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성당 - 기사로 말탄 모습의 프란치스코 동상>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에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루카 19, 40)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있으면 활동을 못해서 활동을 잘 하는 사람이 부럽게 느껴지고, 또 내가 활동을 하고 있는 중에는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부럽게 느껴집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예수님께서 오늘 나에게 원하시는 것일진대 그것보다는 남이 하고 있는 것이 더 좋게 느껴진다니 참으로 우스꽝스럽지 않은가요?
복음에서 서로 다른 두 성격의 모습을 가진 자매를 만납니다. 우리들 중에서 보더라도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활동적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조용한 것을 좋아합니다. 활동적인 사람에게는 자리에 앉아서 깊이 생각하고 말이 적은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운가하면, 그와는 반대로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명상에 잠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무엇인가 행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을 우습게보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느 편이 옳고 어느 편이 그르다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는 일을 좋아하는 마르타도, 하느님의 일을 깊이 생각하며 듣고자 노력하는 마리아와 같은 기도하는 사람도 필요한 것이고, 다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에서 우리가 생각할 점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어진 상황이란 이제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시고 심각하고도 착잡한 마음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그 두 자매의 집에 들리신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대하는 두 자매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마르타는 스승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셨다 하여 성의껏 최선을 다해 대접하느라고 바빴고 식사 줍니에 대한 열성으로 그의 마음과 행동은 가득 차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깊이 생각하시고 염려하시고 계시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통과 죽음을 앞에 둔 그분의 마음을 나누고자 예수님 발 앞에 응답하며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모두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심각한 순간에 마르타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방식대로 예수님께 열성을 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께 보탬이 된 것이 아니라 훼방이 되고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열성을 보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의미하는가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가끔 다른 사람에게 친절 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자기 위주의 방식대로 친절을 베풀고자 하는 때가 흔히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방법이 상대방에게 그리 필요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화를 내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한 친절을 베풀고자 한다면 받아들이고자 하는 상대방의 사정과 마음을 알 필요가 있고, 그 필요성에 적합한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즉, 상대가 원치 않는 친절은 오히려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가요? 예수님께 드리는 우리의 성의와 열의가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든 원하시지 않든지 상관없이 내 방식대로, 내 마음대로 터무니없는 열의와 성의에서 나온 고집은 아닌지요?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평화의 사도라고 불리우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축일을 맞으신 모든 분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해와 달과 바람과 물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인이었고, 사나운 늑대를 회개시켜 주민들의 온순한 친구가 되게 하고, 하늘을 나는 새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동물들에게 복음을 전한 성인은 이태리 아시시에서 부유한 직물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냈습니다.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하여 투옥되기도 했고, 고향에 돌아와 중병을 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병에서 회복된 뒤로 프란치스코는 전혀 딴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고,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고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 그때까지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가 선택한 삶은 주님의 복음대로 가난과 청빈의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전까지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마음을 돌이켜 자기 유산까지 포기하면서 하느님께만 매달렸습니다. 가난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복음대로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 사랑을 알렸습니다. 또한 성인은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창설하여 제자들을 훌륭하게 교육시켰고, 말년에는 예수님의 오상까지 받아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이처럼 프란치스코 성인은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퇴색 되어가던 교회에 가난의 가치를 새롭게 함으로써 교회 안에 참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고 문전걸식을 하면서 비천한 가난뱅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철저히 가난해졌던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셨던 프란치스코를 가리켜 교황 비오 11세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하며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억하는 오늘 성인께서 남기신 가장 아름다운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바치며 세계의 평화를 기도합니다.
주여,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저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