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18일은 231년 전, 즉, 1783년 이 날, 27세의 이승훈 진사가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의 天學道場의 광암 이벽 성조 대리자(délégue)로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되어(envoya), 한양을 떠나던 뜻깊은 날입니다. 우리겨레 양반 출신의 젊은 20대 전후의 선비들이 이벽 성조를 주축으로 하여, 자발적으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믿고, 실천한 나머지, 10여년 만에, 자신들의 대표자가 임명되어, 다른 나라 중국 북경 3천리까지, 서양에서 온 성직자들을 만나보고 세례성사까지도 청하여, 받고 돌아오라는 사명을 띠고 출발한, 한국천주교회의 자발적인 信仰史의 특징적인 날입니다.
이듬 해, 즉 1784년 2월 24일(?), 북경 북당 성당에서 예수회의 프랑스 출신 Joseph de Grammont 신부한테 세례를 받은 날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전 세계 인류에게 자발적인 求道의 열성을 보여주는 모범으로서, 훨씬 더 특이한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특징적인 본보기가 되는 날입니다.
천진암 성지에서는 지난 1983년 11월 18일에, [이승훈 성현 북경 파견 200주년 기념행사]를, 당시 주한 교황대사 Francesco Monterisi 대주교님과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님의 공동 주례로, 여러 신부님들과 함께, 국어학자 이숭녕 박사, 역사학자 유홍렬 박사, 등 관계 인사들과 더부러, 40명 國樂人들이 연주하며 합창하는 한국 최초의 국악 창미사로, 매우 뜻깊게 성대히 거행하였습니다.
그 해부터 매년 이 날 기념미사를 드립니다. 금년으로 제31회 경축미사가 됩니다. 교우들의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미사 후에는 하느님의 종 베드로 이승훈 진사의 후손들이 준비한 간소한 다과가 있습니다. 신자들은 평일미사 때라도 서로에게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금년 방한하신 교황님께서, History라는 말보다 Memory Guard라고 하는, 서구 언어에서도 좀 생소한 표현을 쓰시면서 강조하신 바를 되새기며, 교황님 말씀을 듣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좀 챙겨서 관심과 성의를 가지고 실천에 옮기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Lumen Gentium art.25항 참조).
광암 이벽 성조께서 자신의 대리자 겸 자발적으로 창립된 한국 천주교회 최초 신도 공동체의 대표자로 이승훈 진사를 북경교회로 파견하였음을 뜻하는 기록은 여러 문헌에 자세히 나오는데, 그 중에 몇가지만 추려서 소개합니다.
1801년 朝鮮王朝實錄
“정약종을 문초하자, 서양학(천주교)을 처음으로 알고 있던 사람은 이벽이며, 얼마 후 이승훈을 변장시켜 몰래 북경에 보내었으니(裝送),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그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가게 하였으며, 북경에 가서 서양인들의 처소에 왕래하면서,,,”
丁若鍾供原初李檗聞有西洋學裝送李承薰隨其父東郁貢使之行入往洋人所居之堂,,,<朝鮮王朝實錄, 1801>
1801년 黃嗣永 帛書 참고 문헌
“이승훈은 벼슬을 하지 않는 깨끗한 선비 이벽이 매우 기특히 여기던 사람인데, 이벽이 이승훈에게 가로사대, ‘북경에는 천주당이라는 집이 있고, 그 집에는 서양선비들과 천주교를 전하는 자가 있으니, 자네가 찾아가서, 기도서 한권을 구하러 왔다고 하고, 아울러 세례도 받기를 청하도록 하게. 그러면 그 서양 선비가 자네를 크게 사랑할걸세. 기묘한 성물들을 되도록 많이 구입하여 가지고 돌아오게. 절대로 빈손으로 돌아오지 말게. 이승훈은 이벽의 그 말대로, 천주당에 가서 영세를 청하였습니다,,,.”
