못한 바가 없었을 것이다.” 하니, 드디어 이 자의 말에 의하여 공의 사형(死刑)을 결정하였다. 그때 마침 고문의 상처로 인해 공이 죽자 드디어 기시(棄市)할 것을 논의하였으니, 그날이 2월 25일이었다. 아, 인후(仁厚)하기는 기린(麒麟) 같고 자효(慈孝)하기는 호유(虎蜼) 같고 지혜롭기는 새벽 별 같고 얼굴과 용모는 봄 구름과 상서로운 해 같은 분이 형틀에서 죽어 시체가 거리에 버려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중용(中庸)》을 논함에는 소불문(所不聞)ㆍ소부도(所不覩)를 상천지재 무성무취(上天之載無聲無臭)라 하였으며, 사단(四端)을 논함에는 조기(趙岐)의 설을 따라 단(端)은 수(首)이며, 인의예지(仁義禮智)는 행사(行事)의 성명(成名)이라 하였다. 상례(喪禮)를 논함에는 형제(兄弟)는 동족(同族)의 통칭(通稱)이고, 입후(立後)는 죽은 사람의 후사(後嗣)가 되는 것이며, 대하척(帶下尺)은 옷깃의 길이이며, 연미(燕尾)는 본래 없는 물건이며, 조상(吊喪)을 받을 때 주인(主人)만이 객(客)에게 절하고 그밖의 주인은 객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라 하여, 이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
선형(先兄) 약전(若銓)이 공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 1779년 겨울 천진암(天眞菴)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할 적에 이벽(李檗)이 눈오는 밤에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 놓고 경(經)을 담론(談論)하였는데, 그 7년(=1785 명례방집회) 뒤에 비방이 생겼으니, 성대한 자리는 두 번 다시 열리기 어렵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공이 죽은 지 한 달 뒤에 호남에서 유항검(柳恒儉) 등을 잡아 포도청으로 압송하니, 포청에서는 온갖 고문을 다하여, “이가환 등이 은(銀)을 내어 선박(船舶)을 부르려 했는데, 공도 홍낙민(洪樂敏)ㆍ이단원(李端源)과 함께 그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초사(招辭)를 받아내었다.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은 대계(臺啓)하여 공에게 가율(加律)할 것을 청하였다. 아, 정말로 이런 계획이 있었다면 어찌 반드시 봄에 죽은 네 사람이 주관하였겠는가. 살아 있는 사람을 끌어들이면 변명할 것이므로 죽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고문의 고통을 면하고자 한 것일 뿐, 공이 이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린아이들까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약용의 변명일 뿐이다.!)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참판(參判) 상빈(尙賓)의 따님이고, 배위(配位)는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돈(墩)의 따님이다. 공에게 아들이 없어 집안에서 입후(立後)할 것을 상의하니, 공이,“아버지가 살아계시면 내게 승중(承重)이 없고, 내가 살아 있으면 후사(後嗣)를 말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 입후를 하겠는가.”하였다. 시암(尸菴+1780)이 죽은 뒤 일신(日身)의 아들 상문(相門)을 양자(養子)로 삼았다. 상문 역시 신유년에 죽었는데, 황(愰)과 경(憬) 두 형제를 두었다. 공은 딸 하나를(=둘째는 충주의 이용섭에 시집) 두었는데, 이총억(李寵億)에게 시집갔다
4. 매장(梅丈) 오석충(吳錫忠 =스테파노, 권철신의 계자인 권상문의 장인)의 묘지명
매장의 휘(諱)는 석충(錫忠), 자는 유원(幼源)이며, 매자항(梅子巷)에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매장(梅丈)이라 불렀다. 동복 오씨(同福吳氏)로 원조(遠祖)는 문간공(文簡公) 식(軾)이다.--- 을묘년에 목만중이 이가환(李家煥)을 모살(謀殺)하려(=용도 한영익 진사의 고발을 들은 사건으로, 이가환은 박제가의 병오1786소회를 실현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할 때, 공은 또 윤신(尹愼)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환의 무죄를 밝혔다가 불량배(不良輩)들에게 크게 미움을 샀다. 신유년 봄에 목만중ㆍ홍낙안 등이 대사간 신봉조(申鳳朝)를 시켜 발계(發啓)하기를, “오석충(吳錫忠)은 바로 이가환의 호법신(護法神)으로 흉얼(凶孼)과 체결(締結)하여 성원(聲援)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흉얼이란 바로 홍봉한(洪鳳漢)의 아들 홍낙임(洪樂任)을 지적한 것이다. 공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옥관이 체결한 사실을 캐내기 위하여 말할 수 없는 참혹한 고문(拷問)을 가하니, 공은 정신이 혼미하여 거짓으로 자백하기를, “병신년 가을에 한 번 가서 만난 사실이 있다.” 하였다. 아! 병신년 가을이라면 홍인한(洪麟漢)이 사사(賜死)된 때인데, 어느 누가 홍낙임을 만나보러 갔겠는가.--- 악인(惡人)들은 석충이 죄에서 벗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은밀히 다른 죄수(罪囚)의 집에서 압수한 서서(西書) 1권을 가져다가 석충의 서가(書架)에 끼워 놓았다. 옥관은 곧 이것을 증거로 삼아 석충을 임자도(荏子島)로 유배시켰다. 임자도는 영광(靈光) 앞 바다 가운데 있다. ...
