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이스탄불 성 소피아 성당>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 46)
성전에 대한 경외심은 어떤 종교든지 큰 것이어서 거룩한 장소에 대한 정화의지 역시 큽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강한 성전 정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성전들은 종교지도자들과 결탁한 상인들로 인해 극단적인 세속화 경향을 보였습니다. 백성들의 신앙 역시 영적 생활보다는 제물봉헌에 강조점을 둔 기복적이고 비정상적인 신앙생활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성전 입구에서 수많은 봉헌물 거래상들이 진을 치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상인들은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는가 하면, 봉헌물을 사려는 사람은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서로 실랑이를 벌이곤 했습니다.
또한 상인들의 뒤에는 성전에서의 봉헌물 거래를 허용함으로써, 판매량의 일정한 퍼센트를 상납받는 종교지도자들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겨야 할 하느님의 집을 웃돈, 밀거래, 부정과 상납이 오고 가는 난장판, 도둑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당시 유다인들의 가식적이고도 위선적인 기도생활 역시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떤 유다인들은 집 안에 잘 있다가도, 그들의 공적인 기도 시간인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가 되면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큰 길모퉁이나 장터 같은 곳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열심한 기도생활을 사람들 앞에 보란듯이 뽐내곤 했습니다.
이렇듯 많은 고위층 유다인들은 기도의 본질적인 측면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반면, 경쟁적으로 가식적이면서도 위선적인 기도에 몰두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형식적인 예배, 기복적인 신심으로 가득 찬 성전을 정화하시는 것입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기도하지 않으려거든 내 집에서 나가라.”예수께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하고 나무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고린3,16-17).
그러나 정말 그렇게 불리기에 합당한지 다시 생각해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었던 곳을 우리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곳이 '강도들의 소굴'로 되어 버린 것 같다면 슬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강도들의 소굴’은‘온갖 악한 생각과 악한 행위’만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것을 빼앗을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이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매장시켜 버릴까? 어떻게 하면 저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탐욕과 욕심,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자기의 이익, 자기만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강도들의 소굴일 것입니다.
반면에 기도하는 집은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존재하는 곳입니다. 나의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불리는 내 안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가요?
우리가 성당에 들어올 때 성수를 찍으며 하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제 안의 성전으로 들어 오셔서 악한 생각과 악한 행위들을 쫓아내소서.” 아멘.
참된 성전은 주일미사 의무 때문에 마지못해 오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참된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며, 그분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드리는 곳입니다. 참된 성전은 다시 한번 그분께 대한 우리의 충실을 맹세하는 곳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을 드나들고 있는지 오늘 다시 반성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