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아르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 성당에서>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 3~4)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교회는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이중의 하나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가 23.34) 라고 말씀하신 용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수없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의 요구에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라고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셨고, 이어 "너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태 6.14-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원수까지도 용서하라." 하셨고, 용서는 한번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라는 말씀으로 무한히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에서도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서로가 서로를 용서해주는 것은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죄의 사함이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 단순히 고백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침부터 밤까지 전 교회가 살아야 될 현실입니다. 용서할 줄 아는 공동체는 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할 줄 모르는 공동체는 과거에 주저앉아버리게 됩니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 교회는 희망이 있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가 없는 곳에서는 처음에는 평화와 공존이 있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그것이 깨지고 차디찬 냉전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삶은 공동체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용서는 바로 사랑의 결실입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쉽게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과 용서는 함께 공존합니다. 예수님은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린 행실이 나쁜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면서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하는 사람은 적게 용서한다. (루가 7.47)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를 통하여 참다운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하나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용서와 사랑, 그리고 기쁨은 살아있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내게 잘못이 있을 땐 사과만이 아니라 진정한 용서(뉘우침)를 청하고, 남의 잘못에는 관용이 아니라 참다운 용서, 사랑에 찬 용서를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