李承薰布衣李檗大奇之曰北京有天主堂堂中有西士傳敎者,子往見之求信經一部幷請領洗則西士必大愛之多得奇物玩好必勿空還李承薰如其言到堂請洗,,,<黃嗣永帛書, 1801>
1838년 聖 Pierre Maubant 신부 참고 문헌
“이벽은 그리스도교를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몇몇 다른 改宗者들과 합심하여 1783년에 또 다른 대리자로 (이벽과 다른) 李氏를 북경에 보내어, 聖敎에 관한 사정을 풍부하게 알아오게 하였으며, 그는 1784년 2월에 파리외방전교회원 신부한테 ‘베드로’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Il embrassa la religion Chretie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elytes il envoya en 1783 a Peking un autre délégue egalemant nomme Y,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Y s'adressa aux Missres. frainc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e, sous le nom de Pierre)
聖 A. Daveluy 주교의 한국순교자 비망록 참고 문헌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세자와, 권일신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와, 이승훈 베드로, 이 세 분의 본명 선택, 특히, 북경에서 영세 때 정한 이승훈 진사의 ‘베드로’ 라는 본명 선택은 언제, 누가, 어떻게 정하게 되었는지 앞으로 연구해볼 필요가 있는 사안입니다. 그 이유는 세 분의 사명과 역할을 염두에 두고, 정하게 되었다는 Daveluy 주교의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승훈 진사가 출국 전에 이미 광암 이벽 성조로부터, 영세하게 되면,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하도록 언질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북경에서 이승훈 진사한테 세례를 베풀던 Joseph de Grammont 신부가 이승훈 진사한테서, 이벽 성조의 천진암 강학을 비롯한 한국신도 공동체의 출발에 관하여, 또, 장차 권일신 대학자의 기대되는 역할에 관하여, 이야기를 듣고 정하게 된 것인지, 또는 베드로 라는 본명으로 영세 귀국 후, 이승훈 진사가 이벽, 권일신, 두 분의 본명을 정하게 되었는지, 혹시라도, 출국 전에 국내에서 미리 본명들을 정하였다고 하면,,,,? 거의 20 여년 전에 文獻 이름과 소장처만 우리에게 알려진, 曠菴 李檗 日誌 4권이 세상에 들어나면 혹시 거기서 해답이 될만한 자료가 밝혀질지,,,? 後學들의 일거리가 되겠습니다.
Ch. Dallet의 문헌과 그 원본이 되는 A. Daveluy 주교의 문헌이 약간의 차이가 있어 보이는데, 전자는 이미 번역본이 발행되었으나, 후자는 아직 그렇지 않아서, 이하에 참고로, A. Daveluy 주교의 원문을 뽑아서 알려드립니다.
[,,,,Appliqué à s'instruire à fond de la religion il put pendant le séjour qu'il fit à Péking se mettre en état de recevoir le baptême qui lui fit conféré par le Père Niang (probablement) et comme il fut le premier Coréen baptisé et disposé à répandre la religion parmi ses compatriotes, il fut appelé Pierre comme se trouvant de fait la pierre fondamentale de l'Eglise Coréenne. C'était probablement au commencement de l'année 1784. A son départ on lui donna beaucoup de livres, croix, images, etc et même quelques objets curieux qui plus tard furent envoyés au palais. Au printemps de 1784(kaptsin) Seng houni rentra à la capitale avec tous ces objets. ,,,]
[,,,Ni Seng houni baptisé à Péking comme nous l'avons vu croyait conférer le baptême à ceux qui embrassaient la Religion, et c'est probablement vers cette époque qu'il baptisa Ni Pieki et Kouen Il sini, mais comme ces hommes distingués ne voulaient rien faire à demi, le choix même d'un nom de baptême se fit avec tact et réflexion. Considérant d'une part les idées élevées et la belle conduite de Pieki et de l'autre le rôle que son zèle lui avait fait embrasser en donnant partout le branle à l'étude de la Religion et préparant ainsi les voies à la venue du Sauveur dans ce royaume, on sembla voir quelque ressemblance fondée entre sa mission et celle du Saint précurseur et il fut décidé qu'il serait appelé Jean Baptiste au Baptême. Il sini ayant un cœur ardent joint à un esprit éclairé et voulant se consacrer à l'évangélisation en grand de ses compatriotes prit pour patron St. François Xavier dont la voix était retenti dans toutes les parties de l'Orient, afin d'en faire son modèle et de marcher sur ses traces. Et c'est sous ce nom que nous le désignerons désormais.,,,]
Mgr.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par Mgr. Daveluy vol. 4>
이승훈 성현 순교가, <1980년 변기영 작사, 작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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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변기영신부 작사,작곡, 차인현신부 반주곡의, 이승훈 성현 순교가는 이 천진암 홈페이지 한국어 바탕화면 좌우 양편에 다 있는 [메뉴],'천진암 성지 성가‘'로 들어가서, [악보 보기]로 들어가면 가사와 곡을 보고 듣게 됩니다. - Msgr. By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