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성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루카 19, 41)
오늘은 앨리사벳 성녀의 기념일입니다. 1207년 헝가리의 공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독일 한 지역의 영주가 될 사람과 혼인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윤택한 시집에서 살며 보여 준 삶의 방식은 참으로 파격적이었습니다. 어린 엘리사벳은 매 주일마다 양어머니인 성주의 부인 소피아의 인솔로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신분상 그녀의 머리에는 화려한 황금관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못 박히신 예수님의 성상 앞에서 기도하던 엘리사벳은 문득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있음을 발견하고는 즉시 자기 머리에서 금관을 내려놓았습니다. 양어머니가 이를 나무라자 “어머니, 예수님께서는 가시관을 쓰고 계시는데 제가 어찌 금관을 쓰고 그 앞에 있겠습니까?”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정신을 가졌기에 그녀는 사람들의 굶주림과 고통에 무관심한 가운데 호의호식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영주 부인이 아니었습니다. 늘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하려고 애쓰는 여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당시 귀족들의 부가 가난한 이를 착취하고 전쟁에서 약탈한 결과라는 것을 직시하는 복음적 비판 정신을 가진 지혜로운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검소한 옷차림을 하면서 화려한 식단을 멀리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음식을 제공하고 아픈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이는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와 귀족 여인의 생활 관습을 생각하면 상상하기조차 힘든 애덕의 실천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당연히 성안의 귀족들에게 많은 미움과 반발을 샀습니다. 그녀를 잘 이해하고 깊이 사랑하던 남편이 불행히도 전쟁에서 전사했을 때, 성안의 귀족들은 그녀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결국 그녀는 성에서 추방당합니다. 그녀는 이제 정말로 '가난한 이'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큰 시련에서 더욱 깊은 신앙으로 가난한 이들과 하나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서 끊임업이 기도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하고 가장 비참한 처지의 환자들을 돌보았던 것입니다. 스물넷의 이른 나이에 선종한 그녀의 삶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면서 애덕 활동의 고귀함을 깨닫게 합니다. 엘리사벳 성녀는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인 '애덕의 실천'이 자리 잡게 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 채 애덕의 실천으로 일관한 그녀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가르침을 줍니다. 지금의 안락과 풍요가 사회적 차원에서 누군가의 몫을 부당하게 빼앗은 결과에서 온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가 가난하고 약한 이의 아픔과 절규를 애써 외면하며 끼리끼리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삶의 모습을 돌아보도록 말없이 권고합니다.
엘리사벳 성녀의 축일에 우리는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일생 세 번에 걸쳐 눈물을 흐리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예수님을 울게 하였습니까?
첫 번째 우시는 대목은 라자로의 무덤에 갔을 때입니다. 무덤에 갔을 때 마리아뿐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십니다. 이 모습을 보고 유다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것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했던가 봅니다.” 그분께서 우시는 사람들의 아픔에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오늘의 복음입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언자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시대의 징표를 알아듣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모습에 대한 연민의 눈물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실 때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 실패와 좌절에 대한 눈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울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늘 강하게만 보였던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오습은 익숙한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익숙한 예수님의 모습은 늘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시며, 근엄하게 가르치시며, 무게 잡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웃는 예수님의 모습이나, 울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영 낯설게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흘리시는 눈물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비유라는 방법을 통해 쉽게 설명해 주었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메시아를,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잘못되는 자녀들을 보고 마음속으로 우시는 부모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단을 요구하는 표징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특히 이방인도 아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사람들, 더욱이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 사람들이 잘못된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가슴이 미어 지셨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눈물은 이천년 전에 일회적으로 흘리시는 눈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한심한 모습들을 보시면서도 흘리시는 눈물처럼 느껴집니다. 습관처럼 젖어있는 우리들의 악한 행동들. 그러면서 그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타성에 젖어서 계속 행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어린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일부러 쉽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트집을 잡고, 결국 십자가 상의 죽음으로 내모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이 아니라 그 말씀에 감화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노력하는 단순한 신앙인의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 옛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저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예수님의 뜻을 외면하고 세속의 탐욕에만 젖어 살아간다면, 예수님은 그 옛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셨듯이 우리들을 바라보시면서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정해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 눈에 눈물 대신 웃음꽃을 피어나게 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복음 환호송에 나오는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녀 엘리사벳이 보여준 “애덕을 실천하는 마음”가지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