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眞菴聖地

바로가기메뉴
주메뉴바로가기
서브메뉴바로가기

유틸메뉴


주메뉴


서브메뉴

이번주 풍경소리

  • 이번주 풍경소리
성금 봉헌 안내시복시성 추진성지안내 조감도

본문내용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1. 이번주 풍경소리


순교자 이승훈 진사 기념일 미사 11월 18일 낮12시, 천진암 광암 성당에서.
 오는 11월 18일 일요일은 229년 전, 즉, 1783년 이 날,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중 한분이신 27세의 이승훈 진사가 광암 이벽 성조의 대리자로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되던 뜻깊은 날입니다. 낮 12시에 천진암 성지 광암성당에서 성지 주임 김학렬 신부님 주례로 미사와 특별 강론이 있읍니다. 지금 이승훈 성조의 시복을 위하여 우리 수원교구에서는 온갖 힘을 다 기울이고 있읍니다. 교우들은 기도와 희생으로 함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겨레가 자발적으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믿고, 실천한 나머지, 다른 나라 중국 북경 3천리까지, 세례를 받으러 출발한,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한국천주교회의특징적인 자랑의 날입니다.
천진암 성지에서는 지난 1983년 11월 18일에, [이승훈 성현 북경 파견 200주년 기념행사]를, 당시 주한 교황대사 몬떼리시 대주교님과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님의 공동 주례로 여러 신부님들과 함께, 국어학자 이숭녕 박사, 역사학자 유홍렬 박사, 등 관계 인사들과 더부러, 한국 최초의 40명 국악인이 합창하는 창미사로, 매우 성대히 거행하였습니다. 그 해부터 매년 이 날 기념미사를 드립니다. 금년으로 제29회가 됩니다. 교우들의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미사 후에는 간소한 다과가 있습니다.
 
광암 이벽 성조께서 자신의 대리자 겸 한국 천주교 신도들의 대표자로 이승훈 진사를 북경교회로 파견하였다는 기록은 여러 문헌에 자세히 나오는데, 그 중에 몇가지만 소개합니다.
 
-1801년 조선왕조실록 -
 
“정약종을 문초하자, ‘서양학(천주교)을 처음으로 알고 있던 사람은 이벽이며, 얼마 후 이승훈을 변장시켜 몰래 북경에 보내었으니(裝送),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그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가게 하였으며, 북경에 가서 서양인들의 처소에 왕래하면서,,,
”丁若鍾供原初李檗聞有西洋學裝送李承薰隨其父東郁貢使之行入往洋人所居之堂,,,"
<朝鮮王朝實錄, 1801>
 
-1801년 황사영 백서 -
 
“이승훈은 벼슬을 하지 않는 깨끗한 선비 이벽이 매우 기특히 여기던 사람인데, 이벽이 이승훈에게 가로사대,‘북경에는 천주당이라는 집이 있고, 그 집에는 서양선비들과 천주교를 전하는 자가 있으니, 자네가 찾아가서, 기도서 한권을 구하러 왔다고 하고, 아울러 세례 받기를 청하도록 하게. 그러면 그 서양 선비가 자네를 크게 사랑할걸세. 기묘한 성물들을 되도록 많이 가지고 오게. 절대로 빈손으로 돌아오지 말게. 이승훈은 이벽의 그 말대로, 천주당에 가서 영세를 청하였습니다,,,.
 
李承薰 布衣李檗大奇之 曰北京有天主堂 堂中有西士傳敎者,子往見之 求信經一部
幷請領洗 則西士必大愛之 多得奇物玩好 必勿空還 李承薰如其言 到堂請洗,,,"
<黃嗣永 帛書, 1801>
 
-1838년 聖 Pierre Maubant 신부 문헌-
 
“이벽은 그리스도교를 온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이고, 몇몇 다른 改宗者들과 합심하여 1783년에 또 다른 대표자로 李氏를 북경에 보내어, 聖敎에 관한 사정을 풍부하게 알아오게 하였으며, 그는 1784년 2월에 외방전교회 회원 신부한테 ‘베드로’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대표자란 이승훈을 말합니다. 이 서한은 1838년 10월 3일, Mr. Maubant 신부가 조선에서, 파리에 있는 대신학교 학장 Mr. Langlois 신부에게 보낸 것입니다.
Extrait d'une lettre de Mr Maubant miss. Ap. en Corée à Mr Langlois Superieur du Seminaire des Missions Etrangères Yangtchi 3 Xbre 1838.
 
"[…]Nous avons pu cette année nous procurer secrètement des notes manuscrites sur l'é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nne en Corée. Elles diffèrents peu de celles que j'avais composèes d'après la tradition orale,,,,,En 1720 la 58e annèe du fameux Kanghi, un autre ambassadeur Corèen nommé Y eut une entrevue avec les Missres. de Pekin et reçut d'eux des livres Chretinne qu‘il emporta en Corée. Un nommé Koang, qui reçut le surnom de Jean, ayant lu ces livres, eut le bonneur de sentir et de gouter les verités qu’ils renfermaient. Il embrassa la religion Chreti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élytes il envoya en 1783 à Peking un autre délégué égalemant nommé Y,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Y s'adressa aux Missres. frainç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é, sous le nom de Pierre[…]"Missres. frainç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é, sous le nom de Pierre[…]"
 
聖 Maubant 신부(1803~1839)는 1836년에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프랑스선교사이며, 김대건, 최양업, 최과출, 3명의 15세 조선 소년들을 마카오 신학교로 보낼 때, 추천서를 쓴 신부인데, 그가 입국한 지 2년 정도가 지난 후에, 즉, 1838년 10월 3일에 龍仁 양지 공소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Mr. Langlois신부에게 보낸 문헌에는 조선천주교회의 창립에 관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다. 일부 발췌하여 옮겨본다.
 
[금년에 우리는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창립(l'établissement)에 관하여, 말로만 듣던, 손으로 기록한 비망록을 비밀히 관리하도록 받을 수가 있었는데, 口頭로 듣던 바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즉, 1720년, 중국 年號로 저 유명한 강희 58년에, 북경에 다녀온 사신 이공(李公, 역자 주. 이이명:李頤命)이 서양선교사들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 이 책들을 구해 읽은 광이라는 사람(역자 주. 광암(曠菴) 이벽(李檗)은 후에 요한이라는 교명을 가진 분입니다. 이 사람이 천주교 교리에 同感하고 深醉한 나머지, 천주교를 전심으로 받아들였고(embrassa la religion chrétien), […]광이라는(광암 공) 이 사람은 이 새 종교에 합류한 몇몇 改宗者들(prosélytes)과 함께 힘을 합하여(de concert), 1783년에 자기들의 또 다른 代表者(autre délégué) 한 사람을 북경에 파견하였는데, 이 대표자는 1784년 2월에 베드로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 聖 A. Daveluy 문헌은 생략합니다
 
* 1980년 변기영 작사,작곡, 차인현 반주 이승훈 성현 순교가는 이 홈페이지 우편에 있는, '성지 성가'로 들어가면 됩니다.
 
Msgr. Byon

Writer : 변기영    Date : 2012-11-14 00:51   Hit. 3409
다음글 :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流水不爭先) ? - 대통령 후보 사퇴를 보면서 !
이전글 : 통일 기원 성모상 건립
우리나라천주교회창립사
천진암성지 소식지(2019년 1월호)
ebook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