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briel Marcel의 [有와 所有(L'etre et l'avoir)]와 한국의 [無所有] 頌歌曲이 들리는 계절에 !
누구에게나 자신의 收容能力과 使用能力의 限界를 넘는 것은 所有의 對象이 아니며, 될 수도 없다. 다른이들을 위하여 혹시 관리의 대상일지는 모르지만! 돈 뿐 아니라,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사업도, 지식도, 모두 마찬가지다. 수용과 사용의 한계를 넘는 것을 소유하며 사용하는 것을, 過慾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學歷은 좋으나 實力은 변변치 못하고, 經歷은 화려하나 能力은 형편없으며, 地位는 높으나 業績은 별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전임자들이 해놓은 일들을 보태고 고친답시고 오히려 망쳐놓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그래서, 學歷과 實力이 다르고, 經歷과 能力이 다르며, 地位와 業績이 다르다는 것을 알 때가 적지 않다.
그런데 存在하는 萬物은 모두 自己 存在의 目的과 自己存在 理由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 눈은 자신의 눈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고, 또 볼 수도 없으며, 귀는 자신의 귀를 들을 수도 없지만, 자신의 귀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心)도 對他存在로서의 기능을 할 뿐이다. 그래서 본래의 우리 마음은 텅빈 것으로, 그 안에 대상물이 자리를 잡게 된다. 마치 입이 자신의 입 자체를 먹을 수 없고, 음식물을 먹듯이.
萬有에는 引力이 있으니, 力은 動하게 마련이고, 動하면 變하며, 化하게 된다. 모든 존재가 존재의 목적이 되는 대상과 결합하여 自己化(ipsiusficatio)하는 것을 목적 달성이니, 만족이니, 행복이니, 하지만, 完成이나 完了나 達成은 終了가 아니고, 새로운 출발의 씨앗이 될 뿐이다.
그런데, 形而上學的 세계에서 대화하는 實存哲學人들의 안목과는 달리, 한 차원 아래의 物理學的 혹은 한 차원 더 아래의 形而下學的(?)인 경제논리로 富와 貧의 多少를 가지고 無所有를 언급하며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염려된다. 왜냐 하면 哲學이 쌀 항아리에 들어가서 飽食病으로 呻吟하는 소리를 우리는 名曲然하지 않는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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