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자끄레브 대성당 앞 광장에 있는 성모상>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오 13, 13)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면이라는 상당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을 낮추는 듯한 말은 어떻게든 하지 않으려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라면 자신을 낮추는 말이라 할지라도 할 수 있는 것, 그것 역시 커다란 용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 제자들이 묻는다. “왜 저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처럼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연히 어려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늘 어려운 말로써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달랐습니다.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우리들의 일상 삶 안에서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제자들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원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알아듣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어려운 말로써 자신들이 똑똑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자신을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하다가는 이렇게 쫄딱 망할 수 있습니다. 대신 예수님처럼 모든 이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어 나갈 때, 우리들은 예수님께 더 큰 선물을 받을 것입니다.
다급해질 때만 예수님을 찾는 우리들의 어리석음, 우리들의 미련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떠한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가?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이지만, 예수님은 복음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느님 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쉽게 설명해주십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로써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닫혀 있는 내 마음의 문과 귀를 열고 눈을 뜨고 사랑과 자비로써 다가오시는 하느님께 돌아서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책도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들려지면 한낱 휴지에 지나지 않지만 글을 아는 선비에게 들려지면 훌륭한 스승이 됩니다. 방망이도 성난 사람에게 들려지면 몽둥이가 되지만 야구 선수에게 들려지면 홈런을 치는 방망이가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대강대강 시간만 때우고 눈치만 살폈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었던 어제와 오늘에서 돌아서서 새롭게 태어나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본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마음에 간직된 것들을 증거하면서 거듭 태어날 때, 그리고 우리가 보고 듣고 깨달아 하느님께로 돌아설 때, 우리에게 알려진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이런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