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천진암강학 VII.
2017. 10. 7. 16시 김학렬(약망) 신부.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자비로우신 섭리로, 구원의 은총을 기묘히 베푸시는 천주여,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선조들로 하여금, 주의 진리를 스스로 탐구하고 몸소 실천하여, 모든 이의 모범이 되게 하시고, 불철주야로 전파하다가 마침내 거룩하고 장렬한 죽음으로, 그 진리를 수호하며 증거하게 하셨으니, 선조들에게 시성의 영광을 허락하시고, 우리에게도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내려 주시어, 우리도 선조들을 본받아 신앙으로 살다가, 신앙을 위하여 용감히 죽을 수 있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1980. 6. 24. 김남수 주교 인준).
1/사진 = 베드로 대성전
*1.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인용한 백서 /
교황님으로 선출되신 부활절에 로마교회의 창립자인 베드로 사도의 묘소를 참배하셨다.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5. 3. 12. 로마교회의 창립자인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묘소를 방문한(Ad Limina) 한국 주교님들에게,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교회의 성사생활로 온전히 나타내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어,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습니다.’(사도 4, 32 참조)고 하였다.
또한 이에 앞서 2014. 8. 14에, 방한 중 한국주교님들께 하신 말씀 속에서도, ‘이벽과 첫 세대 양반 원로들은 평신도였고, 그들 스스로 개척해 나갔습니다.’(일어나 비추어라, p. 21). 고 하셨다.
2/백서 내용 글
이런 말씀의 근거는 황사영 백서였다. 백서 101-102행(김시준역 벽위편 p. 306)에,
‘동방의 우리나라에서 주님의 은혜는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게 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전교자가 온 일도 없이, 주님께서 친히 특별하게 성교교리를 가르쳐 주셨고, 이어서 성사를 베풀어 줄 이를 주시는 등, 내리신 갖가지 특은을 손가락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101/主恩之於東國 可謂逈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主特擧斯道而親
102/之 繼又以()聖事者予之 種種特恩 指不勝屈.
3/보감/ 조선에 천주성교회 창립하니라.
그러므로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세례성사를 받기 이전에, 이미 한국천주교회는 창립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사진 ( 교황강복문 사진)
* 성 요한 바오로 II께서는,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성지의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강복을 베푸노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 (1993. 9. 21)하셨다.
5/족보 사진 2장
2. 천진암성지에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의 묘와, 조선교구설립자들인 정하상 성인과 유진길 성인의 묘역, 창립선조들의 가족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한국천주교창립자들은 친인척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 = 정하상 성인의 부친 복자 정약종 아우그스티노, 고모부 하느님의 종 이승훈베드로, 큰댁의 큰 엄마의 동생 하느님의 종 이벽,
6/ 조숙 + 정약종 족보
+ 엄마 유조이 세실리아 성녀의 외가쪽 친척 하느님의 종 권철신과 권일신 = 족보관계 +조동섬의 형 조동욱의 손자 조숙 Pt.와 권데레사)
* 임성빈의 자료중 //류항명은 경기도 양근에서 횡성으로 시집온 한양 조 씨 부인과의 사이에 3남3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때에 낳은 막내딸이 유 체칠리아였습니다. 유 체칠리아의 큰 댁 사촌오빠가 류이지(柳頤之, 1736~1809)인데 류이지의 딸이 복자 조숙 베드로의 모친 입니다. <일성록>에서는 ‘사학죄인 조숙의 모친’을 ‘柳召史’라 기록했고, ‘柳召史’의 친정 당고모인 성녀 유 체칠리아의 이름 또한 우리 교회기록에서 ‘柳召史’라 호명되고 있으나 두 분은 같은 집안 동시대의 同名異人입니다.(나의 의견=소사는 조이로 호칭되는 이두문자로서 오늘날 여사에 해당됨) 가승보 기록을 볼 때에, 유 체칠리아 성녀는 누대로 살아온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부창리 학골(橫城郡 公根面 富蒼里 鶴谷) 고향마을에서 1761년 태어나, 위로 두 언니 세 오빠와 함께 어린 시절을 고향마을에서 성장했는데, 성녀가 태어났던 1761년에 부친 류항명과 백부 류숭명, 조부 류수종이 학골 마을에 모두 생존해 있었습니다. 성녀의 백부 댁 후손들은 지금도 횡성군 공근면 부창리 고향 인근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에 전하는 조숙 베드로 가정의 1801년 신유박해 피난 내용을 좀 더 보완해본다면, ‘신유박해 때에 경기도 양근군 능말에 살던 한양 조 씨 집안 종손인 進士 조상겸(趙常兼)이 이웃 마을에 살던 권철신 사당의 신주 도난사건 실상을 고발해, 도난사건을 주도한 연루자 처벌을 요청했다가, 양근 군수 정주성(鄭周誠)에게 오히려 사학죄인으로 몰려 곤양(昆陽)으로 유배되고, 양근 권일신의 친구였던 조동섬 유스티노(조상우의 숙부) 등 조 씨 집안 친척들이 체포되어 박해를 당하였다. 그러자 조동섬의 형님 댁 조카 조상우(趙尙羽, 당시 35세)는 아들 조숙(당시 15세) 베드로와 가족을 데리고 고향 양근군 능말을 떠나, 아내 전주 류 씨 부인의 친정이 있는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학골 마을로 급히 피난했는데, 그곳은 부인의 당숙모인 유 체칠리아 성녀가 태어나 성장했던 성녀의 고향이었다.’고 정리될 것입니다.
*. 유 체칠리아 성녀의 모친 한양 조 씨 부인과 조동섬, 조숙, 조증이 관계
한양 조 씨 족보(戊午譜, 1798년)에서, 복자 조숙 베드로의 외가와 성녀 유조이 체칠리아(柳召史, 1761~1839) 친정이 전주 류 씨 라는 기록과 함께, 유 체칠리아 성녀의 모친과 조동섬·조숙 베드로가 한 마을에 함께 살았던 문중 친족들임이 확인되면서, 유 체칠리아가 1813년 무렵, 교리지식과 학문에 어두웠던 아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을 함경도 무산 땅 유배자 조동섬 유스티노에게 천리 길 유학을 떠나보냈던 옛 사정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정하상 바오로가 1816년 이후 조선교회의 밀사가 되어 북경교회를 왕래할 때에, 조숙 베드로·권 데레사 동정부부와 조증이 바르바라의 서울 집에 기거하면서, 이들로 부터 헌신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던 혈연관계를 파악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 관계를 보면, 조숙 베드로는 조동섬의 동복형님인 조동욱의 친손자였고, 조동섬의 7촌 당고모가 성녀 유 체칠리아의 어머니인 능말 한양 조 씨 부인이었습니다. 정하상의 스승 조동섬이 정하상 모친의 외가 8촌 오라버니였던 것입니다. 한양 조 씨 족보와 전주 유 씨 족보를 연계해 보면,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는 조숙 베드로의 집안 당고모였고, 정하상 바오로에게 조증이 바르바라는 외가 쪽으로 6촌 누이 뻘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성녀 유 체칠리아의 가족은 조선 영조 때인 1760년대 말쯤에, 성녀의 부모님이 자녀들을 데리고 고향 학골을 떠나서 경기도 용인(양지?)읍으로 이주해 살았는데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지 못했다고 합니다. 유 체칠리아에게는 위로 세 오빠와 두 언니가 있었는데, 1770년대에 과거공부에 열중하던 큰오빠 류관지(1745~早卒)가 아내(安東權氏)와 외아들을 두고 요절해 용인에 묻혔습니다. 유 체칠리아 보다 12년 연상인 둘째 오빠 류풍지(1749~1828)는 나이 20세 전후 때인 1770년대 초에, 용인의 부모님 곁을 떠나서 타향인 강릉에 정착해 자리 잡았는데, ‘매년 봄가을로 강릉과 용인을 오가며 부모님 봉양에 지극정성을 다했다’고 가승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녀의 부친 류항명(柳恒命, 1723~1785?)의 사망단자가 재병오보(1786년)에 없는 것을 보면, 1786년 이후에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2004년 발간 <全州柳氏大同譜>에는 1785년 1월 22일 사망했다고 수록했습니다. 가승보에 보면, 차남 류풍지는 부친이 사망하자 모친(漢陽 趙 氏, 1718~?)과 쌍분으로 용인읍에 묘를 조성했고,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를 살았다 합니다. 부친 사망 후, 차남 류관지가 성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습니다.
