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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꽃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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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꽃자리
  1. 삶의 꽃자리


연중 제 6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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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갈릴래아지방 벳사이다>

"그 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마르코 8, 25)

현대 사회를 일컬어 인스탄트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예를 들면, 샴푸를 선전하는데 샴푸와 린스를 한 번에 쓰는 것이 있는가 하면, 일확천금을 노리는 즉석복권, 로또복권........등 여러 가지의 복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쁜 생활 속에 모든 것을 단 한 번에 이루려고 하는, 즉 노력은 없이 결과만을 과장하여 크게 부풀리는 인간의 심성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착오와 허점이 많이 있음을 느낍니다.

청춘남녀의 만남을 보면 처음에는 어렴풋이 아마도 그는 그럴 것이다.’라고 알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만남이 많아지면 확실하게 그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경이 예수의 도움으로 보게 되는 과정과 같습니. 처음에는 어렴풋이 보이지만 나중에는 확실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지복직관(至福直觀)”을 이루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원하듯 단번에는 불가능합니다.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처럼 서서히, 차근차근히 쌓아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소경이 예수님을 만났듯이 우리 역시 예수님을 만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냉담자들이나 새로 영세한 사람들은 만나면 왜 신앙이 빨리 깊어지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 때마다 생각되는 것은 하느님의 진리는, 신앙은 단번에 알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서히, 하나하나씩, 차곡차곡 자신의 삶에 열중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아울러 죄의 회개와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따르려는 마음의 자세도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의 삶을 통한 노력이 필요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이 눈을 뜨는 것만큼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기심들을 나에게 있어서 큰 보물인 양 간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준은 늘 내가 되는 것이고, 사소한 것에도 목숨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 덕분에 예수님과도 저절로 멀어지게 합니다.

내가 기도를 하면 단 한 번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불평과 불만이 쏟아냅니다. "왜 하느님은 이렇게 불공평한 거야? 누구의 기도는 들어주고, 누구의 기도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시고……."

그러다가 예수님께 바쳤던 기도가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곧바로 예수님의 자리는 사라집니다. "내가 그래도 능력이 있으니까,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지."라는 생각을 갖고 말입니다.

이런 이기심들이 가까워질 수 있는 예수님과의 간격을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의 이기심을 아시기에 단번에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들은 그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눈 먼 소경을 보게 해주시는데, 그 과정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의 말로써도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어떠한 과정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먼저,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고, 그 다음에는 소경의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십니다. 그리고는 "무엇이 좀 보이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소경의 눈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는지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인다고만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눈에 손을 대시자 완전히 눈이 밝아졌다고 오늘 복음은 우리들에게 전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곧 바로가 아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천천히 당신을 알아볼 수 있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다가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어떤가요? 혹시 내 기도에는 관심도 없는 하느님이라고 하면서 또 다른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점차적인 치유를 하시는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시는 예수님 모습을 통해, 내 기도를 곧바로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Writer : 송병선 신부   Date. 2017-02-15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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