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아인카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성당의 요한 세례자 동상>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루카 1, 60)
지금은 성인이 되신 인도의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이런 말을 자주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위대한 사랑을 갖고 작은 일들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들은 수녀님의 말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함으로써 그냥 계획의 차원에만 머무를 때가 참 많습니다. 즉, 사람들은 작은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위대한 일을 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곤 하지만, 대부분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사소한 일들로 이 계획의 실행이 좌절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저의 삶을 봉사하는데 바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여건이 되지 않아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지요. 그러나 언젠가 크게 성공해서 여건이 괜찮아지면 어려운 이들을 위해 제 모든 삶을 다 바치겠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배고픈 사람들, 친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외로운 노인들, 자녀를 돌봐줄 보모가 필요한 어머니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거리에는 쓰레기가 널려 있고, 관심을 쏟아야만 하는 사람들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수천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에는 관심을 갖지도 않으면서, 자기 삶을 온전히 봉사하겠다고 말만 하는 위대한 사랑을 외치고는 합니다.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이 없습니다. 또한 세상을 좀 더 밝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맨 앞에 직접 나설 필요 또한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작은 친절들뿐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사소한 친절과 봉사조차 행동으로 옮기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탄생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잘 알듯이 오실 예수님을 준비한 인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그는 결코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따랐기 때문에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나는 오실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면서 오실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주인공이 아니라 뒤의 자리를 기쁘게 물러나신 분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 외에는 없다는 것을 잘 알려준 것입니다. 내가 바꾸어보겠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욕심이고 착각일 뿐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또한 유다인들은 탄생 후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게 되는데, 이 할례식에는 이름을 짓는 명명식이 동반됩니다. 그 이름은 어떤 특별한 사명이 부여되지 않는 한 보통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전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엘리사벳의 아들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강력하게 반발하며 말합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사실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로부터 이 모든 사정, 즉 아기의 탄생과 아기의 이름과 그가 할 모든 일에 대한 것을 미리 들었지만 믿지 않아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성령을 통해서 이 모든 사정을 알았고, 하느님을 굳게 믿어 요한이란 이름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이 하느님의 뜻을 따랐을 때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 인해서 원하는 아들을 얻을 수 있었고, 이 아들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깨닫고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름이 최고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만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깨달음을 알고 오늘도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너무 커다란 공허한 사랑을 외치기보다는 작은 사랑의 실천이 바로 예수님을 우리 안에,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심을 명심하고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