공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권상문(權相問)의 아내가 되어 아들 형제를 두었다. 공은 마침내 대(代)를 잇지 못하였으니 누가 공을 알겠는가. 아, 슬프다. 명은 다음과 같다. 병인년(1806) 9월에 졸(卒)했고, 묘는 과천(果川) 금정(錦亭) 선영의 남쪽에 있다.
부한화/ 정헌(貞軒 이가환)이 광주(廣州)ㆍ송경(松京)의 유수가 되었을 적에도 아무 것도 도와준 것이 없었으므로 사림이 모두 안타깝게 여겼다.
5. 선중씨(先仲氏)의 묘지명
= 안순암의 갑진1784년 12월/ 2편지, 권기명에 답함 /cf. 벽위편, 안순암의 을사일기(뒤에);
그런데 지금 또 듣자하니, 공이 서양의 천주학에 있어 경망하고 철없는 젊은 것들의 앞잡이가 되고 있다는데, 이렇게 갑자기 이학(異學)으로 가버리다니 과연 어찌해서 그러한 것인가?
지금 들리는 말에 아무 아무가 서로 약속을 하고 신학(新學)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들 모두가 공의 절친한 벗 아니면 공의 문도들 아닌가. 공이 만약 금하고 억제했으면 이렇게 날뛸 리가 있겠는가. 공은 그들을 금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물결을 조장하여 더 일으키고 있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그러나 이미 천주학에 빠져버린 공들이 마음을 씻고 발길을 돌려 그 폐습을 털어 버리지 않고, 도리어 나를 지칭하여, “지옥은 바로 아무(=순암) 어른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한다면(=정약전의 말), 나는 이 말을 달게 받아들여 더이상 차마 이러한 추태를 부리지 않겠네.
벽위편 99/ 80난 늙은이가 배울 수 있는 바가 아니니, -- 그가(약전) 또 말하기를 “밤낮으로 신음하고 괴로워하여 죽으려 하여도 죽지도 못하니, 과연 가련한 인생이다.(앞서 정약전이 이 늙은이가 가련하다고 말한 까닭이다.)
다산시문집 제16권 > 묘지명(墓誌銘)
1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광중본(壙中本)
2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집중본(集中本)
3 오한 선생(聱漢先生) 창원도호부사(昌原都護府使) 손공(孫公) 기양(起陽) 의 묘지명(墓誌銘)
4 남고(南皐) 윤 참의(尹參議)의 묘지명
5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윤무구(尹无咎)의 묘지경
6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금리(錦里) 이주신(李周臣)의 묘지명
7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옹산(翁山) 윤공(尹公)의 묘지명
8. 계부(季父) 가옹(稼翁)의 묘지명
공의 휘는 재진(載進), 자는 진오(晉吾)이다. 정씨(丁氏)는 본디 압해(押海)에서 나왔는데, 고려 말엽에 배천(白川)에 옮겨 살았다가 근세에 열수(洌水) 가에 살았으니 곧 광주(廣州)의 마현(馬峴)이다.
아버지의 휘는 지해(志諧)이니 시운이 비색하여 모두 포의(布衣)로 세상을 마쳤다. 어머니는 풍산 홍씨(豊山洪氏)로 전라 도사(全羅道事) 휘 길보(吉輔)의 딸이다. 세 아들을 낳으니 공이 막내이다.
공이 여러 자질 중에 용(鏞)을 가장 사랑하여 은근하게 길러줌이 친자식보다 나음이 있었다. 갑진년(1784, 정조 8) 봄에 용을 공의 후사로 삼으려 하였다. 용이 망령되이 고례(古禮)를 인증하였더니, 공이 그만두고 옥천공(沃川公)의 둘째 아들을 취하여 자식으로 삼았으니, 지금 상려(喪廬)에 있는 약유(若裕)가 바로 그다. 그러나 공은 평소처럼 나를 다독거리고 사랑하였다. 아, 지극하시다.
