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앙이 한국에 뿌리내리기까지
= 2016 중용강의 서론(김학렬 약망 신부).
-가톨릭 대학 이향만 교수(2016. 9. 3. - 11. )
2016. 9. 10. 김학렬 신부의 보충 <천주신앙의 유입 과정 I>.
1. 2016. 9. 4.에 바티칸에서는 12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마더 데레사 수녀의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살아서도 살아있는 성녀로 이미 추앙을 받았고, 사후 19년 만에 성녀가 된 것이다. 우리도 모두 이렇게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고, 이는 초기교회부터의 전통이었다. =천주교의 구원관은 믿음(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실천)으로 구원 받는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 +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신명기 6,4/ 성무일도 토요일 끝기도-자손들에게 집, 길, 자리에 들었을 때,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주어라.) /=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시성 미사를 마친 후 노숙인 1,500명을 초대해 피자 점심을 대접했다[출처: 중앙일보]
2. 순교자 = 마음과 목숨을 다한 천주님 사랑 + 이웃 사랑의 실천. / 교회의 두 기둥.
# 초기 로마의 순교자들은 20만명(Pentarchia =로마, 비잔틴,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2만 + 천교구 * 200명)
# 카타콤바 50만 (100 km * 5층/2m 양옆)
#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노예들을 보살핌 = 로마 인구 백만 중 반이 노예/Gladiatores!
3. 로마사회 = Panem et Circenses / 먹고(토!) 놀자. = 짐승 사회/ 오늘의 황금만능주의!
4. 행복론 / 생혼(생장지심) - 각혼(지각#) - 영혼(의리#)의 만족이다.
먹기 놀기 사랑하기!
5.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행복의 소식)을 선포하여라.
300년의 박해시기 - 수도자의 시기(@순교같은) - 천년경 서구의 복음화 완성!
=Francisco의 개혁 + 西(서) 勢(세) 東漸(동점)이 아닌 자기희생의 행복 선포자들이 예수회 선교사들@ 영화 Mission! =@ 성녀 마더 데레사/ 하느님 자녀들의 행복을 몸/행동으로 전해 줌!
6. 서세동점 = +이를 부각시키는 일제 식민 사관의 영향(서세동점을 막고 동양평화를 위해 식민지 건설했다는 논리=곧 도움을 베풀었으니 감사하라는 논리!)
// 교회의 세력(숫자)확장 논리는 예수회의 논리가 아니다. 예수회의 정신은 행복을 전파하기 위하여, 고등문화를 존중하는 적응주의 논리를 중국에서 실천하였다. 특히 마테오 리치 신부이후 - 후기의 수도회 간의 알력과 조상제사 금지로 동양선교를 망쳐 놓았고, 이로 인한 박해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
7. 년도1292 - 1392 - 1492 - 1592 - 1692 - 1792 - 1892 - 1992.
Polo -위화도 - 신대륙 임진란 하멜사 권일신 페낭철수 군대3차 !!!
- 그리스도교의 중국전래 -
1. 대진경교景敎유행중국비(635, 1625)1)와 (동방정교)그리스도교.
가. 성 토마 사도의 중국 선교 가능성에 대해서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의 전설로만 남았지만2), 네스토리오의 경교景敎가 당나라의 수도 長安(오늘의 西安)에 나타난 것은 635년(唐 태종 貞觀 9년)3)이었다. 阿羅本Alopen(아브라함 rabban수사의 준말?)과 동료 선교사들 일행 21명이 동방으로부터 중국에 와서, 황제 대신 방현령으로부터 빈례로 궁중의 영접을 받아 성당(大秦寺, 波斯寺)과 수도원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본토 중국인들 가운데서는 극소수의 신자들만 얻을 수 있었다. 적어도 146년간을 전교하다가 황소의 난으로 경교는 중단 되었다. 서안에서 1625년에 발견된 경교비는, ‘唐 建中 2년 1월 7일 (양력 781년 2월 4일) 일요일 아침에 가 새긴’ 것으로4),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8세기 경교의 상황을 전하고 있으며, 70 여명의 서양선교사들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 비문에 새겨진 중요한 내용을 보면, 예수를 미시가彌施訶로, 삼위일체를 아삼일我三一, 천사를 神天, 동정녀를 室女, 동로마를 大秦, 페르시아를 波斯, 유다국을 大猷(猷大를 잘못하여 거꾸로 쓴 것으로 보인다), 성령을 淨風으로 표현하였고, 신약성경 27권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삼위일체(하느님)는 이렇게 나뉘어 계신다- 我三一分身. 빛나고 경애하올 메시아께서는 -景尊彌施訶미시가(메시아), 엄위하온 본체를 숨기시고 사람과 같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도다-濈?隱眞威同人出代. 한 천사가 그 소식을 알려주어, 동정녀가 성자를 (로마제국)대진에 나아 주셨도다-神天宣慶 室女誕聖於大秦. 빛나는 별이 그 사실을 알려주어서, 페르시아인들이 별빛의 인도로 찾아와 예물을 바쳤도다-景宿告祥 波斯覩耀以來貢. 그분은 24성인이 전해준 구약의 율법을 따르셨고-圓二四聖有設之舊法, 유대국을 다스리시어-理家國於大猷(=유대를 잘못 쓴 것), 말없이 성령으로 삼위일체의 새 종교를 세우셨도다 -設 三一淨風無言之新敎. 그 분은 (마음)그릇을 바른 믿음에 잘 사용하도록, 진복 8단의 행복을 제정하셨도다. 陶良用於正信. 制八境之度. 티끌(죄악)을 제거하고 진리를 완성하도록, 信望愛의 3법도(혹은 지덕.용덕.절덕의 삼덕?)를 여셨도다. 鍊塵成眞 啓三常之門. 그분은 생명을 열고 죽음을 멸하셨도다-開生滅死. 어둠의 나라를 파괴하기 위하여 빛나는 정의의 태양이 떠오르게 하셨도다-縣景日以破暗府. 이렇게 악마의 계교를 없애셨도다-魔妄於是乎悉嶊. 자비의 배를 인도하시고, 빛나는 궁전을 세우시어, 영혼을 구원하셨도다-棹慈航以登明宮含靈於是乎. 이 모든 일을 완수하시고, 광명중에(한 낮에 하늘로) 오르심이, 27권의 (신약성경)에 남아 있도다.-旣濟能事華亭午昇眞經留二七部>.5)
637년에 처음으로 쓰여졌을 중국어 [예수 메시아경-序聽迷詩訶(所)經]에서는, 처음으로 예수를 移鼠이서라 하였고, 비슷한 시기의 작품으로서, 만유 위에 존경하올 하느님의 자비론을 [世尊布施論]으로, 일신론을 [一天論]으로, 천주교의 대영광송 격인 성삼찬미가를 [三威蒙度讚]으로 표현하고 있다. 천주교의 호칭기도문과 같은 기도에서는 성삼위의 이름을 부르면서, Aloha 阿羅訶(아라가, 성경의 엘로힘을 연상케 하는 시리아어의 Ala'ha를 따르고 있다.), Misceho 彌施訶(미시가), 그리고 Lokha ni cuscia 盧訶寧俱沙 (로가녕구사, 시리아어의 Ruha d'qudsa-)으로, 한 본성의 3 위격을 고백하고 있다.6)
*예수의 칭호 = 移鼠 /부적응(예수, 이수, 애설) - 열소 - 야소.
이서(Yi Shu)- 열소( Re Suo) - 야소(Ye Su) - 로 변화.
FR N 174- 각주 7.- ‘네스토리오인들이 처음 중국어로 쓴 “예수”라는 음 이서(移鼠637년)과 예수( 641년), 마니교인들이 쓴 이수( 900년경)가 흥미롭다. 쿠빌라이 칸 왕실에서는 이라 하였다. (원사, c.134). 예수회 선교사들은 1584년부터 루지에리의 천주실록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탈리아어 Gesu'를 음역한 것으로 열소( )로 썼다.(ARSI, Jap.-Sin., 1, 189, f. 28a). 조금 후 리치의 교리대화에서도 와 같은 음차문자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수년 후(몇년?) 라고 옆에 표기하였고, 1603년(천주실의)에는 야소를 우선하게 된다.(1595년 경부터였을 것이다.) 열자와 소자 모두의 왼쪽에 입구() 변을 넣고 있는 것은 음차역이라는 의미로서, 음차문자의 시초가 아닌가 한다.; 김혜경, 리치원전 V, <부산교회사보> 89, p. 89의 각주 참조.
사학징의 말미에 있는 압수석적에서 여수와 녀수라 하였다.; 한글필사본 [성경직해광익]에서는 여수와 아믄이라 하였으나, 감목 민와스딩 감쥰, 셩경직ㅣ권칠, 1893 계 신판에 이르러, ‘네 아 우리쥬 예수 그리스도 위야 쇼셔 아멘’ 하고 있다.
중국의 수도 장안으로부터 떨어진 지방에도 경교의 수사들은 퍼져 나갔다. 멀리 떨어진 스챤(사천)지역에까지 760년대에 복음수도원景福院이 생겨났고, 여기에서 기인된 경교마을景敎故里도 생겨났다. 경교의 총대주교 티모테오 1세(823년에 사망) 시대인 9세기 초에, ‘많은 수도자들이 바닷길로 인도와 중국으로, 지팡이와 자루만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전 제국 내에 전파되던 영광스러운 시대를 뒤로 하고, 845년의 칙령으로 불교의 사찰을 파괴하면서 경교의 사찰들도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총대주교의 전령이 보고한 980년의 보고서에서, ‘ 중국의 경교회는 완전히 파괴되어, 원주민 신자들은 하나도 없고, 모든 사찰들도 완전히 파괴되어 전국에서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7)
시리아 교회가 이곳에 들어가 선교사업을 한 사실은 경교비의 하단부분에 시리아어 새김글이 적혀 있다는 사실과, 1245년에 몽고 왕실을 방문한 윌리암 드 노브룩William de Nobruch이 전하는 바, ‘중국의 경교인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시리아어 성서를 가지고 있다’고 한 말에서 찾아 볼 수 있다(Spillett 1975:ix). 분명히 성서가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문헌이 아직껏 발견되지 않아서, 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1908년에 돈황에서 발견된 경교문헌에는, 징징Jing Jing 이라는 사람에 의해 성서가 번역되었으며, 이 문헌들은 모두 가죽함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곧 아라본(알로펜)이 가지고 들어온 530권의 거룩한 책 가운데서, 그가 번역한 30 여권 속에는 창세기, 모세오경(또는 출애굽기), 시편,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오로 서간들이 들어있다고 한다. 지금 전하지 않는 이 번역서들은 아마도 돈황의 어느 동굴에 묻혀있을 것으로, 중국인 왕웨이환 Wang Weifan 목사는 추측한다.8) 그러므로 경교도들이 성경을 전부, 또는 일부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9년, 북경에서 40 마일 떨어진 한 十字寺 터에서, 960년과 1365년 1월 23일에 조각된 돌들이 발견되었다. 이 비문에 의하면, 7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중국인들이 알고 있던 세례명이 나타나는데, 愛薛(애설=예수=요수아), 盧伽, 保祿과 寶路, 玉函(요한 瑜罕難, 主(注, 朮)安), 雅琥(야고보), Sergio 薩吉思, Carlo 徹里, Giulio 伊䁩?, Zosimo 藥失謨, Giorgio 闊里吉思 등이다.9)
나. 1206년 중국의 북서부에 있는 Karakorum和林에서, 황제Khan이 된 징기스칸은 믿는 종교가 없었지만, 그의 직계에는 동방(동방정교)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들이 많았다. 대카안의 자리는 징기스칸의 막내 아들 톨루이 가계로 승계되었는데, 톨루이의 부인인 Sorghaqtani 唆魯忽帖尼(1198-1252)는 Kereit 족의 공주로서, 제 2의 성녀 헬레나로 불릴 정도로, 몽골 제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Monka蒙哥 칸과 Kubilai忽必烈 칸의 어머니가 되었고, 그녀의 둘째 아들이 제 5대 대칸이 되면서 원제국을 세운 쿠빌라이(1260-1294 재위)였다.10)
마르코 폴로는 중앙아시아와 만주 대륙에 분포되어 있던 동방 그리스도교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1271년에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서, 지중해를 거쳐 실크로드를 따라 몽골제국에 들어갔다. 아버지와 숙부는 두 번째로 쿠빌라이를 알현하러 가는 길이었다.11)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가 예수 부활절 기념연회를 베풀었다고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4 복음서를 가져오게 하여 성경에 입맞춤을 한 후, 그의 부하들에게도 입맞춤하도록 명령을 내렸다.12) 쿠빌라이가 예수를 숭배하고 부활절과 성탄절 행사를 했던 사실을 보면, 몽골에도 그리스도교가 있었음이 확실하다. 1287년에 징기스칸의 후손인 나얀(? -1287)이 만주 일대를 거점으로 고려인들을 징병하여 반란을 일켰을 때, 그곳에도 많은 그리스도교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나얀의 반란에 대해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나얀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 교인이었고, 그가 이끄는 군대는 고려(한반도 북부와 압록강 일대)와 여진 등에서 온 병력으로 구성되었다.13)
이 시대에 조지(闊里吉思, 기와르기스, Georgius)는 1299년에 고려 정동행성의 평장정사로 부임해 와서 개경에서 2년간 살았고, 그의 행적이 조선 세종(1430년 12월 2일)때에 논의되기도 하였다. 조지는 개경에 와서 고려의 노비제도가 잘못되었음을 간파하고 이 제도를 고치려 하자, 고려의 조정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원 제국의 황제 성종은 충렬왕의 의견을 받아들여, 1301년에 조지를 평장정사에서 파면하여 소환했다. 그러나 그가 고려에서 행했던 일련의 조치에는 그리스도교의 색채가 가미되어 있었다.14)
<요약정리>. 이상과 같이, 서안에서 1625년에 발견된 경교비는, ‘唐 建中 2년 1월 7일 (양력 781년 2월 4일) 일요일 아침에 곽자의가 새긴’ 것으로,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8세기 경교의 상황을 전하고 있으며, 70여명의 서양 선교사들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 이 비문에 새겨진 중요한 내용을 보면, 예수를 미시가彌施訶로, 삼위일체를 아삼일我三一, 천사를 神天, 동정녀를 室女, 동로마를 大秦, 페르시아를 波斯, 유다국을 大猷(猷大를 잘못하여 거꾸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성령을 淨風으로 표현하였고, 신약성경 27권을 말하고 있다.
