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드레스텐 성모교회 내부 제단 - 종교개혁 때 개신교회로 탈바꿈됨>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9)
교회는 오늘 연중 33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냅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계승하여 '교회란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는 신앙인들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오늘 '평신도 주일'의 의미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은총의 분배자인 성직자들과, 복음 삼덕을 실천하며 하느님께 봉헌된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 그리고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이 된 평신도들입니다. 한 가정이 평화롭고 번창하기 위해서 가정을 구성하고 있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만 하는 것처럼, 교회 역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서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요? 여러분들의 자리에 충실히 계십니까?
신앙인으로서 삶의 자세를 돌아보는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세상 끝 날에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첫 번째 독서, 말라기 예언서의 말씀은 아주 짧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의미심장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의 끝이 다가왔을 때, 나는 어느 쪽에 속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서 현재 살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불에 닿기만 하면 봄기운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릴 검불처럼 가볍고 무게 없고 결실 없을 삶을 올 한해 살아왔는지, 아니면 하느님 두려운 줄 알고 살았기에 승리의 태양이 우리 앞에 비춰줄 때를 맞을 자격을 갖추며 살았는지를 판단해 봐야 합니다. 즉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삶으로 살아왔는지, 구원의 열매를 맺을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했지만, 삶에서 올바른 정신을 갖고 사는 방법을 이야기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현재 보이는 아름다움의 바탕, 근본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몸은 이 세상에 있지만, 그 나머지 모든 것은 이미 하느님의 뜻에 완벽하게 일치하고 살 줄 아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의 종말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아직 이 세상에 더 많은 미련을 갖고 있기에 그렇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미련을 깨끗이 털고 일어날 때에 나의 삶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행복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갈 수 있는 것인데도 그런 일들을 제 자신에게 적용시키기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면서 멋있는 돌로 치장돼 있던 눈에 보이는 성전의 지주(地主)를 감탄하는 일만으로는 참된 구원의 길로 가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말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을 효과적으로 이겨내야 하며 때로는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견뎌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여하려면 첫 번째 독서 끝에 나왔던 것처럼 '하느님 두려운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사를 살펴보면, 초창기 우리 선조들은 누구의 권유나 교육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머나먼 북경까지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이 땅에 복음의 씨를 가져 왔을 뿐 아니라 모진 박해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는 모범적 사도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성직자가 없었던 기간이 무려 백 년에 가까웠습니다. 근 오십 년은 성직자가 전혀 없었고, 나머지 오십 년은 성직자가 몇 명 있었지만 박해 때문에 쉽사리 성직자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 신앙 선조들이 스스로 신앙을 지키고 이 땅에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은 세계 어느 교회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위대한 우리 신앙 선조들을 앉아서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그분들을 본받는 노력과 수고와 열성을 통해 더욱더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평신도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지금까지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성직자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미성년적 자세에서 하루빨리 탈피하여야 하겠습니다.
언제 우리의 목숨을 요구할지 모르는 세상 끝 날에 좋은 몫을 차지하기 위한 방법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찾아보아야 할 방법은 늘 한 가지 길로 흐릅니다. 그 대답은 게으르지 않은 생활을 하는 것이고, 수고하고 애써 노동하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삶의 본보기가 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 좋은 결실만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구원의 길에서 멀리에 떨어져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하느님의 뜻에 올바로 살지 못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구원은 없다.'는 심판의 선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세상의 완성을 향해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가 모르기에 넋을 놓고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말없이 일해서 제 힘으로 벌어먹도록 하십시오."라는 말을 기억하며 한해의 끝을 향하는 연중 33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