우리 형제 3인이 젊어서 서울에 노닐었는데, 불행한 때를 만나 부형에게 근심을 크게 끼쳤다. 그런데 공이 더욱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기를 마치 불길이 집을 태우는 것처럼 하였다. 신유년(1801, 순조 1)에 화가 일어나자 공은 비분(悲憤)하여 살고 싶지 않은 듯하였다. 그러나 그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구휼하여 집을 장만해 주고 또 때때로 위급함을 구해주었다.
9 선백씨(先伯氏) 진사공(進士公 정약현)의 묘지명
공은, 휘(諱)는 약현(若鉉)이고 자는 태현(太玄)이다. 우리 정씨(丁氏)의 본관은 압해(押海)이니 지금 나주(羅州)에 예속되었다.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이니 음보(蔭補) 통덕랑이다.
아버지의 휘는 재원(載遠)이다. 영종(英宗) 임오년(1762, 영조 38)에 신방진사(新榜進士)로서 연석(筵席)에 올라가 제의(祭義)를 강론하였더니 특지(特旨)로 관직을 제수받았는데 벼슬이 오래되면서 치적(治績)이 있었고, 진주 목사에 이르러 임지에서 죽었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의령 남씨(宜寧南氏) 처사(處士) 하덕(夏德)의 딸이니. 개국원훈(開國元勳) 남재(南在)의 후예이다. 영종(英宗) 신미년(1751, 영조 27) 5월 초6일에 공을 광주(廣州)의 마현(馬峴) 집에서 낳았다. 그 이듬해 10월에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니, 유모(乳母)를 따라 수년간 외가에서 자랐다.
점차 장성하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배우고 약관(弱冠)에 감시(監試)에 합격하였다. 계묘년(1783, 정조 7) 봄에 감시(監試) 양장(兩場)에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 모두 합격하지 못하였다. 을묘년(1795, 정약용의 노력으로?) 봄에 이르러서야 진사시(進士試) 3등 제34인에 합격하였으니, 이때 나이 45세였다. 아, 늦었도다. --중년에 자호를 ‘보연(鬴淵)’이라 하였다. 저서로는 시고(詩稿) 3권이 있다. 도광(道光 청 선종(淸宣宗)의 연호) 신사년(1821, 순조 21) 가을에 돌림 역질(疫疾)이 갑자기 유행하여 9월 초4일에 옛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71이다.
전취(前娶)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니 아버지는 보만(溥萬)인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할아버지는 달(鐽)인데 호남 병마사(湖南兵馬使)이며 부제학 정형(廷馨)의 후예이다.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진흥(震興)은 젖먹이 때 죽었다. 딸로 맏은 황시복(黃時福)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홍영관(洪永觀)에게 출가하였으니 지금 정언(正言)이며, 다음은 홍재영(洪梓榮)에게 출가하였다 --홍영관(洪永觀)은 2남 1녀를 두었고, 나머지도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황사영과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의 집안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씨(李氏= 이벽의 누님)는 경자년(1780, 정조 4)에 예천(醴泉)에서 죽으니 무덤은 충주 하담(荷潭) 선고(先考) 진주공(晋州公)의 무덤 동쪽에 있다. 공이 죽던 때에는 하담이 멀어서 가지 못하고, 의논하여 집 동산의 기슭에 묘를 쓸 만한 혈(穴)이 있으므로 유월(踰月 달을 넘김)하여 장사지내되 간좌 곤향(艮坐坤向)으로 무덤을 만드니, 뒷날 김씨(金氏)를 부장(祔葬)하려 하는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10 서모(庶母) 김씨(金氏)의 묘지명
11 형(약전)의 아들 학초(學樵)의 묘지명
학초(學樵)의 자는 어옹(漁翁), 소명(小名)은 봉륙(封六)이니 선중씨(先仲氏) 손암 선생(巽庵先生 이름은 약전(若銓))의 아들이다. 손암 선생은 여러 번 아들을 낳았으나 키우지 못하고 만년에 이 아들을 얻어 지극히 사랑하였다. 학초는 말이 조금 서툴렀다. 그러나 6~7세 때에 이미 서사(書史)를 읽고 그 득실을 의논할 줄 알았다. 일찍이 손무(孫武)가 부인(婦人)에게 병법을 가르치는 것을 논할 적에 우부인(右婦人)ㆍ좌부인(左婦人)의 훈의(訓義)가 통하지 않음을 의심하여 스스로 의견을 내세웠는데, 과연 본뜻이었다. 보는 이는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또 바둑을 신묘하게 알아 7~8세에 이미 어른들과 대국(對局)하였는데 모두 강적으로 여겼다. --가경(嘉慶)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화가 일어나서 손암 선생은 신지도(薪知島)로 귀양가고 나는 장기(長鬐)로 귀양갔다. 겨울에 다시 잡혀왔다가 다시 살아나 중씨(仲氏)는 흑산도(黑山島)로 정배(定配)되고 나는 강진(康津)으로 정배되어 형제가 같은 길로 길을 뜨게 되었다. 학초는 땋은 머리로 화성(華城)의 남쪽 유천(柳川)의 점사(店舍)에서 전송하였는데 그때 나이 11세였다. 집에 번국(番國)이 소산인 사안주(蛇眼珠) 1매가 있었는데 곧 큰 구렁이의 눈동자였다. 대체로 이 구슬이 있는 곳에는 뱀ㆍ독사 따위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뱀ㆍ독사를 만날 경우에 곧 이 구슬로 비추면 뱀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죽어 마른 나무가 되어버리니, 기이한 보배였다. 학초가 울며 이 구슬을 바치면서,
“흑산도는 초목이 무성하여 뱀ㆍ독사가 많으니 이 구슬로 스스로를 보호하소서.”