1908년에 돈황에서 발견된 경교문헌에는, 징징Jing Jing 이라는 사람에 의해 성서가 번역되었으며, 이 문헌들은 모두 가죽함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곧 아라본(알로펜)이 가지고 들어온 530권의 거룩한 책 가운데서, 그가 번역한 30 여권 속에는 창세기, 모세오경(또는 출애굽기), 시편,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오로 서간들이 들어있다고 한다. 지금 전하지 않는 이 번역서들은 아마도 돈황의 어느 동굴에 묻혀있을 것으로, 중국인 왕웨이환 Wang Weifan 목사는 추측한다. 그러므로 경교도들이 성경을 전부, 또는 일부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9년, 북경에서 40 마일 떨어진 한 十字寺 터에서, 960년과 1365년 1월 23일에 조각된 돌들이 발견되었다. 이 비문에 7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중국인들이 알고 있던 세례명이 나타났는데, 愛薛(애설=예수=요수아), 盧伽, 保祿과 寶路, 玉函(요한 瑜罕難, 主(注, 朮)安), 雅琥(야고보), Sergio 薩吉思, Carlo 徹里, Giulio 伊䁩?, Zosimo 藥失謨, Giorgio 闊里吉思 등이다.
이같은 사실에 대하여 한국천주교회 초기 신자들은 [성경직해],성모영보첨례의 내용을 읽고
경교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도, ‘손권의 동오시대 적오년
간에 이르러 쇠로 만든 십자가를 얻었고, 당나라 정관 9년에는 경교가 크게 다루어졌습니다.’하였다.
중국에 오래 머물렀던 앵베르 주교도 경교를 알고 있었고, 경교를 전하기 위하여 조선에 들어왔다고 주장하였다.(cf.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집 3, 서학).
2. 천주교의 중국 전래.
가. 마르코 폴로 이후, 쿠빌라이가 사망(1294년 2월 18일)하기 직전에 칸발리크(북경)에 도착한 프란치스코회의 요한 몬테코르비노(1247-1328)신부는, 바로 그해에 옹구트 지역의 왕자 조르지오闊里吉思를 영접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 왕자는 高唐忠獻王으로서 처음에는 경교의 신자였으나,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많은 사람들을 이끌었다.15) 조르지오 왕자는 개종한 후에 아들을 낳아,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되어 요한注安, 朮安, 主安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왕자는 아마도 수단을 입고 미사에 참여하였는데, 미사는 라틴 예식의 Uigur위그르어였다. 왕자는 라틴어 기도문을 위그르어로 번역하게 하여, 그의 지역에서 백성들이 찬미가를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1298년에 조르지오 왕자가 죽자, 경교의 열광자들은 이 모든 것을 전처럼 되돌려놓았다.16)
프란치스코회의 몬테코르비노 신부는 북경에서 약 35년간(1294-1328)을 거주하며 3곳에 천주교 성당을 세웠다. 1305년까지 자주 세례를 베풀어 6천명 가량의 신자가 있었는데, 1305년 9월부터 1306년 2월 사이에만도 400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제일 먼저 위그르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소년들을 시켜 시편과 성무일도, 성가를 필사하게 하였다. 58세가 된 그는 이미 달단어(薘靼語:타타르어)와 문학을 배웠고, 달단어로 신약성서 전권과 구약의 시편을 번역하였다.17) 소식을 전해들은 클레멘스 5세 교황은 작은 형제회의 총장에게 7명의 형제들을(5명의 이태리인과 독일인과 스페인인 1명씩) 파견하여, 그를 주교로 성성하도록 하였고, 1307년에 칸발리크 (북경)에 교구를 설치하고, 그를 대주교와 동양의 총주교로 임명하였다. 이후 1368년에 중국에서는 대 반란이 일어나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다음 해인 1369년에, 칸발리크(북경)에 있던 모든 그리스도 교인들은 추방되고 말았다.18)
十字敎는 1289년에 원나라 황제의 칙령에 따른 그리스도교의 공식 명칭이었고, 이때 예부의 명칭은 崇福司였다. 몽고제국 시대에 교회들은 十字寺라고 불렸다. 이들 신자들은 그리스, 그리스 예식의 조지아, 크리미아, 러시아, 아르메니아, 알란 혹은 루텐 출신으로서, 노예와 군인으로 몽고에 잡혀와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에 상당수가 요한 몬테코르비노의 노력으로 가톨릭이 되었다. 이들이 사용하던 집회소를 638년-745년 9월(음)까지는 波斯胡寺라고 불렀고, 745년부터 900년대 까지는 大秦寺라고 불렀다. 이들의 후손 신자들은 마태오 리치가 찾기 시작하기 전 60년인, 1550년경까지 존재하고 있었다.19)
나. 마태오 리치 신부는 여러 차례, 중국 내 그리스도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1602년 9월 초순부터 노력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1607년에 중국인 수사 Antonio Leitaio를 파견하여, 산서성(Shansi)과 호남성 開封부와 산동성 臨淸에 십자가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다수 살고 있고, 그들의 조상은 중국인이 아니라 외지인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들은 식사할 때나 음료수를 마실 때 성호를 긋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고도 했다. 또한 당시 중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로부터 십자가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외우는 기도의 내용 가운데, 유대인들의 기도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이 아마 [시편]에 나오는 구절들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한때 이 그리스도교도들은 중국 북방에 다수가 살고 있었는데, 문화적 수준도 높고 무장하고 있어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의심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마태오 릿치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그들이 산다는 곳으로 찾아가서 만나보려고 했지만, 모두 공포에 떨며 그들의 후손임을 인정하거나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 속에서는 분명히 그들의 후손들임을 인지할 수 있었다.20)
리치는 호남성 개봉부에서 500-600년간 대대로 거주하던 유대교 신자 12 가정도 만났는데, 거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시나고가가 있었다. 절강성 杭州에도 더 많은 수의 유다교 가정과 시나고가가 있었다. 리치 이후 100여년이 지난 후, 1704년 10월에 Giovanni Paolo Gonzani 신부가 쓴 편지에 의하면, 유대인들 가운데는 修才와 監生도 있었는데, 그들은 공자묘인 聖人廟에 다른 이방인 학자들처럼 배알하고 있었고, 봄가을로 선조들의 사당인 古堂에서 성대한 제사를 바쳤다. 양과 염소(돼지는 안 씀)를 제물로 바쳤고, 일반적으로 음식을 공헌供獻으로 살라 바치며(燒香), 부복하여 절(磕頭)하였다. 만다린들만이 선조들의 사당에 이름과 직함이 적힌 위패를 봉안하였다.21) 마태오 리치의 회고록에 언급된, ‘십자가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네스토리우스 교도인지 아니면 가톨릭 선교사들에 의해서 개종된 사람들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중국내 기독교도들이 明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런 대로 명맥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16세기 중반에는 거의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22)
마태오 리치의 영향을 받은 예수회의 후계자들 가운데, 이태리 출신의 알레니 (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신부는 히브리어에도 능통하여, 하남성 개봉을 찾아 회당에서 유대인을 만나 대화하였다. 이후 곤짜니(Jean Paul Gonzani, 駱保祿, 1647-1732)신부도 1698년과 1704년에, 하남성 개봉에 가서 유태인 회당을 방문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모세오경, 大經이라 함>을 확인하고 祭孔禮式에 참가함도 확인하였다. 프랑스 출신의 안토니오 고빌(Antonio Gaubil, 宋君榮, 1680-1759) 신부는 1723.3.23.에 하남성 개봉에 가서 유태인회당에 들어가 장로를 만났으며, 양피에 적힌 <모세오경>을 보았다. 유태인들은 祭孔에 참석하고 조상에게도 제사를 지내는데, 위패를 놓거나 遺象을 놓지 않는 것을 확인하였다. 고빌 신부의 저서 가운데는 <中國的猶太人>도 있다.23)
<요약정리>. 이상과 같이 몬테 코르비노 주교는 1300년대에 위그르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소년들을 시켜 시편과 성무일도, 성가를 필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소년들이 첫째 성당과 둘 째 성당에서 신부 대신 성무일도를 바치게 하였다. 58세가 된 그는 달단어(薘靼語:타타르어)와 문학을 배웠고, 달단어로 신약성서 전권과 구약의 시편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성경들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음 16-17세기에 진출하는 예수회 신부들의 글들은 많이 남아 있으며, 다음과 같다.
* 1549. 8. 15.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엘의 가고시마 상륙 - 1552. 상천도에서 선종.
3. 초기 예수회 신부들의 저술.
3-1. 조전천주십계와 천주성교실록.
가. 루지에리(Michele Ruggieri(1543-1607), 耶穌會 羅明堅) 신부는 1579년 7월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가 저술한 [천주십계]의 전파 경로를 보면, 현재로 이어지는 천주십계는 1584. 11월 이전에 출판되었다.24) 많은 중국인들이 마태오 리치 일행 신부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물어오므로 중국어로 [祖傳天主十誡]를 출판하게 되었다. 이는 루지에리 신부의 [天主實錄]보다 앞선 것이었다. 신부들은 1584. 11. 30일자로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그리고 사도신경과 함께 천주십계의 중국어 사본을 다음과 같이 로마에 보내고 있다.
'祖傳天主十誡. 一,要誠心奉敬一位天主不可祭拜別等神像. 二,勿呼請天主名字而虛發誓願. 三,當禮拜之日禁止工夫謁寺誦經禮拜天主. 四,當孝親敬長. 五,莫亂法殺人. 六,莫行淫邪穢等事. 七,戒偸盜諸情. 八,戒讒謗是非. 九,戒戀慕他人妻子. 十,莫冒貪非義財物. 右誡十條係古時天主親書降令普世遵守 順者則魂升天堂受福 逆者則墮地獄加刑.' (ARSI, Jap.-Sin., I, 189).25)
나. 처음 책으로 출간한 루지에리 신부의 <천주성교실록, 1584. 8. 18.>(만력갑신 세추팔월망후삼일)에서, 중요한 교리용어가 이미 확립되었다. 예를 들면, 天主, 십계, 영혼, 승천당, 유일천주제작 건곤인물, 천지만물지주(1) 등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26)
天主制作天地人物章(p. 9-12)에서, 오천오백오십(5,550)여년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이 천주께서만 계셨고, 천주의 은덕으로 6일간 천지인물을 제작하셨다.(自五千五百五十餘年以前之時 別無他物 只有一天主 欲制作天地人物 施之恩德 故於六日之間).27) 이렇게 天主를 비롯하여, 靈魂(云이 위에)과 天堂(p. 2, 14), 天神과 路祭弗爾(Lucifer; 10, 13), 元祖 亞當과 阨襪(11), 地獄과 魔鬼(13), 逐之出地堂(14), 地堂快樂之所(15)라 하였다. 天主性章(p.20-22, 27)에서는, 三位一體에 대하여 논하면서 伯瑣亞(Persona) 중 제 일위가 罷德肋(Pater)이요, 이위가 費畧(Filius)이요, 삼위가 斯彼利多三多(Spiritus Sanctus)라 하였다. 그 신성의 오묘함은(此神性之妙), 파덕륵은 아버지요(罷德肋父也), 제 이위 비약은 아드님이요(費畧子也), 제 삼위 사피리다삼다는 성신(斯彼利多三多聖神也)으로서, 비록 삼위로 나뉘어 계시나 실로 한 체(位雖分三體實唯一)이시요, 이는 언어로 형용하기 극난한 신묘함이다.(神妙之極難以言語形容).
