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아인카렘 동정 마리아 엘리사벳 방문 성당 내부 제단>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 42)
월요일에는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이, 어제는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에 이어 오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잉태한 두 여인의 극적인 만남이 복음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유다 산골에 있는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자렛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다는 것을 알리면서 예루살렘의 남쪽 유다 산골에 사는 그의 친척 엘리사벳의 잉태도 함께 일러주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였 즈카르야의 아내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도록 자녀를 낳지 못했는데, 그들의 풍속에서 볼 때 그것은 크나큰 수치였습니다. 그들의 풍속에서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은 하느님께 무슨 벌이나 받은 것처럼 생각하여 사람들을 대하기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하며 자식을 가지기를 고대하곤 하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촌 언니인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진지 여섯 달이 되었다는 천사의 알림을 받은 마리아의 기쁨은 또 하나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서둘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엘리사벳이 사는 유다 마을 아인카렘은 나자렛으로부터 험한 산을 여러 번 넘어 사흘 길이나 되는 먼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거나 의심을 품었거나, 천사가 알려준 증거를 의심했다면 먼 길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자기가 받은 약속의 기쁨으로 넘쳐, 말씀을 잉태한 기쁨을 나누고, 그 기쁨에 이끌려 경건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였기에 그다지 먼 길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넘친 마리아가 발길을 서두른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성령의 은총은 지체함과 게으름을 허락지 않습니다. 항상 즉시 기쁘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측에서 보면 분명히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에 대한 봉사였지만, 엘리사벳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또 다른 은총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우리가 성모송에서 노래하는 찬미가를 마리아에게 봉헌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울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하면서 마리아를 복되시다고 찬미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호의를 체험한 두 여인의 만남은 이렇게 감사와 기쁨, 그리고 찬미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봉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와 기쁨을 선사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 안에서 작게는 가정과 교회 공동체, 넓게는 국가와 인류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급속도로 변해 가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목표는 모든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하며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자신의 삶을 던져서 봉사에 투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적인 순위를 떠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이고 혈연적인 것에 매임으로 인해 하느님의 섭리를 분간하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나자렛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한갓 목수의 아들로만 여겼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벳과 같이 성자를 잉태하여 품으시고 낳으시며 그 아드님과 함께 계시는 마리아가 누구인지를 참으로 알아듣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같이 성령을 받은 자로서 즉시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해 걸음을 서두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마리아처럼 봉사의 마음을 이웃에게 펼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