하니, 손암선생이 받아서 주머니에 넣는 한편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는 드디어 서로 헤어졌다. --중씨(仲氏)의 휘는 약전(若銓)이니 벼슬은 병조 좌랑에 그치었다. 학초가 죽은 지 10년 뒤(1816년)에 해중(海中 흑산도를 말함)에서 죽었다.
학초는 건륭 신해년(1971, 정조 15) 봄 2월 초 10일에 태어나서 가경 정묘년(1807, 순조 7)가을 7월 19일에 죽으니 그 수가 겨우 17세이다. 파평 윤씨(坡平尹氏)에게 장가드니, 상국(相國) 개(漑)의 후예이다. 광주(廣州) 초부(草阜)의 북쪽, 조곡(鳥谷)의 기슭, 두전(豆田)의 곁에 장사지내니, 그 무덤은 해좌(亥坐)인 듯하다.
12 형(약현)의 아들 학수(學樹)의 묘지명
학수(學樹)는 자는 예숙(藝叔), 소명은 칠복(七福)이니, 선백씨(先伯氏) 진사공(進士公 이름은 약현(若鉉))의 맏아들이다. 선백씨공(先伯氏公)이 종통(宗統)을 이은 집으로, 경주 이씨(慶州李氏)에게 장가들어 3녀를 두고, 뒤에 의성 김씨(義城金氏)에게 장가들어 3녀를 낳고 오래도록 자식이 없다가, 가경 정사년(1797, 정조 21) 3월 16일에 비로소 아들 하나를 낳으니 곧 학수이다. 그때 공의 나이 47세이니 종족이다경하하였다.--관례(冠禮)를 한 뒤에는 또 성연(惺然 깨달은 모양)히 깨친 바가 있었다. 그 종형학연(學淵)ㆍ학유(學游) 등과 뜻이 계합(契合)하고, 우애가 동복형제와도 같았으며, 무릇 싸워서 반목하고 불평하는 소리는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날마다 그 계부(季父 정약용 자신을 말함)가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기도하여 장차 있는 힘을 다 기울여 수학하려 하였다. 그런데 무인년(순조 18, 1818) 9월 15일에 내가 강진(康津)으로부터 은전을 입어 향리로 돌아오니, 학수가 죽어 연제(練祭)를 지낸 지 이미 3일이 지났다. 아, 애석하도다. --학수(學樹) 이후에 또 2남을 낳았는데 하나는 요사(夭死)하고 하나는 존립(存立)하였다. 그 존립한 자는 이름이 학순(學淳)이니, 이제 섭제(攝祭)하고 있다. 뒷날 자식을 낳으면 곧 세워 학수의 후사로 삼을 것이다. 학수의 죽음은 청축년(1817, 순조 17) 9월 13일에 있었고 장지는 마현(馬峴)의 동쪽 언덕, 백씨의 무덤 앞 두어 걸음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또한 같은 간좌(艮坐)이다.
13 효부(孝婦) 심씨(沈氏)의 묘지명
14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윤공(尹公) 명상(命相) 의 묘지명 병진년(1856, 철종 7)
15 상곡(上谷) 최 처사(崔處士)의 묘지명
16 태학생(太學生) 정공(鄭公)의 묘지명
17 윤계진(尹季軫)의 묘지명 무오년(1798, 정조 22)
18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의 묘지명 /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의 묘지명
용이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연천현(漣川縣)으로 갔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선비(先妣) 숙인(淑人)이 술 담그고 장 달이는 여가에 형수와 저포(樗蒲)놀이를 하여 3이야 6이야 하며 그 즐거움이 융융하였다. 수년 뒤에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니, 용이 그때 겨우 9세였다. 머리에 이와 서캐가 득실거리고 때가 얼굴에 더덕더덕하였는데 형수가 날마다 힘들여 씻기고 빗질하였다. 그러나 용은 또한 흔들며 벗어나고 형수에게로 가려 하지 않았다. 형수는 빗는 빗과 세수대야를 들고 따라와서 어루만지며 씻으라고 사정하였다. 달아나면 잡기도 하고 울면 조롱도 하였다. 꾸짖고 놀려대는 소리가 뒤섞여 떠들썩하니 온 집안이 한바탕 웃고 모두들 용을 밉살스럽게 여겼다.
