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保守도 아니고, 進步도 아니며, 더구나 中道는 더욱 아니다. 오로지 正道일 따름이다.! 세상에는 많은 길들이 뒤엉켜 있지만, 바르고 곧은 길은 하나 뿐이 아닌가? 길 위를 스치는 바람은 길이 아니다. 따라가지 마라.나무잎을 흔들며 지나가고 사라진다. 선풍기 바람을 너무 가까이서 너무 오래 쐬면, 온 몸이 마비되어 난치의 중풍 환자가 되리라!
오늘날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은 保守도 아니고, 進步도 아니며, 그렇다고, 더구나 中道도 아니니, 오직 正道로만 나아가야 한다. 정치인도, 사법인도,
언론인도, 종교인도, 아니, 우리 국민 모두가,,! 물론, 進步도, 保守도, 또 中道역시, 모두 正道 위에서, 正道만은 벗어나지 말아야만 하겠다!
進步가 正道를 벗어날 때, 모험과 위험의 함정으로 빠지는 길이 되고, 또 保守가 正道를 벗어나면, 기득권 유지 위한 부패로 인하여, 퇴보와 패배의 길로 가게 된다. 모두가 모를 수 없는 正道는 애국심과 신앙심과 양심이 가르쳐 주는 것이니, 이는 국가와 민족과 가정의 바탕이 되는 힘이다. 강대국의 國力이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앞서, 그 바탕이 되는 正道를 걸어가는 國民意識 수준이다.
사실 中道는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거의가 타협의 산물이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약자의 몸부림이며, 반대와 방해를 피하면서, 존경과 영광과 추앙을 받고, 인기를 얻고자 하는 이들이 양편에서 던지는 돌에 맞을 용기가 없는, 아주 비겁한 無骨蟲이나, 保護色 變身萬能의 오징어 같은 인생길을 찾는 이들이 가는 숨박꼭질 옆길이다. 인간사회의 외형을 규정하는 中道는 결코 우리가 걸어갈 正道가 아니다. 특히 지도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아니다. !
따라서, 비록, 中道가 오늘날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절충과 타협의 길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벗어나서는 아니 되는 正道는 아니다. 그런데 본래 正道로 향하는 길은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 외롭고, 괴로운 길이다. 그러기에 文度公 요한 丁若鏞 承旨도, 1827년 늦봄, 65세의 老軀를 이끌고, 어린 시절 자신이 10여년 간이나 공부하던 母校, 天眞菴을 마지막으로 다녀가면서, 고달프고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 때나 이때나 나는 항상 한평생 괴로운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조각 배 한척의 신세로세”(猶然苦海一孤舟).
그렇다. 正道는 올바른 길이지만 이 길은 걸어가기가 매우 외롭고 괴로운 길이다.이 길을 가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正道가 나 있는 이 세상이 굽은 길들이 뒤엉켜 바르지 않고, 우리 자신도 바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君子에게 있어서, 中道는 必勿樂行해야 하며, 正道는 孤獨한 苦行의 길임을 각오해야 한다. 지쳐서 땀에 젖은 이마를 식혀주는 바람은 正道가 아니고, 아예 길도 아니다. 길가와 길 위를 스치고 지나며, 나무잎을 흔들고 갈 뿐이다. 오늘날 선풍기 만능시대에,,,!
태산의 절벽 아래를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에서 돛단 배를 타고 내리며, 허다한 갈림 길 나룻터에서 다시 바꿔 갈아 타고 오르내리기를 거듭하는 나그네의 여로처럼, 우리네 인생길은, 李白의 표현대로, “참으로 다니기도 어렵고. 살아가기도 힘드는 길이다. 내리고 또 타야만 할 갈림 길이 많기도 하기에!”(忽復乘舟夢日邊,行路難!,行路難!,多岐路!,,,)
어제의 進步는 오늘에 와서 保守가 되고, 그 사이에는 中道가 양자를 조정한다지만, 양다리 걸치듯, 사업도, 정당도, 정책도, 사람도 수시로 바꾸며, 모든 것을 다시 바꾸어 가며 살더라도, 누구도 바꿀 수는 없는, 또 바꾸어서는 아니되는 正道는 벗어나지 말도록 하자 ! 그래야만 참되고 올바른 保守와, 進步와, 中道가 가능하지 아니하랴 ? Msgr. By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