세상에 대난이 올 것을 예지한 낙액은 거함을 지어 처자부녀팔인과 금수의 종류들을 함중에 싣자, 하늘에서 사십일 동안 홍수를 내려 세계의 사람과 모든 것이 몰락하였다.(是以諾阨預知 卽造一巨艦 將妻子婦女八人 及其禽獸之類 俱載于艦中 後果天降洪水四十日 世界人物 一切淪沒). 락덕(롯)과 두 딸들은 명령에 따라 도피하였다.(25 -落德同二女逃出全命). 매슬(每瑟=모세) 성인이 천주십계를 받았으니( 26, 32), 앞의 3조는 천주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는 것이요 후의 7조는 자기처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였다.(前有愛天主萬有之上三條 後有愛人如己七條名曰十誡). 석판 양면 가운데, 제 일면에 3조의 내용으로 천주를 공경함이요(故立碑二面 第一面之碑文 有三條之事 奉敬天主), 제 2면의 7가지 조항은 세상 사람들이 화목하라는 것이다.(第二面之碑文 有七條之事 和睦世人).28)
解釋人當誠信天主事實章(27-32)에서, 천주삼위일체는 나누임이 없으시며(天主三位一體不分), 제 일위 罷德肋은 말씀으로 천지를 조성하셨다(獨言造成天地). 그분의 아들(子) 제 이위 費畧은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降生名耶穌契利斯督). 야소는 구세자란 뜻으로(耶穌譯言救世者), 강생하여 세상을 구원하시어 만민의 주님이 되셨으며(降生救世 本爲萬民之主), 계리사독이란 기름을 받은 자란 뜻이다(契利斯督 譯言受油擦찰). 천주께서 세간에 양선하신 동정녀 마리아를 간택하시어 성모님이 되게 하셨다.(當信天主選擇世間良善童貞女 名瑪利亞 是爲聖母). 성모는 무반점으로 잉태되시고 온전히 순결한 여인이셨다.(並無半點汗穢예 仍前全體之室女/cf.경교).
모든 성인이 통공하는 액격륵서아(Ecclesia) 즉 천주교회를 천하의 총교회이며 보편교회(공교)로 성교를 세우셨다.(30- 額格勒西亞諸聖相通功 額格勒西亞者譯言天主敎會也 --謂之聖敎 又爲天下之總敎會--謂之公敎). 원조 아담이 지은 원죄와 입교후 지은 죄를 사하는 예식은 천주교회에만 있다.(31-惟天主敎會 有二等赦罪之眞禮).
천주십계장(32)에서 천주교인으로 정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2가지 지킬 것이 있는데, 하나는 천주십계요, 다른 하나는 삼규를 지키는 것이다. 천주십계를 양면에 새겨주셨는데, 한 면에 새겨진 것은 3조항의 奉敬天主요, 제 2면에 새겨진 것은 7조항의 和睦世人에 관한 것이다. 이어서 세부적으로 십계명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解釋天主勸諭三規章(36)에서, ‘일은 住集於會中 凡事請命於會長할 것이요, 이는 不思色慾할 것이요, 삼은 不思財利以資日用하는 것이니, 此所以一心奉敬天主也니라’ 하였다.
해석 인당성신 천주사실장에서(27상), 우리가 당연히 믿어야 할 사실은(사도신경 12조?) 1. 유일천주를 믿어야 하고, 께서 화성천지하셨고, 三位一體는 나누임이 없이 모두 전능하시며, 파덕륵의 이위가 아드님이요, 삼위가 성신聖神이시다.(p.27상). 제일위 파덕륵께서는 조성천지하신 분이시다. 2. 제이위 비약費畧께서는 강생하시어 야소耶穌 계리사독契利斯督이라 명하시니, 역언하면 야소는 구세자란 뜻이요, 계리사독은 수유찰(기름바름)이란 뜻이다. 천주께서 세간에 瑪利亞를 선택하시어 聖母 가 되게 하셨으니, 이는 불요교감29)의 동신으로 천주제삼위 사피리다삼다(성신)에 의한 강잉이었다.
영혼은 일체삼위의 신묘하신 천주를 밝히 뵈오며, 천신과 같이 행하게 된다.(31상). (사도신경)12조를 믿고 십계와 7조의 살격랄맹다(성사)를 필히 지켜 승천당함을 생각하라.(31하).
천주십계장(31하)에서, 천주교인은 정도를 가기 위해 두 가지를 지키니, 하나는 십계요, 또 하나는 3규이다. 천주께서 로서 를 하시어, 십계를 하게 하셨다. 일은 봉경천주하는 것이요, 이는 화순호사해지인 하는 것이다. 천주께서 입비 2면 가운데, 앞면에는 3조의 봉경천주를 새기시고, 뒷면에는 7조의 화목세인을 새기셨다.(32상).
해석 제일면 비문장(32상)에서, 제1조는 성심봉경일천주로서, 불가제배별등신상하라 하셨다. 천지일월과 제귀신을 섬기거나, 야몽으로 길흉조를 찾거나, 택일진, 점복괘술 등은 천주의 사정을 불신하여 위계하는 것이다. 제2계는 무호천주명 이발허서 하는 것이다.(33상). 제3계는 당수첨례지일 하고 금지백공 하며 天主堂에서 송경첨례천주 하는 것이다.(33하).
해석 제2면 비문장(33하)에서, 제2면에는 7조의 규계가 있다. 제4조는 당애친경장이요(34상), 제5조는 무란법살인 하며 여형제지친 하라는 것이다.(34하). 제6조는 무행사음등사 하는 것으로, 천주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시어 일부일처로 자손을 낳으라 하셨으므로, 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35상). 의 와 도, 타인처자도 죄이다. 역시 제9계에 해당되는 죄이다. 제7계는 이고, 제8계는 요, 제9계는 이다. 제10계는 이다.(35하).
7조의 살격랄맹다(성사) 가운데 경문에 이르기를, 保弟斯摩(Baptisma)는 번역하면 인데, 사람이 천주교자가 되기를 원하면 경문을 외우면서 천주께서 세우신 성수를 받는 것이다. 성수를 받으면 전의 죄를 모두 씻고 하게 되는 것이다.(p.37).
<요약정리>. 이렇게 책으로 출간한 루지에리 신부(耶穌會 羅明堅)의 <천주성교실록>(만력1584갑신 세추팔월망후삼일)에서, 중요한 교리용어와 내용이 이미 확립되었다. 예를 들면, 天主 파덕륵 비약 사피리다 삼다 성신, 구세자 야소 계리사독, 성모 마리아 실녀, 십계, 영혼, 승천당, 유일천주제작 건곤인물, 천지만물지주(1) 등이다. 후에 마태오 리치가 펴내는 천주실의의 용어는 이 성교실록에서 비롯된 것이다.
3-2. 교우론 (De Amicitia, 交友論)
가. 마태오 리치(1552- 1610)는 1582년 8월에 중국 마카오에 도착한 이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엘이 선종할 때까지 염원했던 대로, 동방문화의 중심인 북경으로 진출하고자 줄곧 노력하였다.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외국인으로서 간첩혐의로 의심받는 가운데서도, 부단히 북경을 향하여 진출하던 리치 신부는 1595년 8월에 南昌에 도착하여, 두 왕족을 만나 교류하게 되었다.30) 건안왕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 간접적인 선교를 위하여, 리치 신부는 최초의 漢字 작품으로서 [교우론]을 저술하게 되었다. 이 저술은 중국에서 마태오 리치의 최종 목적인 중국선교에 다가가기 위해 채택한, 적응주의적 방법 (adattamento, adaptationism) 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중국 주변국가에 효과적으로 선교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문서선교란 새로운 선교방법을 채택하게 됨을 의미했다.31)
왕족들이 리치신부를 1595년 8월 29일까지 3번이나 찾아왔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은 구태소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특히 建安王Kienan과 樂安王Loan은 리치와 대화하고 교류하기를 원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건안왕(朱多火節주다절 乾齊)은 아주 적극적이어서, 리치 일행을 그의 왕실로 불러 함께 茶를 마실 뿐만 아니라, 3번이나 식사에 초대하며 교류를 넓혀 나갔다. 리치 신부는 그들이 귀중히 여기는 선물로서, 구리로 된 기름통과 성 라우렌시오의 동상, 지구의와 나침반, 해시계와 책 등을 선물하였다.32)
이에 화답하여 건안왕은 비단과 은제품, 먹을 것 등을 선물하였다.33) 그가 리치에게 받은 것 가운데, 특히 귀중히 여기는 두 종류의 책들은 유럽의 방식대로 일본 종이로 만들어 액자에 넣은 세계지도로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호주와 함께, 4원소와 구천으로 이루어진 지도와, 그밖에도 그 지역에서는 구경할 수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수학책이었다.34) 또 하나의 책은 교우론에 관한 것으로, 건안왕이 리치 신부에게 유럽에서는 우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을 때, 신부는 성실하게 생각나는 대로 철학자와 성인, 옛날과 근대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대답하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교우론] 작품이 되었다.35) 이렇듯이 [교우론]은 리치 신부가 만든 최초의 漢文 작품이다.
[교우론]에서 리치 신부가 인용한 어구들을 저술가별로 분석해 보면,
성 Augustinus(聖 奧斯定) 10 개조, Aristoteles(亞里士多德) 6 개조, Horatius(荷拉西) 1 개조, Zeno(才諾) 1개조, Cicero(西塞祿) 14 개조, Socrates(蘇格拉底) 1 개조, Diogenes(第奧杰納斯) 1 개조, Seneca(索納加) 7 개조, Plinius(伯里尼烏斯) 1 개조, 성 Ambrosius(盎博羅削) 3 개조, Plutarcos(白羅多亞爾各) 13 개조, Messander(梅桑特爾) 1 개조, Valerius(梵勒里烏斯) 2 개조, Haerzio(菜爾齊奧) 1 개조, Casiodoro(西奧陶洛) 1 개조, Erasmus(愛拉斯摩斯) 1 개조, Gelius(杰利烏斯) 2 개조, Publius(勃利烏斯) 1 개조, Ovidius(烏維第烏斯) 1 개조, Quintilianus(昆底里亞諾斯) 1 개조, Cassianus(加西亞諾斯) 1 개조, Marzialis(馬爾齊亞利斯) 1 개조, Demosthenes(特莫斯德納斯) 2 개조, Cassiodorus(西奧道羅斯) 1 개조, Gregorius(額我略) 1 개조, 성 Cyprianus(西潑里亞諾斯) 1 개조, Aelia(愛利亞) 1 개조, 성Joannes(金口若望) 1 개조.36)
하지만 리치 신부 자신이 서양 고전 등에서 직접 채록한 것이 아니라, Andrea d'Evora의 란 책에 있는 금언들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옛날 이교도들의 고전을 선호하였는데, 이유는 중국의 고전과 그 내용이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나. [교우론]은 리치가 저작한 글 가운데 가장 짧은 글로서, 2천여자의 漢字로 되어있고, 그 자신이 출판하지는 않았다.38) 책 제목은 Chiaoieu Lu"en 즉 Trattato sull'Amicizia 交友論이다. 먼저 짧은 서론에서, 리치는 1595년에 어떻게 남창에 도착하였는지, 어떻게 건안왕의 연회초대에 응하였고, 유럽의 식자들은 우정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였는지 알려달라고 그가 청하였으므로, 먼저 76개의 아주 짧은 문장을 - 대부분 단문장으로 된- 써 주었고, 후에 24 문장을 추가하여 100개의 문장이 되게 하였다. 1601. 2. 9일자로 출판된 서문에서 풍응경Fomimchin은 말하기를, 교우론이 백개의 문장으로 되어있다고 하였다.(友論凡百章).