형수는 자성(姿性)이 헌걸차서 우뚝하기가 마치 장부와 같고 녹록(碌碌)하게 자잘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숙인(先淑人 정약용의 어머니)이 돌아가고 선군(先君) 또한 관직에서 물러나 집안 살림은 더욱 쓸쓸하여 제수(祭需)와 닭ㆍ기장 따위의 음식 지공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형수가 혼자서 집안 살림을 꾸려갔다. 그래서 팔찌와 비녀 등의 패물을 모두 팔아 쓰고, 심지어는 솜을 두지 않은 바지로 겨울을 지냈으나 집안 식구들은 알지 못하였다. 지금 형편이 조금 피어 끼니는 이어나갈 만한데 형수가 미처 누리지 못하니, 슬픈 일이다.
형수의 성은 이씨이니, 본관은 경주인데 시조는 신라의 명신 휘 알평(謁平)이다. 뒤에 휘 정형(廷馨)이 있었는데 이조 참판을 지내고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그 뒤 5대에 휘 달(鐽)이 있었는데 힘이 범을 잡을 수 있었고, 문사(文事)를 버리고 무과에 합격하여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보만(溥萬)을 낳았는데, 보만이 청주 한씨(淸州韓氏) 종해(宗海)의 딸에게 장가들어 건륭(乾隆) 경오년(1750, 영조 26) 3월 24일에 형수를 낳았다.
형수는 겨우 15세가(1765?) 되어 백씨(伯氏)에게 시집왔다. 경자년(1780, 정조 4)에 선군(先君 정약용의 아버지)을 따라 예천군(醴泉郡)에 가서 돌림병을 앓다가 죽으니 4월 15일이다. 충주 하담(荷潭) 신좌(辛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이는 우리 조부모와 부모의 묘역(墓域)이다.
19 절부(節婦) 최씨(崔氏)의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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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벽위편 = 정약용을 죽이려는 노력 !!!
3. 순암집.= 천주교를 반대하는 글로서, 진실성이 크다.
순암선생문집 제6권 / 서(書) , 권기명(철신)에게 답함 갑진년1784.
요즘 어버이를 모시고 지내는 근황이 어떠한가? 일전에 두 차례나 서신을 띄워 내 뜻을 대충 전달했으나 혹은 답을 하면서도 내가 물은 사실에 대하여는 답을 않거나 혹은 아예 답을 주지 않았는데, ... 이를 늙은이 잠꼬대로 보아 물리치지 말고 꾹 참고 들어주기 바라네.
공이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학문에 종사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햇수가 쌓였는가. ...그런데 지금 또 듣자하니, 공이 서양의 천주학에 있어 경망하고 철없는 젊은 것들의 앞잡이가 되고 있다는데, 지금 세상에 사문(斯文)이 기대를 걸고, 친구들이 믿고 소중히 여기고,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후배들의 종주(宗主)가 될 사람이 공 말고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이학(異學)으로 가버리다니 과연 어찌해서 그러한 것인가? 내가 보기에는, 서양 사람들이 말을 제아무리 장황하게 해도, 그 모두가 석씨(釋氏)가 거치고 간 조잡한 발자취들로서 논리의 정미성에 있어서는 오히려 석씨 쪽의 절반도 못 미치고 있네. 차라리 식심(識心)이니, 견성(見性)이니 하는 달마(達摩)ㆍ혜능(慧能)의 말을 따랐으면 따랐지, 밤낮 기도로 무당이나 다름없는 짓을 하는 서양의 그것들을 왜 따를 것인가. 그 짓을 해서 과연 지옥행을 면한다 하더라도 뜻 있는 사람이면 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우리 유학을 하는 사람들이겠는가. 그들이야말로 성문(聖門)의 도깨비들이요, 유림(儒林)의 해충들로서 하루 빨리 내쫓아야 할 것들일세.
