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암강학 IV
2017. 6. 3. 16시 김학렬(약망) 신부.
4. 교우론이 조선에 끼친 영향.
Apostolus, Ecclesia, Confessio와 Poenitentia, Baptisma, 아당과 액말
*. 적응주의 선교정책( +)을 폈던 리치와 원리주의(공개적+급진적) 선교정책을 고수하려했던 루지에리와 롱고바르디,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파리외방선교회와의 마찰은 전례논쟁에 휘말리게 만들었다(서양자,청나라궁중의 선교사들,210; 중국순교사, p. 67).
* 천주실의 = 생혼, 각혼, 영혼과 행복론!
=天學실의(1615이후 알레니에 의하여 천학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1628년
천학초함 목록에도 천학실의로 표기하였다.)
*천진암성지는 한국천주교회의 탄생지. 2016. 6. 김학렬(약망) 신부.
*기략(성경이야기) 참고 /
3-4. 陽瑪諾 역, [성경직해],1636년.
디아스(Emmanuel Junior Dias, 1574-1659, 陽瑪諾)신부가 지은 [성경직해]는 1636년에 북경에서 출판되었다. 성경직해자서에 이어, 성경직해주세주일지목록이 나온다. 이어 성경직해주세첨례지목록이 나오고, 이어서 성경직해잡사지목록에는 천주와 천주삼위일체, 천주성부로부터 사후, 심판, 천당, 지옥까지 145개 항목의 천주교 용어가 정리되어 있다. 이 천주교의 교리용어가 [성경직해]에서 사용되고 있는 곳(0권 0장)과 그 용어와 관련된 세부적 내용도(0권 0장)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천주성자’ 난에는, ‘하위천주성부지물이붕(Verbum, 9권 21장), 우오명사지물이붕하동하이(9권 22장), 하독성자강세속인(9권 10장)’ 이라 하였다. 첨례 성경 가운데서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성경직해 제일권> 극서야소회사 양마낙역; 천주야소계리사독주세주일성경직해(텬쥬 여수 ㅅ긔리스두 쥬일셩경) - 天主는 서양 원문으로 陡斯(두사, 한글필사본=데우스)라 하며,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다.(한글본-스로 계신쟈). 이후 천주의 속성을 설명하는데, 무형, 무시무종, 常活常, 王, 무소부재, 만선만복, 渾然全備, 未有天地之先, (업가온대로조차)造成天地人物, (진실노 나를 내시고 날 다리시)大原大主(p. 1)라 하였다.
다음에 耶穌(여수)에대하여; 천주강생후지명이며, 譯言하면 救世者(셰상을 구쟈)이시요, 元祖가 지은 原罪로 천주대발자비(天主大發慈悲。是위救世자。)하여 강생하신 구세주로 야소라 칭한다고 하였다.
契利斯督(ㅅ긔리스두)에 대하여서는; 吾主 여수의 別名號이며, 譯言受油傳也(셩유로 바을 밧다말), 古禮에 새로 왕을 세우거나 及聖敎宗主를 세울 때 그 頂(니마의 나니), 여수는 만물의 주인이시며 聖敎의 大主이시다.
主日(쥬일)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성교에서는 매 7일 마다 주일(太陽之日)을 정하여, 敎者는 罷百工을 하며(공을 파고), 聖殿에 나와 彌撒(미살 참예고)과 講道를 들으며, 主님께 君父(쥬ㅅ긔 님금과 부모를 위며)와 萬民과 親友와 己身을 위하여 福을 구하여야 한다. 성 奧斯定(와스딩)의 주일에 대한 설명으로, 天主開世之首日(셰샹을 열으시던 첫날)로서 如德亞人(유더아국 사)이 대해를 지나온 이날도 바로 주일이었다고 한다. 이날은 按味(만나)降之首日(맛 니오시던 첫날)이요, 오주의 강생성탄일도 주일이요, 수난 후 부활하신 날도 주일이고, 성신강림날도 주일이요, 세말심판의 날도 주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날이어서 瞻禮를 지내는 것이다.(2).
聖經(셩경)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서양) 원문으로는 阨萬日畧으로서 역언하면 福音(복된소식)이다. 천주강생후 친히 전하여 주신 것이 새로운 가르침 新敎(새교/ 셩교 텬셩의 교이니 원조적브터 믜스(모세) 셩인ㅅ지 니르니 샹고적 교이라)이다. 혹 묻기를 福音者라 칭할 수 있는가? 성 基所(Chrisostomus, ㅅ긔수셩인)가 답하되, 오주께서 죄를 사하여 주시고, 성총을 베푸시어 덕을 닦아 天主義子의 高位로 올리시고, 영고를 면하고 영복을 누리게 하시는 내용이 성경에 들어 있으니, 이를 일컬어 복음이라 하는 것이다. 또 묻기를 어떻게 新敎(새교)라 하는가? 古新이란 선후가 있다는 뜻인데, 中古시대에 每瑟(믜스) 성인이 천주께 誡를 받았는데, 이때가 중국(녁)의 商王 祖乙 七年으로 壬寅년이었다. 吾主降生하신 때는 중국 西漢 哀帝 元壽 二年 庚申으로., 이 사건의 시차(샹거)는 1,517년이었다. 若翰 宗徒(요안종도) 성인이 이르기를, 모세는 고교를 전하고, 오주는 스스로 그 진실한 교를 세우신 것이다. 주님께서 伯鐸羅(버도루-한글본八) 종도에게 이르시되, 吾敎는 악마도 이기지 못할 것이며, 끝이 없을 것이다(마태 16, 18) 하셨다. 오사정 曰 計613條가 있으나, 신교의 계는 간략하여 信望愛主愛人이 있을 뿐이다.(6). 고교는 一國之敎요 私敎이나, 신교는 萬國之敎요 公敎이며 廣大하다.
또 묻되, 에완여뢰를 기록한 성사가 몇위이뇨? ---하나는 若翰(요안) 성인이요, 하나는 瑪竇(마두) 성인이요, 하나는 路嘉(루ㅅ가) 성인이요, 하나는 瑪爾謌(말구) 성인으로 4사위이다.(7) 4위 성사가의 표상으로 요한 복음은 (독수리)鳳을, 마두는 사람(人)을, 루ㅅ가(한글14)는 송아지(犢) 상이요, 사자(獅)는 말구 성사의 모상이니 대개 요안밥디스다(한글14) 성인이 마치 사자 마냥으로 맹렬히 소리함을 뜻하는 것이다. 四史聖經.(8).