전주 류 씨 再丙午譜(재병오보, 1786간행)에 수록된 류항명 자녀들과 사위 정약종, 사위 김원복
유 체칠리아 성녀가 정약종과 결혼한 시기는 1785년경으로 당시로서는 만혼(晩婚)이었는데, 바로 윗대의 선조들이 영의정과 수원부사를 지낸 양반 댁에서, 과년한 규수가 출가하지 않고 25세 까지 어떻게 지낼 수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왜 결혼이 늦어졌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유 체칠리아가 광주 마재에 살던 정약종과 혼인할 당시, 그녀의 집은 경기도 용인에 있었고, 가승보에 보면, 아버지 류항명이 ‘11월 22일 사망’으로 기록돼 있는데, 막내딸 혼사를 치르고 이듬해에 발간될 족보인 재병오보에 올릴 가족의 족보단자를 문중 유사에게 보낸 직후인, 즉 1785년 음력 11월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주 류 씨 낙봉공파 종회 소장본인 <再丙午譜(재병오보, 정조10년, 1786간행)>에는 류항명 부부(유 체칠리아 성녀 부모)와 아들 유관지·류풍지·류이지, 세 딸·사위 이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막내딸인 유 체칠리아 부부를 [柳恒命 女 丁若鍾 羅州人 父郡守載遠], 즉, ‘류항명 셋째 딸은 정약종에게 출가했는데, 사위의 본관은 나주이고 부친은 군수 정재원이다’라 수록돼 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족보가 간행된 1786년 이전에 이미 유 체칠리아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혼사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유 체칠리아·정약종의 혼인 시기는, 전주 류 씨 <재병오보>가 발간된 1786년 이전이고, 정약종이 정철상(1780년경 출생)의 생모인 전실부인의 3년 탈상을 한 이후일 것이며, 정약종이 이승훈으로부터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 1786년 3월 이전으로 추정하는 것이 논리상 맞습니다. 정약종이 세례 받은 1786년 3월 이전에, 정약종·유 체칠리아의 혼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유 체칠리아 25세 때의 일입니다.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유 체칠리아가 결혼 전에 외교인이었는데 정약종과 결혼한 이후 남편에게 천주교를 배웠다’고 했는데, 유 체칠리아가 천주교 신자로서 동정녀의 삶을 살고자 했으나, 교회신자들의 중재로 정약종과의 혼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일찍이 유 체칠리아의 큰언니가 양근 지탄(芝灘里, 現 양평군 강상면 병산리 지례 지여울)의 선비인 선산 김 씨 김원복(金源福, 1742년생)에게 출가했는데, 그 이웃에 살던 시댁의 사촌동생 김원성(金源性, 1754~1801)이 마재 사는 정약종에게서 천주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믿다가 1801년 양근에서 옥중 순교한 양근 고을 순교자입니다. 선산김씨 족보에 보면, 김원성은 큰 딸을 마재 나주 정 씨 집안 정재평에게, 작은 딸은 양근 능말의 한양 조 씨 조관교(趙寬敎)에게 출가시켰는데, 김원성의 사위 조관교는 조숙 베드로의 4촌 형입니다. 이렇게 유 체칠리아의 큰언니 시댁인 양근 지탄은 물론, 유 체칠리아의 모친인 한양조 씨의 친정이었던 양근 능말 집안도 조동섬·조상덕·조우교 등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있었기에, 당시 용인읍에 살고 있던 유 체칠리아도 출가 전에 양근 능말의 외가와 양근 지탄에 살던 큰언니를 통해서 천주교를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신자들이 큰언니를 통해 자연스럽게 혼담을 주선하면서 상처(喪妻)해 독신으로 있던 선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後室이 되었을 것입니다.
① <기해일기> 기록 중, 순교자 ‘정 바울로’ 관련 기록에 보면,
[···(북경) 주교의 명이 “노모(老母, 유 체칠리아)와 수정(守貞)하는 누이(동정녀, 정정혜 엘리사벳)를 외교 지방에 둠이 불가하다.” 하시는 고로, (북경서) 돌아와 즉시 가만히 들어가 모친과 누이를 경성(서울)으로 데려 왔다가, 곧 시골 산중으로 옮아가 한가지로 육칠년을 지내다가 군난에 피하여 경성으로와··· ] 라 하였는데,
하성래 선생은 <기해일기> 출간 편(1986, 성황석두루가서원)을 감수하면서, 순교자 ‘정 바오로‘ 부분 註記에서, 북경 주교의 지시에 따라 노모를 모시고 서울로 왔다가 옮겨간 ‘시골 산중이,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밑으로 추정 된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전주 류 씨 집안 <청도공파보>에 보면, 류수종(柳沆의 4남, 1691~1774. 유 체칠리아의 조부)의 부친인 류항(柳沆)과 류항의 장남 류수대(柳秀大)의 직계 후손들 묘소가 경기도 지평군??? 용문면 화곡리에 있다고 했는데, 필자는 2015년 용문산 기슭 화곡리 마을을 현지 답사해 류항과 류수대의 묘소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제게 가승보를 전해준 류숭명의 직계 후손(23세손 柳完熙)이 현재 양평군 용문면 화곡리의 바로 그 선산 아래 위토답에다 전원주택을 짓고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하성래 선생이 <기해일기> 출간 편을 감수할 당시였던 1989년경에, 그때 주기(註記)를 작성하던 하선생에 고견을 준분이 작고해서 지금은 알 수 없다 하나, 하성래 선생의 당시 註記는 매우 정확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817년 3월 말경, 정하상 바오로가 북경에서 귀국해 서울 집에 도착하는 예정일에, 밀사 정하상을 기다리던 조숙과 권 데레사 부부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목숨을 건진 정하상 바오로는 북경 주교의 권고를 따르기 위해, 마재(또는 광주 분원의 소내, 또는 용인)에 살고 있던 모친 유 체칠리아와 여동생 정정혜를 서울로 이주시켜 잠시 함께 살았었는데, 당시 정하상 바오로는 남편 남이관이 유배를 갔기에 혼자 살고 있던 조증이 바르바라의 서울 주동 집에 함께 머물렀을 것입니다. 조증이는 유 체칠리아 성녀의 외가인 양근 능말의 한양 조 씨 인척이었고, 조숙 베드로와는 동향 동본인 친척이었습니다. 1819년 8월 3일(양력) 조숙과 권 데레사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는데, 처형된 지 한 달 후 시신의 일부를 찾아와 조증이 바르바라가 대바구니에 보관했었다고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에 전하고 있습니다. 조숙 베드로 부부가 처형된 그해 말경 또는 이듬해에, 정하상 바오로는 연로하신 모친 유 체칠리아와 누이동생 정 엘리사벳을 좀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모친의 친정 종조부의 후손들이 살고 있던 용문산 화곡리 시골집으로 피난시켜서 6, 7년간을 그곳에서 지내도록 했을 것입니다.