지금 들리는 말에 아무 아무가 서로 약속을 하고 신학(新學)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들 모두가 공의 절친한 벗 아니면 공의 문도들 아닌가. 공이 만약 금하고 억제했으면 이렇게 날뛸 리가 있겠는가. 공은 그들을 금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물결을 조장하여 더 일으키고 있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언젠가 국손(菊孫)이 이 곳을 지나면서 그런 말을 대강 하기에,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는 계속 강변하여 마지 않았네. 나는 그것이 이미 집안에서 듣고 하는 말인 것을 알고 있었네. 도가(道家)가 노군(老君)을 존경하는 것이나, 석씨들이 석가를 존경하는 것이나, 서양의 사람들이 예수[耶蘇]를 존경하는 것이나 매한가지가 아니겠는가. 이 삼가(三家)의 학문은 다 그들이 배울 학문이지 우리 유자가 배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대체로 서양 사람들이 실로 이류(異類)가 많아 총명과 재변, 기예(技藝)와 법술(法術)에 있어 중국으로서는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거기에 굴복이 되어 그들의 학문까지 믿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럴 이치가 있겠는가. 그들의 학문이 황당무계하고 괴상망측하기로는 사실 저 노씨와 석씨 이가(二家)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지금의 유자들이 저 이가는 이단으로 배척하면서 도리어 이 쪽을 진학(眞學)이라고 하고 있는 실정일세. 사람들이 이 정도로까지 마음의 현혹을 느끼고 빠져 들고 있으니, 이는 바로 세도(世道)의 부침(浮沈)과 학문의 사정(邪正)이 나뉘는 하나의 큰 전기라 하겠네....
군자의 도(道)는 소멸하고 소인의 도가 자라며, 정학(正學)은 꺼져 가고 사설(邪說)이 판을 쳐,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아래로만 내려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서양의 예수란 이름은 바로 세상을 구제한다는 뜻이지. 그들이 높이 받드는 이는 천주이고,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한다는 뜻으로 천당 지옥의 설을 만들어 놓은 것은 저 노씨ㆍ석씨와 같은데, 그들이 인류를 유도하기 위해 하는 말은 기껏 천주ㆍ천당ㆍ지옥 그것뿐이 아닌가.
나도 그들의 말에 따라 해명해 보겠네. 그들이 천주가 있다고 하면 우리도 천주가 있네. 천주는 상제(上帝)를 말하는 것일진대, 《시경》ㆍ《서경》에서 상제를 말했네. 성인이 하늘을 말한 것은 분명한 명문(明文)이 있으니, 어찌 사실이 없는 것을 가상적으로 말했겠는가. 그들이 또 천당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도 천당이 있는 것이네. 《시경》에 이르기를, “문왕(文王)이 오르내리며 상제 곁에 계신다네.” 했고, 또 “삼후(三后)가 하늘에 계신다.”고도 했으며, 《서경》에도 “많은 선대 철왕(哲王)이 하늘에 계신다.”고 했으니, 이미 상제가 있는 바에야 어찌 상제가 살고 계시는 곳이 없겠는가. 또 저들이 지옥이 있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지옥형(地獄刑)이 성왕이 형법을 만든 뜻과는 달라 매우 의심이 가는 것이네. 성왕은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형벌을 둔 것이니, 그 얼마나 인자한가. 그러나 저 지옥형은 살았을 때는 무슨 짓을 하든지 내버려 두었다가 죽은 뒤에야 그 영혼에게 죄를 소급하여 묻는 것이니,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의 책을 보면, 이른바 지옥형이라는 것이 자못 인간 세상의 형벌과는 비교가 안 되는데, 지극히 인자해야 할 상제의 마음이 어쩌면 그렇게도 참혹하고 모질단 말인가.
그들은 또, “사람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면서 선악의 보복을 받는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영혼의 이치는 아득하여 무어라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이 죽은 뒤 혼백이 빨리 흩어지기도 하고 늦게 흩어지기도 한다.”는 선유의 설이 오히려 타당성이 있을 듯하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하면, 인류가 지구상에 태어난 이후 그 수가 너무나도 많은데 지옥과 천당이 제아무리 넓다 해도 그 영혼들을 어디에다 다 수용할 것인가? 인간 세상을 두고 말하더라도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다 죽지 않고 장생한다면 그 많은 수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갈 것인가. 언제가 불서(佛書)를 보았더니, “발우(鉢盂) 하나 위에 보살(菩薩) 60만을 수용한다.”고 했는데, 그게 과연 가능이나 한 일인가. 물론 망녕된 말이지만, 굳이 배척할 것 없이 그들의 말을 따라서 말해 보겠네.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는 천당이 있으면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는 지옥도 있다는 것은 혹 그렇다고 치세. 그러나 그 천당, 지옥을 본 자가 누구라던가? 그것이 전기(傳記)에 남아 있는 정도, 민속으로 전해오는 전설 정도라면, 결국 황당무계한 말로서 젖혀 두어야 옳을 것이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서양인들이 상제를 자기들의 사주(私主)로 생각하고 중국 사람들은 상제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꼭 하루에 다섯 번 하늘에 예배하고, 7일에 한 번 재소(齋素)하고, 밤낮으로 기도하여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해야지만 비로소 그것이 하늘을 섬기는 일이 된다는 것이니, 불가에서 참회하는 일과 다를 것이 뭐겠는가. 우리 유가의 학문은 광명정대하기가 마치 높고 넓은 하늘과 땅 같고, 천지를 비치는 해와 달 같아 털끝만큼도 가리워져 있거나 보기 어려울만큼 황홀한 것이 전혀 없는데 왜 이 길을 두고 도리어 참된 길이 저쪽에 있다고 하는 것인가?
