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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풍경소리

  • 이번주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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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번주 풍경소리


大韓民國 建國日, 8월 15일은 聖母 마리아 昇天大祝日이었다 !
大韓民國 建國記念日, 8월 15일은 聖母 마리아 昇天大祝日이었다,
천진암 성지에서는 겨레의 꽃 무궁화의 날, 천진암 성지의 8월은 겨레의 꽃, 무궁화 사랑의 달 !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서 8월 15일(木) 낮 12시에 기념 경축미사 봉헌>
 
천주교회 2 천년 역사를 훑어보면, 天上에 계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며, 使徒들의 어머니시고, 地上 敎會의 어머니시며, 信徒들의 어머니이신, 聖母 마리아의 紀念 祝日이나, 聖母 聖月, 5월에는 종종 神秘로운 恩寵의 단 비가 내렸었다. 특히, 8월 15일은 使徒들의 시대부터 聖母 마리아의 昇天을 기념하며 공경하던 가장 오래된 축일이었다. 끊임없는 戰亂과 凶年과 疾病과 迫害 같은 苦難의 渦中에서, 눈물로 부르짖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천상에 계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지상의 신도들과 함께 天主 聖父께 간구하시어, 종종 人力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던 自由와 平和와 救援의 큰 은총이 내렸었다. 그래서, 전쟁이 그치고, 포로들이 석방되는 慶事가 성모님 축일이나 성모님 성월 5월에 종종 있어서, 우연이라고만 보기에는 번수가 많은 편이다.
 
제1차 세계대전도 1917년 8월 15일 聖母昇天 大祝日을 깃점으로 終戰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아주 끝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도 1945년 8월 15일 聖母昇天 大祝日에 日本이 항복하므로서, 인류 역사상 최대의 그 무서운 전란이 끝났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2개 투하되어 도시는 잿터미가 되었고, 20여만명 일본국민들이 죽었어도, 日本은 항복은 커녕, 오히려 毒을 뿜는 방송만 계속하였었다. 그 당시 조선 땅에서도 우리 어린이들까지도 부르게 하던 노래가 있었다. “갓따서 닛뽕, 단 지데 갓따서, 메이헤이 이마꼬소 돗찌우리다”(이겼다, 일본이, 또 이긴다 일본이, 이제서야 美, 英을 박살내어 진이겨 버린다!”. 후퇴와 항복과 패배라는 말 자체를 禁忌視하던 日本은 전 국민이 모두 죽어도 항복할 수 없는 체질의 軍隊의 나라, 軍國主義 帝國이었다. 마치 지금의 북한처럼. 미국의 무력이나 중국의 군사력에 의존하여, 남북 어느 쪽에서든 평양이나 서울을 점령한다해도, 쌍방의 항복은 없으며, 종전이 되어도, 게릴라 전은 짧아도 10여년, 길면 30여년 갈 것이다. 6.25 사변 후, 남부군 이현상 부대의 지리산 공비토벌은 3년이 걸렸었다.  그러나 전 세계 10억을 넘는 천주교 신도들의 애절한 기도와 천상에 계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세계대전이 신앙자유 국가들의 승리로 끝난 것은 천상 성모마리아의 도우심이었다. 사실 당시의 표현으로 우리나라는 뜻밖의 해방을 맞았다.
 
1945년 9월 8일 성모 성탄축일에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 대통령으로 유명한, Roosevelt 대통령전권특사, 美國 Spellman대주교(후에 추기경) 미군 하지 중장 (Lt. General Hodge)을 대동하고, 대한민국의 해방군으로서, 소련군보다 한달 늦게서야 인천에 상륙하여 입국하였으며, 남 한 내의 일본군 무장해제와 정권인수를 정식으로 공식 접수하고, 다음 날 9월 9일에는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스펠만 대주교와 노기남 주교 공동집전으로, 2차대전 종식과 倭政 終熄으로 한민족 해방과 미군의 개선 입성을 환영하는 미사를 봉헌하였다.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예하 미국 장성들이 명동대성당 마당에 모인 정계 최고위 저명인사들 앞에서 땅에 무뤂을 꿇고 노기남 주교의 손가락에 낀 주교 반지에 입을 맞추는 인사는 당시 한국인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100여년간을 두고, 처참하게 잡아 죽여도, 말한마디 못하고 맞아 죽던 천주교인한테 점령군 사령관 장군들이 무뤂꿇어 손가락에 입을 맞추다니 ! 기가 막히고 어안이 벙벙한 사껀이었다.
 