② <기해일기> 기록 중, 순교자 ‘유 체칠리아’ 관련 기록에 보면,
[···때에 (기해년) 군난이 대기하니 그(녀의) 조카가 와서 시골로 피신하자 하니, (유 체칠리아) 답 왈, “내가 항상 치명할 원의가 있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아들(정하상 바오로)과 한가지로 치명하겠노라.” 하더니···]라 사양하며 순교의 길을 택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주교 댁에 살던 유 체칠리아(당시 79세)에게 시골로 모셔가겠다며 은밀히 찾아왔던 族姪(족질, 집안의 조카)은, 마재의 시가 정약종 집안 조카가 아니라, 유 체칠리아의 친정 집안으로, 당시 용문산 큰할아버지 댁을 오가면서 강릉에 살고 있던 전주 류 씨 집안 조카였다고 추정됩니다. 가승보인 청도공파보를 면밀히 검토해본 결과, 1828년 류풍지(柳豊之)가 사망해 강릉에 묻히고, 류풍지의 여동생 유조이와 생질(甥姪, 정하상·정정혜)들마저 1839년 기해박해로 위험에 처하자, ‘族姪’ 즉, 류풍지의 아들인 당시 강릉 살던 조카 류압(柳炠, 1794~1880)이 서울 주교 댁에 살던 고모 유 체칠리아를 찾았을 것입니다. 류압은 정하상 보다 한 살 연상인 정하상의 외사촌 형이었는데, 연로한 고모님이 사는 서울 주교 댁과, 조부모님 묘소가 있던 용인읍, 증조부님 묘소와 큰댁 친척들이 살고 있던 양근 용문산 화곡리 마을을 찾아 자주 왕래했을 것입니다. 저는 강릉을 찾아가 류압의 직계 고손자인 류순(柳珣)씨를 만나보았으나 후손은 집안 선조들의 이런 신앙행적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임성빈의 2017년 자료에서).
7/역사학의 원칙有 = 시공상 가까운 기록 + 약용>반대자들의(이기경, 홍낙안) 주장이 우선!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으나, 무턱대고 자기주장이 옳다고 우겨서는 안 되고,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서 진실을 가려내야 한다.
교회사 = 역사학 + 신학 (정약용 요한A.의 종부성사)/ 모르니 엉뚱한 주장!
시공상 가까운 기록 + 반대자들의 주장이 진실! //동북공정+역사왜곡!
* 시간 = 일기 > 회고록(묘지명=미화) + 공간 = 국내 > 국외 자료
* 박해자들의 주장 > 신자들의 변명 = 이기경의 벽위편 > 정약용의 묘지명
* 고문에 의한 자백 = 증거 효력 상실 + 순교 =박해자들의 신앙증오로, 죽음!
진실 =일기>> 회고록(=정약용, 묘지명 = 문자의미가 아니라, 수수께끼를 풀 듯해야한다.)
3.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사는 상당부분 문도공 정약용 사도요한 승지의 기록에 의존한다. 정약용은 500여권의 기록을 남긴 대 저술가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이 회고록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 멸문지화를 방지하면서도 후대인들에게 최소한의 기록을 근거로 수수께끼를 풀듯이 숙제를 남겨주고 있다. 예를 들자면,
가. 여유당 시문집 15권, 선중씨 정약전 묘지명에, 임인1782년 가을에 우리 형제는 윤모(尹某=윤지충으로 이종 4촌으로, 제사를 폐지하여 순교함!)와 함께 봉은사(奉恩寺)에서 경의과(經義科)를 익히고 15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 1783봄 백중계(伯仲季) 삼형제가 함께 감시(監試)에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는 나만이 급제하여 (진사가) 되였다.
나. 작은 아들 학유에게 주는 가계에, [매양 열흘쯤이 되면 집안에 쌓여 있는 편지를 점검하여 번잡스럽거나 남의 눈에 걸릴 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가려내어 심한 것은 불에 태우고, 덜한 것은 노(끈)를 꼬고, 그 다음 것은 찢어진 벽을 바르거나 책의를 만들어 정신이 산뜻해지도록 해야 한다.
편지 한 장을 쓸 때마다 모름지기 두번 세번 읽어보면서 기원하기를, “이 편지가 사거리의 번화가에 떨어져 있어 원수진 사람이 열어보더라도 나에게 죄가 없을 것인가?”
라고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뒤까지 유전(流傳)되어 허다한 식별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 져도 나에게 비난이 없을 것인가?”라고 한 뒤에 봉함해야 한다.
그래서, 정약용의 글은 교회 역사에 관한한, 축약된 최소한의 글이므로, 다른 기록과 일치하면 바로 확대하여 해석해도 되는 것이다. (예; 한국천주교회의 탄생지는 천진암성지임을 = 용의 강학우천진암 주어사설중 이벽야지 장촉담경 + 다블뤼 주교의 Ardus et difiiciles !)
이렇게 측근들에 관해 자세히 많은 기록을 남기면서도,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예컨데, 집안사람인 정약종, 윤지충(그의 6촌 남고 윤참의= 윤지범의 묘지명은 남김), 이승훈, 이벽/ )들에 대하여서는 묘지명도 남기지 않았다.
8/이승훈의 가문
@평창 이씨 가문은 많은 사람이 정계에 진출해 있었다.
*. 이승훈(1756-1801)은 부친 이동욱(1738-1794)과 모친 여주 이씨(이가환의 누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동욱도 영월 도호부사, 의주부윤(종 2품)에 이르렀다. 이승훈의 집은 남문 밖의 염초(=화약고)천 다리에 있어, 지금의 죽림동 지역 반석방에서 태어나 蔓草川 부근에 거주하였기에, 호를 蔓川이라 하였다. 마재의 정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세 아들을 나았다. 1780년 24세에 진사에 급제한 그는, 외삼촌 이가환(1742-1801)과 성호 이익의 영향을 받으며, 권철신의 문하에서 이벽, 정약용, 정약전, 이윤하(?-1793), 이기경(1756-1819) 등과 학문적 교류를 통해 성장하였다. = 정약용, 선중씨 묘지명 = 강학에 참석한 이유가 아래 문헌에!
9/권철신 가문
@이승훈은 천진암강학에 참석하였다.
가. 정약전 묘지명에, 與李潤夏,李承薰,金源星等。 등과 돌같이 굳은 친분을 맺고 定爲石交 --약전이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그곳에 모인 강학회자는 김원성ㆍ권상학(權相學)ㆍ이총억(李寵億) 등 몇몇 사람이었다. 이때 이승훈도 자신을 가다듬고 노력하였으므로- 當此時 李承薰亦淬礪自強, 함께 서교(西郊)로 나아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니, 모인 사람 백여 명이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 또한 많았다. (강학 전후의 문장에 이승훈의 이름이 나오므로, 이승훈도 강학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cf. 옹위 54.)
천진암강학에서, 어떤 책을 가지고, 어느 정도까지 공부하였는지를 말해주는 것으로는, 정약용이 학연에게 주는 가계에서, 마테오 릿치 신부를 도와 일한 徐光啓(1562-1627)가 편찬한 《농정전서(農政全書)》까지 읽고 인용할 정도라면, 천학초함을 비롯한 모든 서학서를 다 읽고 공부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승훈도 참석한 천진암강학으로 한국천주교회는 창립되었다. 그러므로 천진암성지는 한국천주교회의 발상지이다.
10/사진! 강학우천진암
@천진암강학으로 한국천주교회를 창립한 근거 문헌은 여러 가지다.
가. 聖 Maubant 신부가 1838년 12월 3일에 龍仁 양지 공소에서 쓴 편지에,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창립(l'etablissement)에 관하여, 이벽과 이승훈이 노력하였다고 적고 있다.
나. 권철신 묘지명/ 석재기해동 講學于天眞菴 주어사설중 이벽야지 장촉담경!
= 기해1839년박해가 있기 60전인, 같은 기해년 1779년에 한국천주교는 창립되었다.
11/사진 페낭신학교 교과서
다. 우리나라의 3번째(정규하, 강도영, 강성삼) 신부님들부터 배운 말레시아 페낭신학교의 역사 교과서에도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 (역사 교과서, 사진 !)
