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카르야의 동상 - 이스라엘 아인카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성당 외부 정원>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 20)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누구를 믿는다는 것, 더구나 말을 믿는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을 믿어주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기뻐합니다. 서로 믿고, 믿어주는 일이 특별한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 안에서 이사악, 야곱, 사무엘, 삼손, 세례자 요한, 이들은 모두 아기를 못 낳는 부부 사이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태어난 인물들입니다. 기나긴 세월을 하느님께 간구하고 바래서 얻게 된 아들들입니다.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듣게 되었을 때, 그들 부모의 심정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환호성을 올려야 할 기쁨의 정점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아니 게다가 믿을 수 있는 징표까지 달라고 한다면 하느님은 얼마나 기운이 빠지시겠는가요?
하느님은 기쁜 소식을 어서 빨리 들려주려고 천사를 파견하셨습니다. 아무 데서나 아무 때에나 그런 엄청난 소식을 듣게 되면 혹시나 못 믿어할까 봐 장소와 시간도 용의주도하게 선택하셨습니다. 일생에 한번 걸릴 듯 말 듯한 분향의 행운까지 얻은 거룩한 예배시간에, 적합한 성전 깊숙한 지성소에서, 최고 행복의 전언을 천사가 들려주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 아이가 평범한 아이가 아닌 구세주의 길을 준비할 하느님의 특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민족 전체가 고대하던 아기였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즈카르야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사제였기 때문에 천사의 실망은 더욱 컸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그러니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된 것은 당연한 일로써 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계명과 규율을 어김없이 지키며 살았건만 정작 하느님의 전능엔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유구무언의 참회의 기간은 아니었을까요? 아내의 배가 불러오는 동안 내내 정말로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즈카르야를 비웃기는 쉽지만 나 역시 간구하는 내용이 정작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때가 얼마나 되는지요? 그 시기와 방법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다는 생각은 물론 가져야 하지만(내가 하느님이 아니므로...) 어느 때는 하느님이 들어 주실 지에 대한 확신도 없이 습관적으로 기도문을 중얼거릴 때가 더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긴 침묵의 기간의 참회는 아기가 태어나고도(하느님의 약속의 실현을 눈으로 보고도) 다시 팔일 동안이나 지속됩니다. 그리고 터져 나온 찬미가, “즈카르야의 노래”는 “아가야!”(1,76)에서 목이 메어 눈물바다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 말이었을까요?
구세주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도 가슴 벅차게 불러야 할 “아가야!”입니다.
오늘 즈가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다음의 내용을 새롭게 점검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정말 아기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지?”
“아기 예수는 정말 오시리라고 믿고 있는 것인지?”
“건성으로 전례에 참례하는 것은 아닌지?”
믿음이란 우리가 우리의 머리로 다 알아들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가 우리의 머리로 다 이해해서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생활이라는 것이 계산기로 계산하여 수지타산을 맞추는 것은 아닙니다.
의심과 회의 속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진실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신앙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