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생활 2년 만에 자네는 무슨 빽으로 그렇게 높이 올라가 앉아 있나?
해마다 8월 말이면, 먼저 세상을 떠난 동창신부들의 묘를 찾는 습관이 있다. 소속 교구마다 서품일자가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는 1971년 그 해, 國恥日을 이틀 앞두고, 聖女 모니카 축일에 사제품을 받았는데, 벌써 올해로 40년이 되었다. 그래도 아침기도회 때, 직원들이 케이크를 하나 사다가 놓았다. 이게 어디냐? 40년 전 우리가 신부될 때는 구경도 못하던 고급 축하선물이 아닌가?
1973년 가을, 농촌사회지도자 교육원 차린답시고 바쁜 체 하며 뛰어다니다가, 교통사고로 골반이 두 동강 나서, 미아리 성가병원에 누워있으려니, 서울 혜화동 보좌로 있는 야고버 왕송석 동창신부가 잠자다가 腦溢血로 세상을 떠났다고, 서울 동창들이 와서 알려준다. 성모님께서 주무실 때 아드님이 하늘로 모셔갔다하여, 전에는 聖母 夢召昇天(Assumptio SS. Mariae)이라 하였는데, 1951년 1.4 후퇴 당시, 越南 孤兒로 와서 온갖 고생 다하더니, 신학생 때부터 늘 어머니로 모시던, 성모님께서 고생 많이 했다고, 일찍 하늘로 데려가셨나보다. 마치 파티마의 히야친따, 프란치스꼬 어린이들처럼.
용산 성당 마당 아래 성직자 묘지에는,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부르기에르 소 주교님 묘와, 명동성당 터를 장만한 블랑 백 주교님, 건축 실무자였던 꼬스트 신부님과 퐈스넬 박신부님, 대성당 건립을 마무리하고, 초대 교구장 소 주교님 묘를 중국 요동 펠리구에서 찾아 발굴하여 이장한 뮈텔 대주교님 묘, 그리고, 신비신학 서적의 번역가이며 우리 지도신부이셨던 최민순 신부님, 학장으로 계시던 정규만 신부님, 오늘의 수원교구 용인본당 초대 설립자이며 건축자인 조인원 신부님, 서정리 본당 주임 유수철 신부님,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언론인 윤형중 신부님, 등, 여러 선배님들의 묘가 모두 50cm 폭에 1m 길이로 된 작은 平石을 앞에 놓고, 2분지 1평도 못되는 넓이에 일률적으로 平地葬으로 안장되어 있다. 관계사진은 천진암 성지 홈페이지 Photos에서 왼쪽 Submenu의 [최근 사진 자료] 참조-The recent photos
서울대교구에서는, 여기를 [聖地]로 지정하였다고 하니, 늦게마나 얼마나 큰 다행이냐? 절두산도, 새남터도, 미리내도, 모두 [史蹟地]라고 써 붙이던 시절에 비하면, 교회용어도 많이 바로잡히고 있다. 되도록 많은 신도들이 자주 참배하도록 해야만 할 텐데!!
“할 일은 많지만 인생이 짧고, 세월이 빠르다네”하며, 모든 선배 사제들이 異口同聲으로 訓戒하시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1960년대 후반, 신학생 때 종종 이곳을 참배하던 청년시절이 바로 엊그제였는데! 1971년 司祭服 입고 나서, 앞만 보고 달려온 길이 벌써 이렇듯, 김병연 金笠의 감회에 젖는구나. “붕 떠 있는 듯한 내 삿갓이 꼭 텅 빈 배를 엎어 놓은 것 같지만(浮浮我笠等虛船), 머리에 한번 쓰고 붙들어 맨 후 가을이 40번이나 지났네그려(一着平生四十秋). 저명인사들이 감투나 지위로 걸친 의관이란 겉꾸미는 것이지만(俗子衣冠皆外飾), 내 삿갓이야 머리에 쓰고 나면, 하늘에 가득 찬 비와 바람에 홀로 걱정이 없도다!(滿天風雨獨無愁).”
그저 몇 년 앞서 가고, 때로는 그저 몇 달 뒤에 가는 것뿐인데, 萬事가 주님의 손 안에서 안배하시는데(萬事分已定), 흘러가는 구름 타고 불안해서 안절부절하는 뜬 인생들이 공연히 바빠서 법석을 떠는구나!(浮生空自忙).
왜 이렇게 빨리 따라오지 못하고 매달리느냐고 야단이며, 왜 빨리 앞서서 나가지 않고 앞에서 걸리적서리느냐고 재촉이냐?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물도 먼저 내려가려고 앞을 다툰다고 되는 것이 아닌데(流水不爭先), 하물며, 주님이 기다리시는 저 높은 자리로 오르는 길이야, 우리 왕신부처럼, 무슨 빽이라도 있어야 하지 아니하랴!?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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