12 + 13 / 이승훈의 세례= 사진 서십고 성당 +미사
@ 이승훈의 북당 세례 /아버지인 동지사 서장관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5개월 여행중, 북경에 머무는 40일간에 세례까지 받았다는 것은, 이승훈이 이미 잘 준비되어 갔음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섭리는 이승훈의 북경행을 두 배의 확률로 아버지를 동행하도록 안배하셨다.
=정조실록 1784년, -02-17/ 동지 겸 사은 정사 황인점·부사 유의양이 장계하다
올해 정월 초1일 5경(更)에 신들이(동지 정사 황인점, 부사 유의양) 서장관 이동욱 및 사은 정사신(謝恩正使臣 =정사 홍낙성, 부사 윤사국, 서장관 이노춘)과 함께 두 사행의 정관(正官) 49원(員)을 거느리고 대궐에 가서 태화전(太和殿) 뜰 서반(西班)에 들어가 저들의 동반·서반 및 유구국의 사신과 마찬가지로 행례(行禮)하였습니다.
가. 북경의 북당 서십고 성당 순례방문하였는데, 2013.3. 이었다. (사진/ 서십고+미사)
강론내용= 이승훈 성현이 북당에서 (물로 씻는)세례를 받은 것은 유효하나, 세례집전 자격이 없는 신부가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부당한(validum sed illicitum)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두고 중국에서는 이미 제례논쟁이 일어났고, 영화 Mission 과 같은 배경에서 권력층의 미움을 샀던 예수회는 1773년에 해산되었다.(그러나 나폴레옹의 실각이후 예수회는 1814년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그런데 10년 전에 해산된 예수회의 신부인 그라몽(양동재) 신부가 북당에 식객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주변 신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승훈에게 그냥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승훈은 제사금령도 알지 못한 채 2월 22일(베드로 사도좌 축일)에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제사 금령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사람은 뒤늦게 1785년에 북경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온 구베아 주교였다. 그는 포르투갈 출신의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수학자였다.
그러므로 구베아 주교는 이승훈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마다 수학에 관한 사항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이승훈에게 부당한 세례를 주었다고 생각한 주교는 그라몽 신부를 바로 추방하였고, 다시 북경에 돌아올 수 없었던, 그라몽 신부는 마카오에서 선종하게 된다.
14/ 잘 준비된 북당 세례
나. 이승훈은 미리 준비되어 북경에 파견되어 갔고, 결국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아무리 주변 신부들이 반대하였다고는 하나, 40여일 만에 필담으로 교리를 배워 영세하였다는 것은, 이벽이 잘 준비하여 보낸(꾸며서 보낸=裝送) 사실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준비문헌은=> 황사영, (백서44행/ 布衣李檗大奇之-承薰 李檗密托曰 北京有天主堂 堂中有西士傳敎者--求信經一部 幷請領洗--必勿空還.) ‘이승훈은 벼슬하지 않는 선비인 이벽이 아주 기특히 여기고 있어, 이벽이 이승훈에게 은밀히 부탁하였습니다. 북경에 가면 천주당이 있고, 성당에는 서양 전교자가 있으니, 기도서를 구해오고 더불어 영세를 청하여 받고, -- 빈손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김시준역 벽위편 p. 153 / 신해진산의 변중, 24거상중의 신, 이기경의 상소(1791.11.13)/ - 1783계묘년 겨울에 승훈이 중국에 들어갈 때 신이 또한 전별차 나아갔는데, 승훈이 말하기를, ‘내가 서양서적을 구입하려고 하는데 재력이 부족하니, 혹 서로 도울 길이 있겠는가?’. 신이 대답하기를 ‘내가 무슨재력이 있겠는가’하고 돌아와 --- 하필이면 서양책인가 하였습니다. => 후에 박해자가 된 친구 이기경은, 이승훈의 북경행을 알면서도 돕지 않았다!
=> 이만수의 토사주문 (1801. 10. 27 실록)/
정약종이 공초(供招)하기를, ‘맨처음에 이벽(李蘖)이 서양학(西洋學)이 있다는 것을 듣고는 이승훈(李承熏)이 그 아비 이동욱(李東郁)의 공사(貢使) 행차에 따라가도록 행장(行裝)을 꾸려 보내어(추국일기 1801.2.18 권철신 공초에서도, 以日身之門徒 裝送之時-裝送之事 하며 윤유일을 치장하여 보냈다고 한다.) 양인(洋人)이 거처하는 천주당(天主堂)에 들어가 양인과 더불어 친교를 맺고 양서(洋書)를 구입하여 돌아왔는데, -- 이승훈이 구입해 온 사서(邪書)를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널리 전파하였으니, 이가환이 실제 주관하였습니다/ 토역반교문 = 若鍾供。原初268_576d李蘗聞有西洋學。裝送李承薰 !
다. 달레 상, 306- 성세를 주기 전에 많은 문제를 물어보자 모두 잘 대답하였다.
준비시켜 보냄 = 하늘이 주신 기회 + 천지창조와 종말 +천체의 움직임 + 영혼육신의 결합 +강생구속과 천당과 지옥의 상선벌악 =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이네!
=몇 권의 책을 읽어보고 + 이벽의 부탁으로, 천주당을 찾아 서양선비에게 실천방법을 배워오게. 우리 민족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부디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선교사와의 약속
1. 배교강요에는 모든 형벌과 죽음도 감수하겠다.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도 않겠다. 2. 고향으로 돌아가면 인간의 공명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시골로 물러가서 영혼구령에만 전력하고자 한다. => 적극적 선교자로 활동!
3, 해마다 소식을 전하겠다. + 출발하기 전에 (베드로 사도좌축일 2, 22??)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세례를 받음! +사신들도 그들의 왕에게 ‘서양 사람들을 그 나라에 불러들이기를 제청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응시 보록의 북경 첫 세례(서약문을 제단에 바침)!
16/ 귀국과 연구
1784년 봄에 귀국하여 이벽에게 책 전달과 6개월 연구(10년이상 공부+ 4월부터 9월까지) =>선교여행 + 가을 9월에 수표교 자택에서 첫 세례식 = 이벽,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이승훈의 1789년 편지에,
= 내가 un Savant성현을 만났사온데, 어려운 교리까지 잘 알고 있다./편지,윤4집, 96, 98!
= 박해로 내가 형제들 모임을 떠나게 되어, 세례를 베풀도록 지명한 2명 가운데, 바로 그 성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년후인 1785(6?)년 가을경에 박해로 죽었다.( = 김범우를 말하며, 이벽의 순교는 1785. 6. 14. 여름=cf.이벽전)
=1784년 공인이씨(이벽의 누님 1780死 ) 기제사후 선상 선교(=선중씨 묘지명)
갑진년 4월 15일에 맏형수의 기제(忌祭)를 지내고 나서, 우리 형제와 이덕조(李德操)가 한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올 적에 배 안에서 덕조에게 천지(天地) 조화(造化)의 시작(始作)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生死)에 대한 이치를 듣고는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마치 하한(河漢)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서울에 와서 또 덕조를 찾아가 《실의(實義)》와 《칠극(七克)》 등 몇 권(=초함+기략, 인의???)의 책을 보고는 비로소 마음이 흔연히 서교(西敎)에 쏠렸으나 이때는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다. 신해년 겨울부터 나라에서 더욱 서교를 엄금하자, 공은 드디어 서교와 결별하였다. 그러나 맺은 것은 풀기 어려운 것이어서 화(禍)가 닥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으나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골육(骨肉)을 서로 해쳐가면서까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어찌 그 화를 받아들여 천륜(天倫)에 부끄럼없이 하는 것만 하겠는가. 후세에 반드시 공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갑진년(1784, 정조 8)에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책봉(冊封)하고 경재(卿宰)들에게 동궁(東宮)의 관원(官員)이 될 만한 학행(學行)과 조리(操履)를 가진 사람을 각각 천거하게 하니, 판서 홍수보(洪秀輔)와 참판 채홍리(蔡弘履)가 함께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여졌다고 공 권철신을 천거하였으나 마침 세자가 5세에 죽었기 때문에 그 일은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경연관(經筵官)으로 초선(抄選)되었으니 끝내 그 벼슬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권철신 묘지명).