[교우론]이 처음으로 출판된 날자를 교우론의 끝에서 萬曆二十三年歲次乙未三月望日,39) 즉 1595. 4. 24일 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기록이었다. 리치가 건안왕을 처음 알게 된 날자가 1595. 6. 28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리치가 써놓은 한문 글자를 읽을 때, 세로로 써진 음력 XI월 15일을 읽으면서( 十 => 三 ) 월 15일로 착각하여 읽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행일은 음력 11월 15일이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우론]은 1595년 9월 4일 이후에 남창에서, 라틴어와 이태리어로 된 문장들을 번역하여 중국어로 작성되었으며, 1595년 말 이전에 건안왕에게 증정된 작품이다.40)
다. 이 작품의 원 출처는 포르튜갈의 Andrea d'Evora의 Sententiae/ et exempla/ Ex probatissimis quibusque scriptoribus collecta, &/ per locos communes digesta. 란 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제 5판 본(1590년 빠리 발행본)이 아직도 북경의 예수회 고문서고에 있다가 라자리스트회의 문서고로 이관되어 있다. 리치가 축약하여 내놓은 이 작품은 Cicero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라. [교우론]의 중요 내용을 보면, 인간관계 중에서도 친구관계를 (하느님)상제께서 내려준 능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상제께서 두 개의 눈(上帝給人雙目), 두 개의 귀, 두 개의 손, 두 개의 발을 주신 것은, 서로 도와 일을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다.”(56장) “ 각 사람은 일을 홀로 다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사귀며 서로 도우라고 명령하셨다.(故上帝命之交友) 만약 세상에서 이 도가 없어진다면, 인류는 반드시 절멸하게 될 것이다.”(16장)고 하였다.41)
이같이 우정의 관계를 하느님께서 명하신 기본 관계로 보면서, 동시에 친구관계의 중요성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키케로의 격언을 약간씩 변경하여 인용하고 있다.
“벗은 형처럼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벗들은 서로를 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형제보다 더 좋은 것이 벗이다.” (36장 - 友於昆倫邇 故友相呼謂兄 而善於兄弟爲友 -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람과 사람은 모두 형제다’에서 온 것이다). “벗이 피붙이 보다 낫다. 피붙이라도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무릇 피붙이들 간에는 사랑이 없더라도 피붙이 간에 윤리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벗에게 사랑이 없으면 어찌 우정의 도리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 50장 - 友於親 惟此長焉 親能無相愛 親友者否 蓋親無愛 親親倫猶在 除愛乎友 其友理焉存乎). 이는 키케로의, ‘친구가 가족보다 귀하다. 가족은 사랑이 없을 수 있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다. 사랑이 없으면 그 즉시 친구가 되지 못하나, 가족은 여전히 가족이기 때문이다.’에서 왔다.42)
마. 마태오 리치 신부와 루지에리 신부는 1583년부터 1588년까지, 5년에 걸친 작업 끝에 葡中辭典을 편찬하였다. 또한 1598년에 리치 신부가 처음으로 북경에 들어갈 때에 종명인 수수사와 카타네오 신부의 협조를 얻어 音韻字典을 편찬하였다. 리치 신부는 1605년에 西字奇跡을 편찬하였다. 이것은 라틴문 字母를 한자에 붙여 중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에게 학습하기 쉽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마태오 리치 신부는 라틴문 자모를 한문에 붙인 표기법의 창시자이다.43)
바. 교우론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
① 이수광(1563- 1628)의 지봉유설에서는, 마태오 리치 신부가 지은 [천주실의]와 [교우론]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다.
‘歐羅巴國을 大西國 이라고 이름 하기도 한다. 利瑪竇라는 자가 있어서, 8년 동안이나 바다에 떠서 8만리의 풍랑을 넘어, 돌월에 와서 십여 년이나 살았다. 그가 저술한 [천주실의] 2권이 있다. -또 그 풍습에는 우의를 소중히 여기며 사사로운 저축을 하지 않는다. 그는 [重友論]을 지었다. 초횡焦竤이 말하기를, “서역사람인 이군이 <벗은 제 2의 나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매우 기이하다”고 하였다. 이 일은 속이담에 자세히 보인다.’44)
② 이수광에 이어 유몽인도 [교우론]을 소개하고 있다.
‘天竺의 서쪽에 나라가 있어 歐羅巴라고 하는데, 구라파란 그 지역 말로 “커다란 서쪽大西”이란 뜻이다. -그 선비는 친구 간의 사귐을 중히 여기고 (其士重朋友之交), 대다수가 천문과 별자리에 정통하다.’45)
③ 성호 이익(1682-1763)은 신후담과 안정복 등의 후학을 양성하여 기호 남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마태오 리치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았고, 리치 신부를 일러 ‘참으로 성인이다’고 할 정도로 천주교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한편, 리치의 저술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한 글이 [교우론]이었다. ‘집에 1권의 외국서적 [교우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친구는 제 2의 나다. 몸은 둘이나 마음은 하나다. 읽기를 모두 하니, 이는 뼈를 찌르는 이야기이다.-그 책에 또 말하기를 孝子가 父의 交友를 잇는 것은 産業을 이어받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진실 되고 확실하니 가히 생각할만하다.’46)
성호의 제자들 대에 이르러서는 안순암의 천학고에서와 같이, 衆緯(중위:천문역법)와 句股(구고:기하학)의 술법 이외에는, 무조건 모든 서양의 이론이라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 나아가 이기경은, ‘저들은 父子, 君臣, 夫婦의 인륜을 중히 여기지 않고, 다만 友誼를 존숭하니, 이미 재물과 여자를 서로 유통하여 쓰는 기미가 있었던 것’이라며 [교우론] 마저 왜곡시켜 비하하고 있다.47) 신돈와(신후담)의 서학변에서는 갑진년48)에 이미 [영언여작]과 [천주실의], [직방외기] 등의 내용을 장황하게 비판하면서도, [교우론]은 다루지 않고 있다.
④ 공서파들이 수십 년 전부터 이미 [천학초함]을 읽고 비판하는 것과 비교하여 볼 때, 천진암강학에 모여서 공부하던 同學들은 이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천학초함] 속에 들어 있는 여러 편의 글들과 함께, [교우론]도 읽고 실천하였음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정약전은 서울의 젊은 사류(士類)들과 교유(交遊)하며 견문을 넓히고 뜻을 고상(高尙)히 가져 이윤하(李潤夏)ㆍ이승훈(李承薰)ㆍ김원성(金源星) 등과 굳은 친분을 맺고 (定爲石交), - 학문을 강론(講論)하고 탁마(琢磨)하여 서로 더불어 덕을 쌓고 학업(學業)을 닦았다. (相與進德修業。 ---當此時。李承薰亦淬礪自強). 일찍이 이벽(李檗)과 종유(從遊)하여 역수(曆數)의 설을 듣고는 기하(幾何)원본을 연구하고 심오한 이치를 분석하였다.(嘗從李檗游。聞曆數之學。究幾何原本)’49) 이같은 내용은 [교우론]을 함께 읽고 실천하였음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⑤ [교우론]을 읽어 잘 알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정약용은 사돈 형인 이벽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광경을 시로 옮기면서, 同友人李德操檗乘舟入京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고,50) 이벽의 장례식에 참석하여서도 友人李德祖輓詞를 짓고 있다.51) 이렇게 文度公 요한사도(약망) 丁若鏞 承旨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가장 흠모하며 모시고 따르던 스승격인( 從李檗遊 聞西敎見西書, -자찬묘지명/ 이벽의 순교시기에 정약용은 천주교에 흠뻑 빠져 있었다), 曠菴 李檗이 非命으로 32세에 殉敎하자, 그 장례식에 가서, 당시의 狀況과 世風人心을 輓詞로 표현하였는데, 8살 위의 스승격인 이벽을 友人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교우론] 서문에서 萬曆己亥正月瑴旦 友人瞿汝虁序라고 적혀있는 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⑥ [교우론]은 북학파인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의 마음을 열어, 조선 사회에 파격적인 벗 사귐을 만들어 나갔다. 이들의 사귐은 [교우론]에 있는 ‘벗은 제 2의 나’라는 기이한 말을 통해 신분과 문화, 국경을 초월한 수평적 인간관을 낳고 있었다. 북학파는 야소교 교리의 핵심인 이웃사랑을 실행으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52) 담헌 홍대용을 취사(取捨)하며 학문적으로 교류하던 초정 박제가(1750- 1805)는 담헌이 연행에서 귀국하자(1766년) 즉시 찾아가 홍대용을 만났고,53) 박제가 역시 북경을 4차례나 다녀왔으며,54) 정파가 노론임에도 불구하고 이덕조(벽)에 대한 추도시를 지어 남겼다.55) 그가 이벽을 이토록 그리워하였던 것은 어려서부터 봉선사에서 함께 공부한 친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56)
홍대용의 부탁으로 박지원은 [회성원집발문]을 썼는데, 이는 [교우론]의 1장과 56장의 영락없는 판박이였다. “옛날에 붕우(朋友)를 말하는 사람들은 붕우를 ‘제 2 의 나’라 일컫기도 했고, ‘주선인(周旋人)’이라 일컫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자를 만드는 자가 날개 우(羽) 자를 빌려 벗 붕(朋) 자를 만들었고, 손 수(手) 자와 또 우(又) 자를 합쳐서 벗 우(友) 자를 만들었으니, 붕우란 마치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57)
이같이 홍대용과 박지원이 [교우론]에 대해 언급한 것은, 삼강오륜의 수직적 봉건사회를 수평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삼강오륜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는 봉건사회의 윤리관 속에서, 수평적 관계인 붕우는 오륜의 제일 마지막 항목이었고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박지원은 자신보다 4살 어린 이덕무와 벗으로 통했으며, 열두세 살 아래인 제자 박제가(1750-1805), 유득공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은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박제가는 이때의 허물없는 사귐을 기리면서 서로 주고받았던 시와 편지를 모아 [백탑청연집]을 남겼다.58) 양반 가문 출신의 홍대용과 박지원은 참된 [교우론]을 알았기에, 서러움을 받는 서얼 출신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함께 제 2의 나로 친구처럼 지냈다. 그 때의 편지 및 시문을 간추려 벗의 우의에 대해 야박한 자들에게 경계로 삼기 위해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를 남기기도 했다.59) 그러므로 이들은 정파가 다른 남인파의 이벽과도 친구처럼 지냈기에, 이벽이 홍대용에게서 [천학초함]을 전수받을 수 있었고(이벽전), 이벽의 순교 후에는 박제가가 [사도시]를 남길 수 있었다.
또한 이들과 교류하였던 이재 황윤석은 무술년인 1778(정조2)년 11월 26일에 이덕무에게서 들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이덕무가 말하기를, “요사이 서울 안에 서학과 수리를 전문으로 공부하는 자로 서명응과 그의 아들 서호수가 있는데, 또 이벽이 있으니, 바로 무인 이격의 동생입니다. 그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사람됨이 고결한데, 지금 저동에 살고 있습니다. 또 정후조(이가환의 매부인 정철조의 동생)가 있으니, 바로 문관 정철조(이가환의 매부로서, 여주 화가 이희영 순교자의 스승)의 동생입니다.”고(1778) 하였습니다.’60)
또, ‘내가 나군(나동선)에게 묻기를, “지금 세상의 도성 사람들 중에 또한 총명하고 뛰어난 선비가 있는가?”라고 하니, 나군이 대답하기를, “이벽이란 자가 있는데, 월천군 이정암의 후손이고, 병사 이달의 아들이며, 이격의 형(동생)입니다. 어려운 글 열 줄을 한꺼번에 보면서 비호같이 읽어 내려가고, 동시에 눈 하나로는 위를 보고 다른 하나로는 아래를 볼 수 있고, 하나로는 왼쪽을 보고 다른 하나로는 오른쪽을 볼 수 있습니다. 체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나 한번 뛰어올라 공중에서 3회전할 수 있으며, 두 질을 뛰어 오를 수 있습니다. 평소 서양의 <천주실의>를 몹시 좋아하여, 한때 그 무리의 으뜸이 되었는데, 나이 30에 요절하였습니다. 근년에 임금이 서양의 학문에 대해 율. 역. 수. 종류 이외에 천주실의의 학문을 하는 자들로부터 형조에서 그 책들을 거둬들여 불태우고 경향에 엄히 금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군이 당시 세자익위사의 별천에 들자(?) 상소하여 천주의 설을 스스로 아뢰었습니다.”라고 하였다.’(1786).61) 또한, ‘북극고도가 한양은 37도 15분이고, 위원(북경을 뜻함?)은 40도 51분이다. 예전에 이벽에게 들었는데, 백두산은 42도 남짓으로, 봉조하 서명응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였다.’62)
⑦ 신해박해(1791) 중에 올린 이기경의 상소에서는, 이기경 본인과 채제공 역시 [천주실의]를 읽은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63) 초정 박제가는 1778년 1차 연행에서 채제공의 종사관으로 수행을 하였었다. 박제가 역시 이때를 전후하여 [천학초함] 전권을 읽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이벽의 순교 후인, <1786년 1월 22일 朝參時에 박제가가 품었던 생각> 속에 다음과 같이 들어 있다.
