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예리코>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 38)
복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장님의 끈질긴 간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이럴 때에는 순례자들이 무리를 지어 예루살렘으로 함께 여행을 하곤 하였는데, 스승이라고 불리던 랍비들은 이렇게 여행하면서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 때 순례객들은 함께 걸어가면서 그 가르침을 들었고 순례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순례객이 마을을 지나갈 때 길가에 줄을 지어 서서 축복을 청해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길가에 한 소경이 나와 앉아 있었는데 순례객의 무리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나자렛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큰 소리로 예수님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소경은 사람들의 제지를 문제삼지 않고 비명에 가까운 절규를 하였습니다. 특히 39절의 외침은 비장감이 감도는 절규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나자렛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고 아무도, 그 무엇도 그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발걸음을 멈추셨고 그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소경의 고통스러운 절규는 결국 예수님의 자비를 얻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기적을 원할 때도 바로 그 소경이 보여준 그러한 마음자세와 태도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기적을 나타나게 하는 것은 기적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감상적인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정열적이고도 강렬한 절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열성적이고 항구한 믿음을 보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입니다. 소경은 눈을 뜨고 올바로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삶을 올바로 보게된 소경은 예수님을 따랐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그가 하느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는 것은 기적의 은혜를 깨닫기도 하였겠지만, 예수님을 닮으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과는 달랐습니다. 그분이 어떤 기적을 행할까 하고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했고 그분과 삶을 함께 하려는 마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의 참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였습니다.
복음이 전하는 예리고의 소경이 그토록 부르짖어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받았다면 우리의 눈은 어떠합니까? 사물을 쳐다보는 눈은 볼 수 있다 해도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얼마나 밝은가요? 육신의 눈은 보지 못한다 해도 잠시 뿐이지만 영혼의 눈이 멀 때, 그것은 영원한 암흑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예수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자주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색안경을 쓰고 이웃을 바라보며, 우리의 잣대로 재고 측량하여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하느님과 이웃에게 행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이제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바라보며 그 신비를 깨달아 알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예수님께 은총을, 그러한 기적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