20-21/ 양근 감호 갈산에서 강의+ 명례방 집회 사진 @토론
=과거(1784. 9월/cf. 달레상 311=양근 갈산에서 강의!) 이벽(李檗)이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宣敎)할 때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0.- 1786.6.양력)를 가르치는 동궁(東宮)의 관원(官員)이 된 권철신의 집이 있는 양근 감호를 방문하여, “감호(鑑湖)는 사류(士類)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고, 10여 일을 묵은 뒤에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공의 동생 일신(日身)이 열심히 이벽을 따랐다. (감호암 사진 + 보감 양근 갈산)
=1784년 9월에 수표교의 이벽 성조의 자택에서, 이승훈은 이벽,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에게 세례를 주었다.(추국 1801. 2.18.조 + 달레상 307) + 이어서 중인 계급의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이들을 입교시켰다./달레상 308.
+인천에서 권일신이 권철신에게 쓴 편지를 읽고(추안1801 1차 심문중/주재자 흠숭 +삼혼설+4근본원소... 그래서 이몸도 그 책들을 보았습니다.) // 암브로시오로 세례받음/달레상311. +1790. 10. 16.구베아 주교의 편지는 천명도 넘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 이벽과 이가환, 이기양의 교리 논쟁!
= 이가환: 백서 47-52행/ 갑진-을사무렵(겨울/정헌 묘지명)에 이벽에 굴복당하여, 천학초함과 함께 성년광익까지 가져다 거듭 읽고는 믿기로 결심하고,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아침 저녁으로 이벽 등과 비밀리에 왕래하며 열심히 하였다. /1789년에 윤유일이 밀사로 갈 때 은자 500냥(현 5천만원 정도=징의 232)을 봉헌하였고(김시준240), 1799년에 충청도 보령에서 압수된 신자 연명부에 이가환이 우두머리로 실려있고(벽위편), 부연사가 되어 직접 북경에서 영세하려 하였다.(백서) 신유박해를 맞아 권철신과 함께 장폐로 순교하였다.
*-달레상 308/ 이가환이 회담 날자를 정하여 이벽의 집에 모였다. 호사가들의 한떼가 이 굉장한 토론을 참관하여, 사흘 동안 진행된 끝에 이가환이 패배하여, ‘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달레상 310 / 그 후 이기양도 토론을 견뎌낼 수 없었고, 이기양이 안순암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안정복도 신자가 되도록 설득하려고 하였다.
1. 안순암이 권철신과 이사흥에게 보내는 편지 1784년 (12월?)
2. 안순암이 이사흥에게 답하는 편지 을사 1785년 봄
-저번에(1784년?) 성오 (권일신)이 힘써 이 학문을 내게 권하였지만, 내가 귓전에 지나가는 바람을 듣듯이 하였네!
22/ 을사 1785년 박해로 이벽성조의 순교
=천진암성지의 기도공동체(+교회창립)가 =>수표교의 세례 공동체가 되었고, 양반 외에 중인들까지도 모일 수 있도록 =>중인 김범우의 집이 있는 명례방의 기도 집회로 변화하였다.
=(김시준, 벽위 95)/ 을사 1785년 (3월)봄에 이승훈은 정약전, 정약용 등과 함께 장례원(@한글본 성교요지 용지) 앞에 있는 중인 깁범우 집에 모여 집회를 가졌다. 이벽이라는 자가 있어, 푸른 두건(=미살제의에 나오는 청건으로 대림.사순절에 사용)으로 머리를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아랫목에 앉아서, 이승훈과 정약전,정약종,정약용 삼형제 및 권일신 부자가 모두 제자라 일컬으며, 책을 옆에 끼고 모시고 앉았는데, 이벽이 설법하고 깨우쳐주는 것이 우리 유가에서 스승과 제자간의 예법보다 더욱 엄격하였다. 날자를 약속하여 모이는데 두어달이 지나니 양반과 중인 가운데 모이는 자가 수십 명이 되었다. 추조의 금리가 -- 드디어 체포하고 예수의 화상과 서적들 및 몇가지 물건을 추조에 바쳤다. 추조의 판서 김화진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로서 잘못 들어간 것을 애석하게 여겨서 타일러 보내고 다만 김범우만 가두었다.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이윤하와 이총억 과 정섭 등 다섯 사람을 데리고 바로 추조에 들어가서 성상을 돌려달라고 여러 차례 호소하였다. -- 꾸짖고 달래어 내어보내고, 다만 김범우를 신문하여 정배시켰다.
* 1785을사박해 - 이벽 성조의 순교 + 집안들의 문중박해(이승훈, 정약용/권철신은 父亡!).
윤4집 103 +이승훈의 1789년 편지 = 박해가 4/5곳에서 일어나 체포 +감옥 = 10명 넘게 피를 흘리며 증거!
=이승훈이 1784말에 그라몽신부에게 편지를 썼고, 그는 1785년 4월음력?에 돌아왔으나 이미 박해가 시작되어 그라몽 신부의 답장과 책들을 빼앗겼다.=윤4집 103
23/ 이승훈의 신앙 고백
/벽이시. 문은 오히려 깃발을 드는 글(1791.11.13. 거상중의 이기경 상소문에서)
+ 그러자, 이승훈의 아비 이동욱과 정약전의 아비 정재원은 비로소 그의 아들이 사학을 배우는 것을 알고, 크게 놀라 죄를 다스리고, 친지들의 집을 두루 다니며 스스로 뉘우치고 깨달았음을 말하게 하고, 또 이승훈으로 하여금 사학을 배척하는 글을 짓게 하여 스스로 변명하게 하였다. (벽위편)
=백서 45행에는 -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악우들의 비방에도 끝까지 참고 성교를 봉행/隨後厥父嚴禁 惡友亂謗 承薰猶忍耐奉敎 하였다고 전한다!
= 아버지의 焚書에 대한 벽이시와 (天彛地紀限西東 暮壑虹橋唵靄中 一炷心香書共火 遙瞻潮廟祭文公 = 배교시가 아니다.) +벽이문(이기경은 1791.11.13.거상중의 이기경 상소문에서, 불교와 같다는 것을 배척하는 것뿐으로, 오히려 천주교의 깃발을 드는 것이라고 했다. 僞天主云云者 只斥其非天學 --爲眞天學立幟而不見其闢之也 = 이기경 벽위편, p.146; 김시준역 벽위편, 156) + (주재용, 가톨릭사의 옹위, p. 100)
=옹위 59/ 을사박해 - 소위 벽이문. 시를 지었나? = 달레의 기록 / 아비 동욱은 아들이 배교했다고 전하고 승훈에게 척사문을 짓도록 하였다. <= 거짓말임은 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기 전 아버지의 승낙을 받았기 때문이다.