“신이 듣기에, 중국의 흠천감에서 역서를 만드는 서양 사람들은 모두 기하학에 밝고 이용후생의 방법에 정통하다 합니다. 국가에서 관상감 한 부서를 운영하는 비용을 들여서, 그 사람들을 초빙하여 머물게 하고, 나라의 인재들로 하여금 천문과 천체의 운행, 악기나 천문관측기구의 제도, 농잠, 의약, 기후의 이치 및 벽돌을 만들어 궁궐과 성곽과 다리를 짓는 방법, 구리나 옥을 채굴하고 유리를 구워내는 방법, 화포를 설치하는 법, 관개하는 법, 무거운 것을 멀리 옮기는 기술을 배우게 하십시오.(천학초함, 기편) - 신의 생각에 그들 무리 수십 명을 한 곳에 거처하게 하면, 난을 일으키지 못 할 것입니다. 그들은 결혼도 벼슬도 하지 않고 모든 욕망을 끊은 채, 먼 나라를 여행하며 포교하는 것만을 신념으로 삼고 있습니다.(천학초함, 리편) 그들의 종교가 천당과 지옥을 독실하게 믿어 불교와 차이가 없지만, 후생의 도구는 불교에는 없는 것입니다. 열 가지를 가져오고 그중의 하나를 금한다면, 옳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다만 저들에 대한 대우가 적절치 않아, 불러도 오지 않을까 염려될 뿐입니다.”64)
병오소회를 읽은 3일 후, 정조는 선대왕들의 업적을 기록한 [갱장록] 수정작업에 참여할 명분으로 박제가를 승진시키라는 어명을 내려, 박제가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65)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 정조는 박제가의 간청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는데, 정조가 북경에 있는 서양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유럽과 교류하고 서양신부를 영입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66) 그러나 정조가 48세 라는 젊은 나이로 갑자기 운명함으로써 박제가의 주장처럼 서양신부를 초빙하여 개혁을 추구하려던 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제가는 이와 같이 서양 선교사들을 등용하여 그들의 과학과 기술을 배우자고 죽기를 각오하면서까지 이렇게 건의하고 있으며,67) 정약용과 더불어 종두법을 함께 연구하는 등, 이들은 붕당을 초월하여 실용적인 교류를 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교류로 미루어 보아, 이벽 역시 박제가의 스승 격인 홍대용을 만나서 연행사실을 듣고 배웠으며, [천학초함]도 전수하여 보았다는 ‘이벽전’의 내용이 -(부연사 홍군사로써 천학전함을 증수하여 몰독주야하시더니)-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이명(1658 - 1722)은 숙종 때 영의정까지 지내다가 숙종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고부사로 북경에 가면서 이기지(1690 - 1722)를 자제군관으로 대동하였던 노론의 거목이었다. 1795년에 노론이 야소교를 믿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 남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렸을 때, 정조는 ‘야소교가 유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이명의 편지를 인용하여 남인을 보호하였다.68) 정조가 평택 안핵어사로 파견한 김희채(1744-1802)는 본관이 청풍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노론이었으나, 이동욱의 종서從婿로서 이승훈이 평택 현감으로 있으면서 3년 동안 공자의 사당에 참배하지 않은 사실을 엄폐하기 위함이었음이 드러나고 있고, 당시 보고 선상에 있던 승지도 이동욱의 從兄 이동현이었다.69)
이밖에 소론에서도 정파를 초월하여 姜世晃의 아들 姜彛天이 천주교를 수용하였고,70) 안동 김문의 봉사손이었던 노론의 金健淳과 그의 族兄 金伯淳이 천주교를 신봉한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김건순은 애초 주문모 신부에게 북벌을 설득하고 이용후생을 배우고자 접근하였다. 담헌 홍대용 등과 큰 테두리를 공유하는 장면이다.71) 노론 명문 집안 출신인 김건순은 이미 조상으로부터 전해진 리치신부의 [기인십편]을 통해 일찍부터 천주교를 알고 있었다. 그는 권철신을 찾아가 교리를 배웠고, 1797년에는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받고 서울로 찾아가 요사팟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김건순은 이후 친척과 친구들에게 신앙을 전파하여, 이중배, 원경도, 이현, 이희영, 정치상, 김치석 등을 입교시켰다.72)
⑧ 朋黨의 벽을 넘어서 서로 교류하면서 진리를 찾고 기뻐하는 士類들의 학문적 교류가 있었던 한편, 신앙 안에서 모든 이웃을 소중히 여기며 班常의 사회적 단절을 사랑으로 극복하여 가는 천주교 공동체인 敎友村도 곳곳에 생겨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존중하고, 한자리에 앉아 함께 기도하면서 하인과 백정까지 정중하게 대우하였던 정약종 순교자의 경우를 보면, 이에 감격한 황일광 알렉시오는 “신분으로 보아 사람들이 나를 너무나 정중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나에게는 천당이 두 개가 있다”고 말하게끔 하였다.73) 이렇게 만인을 평등하게 대하는 정신은 [교우론]을 읽고 그대로 실천한 결과였다고 본다.
3. [교우론]이 우리나라 작품에 반영된 흔적들
➀ 니벽전
‘시세 무술년 이십오세라. 수시 이성호 종학도와 賢友賢士 이씨 정씨네와 면학하시드라.---광주 원앙산사에 은거하시매, 道友가 중도하니 성교요지를 하필하시더라.--- 기해 시세 이십육세시 賢友 면학 위상(爲上)하야 중집산사하니 공이 기학다박하여---’74)
이벽을 스승으로 모시고(爲上) 함께 공부하는 나이 어린 사람들도 모두 현우와 도우로 칭하며, 친구처럼 대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➁ 천주공경가
“어화세상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로 시작하는 이벽의 천주공경가는, ‘수시 이성호 종학도와 현우현사(賢友賢士) 이씨 정씨네와 면학하시더라’75) 하던 중에, 노래로 지어 부른 단체가였다. 삼강오륜에서 우선시 하는 수직관계의 君臣, 父子, 夫婦의 관계에 앞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모든 사람들을 수평적관계인 벗의 관계로 (朋友) 보며 중요시하였기에, 노랫말의 제일 앞에 놓았다. 이에 대하여 이기경은 벽위편에서, ‘저들은 父子, 君臣, 夫婦의 인륜을 중히 여기지 않고, 다만 友誼를 존숭하니 하며, 순암 안정복이 타일러 고치려 하던 천진암강학 관련자들이 벗을 첫 자리에 두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76)
➂. 성교요지
[성교요지]가 [교우론]의 영향을 받은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몇가지 살펴보면,
제 5 장 예수님의 가족77)
東界友師 동계우사 동방 세계 박사들이
軍光詳視 군광상시 별빛 따라 찾아와서
造室辱臨 조실욕림 누추한 곳 나신 분께
伏拜依次 복배의차 엎드려서 문안 했네
5장에서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東界友師로 표현하면서, 논어의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를 은연중에 암시하였다고 본다.
제 13 장 최후의 만찬
工役貧富 공역빈부 일꾼 관리 빈자 부자
左右近交 좌우근교 친근하게 사귀오며
餘論尤服 여론우복 주님 말씀 복종하는
班旅盡招 반여진초 모든 사람 부르셨네
13장 최후의 만찬 부분에서,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 15, 15)는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 일꾼과 관리, 빈자와 부자들이 서로 친하게 사귀고, 양반과 상인들이 모두 다 평등하게 살면 하느님의 초대를 받는다는 평등사상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78)
제 34 장 시간
璣衡驗山 기형험산 시간 재도 세월 가니
怱遽躇躊 총거저주 영복 찾기 주저 말라
璣衡, 璇璣玉衡,79) 所以占測者也. 怱遽, 促迫也. 躇躊, 猶豫不決之貌.
기형, 선기옥형, 소이점측자야. 총거, 촉박야. 저주, 유예불결지모.
기형(璣衡)은 선기옥형으로서 시간을 재는 고대의 관측기구이다. 총거(怱遽)는 촉박함이며, 저주(躇躊)는 주저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④ 담헌 홍대용의 교우관계80)
가. 담헌 홍대용은(1731 - 1783)81) 남양주시의 옛 미금나루 근처에 있는 석실서원에서82) 미호선생(渼湖先生) 김원행(金元行)에게 사사(師事)하였다.83) 석실서원의 위치는 이벽이 천진암과 두미에 머물면서 서울과 포천을 왕래하던 길목에 있으므로, 그곳에서 1770년대에 홍대용을 찾아 만나 뵈올 수 있었다고 여겨지며, 또한 책도 빌려서 필사하여 간직할 수 있었다고 본다. 담헌은 애초 김원행이 중히 여기던 제자였고, 영조 말년 書筵에 낙론을 대표하는 신진 학자로서 세손(정조) 교육(1774/5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84)
[이벽전]에서는, 이벽이 홍군사로부터 [천학전함]을 전수하여 천학공부에 몰두하였다고 적고 있다. 담헌 홍대용을 언급한 것으로 나타나는 이 내용은, 이제까지의 연행일기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홍대용의 부연사행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대청 관계에 있어 시각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홍대용의 연행일기에서 비롯되었다. 홍대용은 남당과 동당의 성당을 찾아, 4차례에 걸쳐 그곳의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볼 수가 있었고, 이들의 과학과 종교에 대하여 상당한 충격을 받았기에, 후에 고금도서집성 5,020권에 달하는 책을 정조 즉위 직후인 1777년에 은자 2,150냥을 주고 수입하여 열람하면서 공부를 하였고,85) 이들 가운데서 [천학초함]을 이벽이 빌리거나 복사하여 공부하였으리라고 본다. 후에 정약용도 이렇게 도입된 책들 가운데서 [기기도설]을 보고 응용하였다. 이규경이 언급한 이 [기기도설]에는 기계의 조작과 설계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고, 이와 더불어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도 소상히 다루어져 있다. 이를 보면 정조와 정약용은 이 책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알았을 것이다.87)
나. 홍대용은 서장관이 된 계부 홍억을 따라서 자제군관으로 1765년 11월 2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12월 27일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1766년 정월 초하루의 조참례에 참여하여 만주어로 행하는 의례의 소리를 들으며 연행을 시작하였다.88) 음악과 관련하여 담헌이 북경에서 목격한 경험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정월 9일에 남천주당을 방문하여, 처음으로 파이프오르간을 직접 연주까지 해보면서 서양문물을 상세히 접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담헌 홍대용은 서양 과학을 새롭게 발견하고, 비로소 그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홍대용의 중국여행은 그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에서 사귄 몇 명의 인물들과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cf. 교우론) 나눔과 동시에 학문적인 교류를 전개 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담헌은 정주학만이 아니라, 양명학, 西學, 불교, 제자백가도, 모두 진리를 일정하게 구현하고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사상전개의 국면에서 유교를 벗어나는 지점에까지 나아가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유교가 강조하는 차별과 차등에 대한 대안으로서, ‘평등’을 사상적 지향점으로 내세우게 되었다.89)
다. 담헌 홍대용 주위의 지식인 가운데 잘 알려진 그룹은 이른바 연암 박지원 일파이다. 연암 그룹은 담헌과 연암을 중심으로, 선배로는 김용겸, 원중거가 있었고, 후배로는 초정 박제가, 형암, 영재, 이서구 등이 있었다. 원중거가 1763/4년에 일본을 사행하고 기록한 [승사록] 과 [화국지]는 담헌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원중거는 일본 문화를 상세히 전하며, 그들의 시문 융성, 서적유통 등을 높이 평가하여 ‘해중문명’이라 칭하기도 하였다.90) 담헌이 원중거를 취사했던 것처럼, 연암 박지원과 초정 박제가(1750-1805)는 담헌을 취사하였다. 특히 초정 박제가는 급진적으로 문명의 위계를 세우고 중국의 선진성을 수용하고자 했다. 문물교류 지향을 서양으로까지 확대시켜 서양 선교사들을 영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91) 초정은 다산 정약용과 절친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창기 천주교 창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벽을 경제의 선비이자 사물의 본성을 깨우친 이로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시를 쓰고 있다.
