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이콘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오 9, 13)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축일을 맞이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열두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첫 번째 복음서의 저자인 성 마태오는 알패오의 아들로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는 가파르나움 세무서에서 일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 이외에 여러 가지 부당한 방법으로 동족을 착취하고 사복을 채웠으므로 사람들이 싫어했고, 독사와 같은 존재로 매국노로 지탄을 받아왔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세리직을 포기한 후 ‘마태오’(하느님의 은덕을 입은 자)라는 이름을 받고 예수님을 전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듣고 보고 배웠으며, 그분의 구원활동에 동참하고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강림 후에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유대인들에게 전교하다가 그들의 언어인 아람어로 복음서를 저술하여 사도들의 설교로 입교한 신자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후에 페르시아, 에디오피아까지 전교하며 에디오피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승은 전합니.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또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 신앙인의 길은 한마디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길을 따르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인으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분의 부르심을 제대로 잘 알아듣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를 불러주시는 것 같지도 않고, 그 부르심이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게 생각되는 것이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고민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나름대로는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은 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나는 죄인이기를 거부하고 의인이 되려고 무진 애를 쓰며 남들도 나를 의인으로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만 제대로 그분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고 해야 할 텐데 실제로 우리는 죄인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잘못된 생각은 내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잘 못 듣는 이유가 일상의 바쁨 때문에 조용히 기도할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의 부르심을 들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기도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대부분 기도 안에서가 아니라 일상 안에서 우리를 불러주신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리 마태오가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들의 혈세를 빨아먹는 것에 대한 고민과 괴로움으로 기도하고 있던 중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의식하고 있었지만 일상의 자신의 일을 행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방문을 받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일상의 일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각자를 불러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님의 자비와 은총에 대한 체험 때문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죄인인지를 깊이 의식하고 있을 때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분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당에서 기도할 때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행하는 일상의 일 가운데서 그분은 우리를 불러주시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 예수님의 부르심에 오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마태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