*= 승훈의 양심 = 이승훈의 1789년 편지에 자신의 배교에 대한 언급이 없다.(모방성직제도의 죄만 언급/ 윤4집, 93)
*=윤유일이 권일신과 이승훈의 1789년 편지를 가지고 북경에 갔을 때, 왕명을 받은 관리였던 오 요한은 북경에서 직접 세례를 받았고, 선교사를 초빙하여?, 선교사의 미사도구 등의 물품이 왕의 짐짝 속에 들어 있었다. (구베아 주교의 편지 + 정조실록 1790.3.3.에서, 의주 부윤 이이상이 정사 이성원에게 보내는 왕의 (특별문서)諭書를 어천 찰방 조형수가 책문에까지 급히 달려가서 전달하려는 것을 막았다고 보고한다. =왕의 짐짝 속에 있는 물건을 책문에서부터 검사하지 않고 통과시키라는 특별 유서였을 것이다.! 결국에는 유서가 전달되지 않고도 발각되지 않고 전해졌으므로 죄를 묻지 않은 것으로 하였다./ <= 정조실록14/1790년-03-03[03] 의주 부윤 이이상이 사관이 책문에 가려함을 허락치 않고 대죄하는 장계를 올리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이상(李頣祥)이 장계(狀啓)를 올려 아뢰기를,
“어천 찰방(魚川察訪) 조형수(曺亨壽)가, 본국에 돌아오는 동지 정사(冬至正使) 이성원(李性源)에게 보내는 유서(諭書) 한 통을 가지고 신의 고을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본도 관찰사가 승정원의 지위(知委)로 인하여 동지 정사에게 관문(關文)을 발송하고 이를 가지고 가서 전유(傳諭)하게 하되 도내의 겸사(兼史)가 사신이 책문(柵門)에 도착할 날짜를 헤아려 가져다 전달하라고 하였으므로, 찰방인 신이 이를 받들고 책문 밖으로 급히 달려가서 전해 주려 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종전에도 대신이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에 사관(史官)이 임금의 유서(諭書)를 받들어다 전달한 적은 여러번 있었으나 한번도 책문에까지 가서 전달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일단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기만 하면 곧 저들의 땅이므로 왕명(王命)을 띤 사관(史官)이 이역(異域)을 섣불리 왕래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 이 사관이 책문에까지 가려고 하는 것은 전례(前例)로 비춰볼 때 근거할 데가 없고, 더구나 승정원에서도 또 신에게 공문을 보내오지 않았으니, 변경 관문을 조심스레 지켜야 하는 신의 도리로서는 강을 건너도록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중한 전유(傳諭)의 행차를 신의 미혹된 주장만으로 함부로 못가게 붙들어두고 있는 것은 외람된 일인 듯합니다. 이에 황공하여 대죄(待罪)하는 바입니다.” 하니, 회유(回諭)하기를,
“너의 처사는 일의 체모에 꼭 맞는다고 할 수 있다.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원전】 46 집 101 면【분류】 외교(外交))
+ 1890년(6월) 이승훈의 답장에서, 집안이 아직도 박해의 손아귀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노력하는 것은 저의 의무! + 현 상황에서 신자들을 돌보기는 불가능하니 이 의무에서 면제를 요청하고 있다. / 1790년 년중 7주일에 씀= 6월 초!
=오히려 1786년에 권일신이 조동섬과 함께 8일동안 용문산사에서 피정한 후에, 유사성직제도를 세워 열심히 기도하며 전교하고 있음을 볼 수있다.
+또한 24세로 1780년에 진사에 급제한 이후 泮會에 자주 출입(물이 3면을 반달 모양으로 싼 동소문 부근)하였는데, - 1787 정미 반회사건이 있을 때(옹위 55, 77=벽위편 103), 漢枌楡社(한고조의 고향 느릅나무 신=地神에 제사)에 대한 시를 거부함(벽위편 155).
+ 또한 주재용, 옹위 p. 100 + 이기경, 벽위편, 1978 한국교회사 영인본, p. 91.
'이기경이 이르기를, 承薰-- 晝夜誦經어반민김석태지가--累十卷冊子裏以錦袱 納之櫃中-- 早夜誦早晩課經 =이기경이 이르기를, ‘ 승훈이 주야 송경하고, 더욱이 수십 권 책자를 비단보에 싸서 궤 속에 넣어두고, 주야로 [조만과경]을 외우더라. / 뿐만 아니라 바로 몇 달 후인 임자1792년 봄에 빚어진 [평택안핵사]는---.
24/ 평택 안핵사에 김희채(=승훈의 재종 매부)
*+ 1791년 평택 안핵사에 김희채(승훈의 재종 매부)를 임명하여(벽위편 188 + 순조실록) 얼버무림
=백서45-46행 /1790년 가을에 평택현감으로--, 1791년에 체포되어 배교하고 성교를 비방하는 글을 여러번 썼으나, 그것은 모두 자기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을묘1795년에 신부가 이 나라에 온다는 말을 듣고, 회개하고 성사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를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박해가(=실포사건에 3인만 장폐) 일어나(1795 예산 유배) 다시 움츠렸습니다. ---겉으로는 세속을 따랐으나,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날 생각을 -- 선사인지 더 두고 조사해 봐야 할 것!
=정헌 이가환 묘지명/ 신해년(1791, 정조 15) 겨울에 호남옥사(湖南獄事)가 일어나자 홍희운(洪羲運)이 번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렸다. “진신(搢紳 벼슬아치)과 장보(章甫 유생) 중에 총명하고 지혜롭다는 자들이 모두 서교(西敎)에 빠졌으니, 장차 황건(黃巾)과 백련(白蓮) 같은 난이 있을 것입니다.”
상은 번옹에게 명하여 관서(官署)에 가서 목만중ㆍ홍희운ㆍ이기경(李基慶) 등을 불러 호남옥사의 사실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장악원(掌樂院) 조사 사건이다.
일성록 1793. 12. 27일/ 박향영(朴向榮)을 자여 찰방으로, 이승훈(李承薰)을 양구 현감(楊口縣監)으로 삼았다.
징의 92, 유관검 신문기록/ 대저 주문모를 영입하려던 계책은 이가환, 홍낙민, 이승훈, 지황 등이 주장한 바에서 나왔습니다. 만약 신부가 아니라면 7성사를 거행할 수가 없고, --큰 배가 오는 것은 아득히 먼일 -- 중원에서 한 신부를 모셔오는 방편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
1795을묘년 실포사건 이후,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시켰고, 이때에 유혹문을 지었다고 하나 이는 1785, 1791, 1795, 1801년 진술에서도 똑같이 나오는 내용이다. (cf. 원재연 p. 64; 옹위 p. 80). 이런 글을 두고 이기경이 1791.11.13. 상소문에서, 은근히 자기 변호를 하는 말이라고 지적하였다.(김시준 156; 서래지학< >천학). 당시 반대파들의 공통된 견해는 [벽이문,시]는 결코 배교의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데 이견이 일치하였다.(옹위 82) 이를 두고 조광은 4대 교리중 주재자 천주만 남기고, 삼위일체와 상선벌악 등을 부정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재연 64)
김시준 벽위편 p. 219 = 1797 단오일배 이형유천진암 -동부승지 사직소/ 검열 오태증이 이르기를 ‘ 정약용이 아직도 그 사학을 버리지 않았나이다. 상대소왈; 네 말이 과연 옳도다.’
헌신적인 주문모 신부님의 활동과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도 활동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 땅의 신자 수는 1천여 명에서 무려 1만여 명으로 늘어난다.
25/ 1801년 신유박해
천주교 탄압에 그나마 온건적이었던 정조 임금이 49세로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다.(정약용은 고금도 장씨에 대한 기사에서, 시의에 의한 독살을 언급한다.) 이때가 1800년 6월 28일이다. 정조 임금이 승하하셨다는 비보에 이승훈과 이가환, 정약용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조선 왕조 23대 순조 임금은 11살의 어린 나이로, 정조 임금의 계모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임금이 나이가 어려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때 궁중의 제일 웃어른이 대신 정치를 하는 것)을 하였다.
정순왕후는 정조 임금의 장례가 끝나자, 바로 박해의 칼을 빼들었다.