여수 셩탄젼 뎨 사 쥬일 셩경(현 대림 제1주일; 루가 21, 25-33 ; 한글 광익 16) ; 유시에 여수ㅣ 문뎨자(門弟子)더러 닐으샤되 해와 달과 별의 딩됴(한글 17). 無花果, 天國巳近(텬쥬의 국이 갓가운줄을 알디니라/한글 19).
箴; - 聖 巴西略(바실리오), 聖 祭利落(치릴로) 地獄之苦(11). 葆祿聖徒曰-主來審判(11).
당무지구; 위죄인ㅣ과 - 죄인의 허물 고치길 위미라.
츅문; 복망 텬쥬 뢰이대능, 득탈쟝ㅣ위험, 뢰이구원 득향안젼, 아쥬여수, ㅣ셩부, ㅣ셩신. 아믄.
업l여 텬쥬ㅅ긔 라니 네 대능을 힘닙어 챵l에 위험믈 버서나길l 어드며 네구원심을 힘닙어 평안고 온젼믈 누리길l 엇게소셔 아쥬 여수l 셩부와 ㅅ긔 시며 셩신과 ㅅ긔 샷다. 아믄.(한글 28).
여수 셩탄젼 뎨 일 쥬일 셩경(대림 제4주일; 성사 루까 제 삼편 ; Lc. 3,1-6/다해 대림2주일 말씀) -- 여수 세상에 계신지 29년을 성모와 요씁(若瑟) 성인으로 더불어 한가지로 계셔, 요씁 성인과 한가지로 나모 깎기를 업으로 삼으시고, 후에 장차 나가 교를 펴려 하실새 이에 먼저 요안 성인을 믁유하야 곳으로 따라가며 사람을 권하야 쥬를 좃게 하시니라.
經 (성 路嘉 제삼편) ; 第白畧(디버뢰-티베리우스) 責撒爾(서살이) 卽位十五年 般雀(ㅅ봉쇠) 比辣多(비라도)는 如德亞(유더아)를 다스리고, 阨祿德(에로더)는 加理勒亞(ㅅ가리릐아)를 다스리고, 厥弟 費理伯(비리버)는 義度肋亞(이두리아)와 大各倪亞(ㅅ다거니디뎨)를 다스리고, 理撒倪亞(리사니아스)는 彼理納(아비리나)를 다스리고, 亞納(아나)와 該法(개바)는 교사를 사유할새(方司敎事), 천주의 묵계하심이 들에(方居山林-경성남녁으로 일백이십리라) 있는 자까리아의 아들 요한(若翰 匝加利亞子)에게 계신지라. (한글 69/ 乃衆目得視主救世者.- 33).
箴 : 告解罪何.-而神父依規解之. - 宗徒 伯鐸羅曰. --後來雖有敎皇相繼. --故復有撒責(Sacerdos)之選. -- 천주입해죄지례 -- 蓋罪人 病人也 神父良醫也.-- 聖 盎博削曰 罪如熱病.-- 惟一一吐露神父之前. 聖 納西盎(37). 神父- 贖補罪 - 蓋耶穌一身贖之矣(38).
당무지구; 위 죄인 개과- 죄인의 허물 고침을 위함이라. (한글 83).
츅문; 긔망오쥬, 속이능, 구아등어죄지즁, 가극승지력, 소졔험지위(액), 이획안졍, 봉오쥬, 희유슈윤아긔. 아믄.(祈望吾主 速賜爾能 救我等於罪之中 賜加克勝之力--- 亞孟).
오 주께 빌며 바라나니, 바삐 네 능을 주어 우리 등을 죄 가운데 구하시고, 이기고 이길 힘을 주어 더하시고, 험하고 험한 위태로움을 살라버리고 덜으사, 써 안정함을 얻어 오주를 받들어 섬기게 하쇼셔. 오직 내 빌믈 드리워 허락하심을 바라나이다. 아믄.
성경광익 사본
(성경직해광익 제일권 상편 종 40).
<요약정리>. 성경직해 잡사지목록에는 천주, 천주삼위일체, 천주성부로부터 사후, 심판, 천당, 지옥까지 145개 항목의 천주교 용어가 정리되어 있다. 교회 안팎에서 천주를 두사라 부른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성호전집 제 55권, 천주실의발에서도 ‘於是天主大發慈悲。親來救世’라 하였다. (그러나 ‘耶蘇?者西國救世之稱也’라 하여, 야소를 초두가 있는 耶蘇를 썼는데, 번역원에서도 잘 못 하여 이렇게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에완여뢰(복음서)를 기록한 성사를 하나는 若翰(요안) 성인이요, 하나는 瑪竇(마두) 성인이요, 하나는 路嘉(루ㅅ가) 성인이요, 하나는 瑪爾謌(말구) 성인으로 4사위라고 한다.(7) 삼왕래조후 제3주일을 보면, [성경직해]에는 구약의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창세기의 내용중, 아담과 하와(亞當(아당)阨襪(액말), 노아의 주(諾厄造舟)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성교요지 1장-2장 참조). 입야소성명첨례에서, 할손지례를 언급함과 동시에, 잠에서는 할례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어, 이 문헌에서 할손과 할례라는 신조어가 처음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한문 문화권에서 이 용어들은 가톨릭교회의 고유한 용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할례의 용어는 만물시원에서도 계속된다.
3-5. 艾儒略, [四字經文].
알레니(Giulio Aleni, 1582-1649, 艾儒略) 신부는 [四字經文]에서, <성교요지>와 <천주공경가>와 같은 4언절구의 형식으로, 성경과 교리를 요약하여 노래하듯 읊고 있다. 특히 한문본 <성교요지>를 풀어 놓은 듯하다. 6일 창조 이야기와 아당과 액말(p. 5)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며, 성사 Sacramenta로 영세, 견진, 성체, 통해, 종부, 품급, 혼배 등,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용어의 대부분이 정리되어 있다. 35쪽의 적은 분량으로 전체가 다 소중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내용을 요약하여 보자.
