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나자렛 성모 영보 대성당 내부 - 천사가 성모님께 예수님 잉태를 알린 장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
매달 성모신심미사를 봉헌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하여는 2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시고 기르신 어머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마리아는 신자들의 모범이며 교회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가장 온전히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그리고 책임 있게 받아들이셨고 실천하셨기에 교회의 모범이며 신자들의 모범이 되시는 것입니다(루가 1,38 참조).
그러면 성모님이 어떻게 가장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라 사실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마리아가 신자들과 교회의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순명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순명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루가는 성모영보 때 마리아가, 충만한 믿음으로 예수를 태중에 잉태하기에 앞서, 그 마음에 예수님을 품으셨다고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순명은 마리아의 복됨과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의 원천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이 말은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참으로 현존하게 된 마리아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 줍니다. 마리아는“순명하는 믿음”을 드러내면서,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명으로”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셨습니다.
당시 사회풍속으로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하면 돌로 쳐 죽이는 엄청난 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의 위험스러운 처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마리아가 지닌 참된 신앙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마리아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순명의 바탕에는 “찬미하는 삶”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의 인사에 응답한 마리아의 마니피캇에서, 마리아가 온전히 순명할 수 있었던 조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 46)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마리아의 전 생애는 주님의 현존을 열어 보이고 찬양하는 존재로서의 삶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찬미하고 찬양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마땅하게 찬미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두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첫번째 위험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하느님이 좋은 것을 계속적으로 주시지 않으면 하느님을 찬미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심장을 찔러야만 하는 사랑의 칼이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통이 닥쳐오고 십자가가 자신의 삶 안에 나타나면,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두번째 위험은, 좋은 것들을 하느님께 받기 위해 받기 위해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영혼은 하느님을 진정 찬양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려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정의의 면에 있어서 빚을 지셨다고 단정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독선적이고 교만으로 가득차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쉽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람들 분리시키는 교만함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한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원자 안에서의 기쁨을 필요로 합니다. 구원자는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하는 원인이 되는 분입니다. 마리아가 세상이 줄 수 없거나 혹은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체험했던 것은 바로 그 구원자 안에서였습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주님을 찬미했으며,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어떤 것을 이루시기 전에 이미 구원자 안에서 기뻐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56항에서는 마리아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합니다. 마리아는 이레네오의 말씀대로,“순명함으로써 자신과 인류전체를 위한 구원의 원인이 되신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조차도 믿었습니다.(루가 1,38). 그녀는 항상 속단하지 않고 예수에 관한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는 사려 깊은 신앙인이었고(루가 1,29; 2,19.51), 하느님께 순명하며 믿는 바를 그대로 실천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루가 8,19-21). 하지만 마리아가 구속사업의 중재자로 은총을 받은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인류구원을 위해 “예”라고 순명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시대의 또 다른 마리아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믿음의 기쁨을 체험한다면, 그 기쁨은 자기마음 안에서 울려 퍼지는 천사들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아드님 예수를 통하여 체험하셨던 기쁨은, 새로운 세상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모께서 간직하셨던 기쁨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던 것들이, 마리아의 겸손한 순명의 말씀으로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모든 것을 사리에 맞게 처신하려 하고, 세상의 논리적 가치로 남을 판단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좁은 마음을 성모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나자렛 처녀의 이 겸손한 응답이 끝없는 기쁨이 되었듯이, 우리 역시 신뢰에 찬 응답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자신 안에 이 기쁨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 신앙인인 마리아의 기쁨에 찬 얼굴을 바라보며, ‘마니피캇’에서 하느님께 노래한 기도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물결에 자신을 내맡기도록 해야겠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예수님께, 공생활의 때를 재촉케 하시는 마리아의 한 말씀은 우리의 신앙고백이며, 전적인 의탁일 수 있습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우리는 기도 안에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성모께서 예수와 이루셨던 영적 일치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길을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 길은 전적인 순명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뜻에 자신을 맡겼던 것처럼, 그리고 성모님께서 아드님 예수님의 삶에 맡기셨던 것처럼, 그 삶에 우리도 순명해야 합니다.
신앙인이란 예수님이 성부와 하나인 것처럼 아들과 하나 되기로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의 어머니 마리아는, 신앙 안에서 아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제자들(신앙인)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 직분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은 두터운 믿음 안에서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셔야만 합니다. 믿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우리에게 아드님께 대한 순명의 덕을 키워 주시고, 구원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