1945년 10월 성모 마리아 로사리오 성월(16일?)에는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자마자 제일 먼저 노기남 주교를 먼저 예방하는 자리에서, 이승만 박사는 그의 환영식 답사에서, 미국서 뉴욕 대교구장 Spellman 대주교와 G. M. Carrol 안신부와 재미 윤을수 신부, 및 중국 南京의 우빈(于斌) 대주교로부터 그동안 한국독립을 위해 받은 크나큰 특별 지원에 대하여 아주 진솔하게 정중한 감사를 표하였다. 독립군들의 전투현장 외에, 당시 국제 무대에서 세계 4대 강국 지도자들, 즉,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중국 장개석 총통, 소련 스탈린 수상에게, 직접 대면하여 수시로 한국 독립을 주장하는 말을 할 수 있던 사람은 미국 뉴욕 대교구장이며 루스벨트 미 대통령 전권특사였던 스펠만 대주교와 중국의 장개석 총통 정치 고문이었던 南京 교구장 우삔 대주교 뿐이었다.
 
독일과 일본과 이태리를 패배시키고, 세계 2차대전을  승리로 끝맺은 것은 전투현장의 맼아더를 비롯한 名將들의 지휘 用兵術(technic) 뿐 아니라, 영국 쳐칠 수상과 미국 역사상 최고의 천재적 정치 지도자이며, 유일한 4선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 대통령 같은 위대한 정치가의 정책(politic)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은 U.N. 총회를 창설한 주역이었고, Spellman 대주교와는 매우 절친하여, 일심동체로 인류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이 시대는, 특히, 지금은,  Roosevelt 대통령과 Spellman 대주교 같은,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들의 역활이 필요하고 아쉬운 싯점이다.  
 
1945년 12월 8일 성모무염시태 축일에는 노기남 주교가 명동대성당에서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 귀국 환영식 거행하며, 임시정부 요인들, 金九 主席과 金奎植 박사, 등을 위하여 환영미사를 드렸고, 그동안 임시정부의 업적과 희생에 감사를 드렸다. 이 날 환영행사 중에, 金九 主席은 공개석상에서 답사를 통하여, 그동안 한국독립을 지원한 蔣介石 총통과, 그 정치 고문이었던 천주교 우빈 대주교의 협력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특히, 1943. 11. 27. Cairo 회담에서, 미국 Roosevelt 대통령과 종종 동행하면서까지 그의 해외 미국 대통령 전권특사로 활약하던 스펠만 대주교의 성원은 지대하였음을 밝혔다. 또한 1945. 7. 26. 포스담(Potsdam), 회담에까지 장총통과 함께 참석하여, 회의참석자들,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장개석 등에게 회의 개최 직전을 전후하여, 약소민족의 자치권과 특히 대한민국의 독립을 역설해준, 천주교 Spellman 대주교지지와 성원에 깊히 감사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한많은 세월, 일본의 속국 국민으로 숨을 죽이고 숨어다니던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 요인들에게는 얼마나 놀랍고도 고마운 일이었으랴 ! 사실 한국독립을 세계 강대국 정상들에게 직접 거론한 유일한 경우였다. 1945년 12월 2일,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은 귀국하여, 여정을 풀자마자, 12월 8일, 성모 무염시태 대축일에 명동대성당에서, 상해 임시정부 각료들은 김구 주석과 함께 당시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최고의  임시정부 귀국 환영식을 받은 것이었다.
 