<천지가 있기 전에 먼저 천주께서 계셨도다(未有天地 先有天主). 육일동안 창조하셨으니 (六日迺(=乃)傋(p.2), 첫날에 높은 하늘을 만드시어 무수한 천신들을 만드시고, 혼돈의 세상에 경도와 위도를 그으시고, 네 개의 큰 구덩이를 만드시니, 1은 영원한 고통(지옥)의 장소요, 2는 연옥이요, 3은 영해들이 가는 곳이요, 4는 영부(고성소)이로다(第一日生 絶頂高天 無數天神 混沌水地 地經地緯 俱九萬里 地之中心 有四大穴 一曰永苦 二曰煉獄 三曰孩所 四曰永薄 ). 엿샛날에는 수백가지 짐승들을 내어 살게 하시면서 땅을 꾸민 연후에 사람의 조상을 만드셨도다 (第六日生 百獸巳傋 然後將土 化成人祖)(4). 남자의 이름은 아당이고 여자의 이름은 액말로서, 부부의 인연으로 우리 인류를 번성하게 하셨도다(男名亞當 女名厄襪 配爲夫婦 生我人類). 이렛날 첨례날에 이같은 은혜에 감사하는 날이며 (七日瞻禮 謝恩伊始), 천신의 무리가 오만하게 반항하여 그벌로 영옥에 갇혔으나 (天神之屬 內有傲抗 罰魔永獄), 주님께 원망하고 우리 원조를 해치려 유혹하였고 (怨主害人 故誘我祖), 거역하고 범죄하여 낙원에서 쫒겨나고 (逆命犯罪 逐出地堂), 죽음이 오고 원죄를 지어 자손들에게 미쳤도다 (是以有死 因有原罪 延及子孫)(5).(창조후) 2,245년에 많은 이가 악으로 주님의 의노를 불렀으니 (二千二百 四十五載(2,245) 人多作惡 犯主義怒), 주께서 명하시어 낙액에게 일독을 지으라 하시니 (主命諾厄 預製一櫝), 상하삼층에 처와 삼자부와 모든 종자들을 들이시고(上下三層 置爾及妻 三子三婦 幷諸物種), 홍수로써 사람들을 진멸하시고자 (迺發洪水 殄滅人物), 사십일 후에 강우로 벌을 내리신 후(四十日後 降罰巳畢), 낙액 부자들이 육지로 돌아오니 (諾厄父子 復居陸地), 장자는 생이요 차자는 강이요 세째는 아불덕이라 (長子名生 次子名岡(7), 其第三子 名雅彿德).
天主憫世 第二位者 名曰費畧(Filius) 因聖神能(9), 奇功變化 降孕聖母 當漢哀帝 元壽二秊 歲次庚申 耶穌生時(Lc.2) 重星交光 天神環衛 如同白晝 空中秦樂 讚頌慶賀 守夜牧童 聖誕八日 行古割(禮). 三王來朝 異星顯示 直至其處(11)神國法度 授此斯玻 倂授鐸德 皆行敎事 代天主位(20). 定有七規 格辣孟多 일왈領洗 이왈堅振 삼왈聖體 사왈通解 오왈終傅 육왈品級 칠왈婚配 經言禮節 彌撒儀旨 與領聖水 洗罪入敎(21). 克七罪宗 守十誡命 生爲聖人 死同天神 萬世常生(34), 生是惡人 死墮타地獄 讀了天學 明了經旨 得大根本 斯眞學問 一非不間 萬德全渾 人勉之哉 人勉之哉> 四字經文 終(35).
<요약정리>.성교요지 제1장의 첫머리에 나오는, ‘未生民來 前有上帝’는 사자경문의 ‘미유천지 선유천주’를 본 뜬 것으로 보인다. 6일창조(六日迺(=乃)傋)(p.2)와 화성인조(化成人祖)(4)는 성교요지 1장의 설명과 같다. 할례를 할체로 잘 못 표기한 것으로 나타나며, 이를 성교요지 10장에서는 이라 하였고, 주에서는 라 하였다. [성경직해] 야소성명첨례에서도 할례라 하여 할례가 천주교의 고유 용어임이 확인되었다. ‘三王來朝 異星顯示’는 성교요지 5장의 ‘동계우사 군광성광야’를 연상케 한다. 성경직해에서 교황, 살책이, 탁덕을 사자경문에서는 ‘立敎化皇 命比斯玻 授爾鐸德 數萬風波 救我靈魂 永保眞福(32)’이라 하면서 성교요지 30장에서 한서(추위와 더위)를 불문하고 오직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선교사(전도지교사)들을 지칭하는 듯하다. 4자 운을 맞추기 위하여 살격랄맹다를 줄쳐서 살자를 생략 ‘격랄맹다’ 하였듯이, 성교요지 2장의 구전아백은, 천주강생인의 상권 6의 아백이와 바쎄역본의 아백이를 운을 맞추기 위해 아백으로 줄인 것으로 보인다. 십계명을 준수하면, “살아서는 성인이요 죽어서는 천신이라(生爲聖人 死同天神)”를 [천주공경가]에서는, 그 반대로 ‘인륜도덕 천주공경 영혼불멸 모르면은, 살아서는 목석이요 죽어서는 지옥이라’고 하였다.
3-3. 교우론 (De Amicitia, 交友論)
가. 마태오 리치(1552- 1610)는 1582년 8월에 중국 마카오에 도착한 이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엘이 선종할 때까지 염원했던 대로, 동방문화의 중심인 북경으로 진출하고자 줄곧 노력하였다.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외국인으로서 간첩혐의로 의심받는 가운데서도, 부단히 북경을 향하여 진출하던 리치 신부는 1595년 8월에 南昌에 도착하여, 두 왕족을 만나 교류하게 되었다. 건안왕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 간접적인 선교를 위하여, 리치 신부는 최초의 漢字 작품으로서 [교우론]을 저술하게 되었다. 이 저술은 중국에서 마태오 리치의 최종 목적인 중국선교에 다가가기 위해 채택한, 적응주의적 방법 (adattamento, adaptationism) 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중국 주변국가에 효과적으로 선교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문서선교란 새로운 선교방법을 채택하게 됨을 의미했다.
왕족들이 리치신부를 1595년 8월 29일까지 3번이나 찾아왔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은 구태소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특히 建安王Kienan과 樂安王Loan은 리치와 대화하고 교류하기를 원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건안왕(朱多火節주다절 乾齊)은 아주 적극적이어서, 리치 일행을 그의 왕실로 불러 함께 茶를 마실 뿐만 아니라, 3번이나 식사에 초대하며 교류를 넓혀 나갔다. 리치 신부는 그들이 귀중히 여기는 선물로서, 구리로 된 기름통과 성 라우렌시오의 동상, 지구의와 나침반, 해시계와 책 등을 선물하였다.
