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성당 정원에 있는 만남의 동상과 그 뒤에 있는 세계 각 국어로 되어 있는 마리아의 노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나이다."(루카 1, 46)
오늘 독서에 대한 화답송과 복음은 신앙의 여인들이 부르는 찬미가 즉, 요즈음 말로 하면 캐롤입니다. 과연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찬미가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생각해 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생각해봅니다. 우리 인간들, 해, 나무, 꽃, 모든 동물들... 아무리 생각해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 중에서 직선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이 만든 것은 어떠한가요? 고층건물, 유리창, 도로, 가전제품들... 거의가 직선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정확하고, 질서 있는 것을 좋아하는지 직선으로 이루어진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 사람들은 우리의 삶도 그냥 직선으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아무 일 없이 평범하고 평탄하게 살아가길 간절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도 가장 빠른 직선의 길을 선택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이 직선 거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길은 이 세상의 창조물과 같이 곡선을, 또한 빠른 길이 아닌 느린 길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야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곧바로 갔더라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회의 길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방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하느님의 방식과 내 방식이 다르기에 하느님을 원망하고는 합니다.
"나는 성실히 그리고 죄짓지 않으면서 살고 있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저 사람은 나보다 잘 난 것도 없고, 늘 잘못만 하는데 왜 저 사람이 나보다 더 잘 사는가?"
하느님의 방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방식과는 너무나도 다른 하느님의 방식을 받아들이면,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소외될 것 같은 두려움도 생깁니다. 그래서 세상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원망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삶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제일 손해를 본 사람이 누구인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고쳐주고 용서해주시고 살려주셨지만 정작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 죽음만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도움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하는 삶을 사셨던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따르고 닮는다고 모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 세상에서 손해 보는 삶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의 셈에서는 결코 손해를 보겠지만 하느님과 치루게 될 셈에서는 결코 손해를 보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는 세상의 셈이 아닌 바로 이 하느님과의 셈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에서 성모님께서는 교만한 사람, 권세 있는 사람, 부유한 사람들보다 보잘 것 없고 배고픈 사람이 오히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즉, 이 세상의 셈에서는 권세 있고 부유한 사람들이 이득을 보겠지만, 하느님의 셈에서는 보잘 것 없고 배고픈 사람들이 더 이득을 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손해 보는 삶 속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눈앞의 조그만 이익 때문에 영원히 손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예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마리아처럼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