이듬해, 즉, 1946년 10월 성모 마리아 로사리오 성월(9일?)에는, 미국 메리놀회 번(Byrne)신부가 초대 한국 교황대사로 임명되어 입국하자, 3일 후, 10월 12일에 명동대성당에서 노기남 주교가 환영미사를 드리고, 18일에는 美軍政廳과 천주교회가 古宮, 秘苑에서 환영 축하연을 공동개최하였다. 2년 후,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2년 전 일이었다. 로마 교황청이 전 세계에서 최초로 우리나라(Corea) 대한민국을 정부수립 선포 2년 전에 미리 독립국가로 사전 승인하고, 교황대사를 임명한 것이다. 따라서 교황대사로서 제출하는 신임장을 받을 국가 원수도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을 때였다.
 
사실 되돌아보면 우리나라는 100년 迫害(1785~1885)가 끝나는 것도 1886년 5월 1일, 聖母 聖月이 시작되면서였다. 5월 1일 韓.佛修好條約 체결로 인하여 신앙의 자유가 시작되었으니, 한국 교회는 성모 마리아와 프랑스 선교사들에게도 두고두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꿈도 꿀 수 없던 천주교대성당 건립이 같은 해 성모 성월 초(1886년 5월 3일 ?)에 明禮坊 鐘峴 언덕에 착공되었다.
明洞에 427평의 大聖堂이 착공되던 그 당시 우리나라는 전국에 성직자들이 모두 프랑스인 선교사들만 주교 1명, 사제 10명이 전부였고, 한국인 사제는 1명도 없을 때였으며, 수녀들도 전국에 1명도 없었으며, 신학생은 글방에 다니던 소년들 6명뿐이었고, 전국 신도수는 1만 4천 500여명 뿐이고, 그 중에 서울 장안에는, 고작 3백여명 남짓한 가난한 신도들만이 있을 때, 신앙의 자유와 대성당 착공은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聖母 마리아께서 보살펴주시고 돌보아주시는 은덕이었다.
 
1945년 8월 15일 聖母昇天 大祝日, 당시 우리 어려서의 표현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解放이 되었으나, 38선을 경계로 南北이 分斷되자, 北韓은 소련의 스탈린 無神論 共産主義 정권이 지원하는 共産黨 조직으로 출발하였으며, 南韓 각처에서는 社會主義 혁명을 위한 조직적인 民衆 武裝蜂起가 서울과 지방에서까지, 심지어 정부수립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착하고 순수한 일가친척 농민들과 근면하고 정직한 동료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죽창과 낫이나 도끼를 들고, 아주 저속한 폭언과 폭력으로 대규모 방화와 폭동을 일으키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서울 용산역 폭동을 비롯하여, 여수, 대구, 순천, 제주, 등의 폭동이나 반란은 분명히 미리 교육받고 훈련된 조직체에 속한 요원들의 선전과 선동과 지휘에 의한 것일 수 밖에 없다고, 당시 대부분의 노인들은 생각하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드디어 1948년 聖母聖月, 5월 10일 U.N. 감시하에 南韓에서는 반만년 역사상 최초로 국민들의 자유 총 선거가 실시되어, 制憲 國會議員들을 선출하므로써, 제헌국회가 탄생하였다. 제헌국회의원들은 절대다수(98%)로 이승만 박사를 국회의장으로 선출하였고, 해방 후부터 유진오 박사를 비롯한 헌법학자들이 미리 준비해 오던 헌법 초안을 접수하고 손질하여, 오늘날의 우리나라 헌법 제정을 제헌국회가 마무리하게 되었다.
 