이에 화답하여 건안왕은 비단과 은제품, 먹을 것 등을 선물하였다. 그가 리치에게 받은 것 가운데, 특히 귀중히 여기는 두 종류의 책들은 유럽의 방식대로 일본 종이로 만들어 액자에 넣은 세계지도로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호주와 함께, 4원소와 구천으로 이루어진 지도와, 그밖에도 그 지역에서는 구경할 수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수학책이었다. 또 하나의 책은 교우론에 관한 것으로, 건안왕이 리치 신부에게 유럽에서는 우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을 때, 신부는 성실하게 생각나는 대로 철학자와 성인, 옛날과 근대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대답하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교우론] 작품이 되었다. 이렇듯이 [교우론]은 리치 신부가 만든 최초의 漢文 작품이다.
[교우론]에서 리치 신부가 인용한 어구들을 저술가별로 분석해 보면,
성 Augustinus(聖 奧斯定) 10 개조, Aristoteles(亞里士多德) 6 개조, Horatius(荷拉西) 1 개조, Zeno(才諾) 1개조, Cicero(西塞祿) 14 개조, Socrates(蘇格拉底) 1 개조, Diogenes(第奧杰納斯) 1 개조, Seneca(索納加) 7 개조, Plinius(伯里尼烏斯) 1 개조, 성 Ambrosius(盎博羅削) 3 개조, Plutarcos(白羅多亞爾各) 13 개조, Messander(梅桑特爾) 1 개조, Valerius(梵勒里烏斯) 2 개조, Haerzio(菜爾齊奧) 1 개조, Casiodoro(西奧陶洛) 1 개조, Erasmus(愛拉斯摩斯) 1 개조, Gelius(杰利烏斯) 2 개조, Publius(勃利烏斯) 1 개조, Ovidius(烏維第烏斯) 1 개조, Quintilianus(昆底里亞諾斯) 1 개조, Cassianus(加西亞諾斯) 1 개조, Marzialis(馬爾齊亞利斯) 1 개조, Demosthenes(特莫斯德納斯) 2 개조, Cassiodorus(西奧道羅斯) 1 개조, Gregorius(額我略) 1 개조, 성 Cyprianus(西潑里亞諾斯) 1 개조, Aelia(愛利亞) 1 개조, 성Joannes(金口若望) 1 개조.
하지만 리치 신부 자신이 서양 고전 등에서 직접 채록한 것이 아니라, Andrea d'Evora의 란 책에 있는 금언들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옛날 이교도들의 고전을 선호하였는데, 이유는 중국의 고전과 그 내용이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나. [교우론]은 리치가 저작한 글 가운데 가장 짧은 글로서, 2천여자의 漢字로 되어있고, 그 자신이 출판하지는 않았다. 책 제목은 Chiaoieu Lu"en 즉 Trattato sull'Amicizia 交友論이다. 먼저 짧은 서론에서, 리치는 1595년에 어떻게 남창에 도착하였는지, 어떻게 건안왕의 연회초대에 응하였고, 유럽의 식자들은 우정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였는지 알려달라고 그가 청하였으므로, 먼저 76개의 아주 짧은 문장을 - 대부분 단문장으로 된- 써 주었고, 후에 24 문장을 추가하여 100개의 문장이 되게 하였다. 1601. 2. 9일자로 출판된 서문에서 풍응경Fomimchin은 말하기를, 교우론이 백개의 문장으로 되어있다고 하였다.(友論凡百章).
[교우론]이 처음으로 출판된 날자를 교우론의 끝에서 萬曆二十三年歲次乙未三月望日, 즉 1595. 4. 24일 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기록이었다. 리치가 건안왕을 처음 알게 된 날자가 1595. 6. 28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리치가 써놓은 한문 글자를 읽을 때, 세로로 써진 음력 XI월 15일을 읽으면서( 十 => 三 ) 월 15일로 착각하여 읽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행일은 음력 11월 15일이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우론]은 1595년 9월 4일 이후에 남창에서, 라틴어와 이태리어로 된 문장들을 번역하여 중국어로 작성되었으며, 1595년 말 이전에 건안왕에게 증정된 작품이다.
다. 이 작품의 원 출처는 포르튜갈의 Andrea d'Evora의 Sententiae/ et exempla/ Ex probatissimis quibusque scriptoribus collecta, &/ per locos communes digesta. 란 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제 5판 본(1590년 빠리 발행본)이 아직도 북경의 예수회 고문서고에 있다가 라자리스트회의 문서고로 이관되어 있다. 리치가 축약하여 내놓은 이 작품은 Cicero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라. [교우론]의 중요 내용을 보면, 인간관계 중에서도 친구관계를 (하느님)상제께서 내려준 능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상제께서 두 개의 눈(上帝給人雙目), 두 개의 귀, 두 개의 손, 두 개의 발을 주신 것은, 서로 도와 일을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다.”(56장) “ 각 사람은 일을 홀로 다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사귀며 서로 도우라고 명령하셨다.(故上帝命之交友) 만약 세상에서 이 도가 없어진다면, 인류는 반드시 절멸하게 될 것이다.”(16장)고 하였다.
이같이 우정의 관계를 하느님께서 명하신 기본 관계로 보면서, 동시에 친구관계의 중요성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키케로의 격언을 약간씩 변경하여 인용하고 있다.
“벗은 형처럼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벗들은 서로를 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형제보다 더 좋은 것이 벗이다.” (36장 - 友於昆倫邇 故友相呼謂兄 而善於兄弟爲友 -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람과 사람은 모두 형제다’에서 온 것이다). “벗이 피붙이 보다 낫다. 피붙이라도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무릇 피붙이들 간에는 사랑이 없더라도 피붙이 간에 윤리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벗에게 사랑이 없으면 어찌 우정의 도리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 50장 - 友於親 惟此長焉 親能無相愛 親友者否 蓋親無愛 親親倫猶在 除愛乎友 其友理焉存乎). 이는 키케로의, ‘친구가 가족보다 귀하다. 가족은 사랑이 없을 수 있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다. 사랑이 없으면 그 즉시 친구가 되지 못하나, 가족은 여전히 가족이기 때문이다.’에서 왔다.
마. 마태오 리치 신부와 루지에리 신부는 1583년부터 1588년까지, 5년에 걸친 작업 끝에 葡中辭典을 편찬하였다. 또한 1598년에 리치 신부가 처음으로 북경에 들어갈 때에 종명인 수수사와 카타네오 신부의 협조를 얻어 音韻字典을 편찬하였다. 리치 신부는 1605년에 西字奇跡을 편찬하였다. 이것은 라틴문 字母를 한자에 붙여 중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에게 학습하기 쉽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마태오 리치 신부는 라틴문 자모를 한문에 붙인 표기법의 창시자이다.
마. 교우론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
①. 이수광(1563- 1628)의 지봉유설에서는, 마태오 리치 신부가 지은 [천주실의]와 [교우론]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다.