*신유박해의 현장 기록을 보면, 이승훈은 55도의 곤장을 맞아, 정신이 혼미하므로(복자 신태보의 경우 야소도 모른다고 대답한 것을 후회), 고문에 의한 자백은 증거 능력이 없는 것! 제정신으로 증언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 결안이 결정적인 죄목 문서로서, 박해자들이 신앙에 대한 증오(In odio fidei)로 순교에 이르는 형벌을 가하였으면, 순교자가 되는 것이다.
=이기경, 벽위편 2, 신유박해(일지) p. 247 -
1월 9일 / 부신계 -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잡아들이라고 함 = 不動終不悛改承薰
2월 10일/ 대왕대비 殿傳曰 推鞫 - 죄인 이가환, 이승훈, 약용 原情(사정을 하소연!)
2월 11일/ 국청죄인 이가환 형문 13도, 이승훈 30도, 정약용 30도, 최창현 30도, 권철신 5도, 최필공 원정.(심문 첫날부터 우선 나이에 따라 곤장을 치고 시작하고 있다.)
2월 13일/ 三司合啓 -정약종 윤패상지죄 + 원정후 형문 13도, 임대인 조동섬 홍낙민 원정.
2월 14일 / 이승훈과 최창현 面質. 김백순 원정// 신봉조 상소 p.263 -‘신이 추국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친히 눈으로 보니, 승훈등 3인은 똑같이 완악한 패기가 서려있고, 魔祟마수로써 이용하기를 상습으로 삼고, 刑具차꼬보기를 초개같이 하고 형륙에 나아가기를 樂地에 나감같이 하고-- 죽자하고 실토치 않으니 如草芥就刑戮如樂地 -- 抵死而不吐!’. =@1795년에 윤유일(최인길 지황) 등이 緘口無一言 한 것과 같다.
-- 15일 / 승훈 갱추후 10도, 김백순 24도, 이가환 홍교만 정약전 오석충 홍獻榮 원정.
p.270 16일 / 李學逵 원정,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更招, 김백순 4도, 홍교만 20도.
p.272 17일 / 정약종 16도, 이존창 原情.
p. 275 / 16일에 지사 권엄 등 연명 上疏.
p.283 17일/ 이가환 갱초 12도, 이존창 30도, 최창현 6도, 오석충 30도.
p.285 18일 / 이가환 30도, 오석충 20도, 이승훈 15도, 권철신 갱초.
p.285 19일 / 권철신 30도, 오석충 30도 후 이가환과 면질.
p.289 20일 / 조동섬 임대인 홍교만 정약전 홍낙민 갱초, 오석충 2도, 김백순 이기양 原情.
--- 21일 / 권철신 이존창 이기양 최창현 更招. / 이익운 上疏
추국일기 22일/ 권철신 물고 -장폐 // 25일 기시(묘지명, 정헌은 24일)-cf. 박광용 p.149.
p. 308 26일/ 이기양 更招.
--- 27일 / 이가환 遲晩후 物故, 권철신 物故. 최필공 부대시참 西小門外.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홍교만 結案正法. / 이존창은 공주목에 압송 정법.
조동섬 30도, 홍낙민 30도 결안정법, 김백순 30도, 이기양 오석충 갱초.
p. 309 - 결안 죄인 필공
p. 310. 26일 죄인 창현 --지만/ 죄인 승훈 운운 --矣身親受領洗 --부동유일 --결연약종 --外稱革面 內實蠱고心妖黨醜類 -- 矣身爲敎主爲代父 --왕법지엄요서요언전용 혹리?적실遲晩./ 죄인 낙민 운운의신 --신해후척절 --여필공 --창현 -- 여호요서요언전용 혹리?적실遲晩./ 죄인 교만/ 죄인약종 -- 범상부도 지만참약종 적몰가산등사 금해조봉승전거행사 (문서중양지일기유왈 국유대구군야 가유대구부야 십이자 윤지충? -- 부대시지율--)
26-27 / 판결안이 순교의 증거
김시준역 벽위편 266, 여러 사적 판결 안건/ 이승훈(음현감, 참판 동욱의 아들이며, 이가환의 생질이요, 정약용의 매부이다. 최초에 사서를 구입함)
판결안/ 읽기; 나는(矣身) 직접 영세를 받았고, 만리 밖에서 책을 구입해다가 모든 친척들에게 전파하여 서울과 시골의 멀고 가까운 데에까지 미치게 했으며, 이것도 오히려 부족해서 서양사람과 왕래하며, 다른 무리들을 얽어 뭉쳤고, 흉악하고 비밀한 계책은 윤유일과 같이 하였으며, 음험하게 속이는 자취는 정약종과 연결하였습니다. (나는 겉으로는 유교로 회개하는 척했으나, 그 속 마음은 실로 고혹적인 천주교를 품은자로서) 요망하고 추한 무리들은 나를 보고 교주라고도 하고 대부라고도 하였는데, 요서와 요언은 모두 무리를 침혹하는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자백을 받고 참에 처하였다. = Ecco! il martirio!
4대를 이은 순교자 집안/ =기해 박해 때에 그 아들 기원(이신규)이 붙잡혔다가 죽기를 면하고 병진1856년에 무사로 징을 쳐서 석방을 입었고, 음참봉을 하였다가 무진1868년에 또 붙잡혀 참형을 당하였다.(그의 조카 이재의도 또한 붙들려 참형되었다.)
순조 1년 신유(1801,가경 6) 12월24일 (병인)
대사간 유한녕(兪漢寧)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채제공(蔡濟恭)은 지난 을묘년에 포장(捕將)을 은밀히 사주해서 세 흉도(凶徒)를 하룻밤 사이에 때려 죽이고, 오직 여러 역적이 성명(姓名)을 노출시킬까 두려워했고, 주문모(周文謨)가 나오자 숨은 곳을 가리어 감추었으니,--- 김희채(金熙采)는 이동욱(李東郁1738무오-갑인1794)의 종서(從婿)로서, 자신이 안핵사(按覈使)가 되어 오로지 이승훈(李承薰)을 엄폐하였고, 성묘(聖廟)에 절하지 않은 일은 온 세상에서 분개하고 한탄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또한 정조에게 보고하는 선상에 있던 사람도 이동욱의 (4촌)종형 이동현 승지였다.
28-31 / 순교시와 4대를 잇는 순교 집안
** + 순교시 月落在天水上池盡
++ 죽는 마당의 결안 고복다짐에, ‘矣身親受領洗-- 나는 밖으로는 유교로 회개하는 척했으나, 그 속은 실로 고혹적인 마음을 품은자로서, 요당추류(신자들)들이 나를 교주로, 대부로 삼지 않은자 하나도 없었다. = 옹위, 76. ; 김시준, 266,410.
이승훈은 박해자들의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로 매일같이 고문을 당했다. 억지로라도 천주교를 버린다는 소문을 내야만 하는 박해자들은, 그의 취조문에, 이승훈의 대답이 아닌 자기들의 생각을 추가하여, 허위조작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장안의 선비들이 모두 존경하는 대학자 이승훈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소문을, 꼭 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제 배교한 사람들은 모두 죽이지 않고 귀양을 보냈으나, 박해자들이 조작한 허위 배교자들은 자신들의 허위 조작이 후에라도 탄로날까봐, 즉시 처형하였다.