라. 김원행 문하의 동문이었던 정철조는 성호 이익의 조카이자 이가환의 부친인 이용휴의 사위였다(=이가환의 매부). 이가환의 부친 이용휴의 집에는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기하원본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이가환은 매부 정철조로부터 수리정온을 빌려보기도 하였다. 황윤석은 정철조로부터 역상고성을 빌려 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정철조를 매개로 담헌 등 연암일파와 성호학파의 학문적 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생전의 담헌은 성호사설을 소장하여 읽은 듯하다. 연암일파와 이가환 등과의 교류는 담헌의 사후에 더욱 긴밀해졌다. 그중 초정 박제가는 가장 적극적으로 그들과 교유하였다. 초정은 자신과 절친했던 친구 60인을 기린 시(戱倣王漁洋歲暮懷人六十首)에서, 정철조와 이용휴, 그리고 이가환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노래하였다.92)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는 조선 후기 서양화법의 효시라고 하는 이희영(1756-1801)의 犬圖가 소장되어 있다. 이희영의 견도는 조선 사신들이 북경에서 장식용으로 가져온 서양화와 북학파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희영의 스승인 정철조(1730-1781)는 1772년 이후로,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 학자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하여, 문학과 예술, 실용적인 학문 등을 연마했다. 그는 서양 과학 서적을 연구하여 천문관측이나 역산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를 갖추었다. 또한 정밀한 그림에도 뛰어나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93)
<요약정리>. 위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벽전]에서 이벽이 홍군사로부터 [천학전함]을 전수하여 천학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허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94) 이렇게 이벽과 홍대용의 교류 가능성을 논증하였다. 노론 집안의 김건순 순교자도 제사문제로 권철신과 교유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천주교 신자로서 순교까지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95) 이렇게 정파를 넘어서는 교류의 현상은 이제까지의 연행일기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홍대용의 부연사행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성교요지] 34장에서, 璣衡驗山 -시간재도 세월 가니- 註에서 璣衡을 璇璣玉衡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璇璣玉衡은 천문을 관측하는 고대의 기구이므로, 이벽이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천문학을 매개로 홍대용의 북학파와 교류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cf. 정약용, 증이벽 참조 - 이의수불개 7요질서권.). 박제가의 사도시- ‘이벽을 추모함’에서도 이와 똑 같이, “크나큰 온 宇宙, 天上天下를 가슴 속에 모두 품고 함께 보며, 胸中大璣衡 흉중대기형.” 하며 읊고 있다.
애유략 G. Aleni, 천주강생 언행기략/ 1782년 이전에 한국에 유입된 도서. 강화도로 이관된 도서 목록(cf. 배현숙, 조선에 전래된 천주교 서적,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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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이벽 성조 관련.
** 정약용의 저술 원칙 + 정약용의 종부성사(달레 중, 185-).
다산시문집 제18권, 가계(家誡)
학유(學游)가 떠날 대 노자(路資) 삼아 준 가계
나는 나이 스무살 때에 우주 사이의 일을 모두 취해다가 일제히 펴보고 일제히 정돈하고 싶었는데, 30세가 되어서나 40세가 되어서나 그러한 뜻이 변하지 않았다. 풍상(風霜)을 겪은 이래로 백성과 나라에 관계되는 일인, 전제(田制)ㆍ관제(官制)ㆍ군제(軍制)ㆍ재부(財賦)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드디어 생각을 줄일 수 있었으나 경전(經傳)의 전주(箋注)를 내는 데 있어서만은 오히려 혼잡한 것을 파헤쳐 올바른 이론으로 돌이키려는 바람이 있었는데,
이제는 중풍병으로 쓰러지게 되어 그런 마음이 점점 줄어든다. 그러나 정신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한가롭게 생각이 떠올라 또 불끈 옛 생각이 다시 일어나곤 한다.
남이 알지 못하도록 하고 싶으면 행위를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남이 듣지 못하도록 하고 싶으면 말을 하지 않는 것만한 것이 없다. 이 두 구절의 말을 평생 동안 몸에 지니고 왼다면 위로는 하늘을 섬길 수 있고 아래로는 집안을 보존할 수 있다. 천하의 재화(災禍)와 우환(憂患)이나 천지를 흔들며 몸을 죽이고 가문을 뒤엎는 죄악은 모두 비밀리에 하는 일에서 빚어지는 것이니 일을 할 때와 말을 할 때에는 부디 깊이 성찰(省察)해야 한다.
매양 열흘쯤이 되면 집안에 쌓여 있는 편지를 점검하여 번잡스럽거나 남의 눈에 걸릴 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가려내어 심한 것은 불에 태우고 덜한 것은 노를 꼬고 그 다음 것은 찢어진 벽을 바르거나 책의를 만들어 정신이 산뜻해지도록 해야 한다.
편지 한 장을 쓸 때마다 모름지기 두번 세번 읽어보면서 기원하기를,
“이 편지가 사거리의 번화가에 떨어져 있어 원수진 사람이 열어보더라도 나에게 죄가 없을 것인가?”
라고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뒤까지 유전(流傳)되어 허다한 식별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져도 나에게 비난이 없을 것인가?”
라고 한 뒤에 봉함해야 하니, 이것이 군자(君子)가 근신하는 태도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글씨를 빨리 썼으므로 이 계율을 많이 범하였다. 중년에는 화란이 두려워 점차로 이 법도를 지켰더니, 매우 유익하였다. 너희들은 이 점에 명심하라. 경오년(1810, 순조 10년) 2월에 다산의 동암(東庵)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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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약용의 육신을 거두어 준 사람은 이벽의 누님이었다.
다산시문집 제16권 , 묘지명(墓誌銘),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의 묘지명
용이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연천현(漣川縣)으로 갔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선비(先妣) 숙인(淑人)이 술 담그고 장 달이는 여가에 형수와 저포(樗蒲)놀이를 하여 3이야 6이야 하며 그 즐거움이 융융하였다. 수년 뒤에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니, 용이 그때 겨우 9세였다. 머리에 이와 서캐가 득실거리고 때가 얼굴에 더덕더덕하였는데 형수가 날마다 힘들여 씻기고 빗질하였다. 그러나 용은 또한 흔들며 벗어나고 형수에게로 가려 하지 않았다. 형수는 빗는 빗과 세수대야를 들고 따라와서 어루만지며 씻으라고 사정하였다. 달아나면 잡기도 하고 울면 조롱도 하였다. 꾸짖고 놀려대는 소리가 뒤섞여 떠들썩하니 온 집안이 한바탕 웃고 모두들 용을 밉살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선숙인(先淑人 정약용의 어머니)이 돌아가고 선군(先君) 또한 관직에서 물러나 집안 살림은 더욱 쓸쓸하여 제수(祭需)와 닭ㆍ기장 따위의 음식 지공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형수가 혼자서 집안 살림을 꾸려갔다. 그래서 팔찌와 비녀 등의 패물을 모두 팔아 쓰고, 심지어는 솜을 두지 않은 바지로 겨울을 지냈으나 집안 식구들은 알지 못하였다. 지금 형편이 조금 피어 끼니는 이어나갈 만한데 형수가 미처 누리지 못하니, 슬픈 일이다.
형수의 성은 이씨이니, 본관은 경주인데 시조는 신라의 명신 휘 알평(謁平)이다. 뒤에 휘 정형(廷馨)이 있었는데 이조 참판을 지내고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그 뒤 5대에 휘 달(鐽)이 있었는데 힘이 범을 잡을 수 있었고, 문사(文事)를 버리고 무과에 합격하여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보만(溥萬)을 낳았는데, 보만이 청주 한씨(淸州韓氏) 종해(宗海)의 딸에게 장가들어 건륭(乾隆) 경오년(1750, 영조 26) 3월 24일에 형수를 낳았다.
형수는 겨우 15세가 되어 백씨(伯氏)에게 시집왔다. 경자년(1780, 정조 4)에 선군(先君 정약용의 아버지)을 따라 예천군(醴泉郡)에 가서 돌림병을 앓다가 죽으니 4월 1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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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약용의 정신을 이끌어 준 이는 형수의 동생 이벽 성조였다.
cf. 페낭 신학교 역사 교과서.
다산시문집 제1권, 시(詩)
이벽에게 주다[贈李檗] 자는 덕조(德操)이다
음양은 고쳐지지 않는 거지만 / 二儀雖不改
칠요가 번갈아 진퇴를 하니 / 七曜迭舒卷
새봄 되어 초목들 생기 넘치나 / 嘉木敷春榮
무성함도 얼마 후 쉬이 변하네 / 華滋亦易變
몰리는 신세 되어 곤궁해지면 / 倥傯被驅迫
약간의 동정마저 하소연 못해 / 不能訴餘戀
온갖 사물 공정해 편파 없거니 / 庶物無偏頗
부귀 영달 그 어찌 부러워하랴 / 貴達安所羨
현인 호걸 기운은 서로 맞는 법 / 賢豪氣相投
친근하고 도탑게 정을 나눠야 / 親篤欣情眄
미덕을 애써 일찍 닦아야 하니 / 令德勉早修
강개한 빛 얼굴에 항상 보이네 / 慷慨常見面
[주C-001]이벽 : 본관은 경주(慶州), 부만(溥萬)의 아들로 다산의 형 약전(若銓)의 처남인데 다산보다 8년 연상이다. 천주교도로서 포교 활동을 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이를 만류, 자살한 뒤에 손을 떼었다.
[주D-001]칠요 : 일ㆍ월과 금ㆍ목ㆍ수ㆍ화ㆍ토 등 다섯 별을 가리킨다. 낮과 밤, 그리고 계절에 따라 그 운행이 수시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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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이덕조 벽과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다[同友人 李德操 檗 乘舟入京] 4월 15일(=큰 형수의 기일)이었다.
숲 속의 꾀꼬리 소리 나그네 배 보내는데 / 啼樹黃鸝逆客船
강가의 마을에는 아침 연기 깔리었네 / 水邊村落始朝煙
봄 깊은 양쪽 기슭 붉은 꽃비 흩날리고 / 春深兩岸看紅雨
바람이 잔 중류에는 개인 하늘 잠기었네 / 風靜中流俯鏡天
소식은 재주 높아 물과 달을 얘기했고 / 蘇軾才高談水月
이응은 이름 중해 신선과 같았었지 / 李膺名重若神仙
내 재주 졸렬하여 별 수 없음 잘 알아 / 深知拙劣絡無賴
낡은 서적 종사하여 옛 성현 보답하려네 / 欲把殘經報昔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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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이덕조에 대한 만사[友人李德操輓詞]
선학이 인간 속에 내려왔던가 / 仙鶴下人間
고고한 그 풍채가 절로 드러나 / 軒然見風神
날개 털 새하얗기 눈과 같아서 / 羽翮皎如雪
닭이며 따오기들 시기하였네 / 鷄鶩生嫌嗔
울음소리 하늘 끝 울려 퍼졌고 / 鳴聲動九霄
맑고 고와 풍진을 벗어났더니 / 嘹亮出風塵
갈바람 타고 문득 날아가 버려 / 乘秋忽飛去
남은 사람 마음만 슬프게 하네 / 怊悵空勞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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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약용의 세례명은 약망이었다.
Cf. 이승훈 매형과의 대질 심문. - 네가 졸라대어 내가 세례를 주지 않았느냐?
문왈; 서찰중 정약망 위수(누구)호? 공왈; 의신일가중 무차명.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
<1797년 정약용 35세 때, 왕궁에서 동부승지를 역임하면서 正祖 임금을 모시고 있을 때, 빗발치듯 올라오는, “丁若鏞 打倒”의 상소문에 시달리던 때, 단오 날 고향 마재에 내려와서, 마재 앞강에서 川獵이나 하면서, 울적한 심정을 형님들과 함께 풀고, 이어서 천진암을 찾아와서 머물면서 지은 詩.> = .
