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 바니야스 로마의 다리>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태오 6, 24)
유대인의 경전인 탈무드를 보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세 가지가 고민, 말다툼, 빈 지갑이라고 합니다. 그중에서 빈 지갑이 인간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다고 합니다. 한 언론사에서 젊은 대학생들에게 “당신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상당수가 “돈”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물론 돈은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돈을 우상처럼 숭배하기까지 합니다. 심심찮게 들려오는 끔찍한 뉴스들을 보면 항상 돈이 이유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오늘날 사회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 씁쓸합니다. 성경에느 돈과 재물 자체가 나쁘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무분별한 돈과 재물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경계하라고 가르칩니다. 돈이 무엇이기에 천륜마저 무시하게 하는 힘이 있을까요? 문제는 돈과 재물 자체가 아니라 분수에 넘치는 인간의 욕심이 잘못인 것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시작합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의 새들과 들에 핀 꽃들을 예로 드십니다. 새들이 먹는 일에 고민하지 않아도 먹고 살며, 들에 핀 꽃들이 자기 치장에 애쓰지 않아도 아름답게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먹고 마시는 일에, 또 자기의 명예를 찾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기”(6, 33)위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노력해야 하는 대상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먹고 마시며 살아가고, 사회 안에서 자신에 대한 자리매김도 중요하지만, 신앙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의 기원이 하느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타나는 가치관인데, 오늘 복음은 그것을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지배하는 나라요, 하느님이 우리의 생활 안에 살아계신 삶을 의미합니다. 또한 복음에서‘그 의로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삶을 지배하는 원리, 곧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배려, 사랑, 용서 등의 원리를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두 주인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원칙을 먼저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단순해서 한쪽을 떠받들면, 다른 한쪽은 업신여기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신앙인에게도 재물은 주인으로 쉽게 등장합니다. 재물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합니다. 그것을 가지면, 살기에 편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대우도 받습니다. 그 편함과 그 대우에 정신을 빼앗기면, 사람은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착각하고, 오로지 그것을 향해 매진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류역사 안에 출현한 모든 종교들은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가르침의 하나가 법정스님의‘무소유(無所有)’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무소유의 경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비극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16, 19-31)에서 복음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비극이라 말하지 않았고, “부자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도” 라자로가 배를 채우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비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할 라자로를 보고 사랑과 자비를 베풀지 못한 부자의 삶이 비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다운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어서 관대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삼으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마태오 복음은 진복팔단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성경의 의미를 잊고 착각을 잘합니다. 재물이나 명예가 관련 될 때 우리는 아전인수식의 착각을 잘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어떤 역할을 맡으면, 그것이 섬김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신분인 양, 다른 사람들 앞에 군림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도 그런 착각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쉽게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착각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부르면서 그분이 아버지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비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를 찾고 있는지? 내 나라를 찾고 있는지? 아버지의 뜻을 찾고 있는지? 내 뜻을 찾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도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에게 간청할 것은 그 믿음의 부족을 도와달라는 것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헤아리며,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또한 오늘 복음을 기억하며 이해인 수녀님의 ‘가난한 새의 기도’를 묵상합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만 둥지를 틀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새처럼
당신의 하늘을 날게 해주십시오.
가진 것 없어도 맑고 밝은 웃음으로
기쁨의 깃을 치며 오늘을 살게 해주십시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떠나는 철새의 당당함으로
텅 빈 하늘을 나는 고독과 자유를 맛보게 해주십시오.
내 삶의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의 평화여
날마다 새가 되어 새로이 떠나려는 내게
더 이상 무게가 주는 슬픔은 없습니다.
(이해인 수녀 ‘가난한 새의 기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