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요셉축일(2016. 3. 19, 토요일) 오후, 입원 중이신 경갑룡 주교님을 잠시 문병하였읍니다. 성삼일에 우리 신도들이 특별한 기도를 바칩시다. 잃은 양을 찾아 다니느라 고생하는 목자가 병고에 시달리며 고통중에 있으면 우리 양들은 마땅히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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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2015. 12. 31) 갑자기 쓰러지셔서 뇌출혈(?)로 수술 후, 3개월이 다 되도록, 아직도 중환자로서, 일체 말씀도 못하시고,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하십니다. 안정 치료를 위하여, 문병이나 면회가 일체 금지된 상태인데, 필자는 하루 전 아주 어렵게 허락을 받아, 아주 잠간 뵈올 수 있었읍니다. 경주교님이 필자를 알아보시고, 눈매와 입술을 조금씩 움직이긴 하셨으나, 말씀을 전혀 못하시고, 손발도 일체 동작을 제대로 못하시나, 그래도 3개월가까이 모시는 간병사들은 경주교님의 의사 표현 노력을 감지하여, 필자에게 통역(?)하여 주었읍니다. 필자가 올꺼라는 소식을 하루 전에 들으시고, 문병 당일 오후에는 고통중에도 저를 기다리는 의사표시를 하시며 계셨답니다.
경갑룡 주교님은 저보다 10세 연상으로 금년 87세이신데,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 보좌주교, 주교회의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준비휘원회 위원장(1980), 대전교구장, 등을 역임하시며, 한국천주교회 성장의 격동기에 갖가지 난관을 무릅쓰시며, 많은 일을 하셨읍니다.
특히, 1980년 5월 6일, 신장본당(지금의 하남시)을 방문, 장시간 기다리시다가, 천진암 성지에 다녀오는 필자를 만나보시고 가셔서,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님의 동의를 얻어, 필자를 주교회의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준비위원회 초대사무국장으로 임명하셨는데(1980년 5월 16일,) 3일 후, 바로, 5.18 광주사태(당시 언론의 보도 표현)로, 광주, 목포, 나주, 순천, 등이 관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소식이 연일 전해지면서, 온 국민이 불안과 공포로 걱정이 극심하던 시절이었읍니다.
최근에도 연일 핵폭탄과 장거리 탄도탄 발사, 등 핵전쟁의 전운이 점점 짙어지는 지금, 전란의 위험으로 불안한 때일수록, 실로 험악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도들은 침착하고 용감한 국민으로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해야 하겠기에, 오늘의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이 나가는 이 살벌한 길에서 적은 도움이라도 받도록, 특히 용감한 경주교님을 본받도록, 당시 한가지 일을 알리고 싶습니다.
당시는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 대행사를 거행한다거나 준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리라고 모두가 생각할 수 밖에 없던 시국이었읍니다. 그리하여 필자도 불안한 마음으로, 평소 좀 알고 지내던주한교황 대사 Luciano Angeloni 대주교님을 뵙고 소견을 청하였더니, "장마철에는 풍세가 사나워도 날씨가 항상 그렇치는 않을 것이니, 하늘은 반드시 본래의 맑고 밝은, 청명하고 좋은 하늘 즉,"sereno ciello"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는 날이 올 것이므로, 너무 걱정하지 말고, 주교님들의 결정을 따라, 200주년 기념행사 준비 계획초안 수립을 착수하라"고, 필자에게 용기를 주셨읍니다.
그러나 각 교구 총대리 신부회의 소집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경주교님의 뚝심과 추진력은 저에게 아주 큰 힘이 되었었읍니다. 사실, 교회 내외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심하던 때, 준비위원장 경주교님이 아니었다면, 지난 200주년 행 큰사와 성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의 첫 방한과,103위 시성, 등은 없었을 것입니다. 경주교님의 쾌차를 위하여, 이번 성3일간, 모든 신자들이 기도 중에 꼭 기억하며 성모님께 간청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입원 중태로 고통 중이신 경주교님을 문병하던 날, 대전 국립 현충원에서는, 6.25 사변(당시 표현)때, 일등상사로 전역한 역전의 용사 중 친지 한 분(안성, 가스팔 최동국 옹)이 90세로 선종하여, 현충원에 안장되므로, 묘지 축성 및 하관기도에 함께하였읍니다. 그런데, 최 옹은 1945년 해방되던 해 봄, 18세 때, 15세의 어린 소녀와 결혼 하였는데, 그 이유는 대동아전쟁 말이라서, 일본이 정신대(위안부)로 보내려고, 시골마다 소녀들을 강제차출 하던 때였으므로, 이를 모면하려고, 어린 나이에도 우선 혼례를 하게 하고, 시집 부모는 길가의 밭 300평에 초가 삼칸을 마련하여, 새 살림을 차려주었고, 최 가스팔 옹은 같은 집에서 8남매를 낳아 키우며, 70여년을 같은 집에서 살다가 90세에 선종하였읍니다.
천진암성지위원회 2대 위원장으로 20여년 이상 봉사하신 강영훈 전 국무총리(중장 예편)역시 1951년, 1.4 후퇴(당시 표현) 때, 사단장(?)으로, 육군 준장이었는데, 남하한 중공군을 물리치며,서울을 재탈환한 후, 신혼 살림집으로 가족을 위해, 서소문 서쪽 산비탈 피난민 촌에 있는 판자집(대지 50평)을 사서, 살면서 아들 딸 낳아서 키우고 교육시켯고, 지금도 같은 집에서 70여년을 그 비좁은 터에 개축한 같은 집터에서 살고 있읍니다. 일방통행 골목길에 주차장도 없이 !!! 우리 모두 노동의 댓가로만 살고, 노동의 댓가만큼만 사는 것을 만족히 여기며, 위대한 역전의 용사들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정신적 교과서를 소홀히하지 맙시다!-Msgr. By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