이승훈 베드로 성현의 신앙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셋째 아들 신규와 맏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 연구, 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했다. 이승훈 성현의 아들과 손자와 증손자들 4대로 이어진 순교는, 우리 모두에게 이승훈 베드로 성현이 말로 다하지 못한, 많은 진실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고종 5년 무진(1868, 동치7) 윤4월 2일(기유) 비
○ 영풍군(寧豐君) 최우형(崔遇亨)이 상소하였는데, 서학을 궁구하여 우리나라 화근의 선두가 된 자가 바로 이승훈(李承薰)입니다. 저 승훈은 그의 아비 동욱(東郁)을 따라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몰래 사교(邪敎)의 책을 사와 그와 친한 이들에게 전파하여 스스로 교주가 되어 점점 물들게 하였고 더욱 퍼지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 아들 신규(身逵)는 그 가르침을 물려받아 추악한 무리들의 종주가 되어 처의 상을 당하자 그 아들에게 미친 병이 있다 하여 상복을 입히지 않고 3년상을 마치게 하였으니(@ㅈ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증거), 바로 이 한 가지 일은 이미 그의 단안(斷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조카(=이재의)가 또한 흉범의 공초에 나오니, 한 집안이 곧 사악한 무리의 소굴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권복 형제는 바로 신유년 장형(杖刑)으로 죽은 죄인 철신(哲身)의 손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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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간략정보]
• 한자 黃嗣永
• 분야 종교·철학/천주교
• 유형 인물
• 시대 조선
• 성격 천주교 순교자
• 출신지 강화도
• 성별 남
• 생년 1775년(영조 51)
• 몰년 1801년(순조 1) 11월 5일
• 집필자 최석우
1775(영조 51)∼1801(순조 1). 초기 천주교회의 신자·순교자.
[내용]
세례명은 알렉산데르, 자는 덕소(德紹). 한림학사 석범(錫範)의 유복자로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정약종(丁若鍾)을 사사하였다. 1790년(정조 14) 1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정약종의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하였다.
스승이자 처숙인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진지한 토론 끝에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입교 직후에 발생한 신해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단하고 관직진출을 단념하였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신부를 만난 뒤 그의 측근인물로 활동하였으며, 1798년 경기도 고양에서 서울 아현동으로 이사하여 서울 지역의 지도적인 활동가로 활약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유박해로 타격을 입은 조선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 책을 북경주교에게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황사영백서』이다.
이 편지를 황심(黃沁)과 옥천희(玉千禧)에게 시켜 1801년 10월에 떠나는 북경 동지사(冬至使) 일행 편에 끼어 보내려고 하였으나 발각되어 3일 후인 음력 9월 29일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대역 부도죄로 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고, 어머니 (이윤혜)·작은아버지·아내·아들은 모두 귀양 가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천주교회사(韓國天主敎會史)』(달레 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80)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의 사회사상적배경(社會思想的背景)」(조광, 『사총』21·22, 고려대학교사학회, 1977)
[진사시]정조(正祖)14년(1790)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83위(113/126)
황사영(黃嗣永) 덕소(德紹) 1775 ~ 1801 창원(昌原) 3등(三等) 8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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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38 년1762의 진사시 목록 왕대별 성관별 시험종류별
이동욱(李東郁) 유문(幼文) 1739 ~ ? 평창(平昌) 3등(三等) 15위
영조(英祖) 47 년1771의 진사시 목록 왕대별 성관별 시험종류별
수록인원 : 100명
목록개수 : 10 20 30 50 100 정렬 : 방목등재 인명 생년 본관 합격등급
인명 자 호 생몰년 본관 합격등급
이가환 [진사시] 영조(英祖) 47년(1771신묘)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5위(35/100)
심유(沈鍒) 성강(聖剛) 1737 ~ ? 청송(靑松) 3등(三等) 51위
이가환 [문과] 정조(正祖) 1년(1777) 정유(丁酉)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7위(10/35)
영조(英祖) 50 1774년의 (증광시)진사시 목록 왕대별 성관별 시험종류별
이기양(李基讓) 사흥(士興) 1745 ~ 1802 광주(廣州) 1등(一等) 1[壯元]위
김희채(金熙采) 혜중(惠仲) 1744 ~ 1802 청풍(淸風) 2등(二等) 23위
정조(正祖) 4 년1780의 진사시 목록 왕대별 성관별 시험종류별
이승훈(李承薰) 자술(子述) 만천(蔓川)【補】1756 ~ 1801 평창(平昌) 3등(三等) 48위
정조(正祖) 7 년1783의 증광생원시 목록 왕대별 성관별 시험종류별
정약용(丁若鏞) 미용(美庸) 다산(茶山) 1762 ~ 1836 나주(羅州) 3등(三等) 7위
정조(正祖) 7 년1783의 식년생원시 목록 왕대별 성관별 시험종류별
정약전(丁若銓) 천전(天全) 손암(巽庵) 1758 ~ 1816 나주(羅州) 2등(二等) 1위
강이천(姜彛天)/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성륜(聖倫), 호는 중암(重菴). 아버지는 완이다. 1779년(정조 3) 12세 되던 해부터 임금의 총애를 받고 궁궐에 출입하면서 응제시(應製詩)를 지어 올렸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기설(理氣說)을 토대로 하는 당시의 보편적 학문성향을 탈피하고 고증학적(考證學的)인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사실들을 구명(究明)하는 데 전념하여 전도가 촉망되었다. 그러나 1797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김정국(金鼎國)에 의하여, 주문모(周文謨)와 접촉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며 요언(妖言)으로 민심을 혼란시킨다고 보고되어, 형조의 탄핵을 받아 그 해 11월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어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옥사하여 주문모와 함께 효수되었다. 저서로는 고증적 자료가 다수 수록된 『중암고』 8권 4책이 있다.
[진사시] 정조(正祖) 10년(1786 병오)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39위(69/100)
정조(正祖) 13 1789년의 진사시 목록 왕대별 성관별 시험종류별
이치훈(李致薰) 자화(子龢) 1759 ~ ? 평창(平昌) 3등(三等) 68위
정약용[문과] 정조(正祖) 13년(1789 기유)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亞元]위(2/60)
이기경[문과] 정조(正祖) 13년(17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4/60)
정조(正祖) 14 년1790의 진사시 목록 왕대별 성관별 시험종류별
황사영(黃嗣永) 덕소(德紹) 1775 ~ 1801 창원(昌原) 3등(三等) 83위
정조(正祖) 19 년1795 의 진사시 목록 왕대별 성관별 시험종류별
한영익(韓永益) 시중(時重) 1767 ~ ? 청주(淸州) 2등(二等) 5위
조상겸(趙尙兼) 성삼(聖三) 1736 ~ ? 한양(漢陽) 3등(三等) 9위
정약현(丁若鉉) 태현(太玄) 1751 ~ ? 나주(羅州) 3등(三等) 34위
이총억(李寵億) 창명(滄溟) 1764 ~ ? 광주(廣州) 3등(三等) 64위
정조(正祖) 22 년 1798년 의 진사시 목록 왕대별 성관별 시험종류별
이명호(李明鎬) 사규(士奎) 1767 ~ ? 전주(全州) 3등(三等) 21위
순조(純祖) 22 년1822의 생원시 목록 왕대별 성관별 시험종류별
이방억(李龐億) 창강(滄江) 1776 ~ ? 광주(廣州) 2등(二等) 2위
권영좌(權永佐) / 한영이 순교자의 남편 + 딸 권진이 = 벽위편 341.
여진천, 상재상서 연구, 2017 수원가대 심포지움, 41에서 권영진 진사가 임종대세를 받음.
*여유당전서 규장각본 권20 菜花亭新成, 權左衡適至, 次韻東坡聊試老筆 60세 1821년(신사) 5월 5일, 菜花亭 權永佐(安東人, 左衡, 호 晶山ㆍ米山)
권영좌[진사시] 순조(純祖) 22년(1822)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2위(7/100)[
자 좌형(左衡)
생년 임인(壬寅) 1782년(정조 6)
본인본관 안동(安東)
거주지 횡성(橫城)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시험과목 일시(一詩)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
성명 : 권필전(權弼銓)
관직 : 유학(幼學)
[안항:형제]
제 : 권영우(權永佑)
제 : 권영준(權永俊)
제 : 권영유(權永儒)
[출전]
『숭정4임오식사마방목(崇禎四壬午式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朝26-2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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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가 창립선조들의 모범을 따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있는 힘을 다하여 희생하며, 주님을 증거하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한국천주교회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