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초등학교 4학년 44명 중 3명정도만이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오던 시절에.
-無償給食에 兒童敎育學的 考察도 충분히 했는지 다시 한번 되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무료급식 문제를 정치적인 입장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뿐 아니라, 특히 교육적인 면에서도,장기적인 안목에서 충분히 검토해야,,,.
1951년 봄은 우리가 12살의 초등학생 때 해는 길고 배는 고프던 늦은 봄이었다. 1950년 6월 25일의, [6.25 사변] 중, 1951년 1월 4일, 이른 바, [1.4후퇴]로 잠시 피난 갔다가 돌아온 직후라서, 전쟁이 치열하던 중이었는데, 그 때, [굶은 병]ㅣ라고 부르던, 수십만명의 젊은 우리 형님들을 굶겨 죽인, [제2국민병] 사건이 나던 해 늦봄이었다. 늦 봄은, 1년 중 절대 다수 농민들이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이른 바, [보리 고개]라고 부르던, 春窮期를 넘기 위해, 농민들은 산과 들로, 주린 배에 허리띠 조여 매며, 먹을거리 주식용 나물 뜯으러 헤매던 시절이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우리 반 어린이들은 남녀 共學으로 모두 44명이었고, 1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학기마다 선거로 뽑혀, 6년간 반장을 하던 나는, 지금도 그 배고 푸던 어린 시절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오는 학생은, 지금 기억에 44명 중 3명 정도였다. 때로는 어느 여학생의 할머니가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교문 밖으로 손녀를 불러내어, 먹이고 가는 경우도 한 두 번 본 기억이 난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絶對貧困의 飢餓狀態였다. 구호물자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를, 그래서 어른들은, [옥분이, 백분이]라고 예쁘게 불러주기도 하였다.
서울에서는 지금 학생들의 전면 無償給食을 놓고, 시민 투표까지 한다고, 그야말로 野壇法席이다. 들어보니, 경제논리가 문제로 主要視되고 있고, 어떤 한편의 주장 밑바닥에는 평등주의가 깔려 있기도 하다. 또 한 편에서는, 경제 문제 뿐 아니라, 아동 교육학적인 면에서, [공짜 思考方式]이나, [공짜로 거저 받는 意識構造]가 은연중에 무상급식 어린이들에게, 마치 [늘 공짜로 얻어먹으려는 거지 根性]이라도 생겨서 뿌리내리게 되면, 이들이 성장한 후의 사회를 걱정하는, 교육학적 우려의 의견도 적지 않다.
어려운 가정에서 등교하여 점심을 굶어야 하는 어린이들에게 급식하자는 원칙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물론,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먹고 똑같이 살아야]한다는 데는 좀 군대생활이나 공산주의 국가의 [배급생활 사회]가 聯想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무상급식 어린이들]이 부끄럽게 느끼거나 劣等感감을 느끼지 않도록, [高敎 平準化]처럼, 억지로라도 똑같이 무상급식을 먹게 하자는 데는, 이견들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가난한 국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부잣집 학생들까지 무상으로 먹이자는 데에, 가난한 국민들 중에 반대하는 이도 있지만, 가난한 집 어린이들의 무상급식 체면을 살려주기 위하여, 다른 아이들도 더좋은 도시락을 가지고 오지 말고, 똑같이, 군대식으로 同等하고 平等하게 同一한 급식을 강요하자는 데는, 좀 잘 사는 사람들 중에 반대하는 이들도 없지 않은 것 같다. 한마디로, 무상급식의 방법과 技巧 문제이지만, 무상급식 어린이들이, 차별적인 수치감을 느끼지 않게, 무상급식이 불필요한 학생들도 좀 함께 같이 먹어줄 수 없겠느냐는 주장도 문제다. 평등주의와 배급사회 제도의 長短點이 다 있기에 찬반 투표까지 한다는데,,,!
돈 있는 사람들이, [내 돈 가지고 내가 내 마음대로 쓰려는데, 누가 왜 상관하느냐 ?]고 하겠지만,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서글프게 할 정도로, 같은 時代社會的 共生意識(communalism)이나 共生感을 너무나 외면하므로써, 지금 失業者가 된, 죽은 레닌과 스탈린과 트로츠키에게, 再就業의 학과목을 제공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急之緩하고, 緩之急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닌 많은 문제들이, 근 원인과 목적과 결과와 과정에 있어서, 모두가 경제문제로만 보려는 이들이 많지만, 국민들의 倫理意識과 精神紀綱 敎育 면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의 씨앗을 보도록 해야 한다. 경제 발전만이 국가 存立의 唯一한 목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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