‘ 歐羅巴國을 大西國 이라고 이름 하기도 한다. 利瑪竇라는 자가 있어서, 8년 동안이나 바다에 떠서 8만리의 풍랑을 넘어, 돌월에 와서 십여 년이나 살았다. 그가 저술한 [천주실의] 2권이 있다. -또 그 풍습에는 우의를 소중히 여기며 사사로운 저축을 하지 않는다. 그는 [重友論]을 지었다. 초횡焦竤이 말하기를, “서역사람인 이군이 <벗은 제 2의 나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매우 기이하다”고 하였다. 이 일은 속이담에 자세히 보인다.’
②. 이수광에 이어 유몽인도 [교우론]을 소개하고 있다.
‘ 天竺의 서쪽에 나라가 있어 歐羅巴라고 하는데, 구라파란 그 지역 말로 “커다란 서쪽大西”이란 뜻이다. -그 선비는 친구 간의 사귐을 중히 여기고 (其士重朋友之交), 대다수가 천문과 별자리에 정통하다.’
③. 성호 이익(1682-1763)은 신후담과 안정복 등의 후학을 양성하여 기호 남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마태오 리치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았고, 리치 신부를 일러 ‘참으로 성인이다’고 할 정도로 천주교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한편, 리치의 저술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한 글이 [교우론]이었다. ‘집에 1권의 외국서적 [교우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친구는 제 2의 나다. 몸은 둘이나 마음은 하나다. 읽기를 모두 하니, 이는 뼈를 찌르는 이야기이다.-그 책에 또 말하기를 孝子가 父의 交友를 잇는 것은 産業을 이어받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진실 되고 확실하니 가히 생각할만하다.’
성호의 제자들 대에 이르러서는 안순암의 천학고에서와 같이, 衆緯(중위:천문역법)와 句股(구고:기하학)의 술법 이외에는, 무조건 모든 서양의 이론이라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 나아가 이기경은, ‘저들은 父子, 君臣, 夫婦의 인륜을 중히 여기지 않고, 다만 友誼를 존숭하니, 이미 재물과 여자를 서로 유통하여 쓰는 기미가 있었던 것’이라며 [교우론] 마저 왜곡시켜 비하하고 있다. 신돈와(신후담)의 서학변에서는 갑진년에 이미 [영언여작]과 [천주실의], [직방외기] 등의 내용을 장황하게 비판하면서도, [교우론]은 다루지 않고 있다.
④. 공서파들이 수십 년 전부터 이미 [천학초함]을 읽고 비판하는 것과 비교하여 볼 때, 천진암강학에 모여서 공부하던 同學들은 이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천학초함] 속에 들어 있는 여러 편의 글들과 함께, [교우론]도 읽고 실천하였음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 정약전은 서울의 젊은 사류(士類)들과 교유(交遊)하며 견문을 넓히고 뜻을 고상(高尙)히 가져 이윤하(李潤夏)ㆍ이승훈(李承薰)ㆍ김원성(金源星) 등과 굳은 친분을 맺고 (定爲石交), - 학문을 강론(講論)하고 탁마(琢磨)하여 서로 더불어 덕을 쌓고 학업(學業)을 닦았다. (相與進德修業。 ---當此時。李承薰亦淬礪自強). 일찍이 이벽(李檗)과 종유(從遊)하여 역수(曆數)의 설을 듣고는 기하(幾何)원본을 연구하고 심오한 이치를 분석하였다.(嘗從李檗游。聞曆數之學。究幾何原本)’ 이같은 내용은 [교우론]을 함께 읽고 실천하였음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⑤. [교우론]을 읽어 잘 알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정약용은 사돈 형인 이벽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광경을 시로 옮기면서, 同友人李德操檗乘舟入京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고, 이벽의 장례식에 참석하여서도 友人李德祖輓詞를 짓고 있다. 이렇게 文度公 요한사도(약망) 丁若鏞 承旨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가장 흠모하며 모시고 따르던 스승격인( 從李檗遊 聞西敎見西書, -자찬묘지명/ 이벽의 순교시기에 정약용은 천주교에 흠뻑 빠져 있었다), 曠菴 李檗이 非命으로 32세에 殉敎하자, 그 장례식에 가서, 당시의 狀況과 世風人心을 輓詞로 표현하였는데, 8살 위의 스승격인 이벽을 友人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교우론] 서문에서 萬曆己亥正月瑴旦 友人瞿汝虁序라고 적혀있는 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⑥. [교우론]은 북학파인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의 마음을 열어, 조선 사회에 파격적인 벗 사귐을 만들어 나갔다. 이들의 사귐은 [교우론]에 있는 ‘벗은 제 2의 나’라는 기이한 말을 통해 신분과 문화, 국경을 초월한 수평적 인간관을 낳고 있었다. 북학파는 야소교 교리의 핵심인 이웃사랑을 실행으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담헌 홍대용을 취사(取捨)하며 학문적으로 교류하던 초정 박제가(1750- 1805)는 담헌이 연행에서 귀국하자(1766년) 즉시 찾아가 홍대용을 만났고, 박제가 역시 북경을 4차례나 다녀왔으며, 정파가 노론임에도 불구하고 이덕조(벽)에 대한 추도시를 지어 남겼다. 그가 이벽을 이토록 그리워하였던 것은 어려서부터 봉선사에서 함께 공부한 친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홍대용의 부탁으로 박지원은 [회성원집발문]을 썼는데, 이는 [교우론]의 1장과 56장의 영락없는 판박이였다. “옛날에 붕우(朋友)를 말하는 사람들은 붕우를 ‘제 2 의 나’라 일컫기도 했고, ‘주선인(周旋人)’이라 일컫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자를 만드는 자가 날개 우(羽) 자를 빌려 벗 붕(朋) 자를 만들었고, 손 수(手) 자와 또 우(又) 자를 합쳐서 벗 우(友) 자를 만들었으니, 붕우란 마치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이같이 홍대용과 박지원이 [교우론]에 대해 언급한 것은, 삼강오륜의 수직적 봉건사회를 수평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삼강오륜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는 봉건사회의 윤리관 속에서, 수평적 관계인 붕우는 오륜의 제일 마지막 항목이었고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박지원은 자신보다 4살 어린 이덕무와 벗으로 통했으며, 열두세 살 아래인 제자 박제가(1750-1805), 유득공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은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박제가는 이때의 허물없는 사귐을 기리면서 서로 주고받았던 시와 편지를 모아 [백탑청연집]을 남겼다. 양반 가문 출신의 홍대용과 박지원은 참된 [교우론]을 알았기에, 서러움을 받는 서얼 출신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함께 제 2의 나로 친구처럼 지냈다. 그 때의 편지 및 시문을 간추려 벗의 우의에 대해 야박한 자들에게 경계로 삼기 위해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정파가 다른 남인파의 이벽과도 친구처럼 지냈기에, 이벽이 홍대용에게서 [천학초함]을 전수받을 수 있었고(이벽전), 이벽의 순교 후에는 박제가가 [사도시]를 남길 수 있었다.
