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度公 요한 丁若鏞 승지의 6대손 정해운(丁海運 요한, 향년 77세) 선생이 지병으로 앓다가 그저께(11월 11일) 선종하셔서, 구리시 녹색병원 영안실에 모셨다고 연락이 와서, 어제 問喪 가서, 영정에 본명이 있어서 기뻤습니다. 임종 전, 6대 조부를 따라 요한이라는 본명으로 대세를 받고(마재 성지 신부님 한테서?) 떠나신 것은, 천상에 계신 복자 정약종, 정철상, 성 정하상, 조부 정약용, 등 저 세상 선조들의 傳達이 분명 컸음을 느꼈읍니다. 오늘 마재 성지에서 드리는 장례미사에는 부득이 못갔읍니다마는, 약 한달 전에,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와서, 김학렬 신부님과 천진암 직원들을 데리고 問病갔었는데, 병석에서 일어나 앉아서 말씀도 잘 하시고, 옛 일도 잘 기억하셨었는데,,,.본인이 임종을 미리 예감하셨었는지, 최근 몇년간은 연락이 없다가, 가족들시켜서 제게 문병의 기회를 알렸었읍니다.
요한 정해운 선생은 고향 마재의 6대 조부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의 묘를 대대로 지키던 효도가문 종손으로, 충주 하담에 있던 6대조 큰 할아버지 바오로 정약전 부부 묘와 7대조 정재원 부부묘, 8대조 정지해 부부 묘가 토지 소유주의 요구로 이장이 요청되고, 무성한 잡초 속을 헤치며 들어가서야 성묘가 가능하였는데, 당시 50세 미만의 정해운 선생은 종친회 정규선 회장님과 함께 저에게 와서 천진암 성지로의 이장을 요청하여,현재 경기도 광주산맥 主峯 앵자봉 8부 능선 바로 아래 서남향으로 천진암 성지 내에 안장되었습니다.
본래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을 서울대교구 중심으로 준비하던 1981년 봄, 그 때는 거의 매월 한번 정도 필자가 절두산 성지 앞에 있던 최석우 신부님의 은퇴 사제 개인 사제관(건평 30평)의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자주 갔었는데, 최신부님께서, "금년이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인데, 교구설정 주역 복자 정하상 묘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 교구에서는 행사 준비에만 집중하는데, 묘도 모르고, 기념비 하나 없이, 속된 표현으로, '앙꼬빠진 찐빵' 격이 되겠으니, 복자 정하상 묘를 변신부가 좀 찾아볼 수 없느냐?"고 하시기에, 필자는, '예, 한번 노력해보겠습니다' 하고나서,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정덕진 신부님, 박희봉 신부님, 신당동에 살던 순교복자 신심에 열심한 이 안나 부인회장, 등에게 탐문하면서, 마침내 순교복자 정하상 묘로 추정되는 묘를 팔당 두미 마을 某 인사 소유의 별장 안 뒷동산 산비탈에서 발견, 확인하고 보니, 이장이 불가피하고 위급하므로, 김남수 주교님을 위원장으로 하는 이장위원회를 구성, 복자 정하상 묘이장과, 동시에 충주 하담에서 확인한 정약전 묘와, 사사리에 이장되어 있던 정약종 묘, 모두 3基만을 우선 천진암 성지로 이장하자고, 정덕진 신부님과 정해성 신부 및 학자들이 주장하여, 김주교님의 확정과 결정으로 추진하던 참이었습니다(천진암 자료집 제6권, 관계자료 방대함).