그들은 주장하기를, “이 세상은 현세(現世)인데 현세의 화복(禍福)은 잠시이니 만세를 두고 고락(苦樂)을 받는 후세의 천당ㆍ지옥의 화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
“천주 상제가 이 세상에다 상ㆍ중ㆍ하 삼계(三界)를 만들어 상계(上界)에는 상계대로의 일이 있고, 중계ㆍ하계도 각각 일이 따로 있는데, 상계와 하계의 일은 인간으로서 측량할 바가 못 된다. 중계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로 말하면, 인간 노릇 하는 길이 수기(修己)ㆍ치인(治人) 그것뿐이고 수기ㆍ치인하는 일들은 모두 책에 있으니, 그대로만 하면 될 것이다. ...
우리가 이미 이 현세에 태어났으면 당연히 현세의 일을 하고 경전에서 가르친 대로 따라 행하면 그뿐이지, 천당과 지옥이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인가. 일전에 우사(于四)가 와서 유숙하면서 얘기가 천주학에 미치자 그가 말하기를, “서양에서도 이 학(學)을 금하려고 죽인 사람이 천 명, 만 명이 넘었으나 끝내 금하지를 못하였고, 일본에서도 이 학을 금하려고 수만 명을 죽였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라고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당론이 분열되어 피차 틈만 노리면서 상대편의 좋은 점은 가리고 나쁜 점만 들추어 내는 판국에, 가령 누가 이를 빌미로 상대편을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이라도 세우는 날에는 몸을 망치고 이름을 더럽히는 욕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때 가서 천주가 어떻게 손을 쓸 수 있겠습니까. 천당의 즐거움을 미처 누리기도 전에 세화(世禍)가 닥칠 염려가 있으니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 하였네. 그러나 이미 천주학에 빠져버린 공들이 마음을 씻고 발길을 돌려 그 폐습을 털어 버리지 않고 도리어 나를 지칭하여, “지옥은 바로 아무 어른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한다면, 나는 이 말을 달게 받아들여 더이상 차마 이러한 추태를 부리지 않겠네.
어제 유옥경(柳玉卿)이 전목재(錢牧齋 목재는 청(淸) 나라 전겸익(錢謙益)의 호)가 쓴 경교고(景敎考) 한 대목을 적어 보냈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대진(大秦)은 지금 서양 오랑캐 중으로서 문자깨나 안다는 자인데, 입술에다 기름칠을 하고 혀를 닦으며 망녕되이 한 말들이 묘한 풀이로는 취할 만한 것들이 있어도 그들이 하는 교(敎)는 서양 오랑캐들이 하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분명 불교의 한 지류 중에서도 하승(下乘)에 속하는 가장 졸렬한 교리이다.” 했는데, 그의 말이 바로 내 주장과 합치하네...
이 문제야말로 큰 시비(是非), 큰 이해(利害)가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번거로움도 마다 않고 공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니, 속히 지론(至論)을 내려 이 우매한 견해를 속시원히 깨뜨려 주면 고맙겠네. 천학설문(天學設問)을 베껴 보내고 싶었으나 베껴 쓰기가 너무 힘들어 보내지 못하네. 우사가 등사해 갔으니, 어쩌면 볼 수도 있을 것일세. 그러나 모두가 망발이니, 어떻게 이미 굳게 자리잡힌 공들의 학(學)을 움직이게 할 수 있겠나. 사흥(士興)과도 소식이 오래 끊겼는데 혹시 안부나 듣고 있는지? 만약 인편이 있으면 이 서신을 그에게로 보내되, 보고 나서 불태워 버리라는 말도 함께 전해 주기 바라네. 이만 줄이네.
@ 이벽과 이가환, 이기양의 교리 논쟁!