또한 이들과 교류하였던 이재 황윤석은 무술년인 1778(정조2)년 11월 26일에 이덕무에게서 들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이덕무가 말하기를, “요사이 서울 안에 서학과 수리를 전문으로 공부하는 자로 서명응과 그의 아들 서호수가 있는데, 또 이벽이 있으니, 바로 무인 이격의 동생입니다. 그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사람됨이 고결한데, 지금 저동에 살고 있습니다. 또 정후조(이가환의 매부인 정철조의 동생)가 있으니, 바로 문관 정철조(이가환의 매부로서, 여주 화가 이희영 순교자의 스승)의 동생입니다.”고(1778) 하였습니다.’
또, ‘내가 나군(나동선)에게 묻기를, “지금 세상의 도성 사람들 중에 또한 총명하고 뛰어난 선비가 있는가?”라고 하니, 나군이 대답하기를, “이벽이란 자가 있는데, 월천군 이정암의 후손이고, 병사 이달의 아들이며, 이격의 형(동생)입니다. 어려운 글 열 줄을 한꺼번에 보면서 비호같이 읽어 내려가고, 동시에 눈 하나로는 위를 보고 다른 하나로는 아래를 볼 수 있고, 하나로는 왼쪽을 보고 다른 하나로는 오른쪽을 볼 수 있습니다. 체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나 한번 뛰어올라 공중에서 3회전할 수 있으며, 두 질을 뛰어 오를 수 있습니다. 평소 서양의 <천주실의>를 몹시 좋아하여, 한때 그 무리의 으뜸이 되었는데, 나이 30에 요절하였습니다. 근년에 임금이 서양의 학문에 대해 율. 역. 수. 종류 이외에 천주실의의 학문을 하는 자들로부터 형조에서 그 책들을 거둬들여 불태우고 경향에 엄히 금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군이 당시 세자익위사의 별천에 들자(?) 상소하여 천주의 설을 스스로 아뢰었습니다.”라고 하였다.’(1786). 또한, ‘북극고도가 한양은 37도 15분이고, 위원(북경을 뜻함?)은 40도 51분이다. 예전에 이벽에게 들었는데, 백두산은 42도 남짓으로, 봉조하 서명응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였다.’
⑦. 신해박해(1791) 중에 올린 이기경의 상소에서는, 이기경 본인과 채제공 역시 [천주실의]를 읽은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초정 박제가는 1778년 1차 연행에서 채제공의 종사관으로 수행을 하였었다. 박제가 역시 이때를 전후하여 [천학초함] 전권을 읽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이벽의 순교 후인, <1786년 1월 22일 朝參時에 박제가가 품었던 생각> 속에 다음과 같이 들어 있다.
“신이 듣기에, 중국의 흠천감에서 역서를 만드는 서양 사람들은 모두 기하학에 밝고 이용후생의 방법에 정통하다 합니다. 국가에서 관상감 한 부서를 운영하는 비용을 들여서, 그 사람들을 초빙하여 머물게 하고, 나라의 인재들로 하여금 천문과 천체의 운행, 악기나 천문관측기구의 제도, 농잠, 의약, 기후의 이치 및 벽돌을 만들어 궁궐과 성곽과 다리를 짓는 방법, 구리나 옥을 채굴하고 유리를 구워내는 방법, 화포를 설치하는 법, 관개하는 법, 무거운 것을 멀리 옮기는 기술을 배우게 하십시오.(천학초함, 기편) - 신의 생각에 그들 무리 수십 명을 한 곳에 거처하게 하면, 난을 일으키지 못 할 것입니다. 그들은 결혼도 벼슬도 하지 않고 모든 욕망을 끊은 채, 먼 나라를 여행하며 포교하는 것만을 신념으로 삼고 있습니다.(천학초함, 리편) 그들의 종교가 천당과 지옥을 독실하게 믿어 불교와 차이가 없지만, 후생의 도구는 불교에는 없는 것입니다. 열 가지를 가져오고 그중의 하나를 금한다면, 옳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다만 저들에 대한 대우가 적절치 않아, 불러도 오지 않을까 염려될 뿐입니다.”
병오소회를 읽은 3일 후, 정조는 선대왕들의 업적을 기록한 [갱장록] 수정작업에 참여할 명분으로 박제가를 승진시키라는 어명을 내려, 박제가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 정조는 박제가의 간청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는데, 정조가 북경에 있는 서양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유럽과 교류하고 서양신부를 영입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가 48세 라는 젊은 나이로 갑자기 운명함으로써 박제가의 주장처럼 서양신부를 초빙하여 개혁을 추구하려던 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제가는 이와 같이 서양 선교사들을 등용하여 그들의 과학과 기술을 배우자고 죽기를 각오하면서까지 이렇게 건의하고 있으며, 정약용과 더불어 종두법을 함께 연구하는 등, 이들은 붕당을 초월하여 실용적인 교류를 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교류로 미루어 보아, 이벽 역시 박제가의 스승 격인 홍대용을 만나서 연행사실을 듣고 배웠으며, [천학초함]도 전수하여 보았다는 ‘이벽전’의 내용이 -(부연사 홍군사로써 천학전함을 증수하여 몰독주야하시더니)-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이명(1658 - 1722)은 숙종 때 영의정까지 지내다가 숙종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고부사로 북경에 가면서 이기지(1690 - 1722)를 자제군관으로 대동하였던 노론의 거목이었다. 1795년에 노론이 야소교를 믿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 남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렸을 때, 정조는 ‘야소교가 유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이명의 편지를 인용하여 남인을 보호하였다. 정조가 평택 안핵어사로 파견한 김희채(1744-1802)는 본관이 청풍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노론이었으나, 이동욱의 종서從婿로서 이승훈이 평택 현감으로 있으면서 3년 동안 공자의 사당에 참배하지 않은 사실을 엄폐하기 위함이었음이 드러나고 있고, 당시 보고報告 선상에 있던 승지도 이동욱의 從兄 이동현이었다.
