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다리>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마태오 10, 1)
누구나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을 봅니다. 자신의 매무새를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질까?"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 본당의 복음화를 위하여 봉사자, 협조자들을 선택합니다. 이들은 본당과 교우들, 신부와 교우들을 연결시켜주는 "다리"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마음이 맞고, 이야기가 통하고 무난한 사람들을 선택합니다. 열심하고 똑똑하지만 조금이라도 바른 말하며 껄끄러운 모습이 있다면 선택에서 배제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도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인간적으로 볼 때 참으로 한심한 마음이 듭니다. 대부분 어부, 세리, 혁명당원, 배반자 유다 이스가리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선택하십니다. 왜 그래셨을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완성하는데 적임자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죽기까지 예수님의 뜻을 알고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다리 역할을 충실히 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복음선포로 시작된 교회는 지금의 교회가 되었고 마지막 날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혼자 쓸쓸히 여행하는 노인이 갑고 어두운 땅거미가 내릴 때 간신히 다다른 곳은 깊고 캄캄한 강가의 언덕 언저리였습니다. 그리고 캄캄한 강가를 아무런 두려움 없이 엷은 빛을 발하는 그 곳에서 노인은 강을 건넜읍니다. 그리고 반대편 강가에 다다른 노인은 강가에 다리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있는 순례자가 말했습니다. "이러한 곳에 다리를 놓은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고.당신의 여행도 이제 끝이 보이는데 당신은 이제 이 길을 지날 일도 없을 텐데... 당신은 이미 이 강을 건너왔는데 이 석양에 왜 다리를 만드십니까?"
백발을 휘날리며 노인은 말합니다. "여행길에 한 사내아이를 만났소. 이제 곧 이 강가에 이를 것이오. 나는 아무래도 좋지만, 어린 저 사내아이에게는 건너기 어려운 강일 것이요. 이 석양의 엷은 빛 속에서 그 사내아이도 언젠가 이 곳을 건널 것을 생각하며 이 다리를 만들고 있다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열 세 번째 사도입니다. 우리 역시 12명의 제자들보다 나은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면 사도로 불리움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위의 이야기에 나오는 노인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제자들의 선택이 예수님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이었다면, 지금의 신앙인인 우리는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또한 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한 다리를 놓는 마음으로 주어진 매일을 살아가는 삶을 희망해 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