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신학생들에게 성모님 같던, 울술라회 이봉자 골룸바 회장님(향년 91세) 선종
수원교구가 몹시 가난하던 시절,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말까지 신학생들의 등록금을 대기 위하여 매월 성금 봉헌하는 울술라회 창립과 성장을 위하여 故 김복희 막달레나 회장님과 함께 동분서주하던 이봉자 골룸바(향년 91세, 윤공희 대주교님과 평양교구 진남포 同鄕 ?) 부인회장님이 2014년 11월 30일, 카나다 토론토 따님 댁에서 선종하셨다고 소식이 왔습니다. 특히 수원교구 신부님들께서는 미사 때 기억해 주시도록 알려드립니다.윤대주교님께서도 연락을 받으시고, 연미사를 드리시겠다고 하셨읍니다. 6.25 사변 때 어린 딸 둘(?)을 데리고 월남하여, 청춘에 수절하며, 고생 고생 다하면서도 자녀들을 잘 가르쳐서, 큰 사위가 3星 장군 해병대사령관으로, 작은 사위는 외무부 해외 대사(카나다?)로 국가에 봉직하였습니다.
신학생 등록금 때문에 수원교구 안중 본당 박철 신학생 아버지가 논 다섯 마지기를 팔아 가지고 교구청에 오고, 수원 고색 본당 방상복 신학생 아버지, 방회장님은 소를 팔아 가지고 와서, 교구 당가를 맡은 서강하 신부님에게 드린 후, 당시 교구 사목국장으로 있던 필자에게 들려서, “소를 팔았으니, 금년 농사를 어떻게 지을지 정말 앞이 막막합니다. 송아지를 새로 사다가 길러도 금년에는 일을 못 가르칩니다. 신부님, 아들 낳아서 신부 되라고, 신학교 보내는 일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하던 때다. 그러나 열심하던 방회장님은 작은 아들까지도 사제로 만들었다.
수원교구가 신학생들은 많은데(당시 27명 ?), 새학기 등록금을 낼 수가 없자, 혜화동 신학교 운영을 책임진 서울대교구 총대리 최광연 신부님도 쪼들리다 못해 오죽하면 지방 교구에 독촉을 거듭하던 때였다. 서울 대교구도 어려우니, 신학교 기숙사비와 등록금을 못내고 있는 수원교구 신학생들을 할 수 없이 집으로 돌려보낼 수 밖에 없다는 독촉이 심해졌다. 춘천, 원주 교구는 신학생 한 두명씩 밖에 안되니, 큰 문제가 안되지만,,,가난한 집에 아이들은 많다고, 수원교구는 신학생들이 많아, 食口가 좀,,,! 그래서 우리 교구 신학생들 중에 자원자들에 한해서 타교구로 소속을 옮겨도 좋다는 교구 허락이 있어서, 성소가 없는 원주교구로 2명이 가기로 했다가 실제로는 1명만 전속하기도 하였다.
오죽하면, 교구에서 Curia 직원회를 하였는데(그래야, 총대리 정덕진 신부님과 당가를 맡은 서강하 신부님, 그리고 사목국장(당시는 사무처장직무 겸임) 변기영 신부, 3명이 전부다. 난국 타개책으로, 서신부님과 변신부님이 서울대교구 총대리 신부님한테 가서, 새학기 수원교구 신학생 등록금 (당시 전체 총액이 약 400 여 만원?), 납입을 가을 추수 이후까지만 참아주든가, 아니면, 서울 교구에서 차용, 대납해주시도록 사정하면서 청해보기로 하여, 흥부가 놀부 형님댁에 가듯, 우리 두 신부들이 서울교구청으로 갔다.
당시는 수원교구가 주로 농촌지역이니, 추수 후에 본당에서 쌀로 받는 공납금이 교구에 모이는 대로 제일 먼저 신학생 기숙사비 등록금으로 연말까지 반드시 먼저 갚겠다고 서신부님이 재삼재사 말씀드렸다. 그런데 서울교구도 어려워 쩔쩔 매고 있으니,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거절당하였다. 불같은 성격의 젊은 변신부가 얼마나 속이 상했던지, 그만,,, 돈 꾸러 왔다가 거절 당한 젊은 변신부는 좀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던지, 좀 투덜대며 출입문을 나서려 하던 참에, 옆방에서 근무하던 박준영 신부와 박양운 신부가 떠드는 소리에 나와서 같이 대담하는 것을 듣다가 민망한지, “변신부, 점심 사줄게 같이 나가세”하며, 소매를 잡아 끌고 나와, 명동 성당 아래 뒷골목의 [신정]에서 샤브샤브를 사주며 빈 손으로 돌아가는 우리를 위로하였다.돈 꾸러온 흥부 주제에 오죽하면,,,,!
貧者小人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보다 두 살 아래로 나이가 어리고, 서품은 2년 선배였던 박준영 신부는 학생 때 혜화동 신학교 도서관에서 함께 3년간이나 일하면서 좀 친한 사이였다. 후에 로마 유학 중에,103위 순교복자 시성 추진 한국 최초의 로마 연락관(postulator)으로 4 년간 주교회의 우리 시성추진부 일을 하였고, 후임으로 전주 교구 김진석 신부가 8 개월간, 그리고 마지막 후임으로 윤민구 신부가 약 한달 반 정도 일하였을 때, 국내 일부 성직자들의 無視와 反對에도 불고하고, 전혀 예상 밖으로, 마침내 103위 시성을 위한 복자 기적심사 관면이, 실로 기적과도 같이, 확정 선포되었다.
103위 시성을 전후하여, 서울이 폭발적으로 확장되어 밀려 들어오는 바람에, 수원교구도 부유한 교구가 되고, 우술라회도 1980년 중반에 해산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우술라회원들의 희생과 공덕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골룸바 회장님이 있기에, 天國은 반드시 있어야만 하겠다. -Msgr. By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