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봉평 메밀꽃>
"그 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 38)
11월 위령 성월의 첫주일입니다. 우리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분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고 특히 불쌍한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기입니다. 또한 우리는 나의 죽음과 죽음 후에 관한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묵상해야 합니다.
어렵고 혼란한 사회일 수록 자살에 관한 소식들이 많이 들려옵니다.입니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더욱더 무거워집니다. 왜 그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동원해 삶을 마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삶을 포기하게 하는가? 삶에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삶에 목적이 없기 때문에,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살이라는 마지막 방법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거지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거지들의 자살 소식은 신문이나 방송의 기사로서 취급할 가치도 없을 것인 이유도 있지만 거지들은 자살을 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얻어먹고 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또 이 추운 날 아무데서나 잠을 잔다는 것,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과 눈초리를 견디면서 생활하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을 터이지만 그들 중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쉽게 접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들의 자살소식들 듣기가 어려울까요? 그들에게는 확실한 목적이 있고, 뚜렷한 목표가 있고,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확실한 목표는 희망인데, 그것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날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어머니와 일곱 형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전해줍니다.(전체를 우리가 듣지는 않았지만 성경을 보면) 우리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어머니는 고통을 당하는 아들들에게 위로를 해줍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내 뱃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도 모른다. 너희들에게 목숨을 주어 살게 한 것은 내가 아니다." 아들을 잃는다는 그런 아픔이 가슴에 남아 있을 텐데 내색하지 않고, 용감하게 견디어 냅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을 견디어 내게 하고 있습니까? 어머니는 단 하루 동안에 일곱 아들이 모두 죽는 것을 지켜보고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픔을 용감하게 견디어 냈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용기에 힘입어 아들은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자격이 없소." 라고 부활의 희망을 전합니다. 이렇게 어머니와 일곱 아들들은 하느님에 대한 희망으로 인해서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은 세상의 돈, 명예, 쾌락에 대한 즐거움이나 기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자격이 없소."
이런 신앙고백이 있기에 신앙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가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기대할 수 있었기에 기꺼이 몸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고통을 당하고 괴로워하여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가 있기에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 부활에 대한 굳은 믿음이야말로 갖가지 고통으로 약해지려는 우리를 강하게 지켜주고 어려움에서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줍니다.
부활후의 우리의 모습,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복음에서 사두가이 사람들은 부활을 언급하면서 만일 일곱 형제가 모두 자녀 없이 죽고 한 여인을 부인으로 데리고 살았을 때, 부활한 뒤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애매모호한 질문을 합니다. 그들은 바리사이 사람들과는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의 삶은 필요 없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충분하게 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죽음이후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은 허무맹랑한 것이었습니다.
사두가이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인간적인 잣대로 부활이후의 삶을 평가하지 말아라. 부활의 삶은 세상의 삶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후의 모습은 지금의 삶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모두 살아있는 것이다."
독서의 일곱 형제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고통을 이겨냅니다. 희망은 죽음을 이겨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법도 달라집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는 사람은 오늘의 삶을 통해서 내일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사람은 오늘의 삶을 통해서 내일을 포기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더욱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희망은 무엇입니까? 사라지고 없어질 세상의 희망이 아니라, 진실 되고 참된 하느님께 대한 희망만이 우리의 삶을 더욱더 가치 있게 만들어줍니다. 어떤 희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삶이 결정됩니다. 사도신경을 통하여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는 우리가 미사 때 고백하는 신앙 안에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정으로 좋은 희망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이제는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무성하던 나뭇잎이 단풍들고 낙엽 되어 구르는 깊은 가을이다. 우리들 현세의 삶도 머지않아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부활을 굳게 믿고 그 부활에 동참하는 구원의 좁은 문을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당장 눈앞의 현세 이익을 탐하여 남을 해치고 사랑을 거슬러 영원한 멸망을 자초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 죽음도 뛰어넘는 참으로 가치 있는 사랑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