이밖에 소론에서도 정파를 초월하여 姜世晃의 아들 姜彛天이 천주교를 수용하였고, 안동 김문의 봉사손이었던 노론의 金健淳과 그의 族兄 金伯淳이 천주교를 신봉한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김건순은 애초 주문모 신부에게 북벌을 설득하고 이용후생을 배우고자 접근하였다. 담헌 홍대용 등과 큰 테두리를 공유하는 장면이다. 노론 명문 집안 출신인 김건순은 이미 조상으로부터 전해진 리치신부의 [기인십편]을 통해 일찍부터 천주교를 알고 있었다. 그는 권철신을 찾아가 교리를 배웠고, 1797년에는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받고 서울로 찾아가 요사팟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김건순은 이후 친척과 친구들에게 신앙을 전파하여, 이중배, 원경도, 이현, 이희영, 정치상, 김치석 등을 입교시켰다.
⑧. 朋黨의 벽을 넘어서 서로 교류하면서 진리를 찾고 기뻐하는 士類들의 학문적 교류가 있었던 한편, 신앙 안에서 모든 이웃을 소중히 여기며 班常의 사회적 단절을 사랑으로 극복하여 가는 천주교 공동체인 敎友村도 곳곳에 생겨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존중하고, 한자리에 앉아 함께 기도하면서 하인과 백정까지 정중하게 대우하였던 정약종 순교자의 경우를 보면, 이에 감격한 황일광 알렉시오는 “신분으로 보아 사람들이 나를 너무나 정중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나에게는 천당이 두 개가 있다”고 말하게끔 하였다. 이렇게 만인을 평등하게 대하는 정신은 [교우론]을 읽고 그대로 실천한 결과였다고 본다.
3. [교우론]이 우리나라 작품에 반영된 흔적들
➀. 니벽전
‘ 시세 무술년 이십오세라. 수시 이성호 종학도와 賢友賢士 이씨 정씨네와 면학하시드라.---광주 원앙산사에 은거하시매, 道友가 중도하니 성교요지를 하필하시더라.--- 기해 시세 이십육세시 賢友 면학 위상(爲上)하야 중집산사하니 공이 기학다박하여--- ’
이벽을 스승으로 모시고(爲上) 함께 공부하는 나이 어린 사람들도 모두 현우와 도우로 칭하며, 친구처럼 대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➁. 천주공경가
“어화세상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로 시작하는 이벽의 천주공경가는, ‘수시 이성호 종학도와 현우현사(賢友賢士) 이씨 정씨네와 면학하시더라’ 하던 중에, 노래로 지어 부른 단체가였다. 삼강오륜에서 우선시 하는 수직관계의 君臣, 父子, 夫婦의 관계에 앞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모든 사람들을 수평적관계인 벗의 관계로 (朋友) 보며 중요시하였기에, 노랫말의 제일 앞에 놓았다. 이에 대하여 이기경은 벽위편에서, ‘저들은 父子, 君臣, 夫婦의 인륜을 중히 여기지 않고, 다만 友誼를 존숭하니 하며, 순암 안정복이 타일러 고치려 하던 천진암강학 관련자들이 벗을 첫 자리에 두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➂. 성교요지
㉮. 한문본 [성교요지]는 ‘讀天學初函李曠奄作註記之’라고 작은 글씨로 부기되어있다. 이는 [천학초함] 안에 들어있는 20권의 책들 중, 전반부에 나오는 ‘唐景敎碑附’에서 參初度涼菴居士의 ‘讀景敎碑書後’ 를 읽고 그 형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 한문본 [성교요지]는 마태오 리치 신부가 쓴 [교우론]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교우론] 56장에서는, ‘上帝(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두 눈과 두 귀, 두 손과 두 발을 주신 것은 두 벗이 서로 돕도록 하기 위해서였으니, 그래야만 비로소 일이 성사되기 때문이다.’ (上帝 給人雙目 雙耳 雙手 雙足, 欲兩友相助, 方爲事有成矣.)
原註; 友字古篆作우 卽兩手也 可有而不可無
朋字古篆作羽 卽兩익也 鳥備之 方能飛 古賢者 視朋友 豈不如是耶.
뒤이어 작은 글씨로 인쇄된, 이 문장을 설명하는 마태오 리치의 원주에서는, ‘友’자는 篆書에서, 又와又가 위아래로 겹쳐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곧 두 손이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又字古篆作- 卽兩手也 可有而不可無).
朋자는 전서에서 ‘羽’로 표기되었다. 이는 곧 두 개의 ‘-羽반쪽 ’로서, 새는 이를 갖추어야 비로소 날 수 있는 것이다. 옛날의 현자가 벗을 보는 시각이 어찌 이와 같지 않았겠는가? (朋字古篆作羽 卽兩羽익也 鳥備之 方能飛 古賢者 視朋友 豈不如是耶?).
이와 같이 [성교요지]는 그 서술 방법에 있어 [교우론]과 같은 방식을 취한 것이어서, 그 문장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하여, 교우론의 56장처럼 작은 글자체로 부기를 하고 있고, 교우론의 98, 99, 100장에서와 같이 가차(假借)문자로 쓴 서양말 등, 어려운 내용을 설명하는 순서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교요지는 그 형식과 방법에 있어서 [교우론]을 많이 반영한 작품으로 보인다.
[성교요지]가 [교우론]의 영향을 받은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몇가지 살펴보면,
제 5 장 예수님의 가족
東界友師 동계우사 동방 세계 박사들이
軍光詳視 군광상시 별빛 따라 찾아와서
造室辱臨 조실욕림 누추한 곳 나신 분께
伏拜依次 복배의차 엎드려서 문안 했네
5장에서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東界友師로 표현하면서, 논어의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를 은연중에 암시하였다고 본다.
제 13 장 최후의 만찬
工役貧富 공역빈부 일꾼 관리 빈자 부자
左右近交 좌우근교 친근하게 사귀오며
餘論尤服 여론우복 주님 말씀 복종하는
班旅盡招 반여진초 모든 사람 부르셨네
13장 최후의 만찬 부분에서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 15, 15)는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 일꾼과 관리, 빈자와 부자들이 서로 친하게 사귀고, 양반과 상인들이 모두 다 평등하게 살면 하느님의 초대를 받는다는 평등사상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제 34 장 시간
璣衡驗山 기형험산 시간 재도 세월 가니
怱遽躇躊 총거저주 영복 찾기 주저 말라
璣衡, 璇璣玉衡, 所以占測者也. 怱遽, 促迫也. 躇躊, 猶豫不決之貌.