- 天眞消搖集 -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共同 合作
[病伏十有二旬適逢玄谿令公從龍門水鍾而至將南游天眞菴 勉而從之 仍訪石泉翁偕適 三家少年及季林聖九規伯亦從焉 到水南作 병복십유이순적봉현계령공종용문수종이지장남유천진암 면이종지 잉방석천옹해적 삼가소년급계임성구규백역종언 도수남작] 洌樵(열초)
-정초부터 몸이 아파 병으로 120일간을 누어있었는데, 현계 영공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용문사에서부터 수종사를 거쳐 오는 길인데, 남쪽으로 내려가 천진암에 이르러 좀 놀다 오려고 하니, 같이 가자고 자꾸 권면하기에 따라 나서기로 하였다. 이왕이면 석천 옹도 찾아가 이야기하여 모두 함께 가기로 하니, 우리 3 가정의 아들들과, 또 계림, 성구, 규백도 따라나서기로 하여, 남쪽 앞강 기슭에 이르렀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다산시문집 제7권 시(詩) -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 산목을 읊은 시에 차운하다[次韻詠山木] 정약용(丁若鏞)
초여름에 산중을 들어오니/孟夏入山中, 푸른 시냇가 방초가 무성한데/綠溪芳草蒨, 취한 눈은 옅은 녹색이 어른거려라/醉眼纈淺綠, 십 리 벌에 흰 명주를 깔아 놓은 듯/十里鋪素絹, 우거진 풀은 한 자도 차지 않는데/茸茸不盈尺, 돌 사이 길은 실처럼 가늘구려/石徑細如線, 옛날 내 어린 시절 노닐 적엔/昔我童時游, 푸른빛이 무성히도 고왔었으니 /蒼翠鬱采絢.
1) Pasquale M. d'Elia, Fonti Ricciane, 1942 Roma, 서론(Introduzione Generale Alle Fonti Ricciane) p. 55- 57 참조. 앞으로 이를 FR로 약칭.; 천학초함, 1976 서울 아세아문화사, p. 19-26.
2) 탕약망, 전정도상설에, ‘두사가 하늘로 올라간 뒤로 그 제자의 한 사람인 다묵이라는 자가 중토에 도착하였는데, 이로부터 대대로 중토에 가는 자가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cf.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3, 서학(1847년 기록).-범세형 주교와 정아각백 신부의 공초에서, ‘경교를 전하기 위하여’ 왔다고 자백하였다.; 셩교감략, 1883 블랑 부주교 감준, 권이 74-79 참조.
3) [성경직해] 9권, 성모영보첨례에서, 당나라 때에 경교가 중국에 들어왔으니, 이미 천 년 전이었다고 한다.;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3, 서학(1847년 기록) 조에서는 정관 2년(628)에 파사사를 세웠다고 하였다. ‘또 손오 때에 땅을 파다가 십자철을 얻었으니, 이 또한 한나라 때부터 천주교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오나라 대제 손권 적오 10년(247) 무오에 땅을 파다가 쇠로 만든 십자비를 얻었다.’고도 하였다.
4) 테렌츠(등옥함 구수, 왕징 역회)가 지은 [기기도설]의 서문(원서기기도설록최)에서, 왕징은 ‘내가 성의 신종지 땅 속에서 비석 하나를 굴출해냈는데, 이 비석의 이마에 <경교유행중국비송>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는 당나라의 곽자의가 새긴 것으로, 1천재가 지났으면서도 오늘 만든 것처럼 새로웠다.’고 하였다.; Giulio Aleni, 천주강생인의(1640년 간행) 하권, 13장과 14장에서, <정관9년, 유대덕 阿羅本자 전교동래, 태종12년7월, 금고경교비서, 且宗徒多黙 敷부敎於印度地方時 去天主降生 未六十年. 전파기광 한명제(漢明帝)귀사서행, 행지천축(行至天竺) 불능복서, 거이42장 동입중국, 약태서70여국 즉천주경전>이라 하였다.; Giulio Aleni, 직방외기, 여덕아 조에서, 옛이름은 비잔틴제국 또는 대진이다. 당나라 정관연간에 그 사람들이 경전과 성상을 가지고 와서 머물렀다. 경교유행비가 있어 그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샤바낙 지음, 유은희 옮김, 진도자증, 2013 도서출판 순교의맥, p. 134.;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도, ‘손권의 동오시대 적오년간에 이르러 쇠로 만든 십자가를 얻었고, 당나라 정관 9년에는 경교가 크게 다루어졌습니다.’하였다.;김혜경, 리치원전제VI, <부산교회사보>제90호, 2016.4. 부산교회사연구소, p. 63-각주 2 참조.; 송강호, 중국어 성경과 번역의 역사, 2007 도서출판 모리슨, 25.; 이환진, 19세기와 20세기의 중국어 성서, 2000, p. 2 참조.
5) 송강호, 중국어 성경과 번역의 역사, 2007 도서출판 모리슨, 30-40 참조.
6) FR 서론(Introduzione Generale Alle Fonti Ricciane) p. 55- 57 참조; 민기, 앞의 책, p. 602 각주 2.
7) FR 서론, 60.
8) 이환진, 19세기와 20세기 중국어 성서, 2000. 9. p. 2에서 재인용.
9) FR 서론,62.; 민기, 앞의 책, 602에서는 梅瑟, 達味, 瑪竇, 瑪爾谷, 路加, 若望, 保祿 등이 제시되었다고 한다.
10) FR 서론,61.64./그녀는 甘州에서 사망하여 十字寺에 묻혔다.; 최상한,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pp. 261- 263.; 서양자, 가톨릭대사전, 경교 항목에서 원나라의 경교를 말하고 있다.
11) 최상한, 앞의책, p. 243.
12) 마르코 폴로, 김호동 역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2008 사계절, p.226/7; 최상한, 앞의 책,p.235 참조.
13) 마르코 폴로, 앞의 책, p. 225; 최상한, 앞의 책, pp. 231, 235- 237, 251 참조.
14) 최상한, 앞의 책, p. 292-298 참조.
15) 최상한, 앞의 책, p. 299, 303, 304 -고당왕 조르지오는 충렬왕의 왕비인 제국대장공주(忽都魯揭里迷失1259-1297)가 죽자 조문사신단을 보내어 부의를 전했다. 공주는 베키의 손녀이자 쿠빌라이의 딸이다.
16) FR 67-68.
17) 송강호, 중국어 성경과 번역의 역사, 2007 도서출판모리슨, p.245.- ‘몽골어역본은 1294년에 원의 수도에 도착했던 프란체스코회의 몬테 코르비노가 번역한 신약과 시편이 있다.’
18) FR 66- 73; 송강호, 앞의 책, p. 64참조.
19) FR N. 173-주 5, 606, 724-730 참조.
20) cf. FR 서론, 78. N.173, 724, 728.; 김호동,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2009 까치글방, p. 296.
21) FR N. 723 -주 1참조.
22) 김호동, 앞의 책, 296.
23) 서양자, 청나라 궁중의 선교사들, 2010 도서출판 순교의맥, p. 239, 337, 375-379.
24) FR N. 248.
25) 1873년에 田 類斯 주교의 감준으로 增刊된 [揀言要理]에서는, ‘一, 欽崇一位天主萬有之上. 二, 毋呼天主聖名,而發虛誓. 三, 守瞻禮之日. 四, 孝敬父母. 五, 毋殺人. 六, 毋行邪淫. 七, 毋偸盜. 八, 毋妄證. 九, 毋願他人妻. 十, 毋貪他人財物. 右十誡總歸二者 愛天主萬有之上 及愛人如己.’ 하며, 간소화 하였다.
26) FR N. 253. -루지에리 신부는 Pietro Gomez 신부의 도움을 받아, 대화형식으로 된 이야기 교리서를 중국어로 내기에 3년 앞서, 1581년 중반에 먼저 라틴어로 준비하였다. 그래서 세상 창조 시기가 라틴어로는 5547년 전이었으나, 중국어 본으로는 5550년 전이라고 명시하게 된다. 1581. 10. 25. - 11월 12일 사이에 광동과 조경의 중국학자들이 손으로 쓴 ‘西[天]竺國天主實錄’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를 보고 A. Valignano 신부는 1582. 12. 31.에 마카오를 떠나면서 빨리 출판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1583년이 그냥 지나고, 1584년 5월 경에 Fukien(복건)의 한 학자가 세밀하게 정리하고 나서, 11월 25-29일 경에 王泮의 허락을 받아, 유럽인이 출판해낸 최초의 호교서 [天主實錄正文]으로 1,200부가 인쇄되었고, 호응이 좋자, 즉시 3,000부가 더 인쇄되어, Cocincina에까지(우리나라에 들여왔을 가능성도 많다) 전파되었다.(ARSI, Jap.-Sin., I, 189, 190.). 저자는 天竺國僧(明堅)이고, 39장으로 된 78쪽이며 제목을 제외하고 13,016 자의 글이다. 루지에리 신부가 로마로 귀국한지 얼마 안 된 1590.7.2.에 신학생들에게도 이 책을 보여주었고, 1591년에는 Gregorio XIV 교황께도 라틴어로 증정되어, 이것이 Tacchi Venturi에 의해 1913년에 출간되었다.
27) 성교요지 제 1장. -육일역작 선벽천지 참조.
28) 한국가톨릭대사전 7권, 1999 분도출판사 간행본에서, ‘그 내용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서가 과연 조선에 전래되었는지가 의문이라’며 <만천유고>에 있는 [성교요지]의 사료적 가치를 문제 삼고 있다.; 또한 모 신부의 주장은, [그뿐 아니라 ‘성교요지’의 본문을 살펴보더라도 △초기 천주교나 박해 시대 천주교 신자들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구약성경 혹은 적어도 구약의 창세기가 번역된 이후에나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들이 나온다고 한다.]고 하였으나, 이후에 밝히는 여러 글에서도 구약성경의 이야기가 많고 자세하게 나오고 있다.
29) 성호전집 제55권, 제발, 천주실의 발문에서, ‘於是天主大發慈悲。親來救世。擇貞女爲母。無所交感。(託胎降生於如德亞國。) 名爲耶蘇’이라고 하여, 천주실의 하권 8편을 그대로 인용하는데, 천주실의의 용어와 내용은 이 성교실록에서 비롯된 것이다.(耶蘇는 고전번역원의 오류일 듯).
30) FR N. 478 이하 참조.
31) 메디나 지음. 박철 옮김, [한국천주교전래의 기원(1566-1784)], 1993 서강대, 89.- 서학서가 조선에 보급되는 데에는 명.청에 와 있던 서양신부들의 전략이 주요했다. 16세기 말부터 서양 신부들은 중국과 만주 지역에 야소교 전파를 위해 서적을 적극 활용했다. 중국에서는 17세기 중반에 한문 서학서가 90권 이상이나 발간되고, 그중 절반 이상이 종교, 고행자, 도덕적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책은 말보다 더 멀리 퍼지며, 우리가 없을 때에, 더 나아가서 죽은 후에도, 설교용으로 가능하므로 영구적인 방법이다. 이는 중국뿐만 아니라, 통킹.월남. 조선 등 한자를 쓰고 이해하는 이웃 나라의 신도를 위해서도 유용한 방법이다.’
32) FR 479.
33) FR 480.
34) FR 481 -각주 2에서는 수학책이 아닌, [교우론]이었다고 한다.
35) FR 482.
36) 뒤에 나오는 [성경직해]에서 이들의 이름이 똑같이 기록되고 있다. 金口若望에 대하여, 민기, 한중일 가톨릭 어휘사,<한국교회사 논문집 II>, p.603에서, [성경직해(광익)] 필사본에는 ‘끠수’였다가, 1893년 활자본[성경직해]에 와서 ‘금구’로 바뀌었다. 디아스 신부의 [성경직해 1636]의 ‘基所’에서 끠수가, 이어서 金口로 바뀌었다.; 沈定平, 이경규외 번역, 明淸之際中西文化交流史 XIII, 2010 부산교회사보 68호, p. 82참조.
37) 노용필, 조선후기 천주교의 수용과 마태오 리치의 교우론,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 2008 한국사학, p. 30. -여기서 Cicero 15회, Plutarch 14회, Augustinus 11회, Aristoteles 6회, Seneca 6회, Diogenes 5회, Erasmus 2회 등으로 집계하고 있다.
38) cf. FR. N. 464.; FR. N. 1513, 1558.
39) 천학초함, 1976 아세아 문화사 영인본, p. 94.
40) cf. FR. N. 1475, 1476, 1513.
41) 천주의 이름을 사용하다가, 문헌상으로는 처음으로 여기서 상제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어서 천주실의에서 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FR. N 246 참조.
42) 沈定平, 이경규외 번역, 明淸之際中西文化交流史 XIII, 2010 부산교회사보 68호, p. 83.
43) 서양자, 청나라 궁중의 서양 선교사들, 2010 도서출판 순교의 맥, p. 149.; 아마도 이 [라틴어-중문 사전]을 모리슨이 입수하여 [모리슨역] 성경 번역에 활용한 듯하다.
44)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3, 서학 참조; 노용필, 앞의 책, p. 19 ; 벽위편, 이지봉의 유설 참조.
45) 노용필, 앞의 책, p. 46.
46) 성호선생문집 상, 1974 경인문화사, p. 533 ; 순암집 제 6권, 권기명에 답하는 갑진년 편지에서도, 칠극을 두고 ‘뼈를 찌르는 듯한 절실한 내용’이라 하고 있다.; 노용필, 앞의 책, 51.
