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밤베르크 교구 법원 입구의 조가상>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오 11, 19)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들은 나와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늘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나와는 너무나 생각이 다르고 행동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 자체가 싫으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다 싫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장점은 잘 보이지가 않고 단점만이 눈에 잘 보입니다. 사람이란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장점도 있으련만, 상대방이 싫고 잘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우리가 가진 기준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규정해 버리고는 합니다. 그래서 편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보기에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꼬투리 잡고 비난합니다. 이와 같이 상대방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이 보이지 않고, 상대방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렇게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있는 그대로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보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진 기준으로 그분들을 판단하고 규정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서 꼬투리를 잡아 비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분이 세리와 죄인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을 품에 안으신 것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부정한 사람들로 규정하고 그들을 멀리 했습니다. 그래서 그 세리와 죄인들에게 다가가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분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결정적인 잘못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했고, 심지어 하느님까지도 자기들의 기준으로 판단하려 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볼 수가 없었고, 그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보지 않고, 우리가 보고 싶고 우리가 만나고 싶은 예수님만을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듣고 싶은 말씀만 듣고, 듣기 싫은 말씀에는 우리의 귀를 닫아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준에 맞지 않는 예수님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아무런 편견 없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대림절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분을 열린 마음으로, 열린 두 팔로 맞이해야합니다.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그것은 내 외부의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완고한 마음을 모두 떨쳐 버리고, 내 안에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마음이 있어야 우리는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것처럼, 나를 기준의 잣대로 삼으면 우리도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 내가 아니라, 나의 이웃이 바로 내 기준의 잣대가 되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