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최남단 미츠페 라몬>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 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코 12, 33)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나름대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지금의 내 삶을 이룬다고 하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표현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 주는 영향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인들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 기억하는 분도 있을 것이고, 친구처럼 스스럼없는 대상으로 그 도움을 받으며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 정답이고, 어떤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도 우리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는 신앙인들 입니다. 때로는 의도적인 노력으로 하느님을 만났지만, 그 때 만난 하느님은 오늘날 자신이 살아가는 일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분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분으로서 머무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고, 그 하느님의 뜻에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방법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약속하고 이루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이고, 그 하느님께 다가서려면 사랑 실천에 대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복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하느님을 느끼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 삶의 모습에 따라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잘 숨겨놓은 잘못과 나의 행동을 들춰내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늘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잘못한 인간을 잊으실 분도 아니지만, 올바른 정신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의 잘못은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선언하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기에, 혹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을 무섭고 두려운 사람으로 알고 있다면 그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모습,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 나선 율법학자의 모습을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다시 말해서 하느님 앞에 내가 올바로 서기 위한 방법으로서 하느님이 가장 즐거워하시는 의 첫 번째 요건은 무엇입니까? 를 묻는 것입니다. 율법을 전공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하느님 앞에 다가서는 규칙과 계명을 묻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의 응답은 율법학자가 기대하던 수준을 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것 “사랑의 실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 예수님과 율법학자는 의견의 일치를 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올바른 방법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율법학자가 칭찬을 들었던 응답을 우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똑똑한 답을 했던 율법학자를 예수님은 칭찬하십니다.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율법학자의 응답처럼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소리가 됩니다. 그것이 독서 끝에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한다면 좁은 길도 넓어질 것이고, 구불구불한 길도 곧은길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옳지 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곧은길에서도 굽은 길로 생각하고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져야 할 올바른 삶의 자세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끊임없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지치지 않을 끈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