47) 벽위편, 안순암의 천학문답.; 일성록 1795. 7. 24. 천주교인들은 ‘어버이를 버리고 벗을 중시하는 마음으로..’
48) 김시준역, 벽위편, 신돈와의 서학변 참조 -이승훈이 북경에 다녀온 해가 1784 갑진년이므로, 벌써 60년 전 갑진년에 이렇게 비판을 늘어놓고 있다. 혹자는 甲辰의 글자가 甲戌과 비슷하므로, 갑진년인 1724년이 아니라 1754년의 갑술년이라 주장하기도 한다.(cf. 홍이섭, 실학의 理念的一貌, <인문과학>1집, 1957. 12.).
49) 정약용, 선중씨(정약전) 묘지명.
50) 정약용, 第一集詩文集第一卷○詩集 詩 - 同友人李德操檗乘舟入京 四月十五日.
51) 정약용, 第一集詩文集第一卷○詩集 詩 - 友人李德操輓詞.
52) 최상한,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2012 돌베개, p. 94.
53) 박제가 연보, p. 557.; 기억력이 좋고 암기에 능했던 박제가는 어릴 적부터 글을 좋아해 읽은 책은 반드시 세 번씩 베껴썼고, 입에는 늘 붓을 물고 있었다고 한다. 서자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사회적인 차별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반대하는 사상을 전개하였고, 남인인 정약용과도 친교를 맺고 교류하였다.
54) 박제가는 1778년에 채제공의 종사관으로 1차 연행 중 성당을 방문하였고, 2차는 서호수의 종사관으로 1790년에, 이어서 바로 3차는 1791년에, 유득공과 함께 4차 여행을 1801년에 하였으나 귀국 후 9월에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서학과의 관련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55) 박제가, 정유각집, 四悼詩; 정민외 옮김, 정유각집 상, 2010 돌베개, p. 519. - 앞으로는 정유각집으로 약칭.
박제가, 정유각집, 四悼詩, 李德操 蘖
진(晉) 나라 사람들은 유명한 道理를 늘 앞세우고 나가면서, 晉人尙名理, 진인상명리
淸明한 道理를 알려 春秋戰國 亂世를 밝히고자 하였듯이, 淸譚亂厥世 청담난궐세
德操는 上下 左右 先後 모든이와 差別없이 對話하였었는데, 德操議六合, 덕조의육합
어찌하여 이리도 일찍 實存의 現世를 버리고 떠나간단 말인가? 何嘗離實際 하상이실제
匹夫로서 만나게 되는 運數에 매여 있으면서도, 匹夫關時運 필부관시운
집안 일 뒤로 하고, 濟民 經世에만 뜻을 두었었지! 破屋志經濟 파옥지경제
크나큰 온 宇宙, 天上天下를 가슴 속에 모두 품고 함께 보며, 胸中大璣衡 흉중대기형
東西南北 온 누리에 홀로 외로이 드높은 境地에까지 올랐었도다. 四海一孤詣 사해일고예
萬物의 本性과 實體를 直觀하고 알리며, 物物喩性體 물물유성체
萬有의 類別까지도 서로 견주며 밝혔었도다. 形形明比例 형형명비례
거친 벌 드넓어 아직 모두 未開拓인데, 鴻荒諒未開 홍황양미개
뉘 있어 그 어떤 유명한 말로라도 서로를 모두 매어 묶으리오? 名言孰相契 명언숙상계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 앵무새들에게 닥치면, 天風吹鸚鵡 천풍취앵무
새들은 거꾸로 몸을 뒤집어 새 장을 빠져나갈 꾀를 내듯이. 飜成出籠計 번성출농계
못 다 꾼, 남은 꿈마져 깨버리고, 머물던 움막도 미련없이 떠나서, 遽廬罷殘夢 거려파잔몽,
그 神靈한 智慧를 靑山에 파묻고 떠나가는구료! 靑山葬靈慧。청산장영혜
봄가을 오고 가는 세월은 잠시도 쉬지도 머물지도 않고, 春秋不暫停 춘추부잠정,
만물의 造化에는 죽어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다네. 万化無非逝 만화무비서,
드높이 나르며 울며 가는 기러기, 그 휘파람 소리에 보내노라! 高嘯送飛鴻 고소송비홍,
하늘과 땅도 한 쌍이 되어, 소리없이 哭하며 어두운 눈물 흘리도다! 乾坤暗雙涕 건곤암쌍체.
56) 정유각집 중, p. 388-歷奉先寺余童子時讀書處也; 이벽전, -상천도를 작하야 봉졈사 춘파대 사당 증하시더라.
57)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회성원집(繪聲園集)》발문.
58) 백탑은 현재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지(圓覺寺址)의 석탑〔白塔〕을 가리킨다. 박제가(朴齊家)의 《정유문집(貞蕤文集)》 권1,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에 의하면, 한때 그 부근에 연암과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등이 살았다고 한다.
59) 이덕무, 청장관전서 제63권,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 정유각집, [관헌 서상수에게 주다] 참조.
60) 황윤석, 이재난고 27책 무술(1778) 11월 26일 임자. - 서종태, 이벽의 서학탐구와 서울거처 및 천주교 수용시기, <이벽 새벽을 열다>, 2015.9.24 심포지엄에서 재인용.
61) 황윤석, 이재난고 38책 병오(1786) 5월 5일 정미. - 서종태의 앞의 글에서 재인용
62) 성대중, 청성잡기 권5, 성언, ‘백두산의 위도’ - 서종태의 앞의 글에서 재인용.
63) 김시준역, 벽위편, p. 151, 153.
64) 일성록, 1786. 1. 22.; 정조 10년 1786. 1. 22.; 정유각집 하, 2010 돌베개, p. 198 - 199; 당시에 이 단락은 논란의 소지가 많아서, 이본에 따라서는 이 부분을 삭제한 것도 있다고 한다.; 수원화성을 지을 때, 정조는 테렌츠 (등옥함鄧玉函 J. Terrenz)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하라고 정약용에게 책을 주어, 거중기를 고안해 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다산시문집 제10권, 설(說), 성설(城說); 起重圖說; 목민심서;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집중본(集中本); 성호전집 55권, 제발(題跋),〔跋天問略〕; 박지원, 열하일기, 일신수필, 車制참조).
65) 일성록, 정조 10년 1786. 4. 25.
66) 윤민구역주, 시복자료집 5, 2000 수원교구 시복시성 추진위원회, p. 120 - 'ma ben per capirle bisognerebbe aver letto cio, che sette o otto anni fa, fu mandato in Europa La lettera del Re di Corea conferma tutto cio che fu detto della fermezza dei nuovi Cristiani, del zelo e dei sorprendenti progressi della Religione.'
67) 박제가, 정유각문집 권3, 병오정월이십이일.- 東道西器論적인 생각이다. (cf. 위키백과)
68)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3, 서학.
69) 정조 15년 11월 11일; 정조 16년 2월 28일; 순조 1년 12월 24일; 정약용, 목민심서 해관 6조, 願留.
70) 황사영 백서, 58행, 60행.
71) 이경구, 담헌의 지식인교유와 지성사적 위치, [담헌 홍대용 연구], 2012 성균관대학교, p. 363. - 앞으로는 홍대용 연구로 약칭한다. ; 김시준역, 벽위편, p. 273.
72) 황사영, 백서, 54행; 사학징의, p. 119.
73) 달레 상, p. 474; 사학징의, p. 146.
74) 이벽전, 9b.
75) 이벽전, 9b.
76) 김시준역, 벽위편, 안순암의 천학문답, p. 34.; ‘어와 벗님내야 집구경 가자셔라’(李滉, 道德歌)는(cf. 이대근, 조선후기 천주교 수용연구, 2014 대전 가톨릭대, p. 247 각주 71.) [교우론]이 나오기 이전 시대의 것이나, 천주공경가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최양업 신부, 천당 산양가(사향가), 오춘백씨(오배드루) 소장본에서, 어화세상벗님ㅣ야 우리낙토가자, 지당을 가이 아담원조ㅣ쳐닛고, 복지로가이 믜스(모세)션인믓드럿고(1) 하며, 오주예슈강이 긔모이(기묘함)셰히로다.(5). 이외에도 ‘어화벗님ㅣ야 우리고국(고향)차자가셰’는 27, 28, 29, 30, 40. 에서도 나오고 있다. 77) 성교요지 각 장의 내용은, 김동원편저, 영성의 길, 2008 유림문화사를 따랐다.
78) 김옥희, 한국천주교사상사 I -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연구, 1990 순교의 맥, p. 193.
79) 성교요지 34장에서, 璣衡驗山 - 시간재도 세월 가니-를, 註에서 璣衡을 璇璣玉衡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璇璣玉衡은 천문을 관측하는 고대의 기구이므로, 이벽이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cf. 정약용, 증이벽 참조 - 이의수불개 7요질서권.) ; 박제가의 사도시- ‘이벽을 추모함’에서도 이와 똑 같이,
“크나큰 온 宇宙, 天上天下를 가슴 속에 모두 품고 함께 보며, 胸中大璣衡 흉중대기형” 하며 읊고 있다.
80) 홍대용 연구, 2012 성균관대학교 참조.
81) 남양, 자는 덕보, 호는 담헌, 천안 수신면 장산리 수촌에서 태어났고, 묘도 그곳에 있다.
82) 현재 남양주시 수석동에 위치하며, 구산성지의 강 맞은편에 나룻터가 있던 곳으로서, 서울에서 신부님들이 판공을 다닐 때, 양주 지역의 판공 이후, 미금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오시는 신부님의 미사 짐을 받아서 구산으로 모셔들였다는, 부친(김완식)의 이야기를 필자는 들을 수 있었다.
83) 홍대용, 담헌서 내집 3권, 서(書), 미호 선생 김원행에게 올리는 편지[上渼湖先生金元行書] 참조.
84) 홍대용, 담헌서 내집 2권, 계방일기(桂坊日記). ; 홍대용 연구, 2012 성균관대학교, p. 356.
85) 정조 1년(1777). 2. 24. 참조 - 정사 이은, 부사 서호수 등이 장계를 올려 그간의 상황을 알리다. 이후 동지 겸사은 정사 정존겸 등이 지난 해 봄에 완성된 <사고전서>를 (3만 6천권에 총목만 2백권) 구입하여 들여오고 있다.(1783. 3. 24.) 이어서 사은사 서장관 이정운은 (1785. 4. 19.) 이미 수입한 四庫全書 3만 6천권의 장서를 4부로 베껴서, 문연각, 문원각, 문진각, 문소각에 갈라서 보관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86) 다산시문집 10권, 城說 - 글이 올려지자 임금의 비답이 융중(隆重)하셨는데 ‘옹성(甕城)ㆍ포루(砲樓)ㆍ현안(懸眼)ㆍ누조(漏槽) 등의 제도와 기중(起重)의 모든 설(說)을 빨리 강구하라.’ 하고, 인하여 1권(卷)으로 집성(集成)된 내장도서(內藏圖書)를 내리시니, 이는 곧 《기기도설(奇器圖說)》이었습니다. 신(臣)에게 그 제도들을 참고해 보게 하였으므로 신은 삼가 -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도설(圖說)을 만들어 올립니다.
87)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3, 서학 참조.; 최상한,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2012 돌베개, p. 359.
88) 홍대용, 담헌서 외집 8권, 연기, 경성기략 -북경 관(館)에 머물러 있는 62일 동안에, 돌아다니며 구경한 날이 33일이었다; 홍대용 연구, p. 292.
89) 홍대용 연구, p. 108
90) 홍대용 연구, p. 358; 원중거, 화국지, 2006 박재금 역 ; 원중거, 승사록, 2006 김정숙 역 참조.
91) 박제가, 정유각집 권 3, 병오정월22일; 박제가 년보, p. 563.
92) 정조 2년 무술(1778,건륭 43) 2월14일, 승문원 정자 이가환을 불러 -질의하다.; 홍대용 연구, p. 362.
93) 황사영 백서, 64행; 정조 5년 1781. 9. 4.; 일성록 1791. 9. 4; 최상한,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p. 126.; 윤사연 집, 벽위신편 참조.
94)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I,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2011, 157쪽에서, ‘이벽이 홍대용에게서 한문서학서들을 받은 것처럼 말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홍대용은 노론쪽 인물이고 이벽과 그의 집안은 남인에 속하기 때문이다.’하며, 남인과 노론의 교류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주장한다(쟁점연구, p374).
95)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488- 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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