기형, 선기옥형, 소이점측자야. 총거, 촉박야. 저주, 유예불결지모.
기형(璣衡)은 선기옥형으로서 시간을 재는 고대의 관측기구이다.
④. 담헌 홍대용의 교우관계
가. 담헌 홍대용은(1731 - 1783) 남양주시의 옛 미금나루 근처에 있는 석실서원에서 미호선생(渼湖先生) 김원행(金元行)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석실서원의 위치는 이벽이 천진암과 두미에 머물면서 서울과 포천을 왕래하던 길목에 있으므로, 그곳에서 1770년대에 홍대용을 찾아 만나 뵈올 수 있었다고 여겨지며, 또한 책도 빌려서 필사하여 간직할 수 있었다고 본다. 담헌은 애초 김원행이 중히 여기던 제자였고, 영조 말년 書筵에 낙론을 대표하는 신진 학자로서 세손(정조) 교육(1774/5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벽전]에서는, 이벽이 홍군사로부터 [천학전함]을 전수하여 천학공부에 몰두하였다고 적고 있다. 담헌 홍대용을 언급한 것으로 나타나는 이 내용은, 이제까지의 연행일기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홍대용의 부연사행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대청 관계에 있어 시각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홍대용의 연행일기에서 비롯되었다. 홍대용은 남당과 동당의 성당을 찾아, 4차례에 걸쳐 그곳의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볼 수가 있었고, 이들의 과학과 종교에 대하여 상당한 충격을 받았기에, 후에 고금도서집성 5,020권에 달하는 책을 정조 즉위 직후인 1777년에 은자 2,150냥을 주고 수입하여 열람하면서 공부를 하였고, 이들 가운데서 [천학초함]을 이벽이 빌리거나 복사하여 공부하였으리라고 본다. 후에 정약용도 이렇게 도입된 책들 가운데서 [기기도설]을 보고 응용하였다. 이규경이 언급한 이 [기기도설]에는 기계의 조작과 설계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고, 이와 더불어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도 소상히 다루어져 있다. 이를 보면 정조와 정약용은 이 책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알았을 것이다.
나. 홍대용은 서장관이 된 계부 홍억을 따라서 자제군관으로 1765년 11월 2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12월 27일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1766년 정월 초하루의 조참례에 참여하여 만주어로 행하는 의례의 소리를 들으며 연행을 시작하였다. 음악과 관련하여 담헌이 북경에서 목격한 경험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정월 9일에 남천주당을 방문하여, 처음으로 파이프오르간을 직접 연주까지 해보면서 서양문물을 상세히 접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담헌 홍대용은 서양 과학을 새롭게 발견하고, 비로소 그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홍대용의 중국여행은 그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에서 사귄 몇 명의 인물들과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cf. 교우론) 나눔과 동시에 학문적인 교류를 전개 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담헌은 정주학만이 아니라, 양명학, 西學, 불교, 제자백가도, 모두 진리를 일정하게 구현하고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사상전개의 국면에서 유교를 벗어나는 지점에까지 나아가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유교가 강조하는 차별과 차등에 대한 대안으로서, ‘평등’을 사상적 지향점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다. 담헌 홍대용 주위의 지식인 가운데 잘 알려진 그룹은 이른바 연암 박지원 일파이다. 연암 그룹은 담헌과 연암을 중심으로, 선배로는 김용겸, 원중거가 있었고, 후배로는 초정 박제가, 형암, 영재, 이서구 등이 있었다. 원중거가 1763/4년에 일본을 사행하고 기록한 [승사록] 과 [화국지]는 담헌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원중거는 일본 문화를 상세히 전하며, 그들의 시문 융성, 서적유통 등을 높이 평가하여 ‘해중문명’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담헌이 원중거를 취사했던 것처럼, 연암 박지원과 초정 박제가(1750-1805)는 담헌을 취사하였다. 특히 초정 박제가는 급진적으로 문명의 위계를 세우고 중국의 선진성을 수용하고자 했다. 문물교류 지향을 서양으로까지 확대시켜 서양 선교사들을 영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초정은 다산 정약용과 절친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창기 천주교 창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벽을 경제의 선비이자 사물의 본성을 깨우친 이로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시를 쓰고 있다.
라. 김원행 문하의 동문이었던 정철조는 성호 이익의 조카이자 이가환의 부친인 이용휴의 사위였다(=이가환의 매부). 이가환의 부친 이용휴의 집에는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기하원본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이가환은 매부 정철조로부터 수리정온을 빌려보기도 하였다. 황윤석은 정철조로부터 역상고성을 빌려 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정철조를 매개로 담헌 등 연암일파와 성호학파의 학문적 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생전의 담헌은 성호사설을 소장하여 읽은 듯하다. 연암일파와 이가환 등과의 교류는 담헌의 사후에 더욱 긴밀해졌다. 그중 초정 박제가는 가장 적극적으로 그들과 교유하였다. 초정은 자신과 절친했던 친구 60인을 기린 시(戱倣王漁洋歲暮懷人六十首)에서, 정철조와 이용휴, 그리고 이가환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노래하였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는 조선 후기 서양화법의 효시라고 하는 이희영(1756-1801)의 犬圖가 소장되어 있다. 이희영의 견도는 조선 사신들이 북경에서 장식용으로 가져온 서양화와 북학파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희영의 스승인 정철조(1730-1781)는 1772년 이후로,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 학자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하여, 문학과 예술, 실용적인 학문 등을 연마했다. 그는 서양 과학 서적을 연구하여 천문관측이나 역산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를 갖추었다. 또한 정밀한 그림에도 뛰어나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요약정리>. 위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벽전]에서 이벽이 홍군사로부터 [천학전함]을 전수하여 천학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허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이벽과 홍대용의 교류 가능성을 논증하였다. 노론 집안의 김건순 순교자도 제사문제로 권철신과 교유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천주교 신자로서 순교까지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정파를 넘어서는 교류의 현상은 이제까지의 연행일기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홍대용의 부연사행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성교요지] 34장에서, 璣衡驗山 -시간재도 세월 가니- 註에서 璣衡을 璇璣玉衡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璇璣玉衡은 천문을 관측하는 고대의 기구이므로, 이벽이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천문학을 매개로 홍대용의 북학파와 교류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cf. 정약용, 증이벽 참조 - 이의수불개 7요질서권.). 박제가의 사도시- ‘이벽을 추모함’에서도 이와 똑 같이, “크나큰 온 宇宙, 天上天下를 가슴 속에 모두 품고 함께 보며, 胸中大璣衡 흉중대기형.” 하며 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