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方博士들보다 더 偉大하신 韓國天主敎會創立者 曠菴李檗聖祖
주님의 공현축일이다. 아기 예수 탄생시에 東方에서 博士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서 경배하며 예물을 드리고 돌아갔다고 복음서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성모님이 마음 속에 간직하였던 것을 훗날 제자들에게 전해주므로써 성서에까지 기록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 별이 東方에서만 보였고, 西方에서는 안 보였을리가 없다. 또 牧童들도 왔었다는 기록을 보면, 동방박사들 세사람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는 모르나 하여간 찾아온 사람들 중에 오래오래 기억에 남고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방문객들이 바로 가장 먼 나라에서조차 왔었던, 가장 저명한 그 사람들이었고, 또 가장 귀중한 예물을 주고 간 분들이 바로 그 東方博士 3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당시에 西方에서도 매일밤 떠오르는 이상한 별을 못보았을리는 없었겠지만, 天文學이나 占星術 분야에 그다지 관심이 적었다던가 아니면 몇 명 찾아왔었지만 별로 신통치 않은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西方, 특히 로마 大帝國의 황제한테 점령당한 屬國 국민인 이스라엘 여성으로서 성모님이나 성요셉, 또는 훗날 성경기자들에게도 별로 달갑지 않은 기록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지금의 이락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쉬, 인도로 이어지는 東方에 대하여는 솔로몬 왕 때를 전후하여 이스라엘인들에게 상당히 선망의 대상이 되는 文明人들이나 賢者들이 있는 神秘의 지역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그러한 시대였을 수도 있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자기네와 역사적으로 종종 전쟁도 하고 선조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고생도 하던 강대국이나 또는 무역거래도 있었던 나라들, 예컨대 바빌로니아, 즉 이라크나 이란이나 인도 같은 나라에서 박사들이 왔다면, 구체적으로 바빌로니아의 박사들이 왔었다고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막연히 동방의 박사들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나라이름을 모르는 아주 먼 극동지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이 아니었을까?
더욱이 최근 우리나라 몇몇 곳에서 선사시대의 암반 음각 주에는 천체의 별자리들을 정확히 표시한 것들이 발견되고 있고, 고구려의 고분 천정벽화 중에도 천체도가 발견되는 것을 보면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도 더 연구해볼만한 것이라고 본다.
하여간 장차 역적이 될 아기가 태어났다하여 헤로데 왕은 별이 보이기 시작하던 때를 기준으로 두세살짜리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을 보면, 東方박사들은 당시 베들레헴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던 牧童들과는 달리 적어도 2, 3년 전부터 별을 보고 연구와 준비를 거쳐 꽤 긴 여행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2년이나 만일 3년의 긴 여행을 하면서까지 찾아왔을까? 가능성은 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예수성탄은 우리나라가 新羅 百濟 高句麗 등 3국이 鼎立하기 시작하던 시절인데, 신라의 청년 蕙草는 19세의 나이로 高句麗와 唐 나라를 거쳐 泰山 峻嶺 지역인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에까지 머나먼 길을 10년간 맨발로 求道의 巡禮를 하고나서 往五天竺國傳을 쓴 것은 잘아는 사실이다.
1836년 12월 6일에 서울을 떠난 金大建 崔良業 최과출 3 소년들은 14세 15세의 나이었는데 神父가 되기 위하여 영하 30도를 내려가는 엄동설한에 만주벌판을 거쳐 북경으로해서 제남 상해를 거쳐 영상30도를 넘는 마카오 무더운 열대의 지역까지 약 2만리 길을 하루 평균 70리씩을 걸어서 6개월 후, 즉 이듬해인 1837년 6월 6일에 도착하여 최과출은 旅毒으로 7개월 후 세상을 떠났고, 2 소년 김대건과 최양업은 10여년 후에 神父가 되어 귀국하였다. 특히 이 3 소년들의 스승이었던 丁夏祥 회장은 16세 때부터 북경 3천리 길을 10여차례나 왕래하면서 조선교구 설립을 이룩한다.
그렇다면 2천년 전 예수 성탄의 별을 보고 印度나 中國, 우리나라 지역인 極東에서도 찾아간 사람들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나아가 東方에서 몇 년 전부터 이상한 별을 보고 찾아왔다는 동방박사들 중에는 極東地方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여간 하늘에 별을 보고 찾아간 동방박사들의 소박하고 순수하고 진솔한 신앙은 우리의 모범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별을 못보고도 천주를 찾고 진리를 탐구하고 세례를 받고 오라고 북경에 사람을 파견하고 그 진리와 신앙을 위하여 박해를 견디고 목숨을 바친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은 물질을 바치고 돌아간 동방박사들보다 더 위대하게 느껴진다.
김대건 신부가 신학생 때 쓴 조선천주교회 略史槪觀(notitia) 첫 머리에 이런 대목이 있다. .㉤ 1845년 金大建 副祭의 書簡.
"朝鮮에는 많은 哲人들(philosophantes)이 자발적으로 우주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참 천주가 계시다는 것(naturali lumine,,,verum Deum,,,)을 스스로 연구하여 인식하고 섬기었는데, 그들 중에 뛰어나게 가장 유명한(inter eos celebrior) 사람은 李檗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큰 연구를 하여 참되신 천주를 공경하고자 노력한 나머지, 당시 북경에는 천주 공경이 번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북경에 보내어 천주교서적을 가져오게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고, 마침내 이승훈은 이벽 박사(doctor I Pieki)에게 가서 자신이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간다는 말을 하였으며,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거든 서양 사람들을 찾아가 천주교 서적을 얻어오게 하였습니다." (1845년,金大建神父의 [新生 韓國天主敎會 槪觀].
(Inter eos celebrior fuit vir nomine I Pieki(nomen baptismi Joannes Baptista). Hic magno studio veri Dei cultum inquirens, cum audivisset religiopnem Domini caeli nuncpatam in Pekino florere,statuit homines mittere, qui illius religionis libros afferrent. Transacto demum aliquod temporis spatio, quumque legati proficiscerentur versus Pekinum; filius tertii legati I Senghugni dictus, adiit doctorem I Pieki eique se in Sinas profecturum affirmavit.).
金大建 신부가 "博士(doctor)"라고 유일하게 기록한 曠菴李檗聖祖야말로 2000년 전 東方博士들 못지 않은, 아니 그 이상의 위대한 200여년 전의 東方博士가 아닐 수 없다.<天眞菴 聖地 卞基榮 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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