그러나 전국 교회 기관에 주교님 명의로 이장 준비 공문 발송, 등 분주하였으나, 평소에나 그 때나 지금이나 관심도 성의도 없어서, 와보지도 않고, 이유도 없이, 또 대안도 없는 반대만 하는 일부 성직자들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관련된 2 교구의 일부 주교님들 2분들까지도 할수없이 가세하여 이장을 보류하고자 하여, 부득이 김남수 주교님도 이장 보류를 결정하셨고, 그러는 동안, 그해 10월, 조선교구설정 150주년 행사는 거행되고, 복자 정하상 묘는 토지 소유주의 무지막지한 일꾼들에 의해 산비탈 밭을 일구느라 파묘, 소각되어, 불에 타버린 유해 잔재를, 1주일 후에서야 알게 된 필자와 함께 이숭녕 교수, 유홍렬 교수, 이원호 교수, 등이 실로 침통한 심정으로 수거하여, 우선 신장 성당 사제관에 안치하였다가, 그래도 해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에 뜻이 모아져서, 12월 31일에 천진암 성지 박석골 현재의 위치에 안장하였다. 그 후, 김남수 주교님은 기회있을 때마다 여러 차례, " 복자 정하상이 살아서는 비신앙인들한테 斬首당하시고, 죽어서는 후대 신앙인들한테, 그것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하는 해에, 그 달에, 기념행사 거행 때, 유골로서나마 또 火刑당하셨으니, 칼과 불로 2번이나 순교하셨다"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좀 생각해보면, 이장이 시급히 요청되는 파묘위기에서, 별로 이렇다할 뚜렷한 이유도, 명분도, 대안도 별로 없는, 실로 무책임하고 대수롭지 않은 반대의 큰 목소리들이 주교님들까지 움직여가며 어떤 결과를 내었는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진리의 천주를 위한다는 이유와 핑게로 미움을 받아 (in odio
fidei), 잡혀가고 끌려가서 참혹하게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유배를 가서 굼주리며 온갖 천대와 고생을 다하다가, 괴로움과 외로움 속에서 홀로 숨을 거두고, 장례도 없이 며칠씩 방치되어, 아무데나 내버려 덮허 두어, 죽어서 썩어가던 몸이, 죽은 곳에 그나마도 마음놓고 머물러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조차도 어려웠으니, 오늘날 천주신앙으로 뺨한데 맞아본 적이 없는 천주신앙인 훼방꾼들의 반대와 방해와 훼방으로 길이 가로막히고, 일을 흔들기도 모자라, 심지어는 아직 덜 썩어서 남은 뼈 조각마저 산비탈 고지박 태우는 불에 타야 했던 운명이, 하필이면 기념적인 해에, 그 달에, 그 큰 행사 때, 마치 축하식인양,,,?!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그 후, 지석확인까지 했던 충주의 정약전 묘역시 일부 사제들과 청주교구장의 반대로 이장이 보류되었었다가, 1987년 10월에 와서야, 라주정씨 종친회 직계 종손들 정해운 선생과 정규선 회장, 등 종친회 이사님들의 요청과 주선으로, 천진암 성지 현 위치에 이장하게 되었는데, 평소 성실하고 철저한 성격의 정해운 선생은 종친들과 함께, 그 후로 천진암 성지에도 자주 방문하였고, 필자가 마재를 방문하면, 항상 점잖하고 친절한 호의로, 또 마재 성역화 추진을 위하여도, 경기도청에 계속 건의하고 주선하여, 오늘의 마재 성역화에 크게 공헌하신 분입니다.
위령성월에, 세상 끝날까지 안식하시도록 기도하며 되새겨보니, 정약전, 정약종, 정하상, 정철상, 경주이씨, 등 모두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형장에서나, 유배지에서나, 운명지에서나 묘지에서나, 육신마져 편히 있지 못하게 하고, 계속 수난을 당하게 하는 증오심의 세력(in odio Fidei)이 그제나 이제나 이후에도 변함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교구 설립의 주역 성 정하상 묘역과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가족 묘역(이벽 성조 부모 이부만 공 부부 묘, 이벽 성조의 동생 이석 장군 부부묘, 순교자 황사영의 장모이며 이벽성조의 누님인 경주이씨, 제주도에서 40년간 유배생활한, 신유박해의 마지막 유배 신앙인 정명연 마리아의 어머니)의 위치는 한국에서 가장 안전한 최상의 유택이라고, 몇차례씩이나 진솔하게 확언하던 정해운 선생마저 세상을 떠나니, 이제 이 늙은이 차례만 남았습니다.그려! 모두들 일을 마치고 돌아가니, 나도 가야지 !
그런데 이제 할일이 줄지 않고, 주야로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할 일은 많으나 인생은 짧고, 시간은 빠르기도 합니다. 인생은 미완성이니, 미련없이 후련하게 떠나는 날이 그리 멀지는 않게 보이는 듯도 합니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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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度公 요한 丁若鏞 승지 6대손 정해운(丁海運 요한, 향년 77세) 선생 問喪 -2014. 11. 13. 卞基榮 몬시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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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度公 요한 丁若鏞 승지 6대손 정해운(丁海運 요한, 향년 77세) 선생 問喪 -2014. 11. 13. 卞基榮 몬시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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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度公 요한 丁若鏞 승지 6대손 정해운(丁海運 요한, 향년 77세) 선생 問喪 -2014. 11. 13. 卞基榮 몬시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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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度公 요한 丁若鏞 승지 6대손 정해운(丁海運 요한, 향년 77세) 선생 問喪 -2014. 11. 13. 卞基榮 몬시뇰.
Msgr. 변기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