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예루살렘 예수 부활성당 내 벽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 25)
사순절을 시작하며 우리는 화해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묵상합니다. 즉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려는 성모님의 역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 시초부터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죄를 지어 하느님과 이웃과 나 자신과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한없이 선(善)하시기에 잘못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을 다시 사랑하도록 부르십니다.(감사송) 이러한 역할에 성모님이 선택되신 것입니다. 당신의 모성애로 하느님을 떠난 사람들을 다시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게 인도하여 주시는 분으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자의 피로 세상과 사람들과 화해하시고, 성모님을 십자가 곁에 죄인들의 화해자로 세워주시고, 그분의 전구로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본기도, 복음의 내용) 또한 우리는 독서에서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부탁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화해는 무엇입니까?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도 어렸을 적에는 일반 소년들처럼 평범한 아이로 자랐다고 합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궁리 끝에 집에 돌아와서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몰래 아버지의 침실로 들어가서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 상점으로 달려가 고기 몇 점을 사먹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맛이 있어서 단번에 먹어 치우기는 하였지만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뜬눈으로 이리 저리 굴러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보다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밤에 아버지께 찾아가 직접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작은 종이에 몇 줄을 적어서 그것을 돌돌 말아 가지고 아버지의 침실 문 열쇠구멍에 끼워 넣고 돌아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새벽이 밝았고, 그는 잠에서 깨자마자 어쩐지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급히 아버지의 침실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가서 보니 열쇠구멍에 꽂혔던 종이 조각은 없어지고 그 구멍을 통해 방안을 살피니 아버지께서 그 종이 조각을 읽으시며 눈물을 닦으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때 그는 더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하였고,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후에 그는 어른이 되어 이 때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아버지의 용서하여 주시는 얼굴을 보면서 하느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용서에는 기적의 힘이 있습니다. 용서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합니다. 용서보다 내면의 상처를 더 잘 치유하는 약은 없습니다. 슬픔이 있던 가슴에 기쁨을 일으키고, 갈등이 있던 곳에 평화를 가져오며, 분노가 있는 곳에 사랑이 솟아오릅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있으려면 우선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임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도 실수할 수 있고, 상처를 줄 수 있고, 때로는 이기적이고, 불친절하고, 배려할 줄 모르는 존재임을 자신에게 항상 고백하고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자존심과 늘 싸우고, 두려움과 씨름하며, 사랑하지 못해 갈등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인내할 수 있고, 용서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서할 줄 알면 내면의 깊은 평화와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숨결로 살아서 하느님을 우리 삶의 한가운데 모셔 들이는 시기이다. 사순절은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고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하여 하느님께 무죄 선언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죄로 인하여 끊어진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화해는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요 용서인 것입니다.
회개(화해)는 진정한 “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를, 이웃과의 관계를, 자연과의 관계를, 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올바로 정립하는 것이 바로 화해인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리고 은총을 체험하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삶은 이제 나부터 시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화해의 삶을 사셨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이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로운 사순 시기,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멋진 관계의 회복을 이루어 회개와 구원, 은총 체험의 시간이 되기를 우리 함께 서로를 위해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나 회해의 삶은 ‘막연히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마리 여우가 토끼를 쫓고 있었지만 결코 토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여우는 한 끼 식사를 위해 뛰지만 토끼는 살기 위해 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을 얻고자 한다면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지금 무엇을 하지 못하거나, 일이 안 되는 것은 그만큼 간절히 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행한다면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힘이 모자랄지라도 간절히 원할 때는, 자연스러운 용기와 적극적인 행동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자신도 모르는 커다란 능력이 발휘되는 법입니다. 지금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간절히 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원하십시오. 그러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