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에서 기도하고 있는 율법학자>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마르코 3, 4)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라면을 싫어하시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면을 아주아주 맛있게 먹는 법이 무엇일까요? 그 답은 한끼 굶고 먹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아마 많은 분들은 라면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 계란, 파, 참치 등, 어떤 첨가물을 넣는 것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배고플 때 먹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과 대답을 하면서, “우리가 참으로 고정관념 속에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라는 것은 이 고정관념 속에 꼭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 말씀은 어떻게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너무 과장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도 합니다. 왜냐하면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 외적 문서인 '나자렛인들의 복음서'라는 책에 따르면 이 사람은 오른 손으로 밥벌이하는 장인이었다고 합니다. 즉, 이 사람에게 있어 손이 오그라진 것은 그의 가족의 생명과 관계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회당에 모인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항변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반대로 동의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 규정에 치유를 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고정관념 속에 묻혀 항변도, 동의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태도에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시며 슬퍼하셨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시선이 혹시 우리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선택이 율법을 어기게 될까 두려워 침묵을 지키는 사람은, 생명을 편들고 사람을 살리는 분명하고 결정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은 내일이나 다음으로 미룰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중립을 지킨다거나 신중을 기한다는 구실로 그 실천을 내일로 미루면, '오늘' '지금' 사람을 죽이는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요구는 어떤 이론의 정립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서' 해야 할 바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서 까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나의 틀 속에 갇혀서 정작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사랑의 실천이 아닌 규정의 실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만일 내가 이런 모습을 취하고 있다면 신앙인인 나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은 곱지 않을 것이며, 완고한 나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슬퍼하실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이 언제나 웃음 띠고 흐뭇해 질 수 있는 일을 많이 하는 오늘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