= 이가환: 백서 47-52행/ 갑진-을사무렵(겨울/정헌 묘지명)에 이벽에 굴복당하여, 천학초함과 함께 성년광익까지 가져다 거듭 읽고는 믿기로 결심하고,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아침저녁으로 이벽 등과 비밀리에 왕래하며 열심히 하였다. /1789년에 윤유일이 밀사로 갈 때 은자 500냥(현 5천만원 정도=징의 232)을 봉헌하였고(김시준240), 1799년에 충청도 보령에서 압수된 신자 연명부에 이가환이 우두머리로 실려있고(벽위편), 부연사가 되어 직접 북경에서 영세하려 하였다.(백서) 신유박해를 맞아 권철신과 함께 장폐로 순교하였다.
*-달레상 308/ 이가환이 회담 날자를 정하여 이벽의 집에 모였다. 호사가들의 한떼가 이 굉장한 토론을 참관하여, 사흘 동안 진행된 끝에 이가환이 패배하여, ‘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달레상 310 / 그 후 이기양도 토론을 견뎌낼 수 없었고, 이기양이 안순암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안정복도 신자가 되도록 설득하려고 하였다.
1. 안순암이 권철신과 이사흥에게 보내는 편지 1784년 (12월?)
2. 안순암이 이사흥에게 답하는 편지 을사 1785년 봄
-저번에1784년? 성오 (권일신)이 힘써 이 학문을 내게 권하였지만, 내가 귓전에 지나가는 바람을 듣듯이 하였네!
5. 페낭 신학교 교과서.
1. < 모방 신부의 1838 년 편지 >
Extrait d'une lettre de Mr Maubant miss. Ap. en Corée à Mr Langlois Superieur du Seminaire des Missions Etrangères Yangtchi 3 Xbre 1838.<자료수집 확인: 최승룡 신부> :
"[…]Nous avons pu cette année nous procurer secrètement des notes manuscrites sur l'é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enne en Corée. Elles diffèrents peu de celles que j'avais composèes d'après la tradition orale,,,,,En 1720 la 58e annèe du fameux Kanghi, un autre ambassadeur Corèen nommé Y eut une entrevue avec les Missres. de Pekin et reçut d'eux des livres Chretinne qu‘il emporta en Corée. Un nommé Koang, qui reçut le surnom de Jean, ayant lu ces livres, eut le bonneur de sentir et de gouter les verités qu’ils renfermaient. Il embrassa la religion Chreti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élytes il envoya en 1783 à Peking un autre délégué égalemant nommé Y,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Y s'adressa aux Missres. franç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é, sous le nom de Pierre[…]"
번역/ 한국 선교사 모방 신부가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교장 랑글로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양지에서 1838년 12월 3일.
[ 금년에 우리는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設立에 관하여, 손으로 기록한 備忘錄을 비밀히 관리하도록 받을 수가 있었는데, 口頭로 듣던 바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1720년, 중국 年號로 저 유명한 康熙 58년에, 북경에 다녀온 使臣 李公(李頤命)이 서양 선교사들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책들을 구해 읽은 광이라는 사람(曠菴 李檗)은 후에 요한이라는 교명을 가진 분입니다. 이 사람이 천주교 교리에 同感하고 深醉한 나머지, 천주교를 全心으로 받아들였고, 몇몇 다른 改宗者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1783년에 또 다른 가문 출신의 같은 성을 가진 이(승훈)를 , 이 거룩한 종교에 관하여 더 많이 알아오도록, 또 다른 代理者로 北京에 파견하였습니다. 이(승훈)은 1784년 2월에 베드로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2. 페낭 신학교 교회사
나. 페낭신학교 역사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3번째(정규하, 강도영, 강성삼) 신부님들부터 배운 말레시아 페낭신학교의
* COMPENDIUM HISTORIAE ECCLESIASTICAE, PULO-PINANG 1885
Q&A 1631 - 1720 년 사이에 중국에 간 사신들이 예수회원들이 건네준 천주교 서적들을 한국에 들여왔다는 첫 문답에 이어,
Q. 어떻게 이런 책들이 한국인들을 신앙에로 이끌었는가?
R. 그때에, 어떤 한국의 선비들이 고적한 곳으로 물러가서 철학 공부를 하였다 ; 그들 가운데 특출한 사람들은 이덕조(Ni-Tek-Tso) 로서 별호가 벽이(Piek-i , 즉 고집이 센 /완고한 사람 =obstinatus)라는 이와, 권철신(Kuen-Tsiel-Sin-i)과, 그리고 정(Tieng)씨네 두 형제들(정약전/Tieng-Jak-Tsien 과 정약용/ Tsieng-Jak-Iong)이었다. 그들은 인간 본성과 하늘과 세상에 대하여 다양한 문제를 검토한 후, 그리스도교 서적들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섭리와 영혼, 덕행과 죄악에 관한 교리에 대하여 선으로(좋게) 판단한 후, 꾸준히 자기들 나름대로 하느님의 계명을 (적응)훈련하는 데 열중하게 되었다. (1770)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