마침내 1948년 7월 16일, 갈멜산의 복되신 童貞女 聖 마리아 祝日에, 國號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憲法을 확정하여, 다음 날, 즉, 미국 독립기념일이기도 한, 7월 17일에는 大韓民國 憲法 선포식을 거행하였다. 制憲節이다.! 이어서, 헌법에 따라, 제헌국회에서는 국회의장 이승만 박사를 절대다수(98%) 찬성으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헌법에 의한 政府 組織法을 가결하고, 계속하여 부통령과 12部, 4處의 장차관을 임명하였다. 황제의 나라 大韓帝國을 상해 임시정부의 우리 선조들이 大韓民國으로 국호를 개칭한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전승한 이승만 대통령 정부와 제헌국회의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같은 해, 즉, 1948년 8월 15일 聖母昇天 大祝日에 우리나라는 정식으로 전 세계에 大韓民國 政府 樹立을 선포하였다. 위대한 우리나라 大韓民國 建國日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해 늦가을 파리에서 열린는 U.N. 총회에 요한 張勉 선생과 趙炳玉 박사, 金活蘭 女史, 3인을 대표로 파견하여 국제연합이 대한민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도록 요청하게 하고, 최초의 한국 대표 3인은 파리 Rue de Bac에 있는 파리외방선교회 본부 앞 길건너의 Lutetia 호텔 2층에 머물면서, 파리외방선교회 신부들의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후원으로 처녀외교 활동의 초년생들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 共産黨 조직에서는,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 U.N.의 승인은 나중으로 미루고, 먼저 南北이 공산주의 사회로 하나가 된 후에 국제연합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1948년 12월 8일, 聖母 無染始胎 大祝日에 당시 파리 U.N. 총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은 48대 6으로, U.N.은 대한민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기로 확정하였고, 발표식은 다음 날, 즉 12월 9일에 하였다. 그 당시에는 유엔 승인의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내다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었다. 그러나, 1년 정도 지난 후, 즉, 북한 共産軍의 기습 南侵이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에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시작되어, 3일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계속하여 1주일 후 수원이 점령되고, 이어서 대전이 점령되어, 한달만에 대구와 부산만이 남는 전황으로, 대한민국의 운명이 風前燈火 같이 위태로울 때, 1년 전 U.N. 총회의 승인을 근거로 하여, 전 세계 60여개 국가가 대한민국을 지원하여, 20여개 나라는 현역 전투부대까지 파병하는데 있어서 명분과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성모님의 안배의 손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건국과정 마디 마디를 천주교 신앙인의 편에서 살펴볼 때, 성모 마리아의 축일에 베푸시는 은덕을 부정할 수가 없다. 앞으로도 우리나라와 우리 겨레를 위하여 성모 마리아 축일에 큰 은총의 선물을 주실 것만 같다. 특히 천진암 성지에서는 1995년부터 매월 첫토요일 저녁에 성모신심 미사와 묵주의 기도 15단을 바치는 촛불 기도회를 지금까지 185회가 넘도록 15년 이상 거행하여 오고 있다.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을 위하여, 각 가정과 직장을 위하여 봉헌하고 있는, 천진암 성지의 순수하고 거룩한 촛불기도회가 시작된 후 몇 년이 지나자, 촛불만을 흉내 내어, 어느새 촛불기도회가 아닌, 촛불 시위가 서울 중심가에서 종종 개최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매우 얺잖아 지는것이 사실이다. 민주화나 인권신장이라는 말이 인끼가 있으니까, 가장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조직체 요원들이 모두 너도나도 복장과 명찰을 바꾸어 달고 나와서, 사회 각처에 진출하여 자천 출연하지만, 몸둥이는 바꿀 수가 없는데도!!
 
한국천주교회는 최근 여러 교황님들의 모범을 본받아 성모 마리아 공경에 정성을 다하여야 하겠다. 더욱이,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문서로까지 천명해주신 바를 따라, 우리나라의 평화통일 기원 천진암대성당 건립에 관심과 정성을 바쳐야 하겠다. 금년에 세계 평화의 청동제 성모상이 천진암 성지 광장 한쪽에 세워졌다. 천년세월을 두고 우리나라와 우리겨례를 지킬 것이다. 서울과 예루살렘과 바티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세워졌다. 교우들은 관광지나 유원지 가는 일을 줄이고, 천진암 성지의 성모상 앞에 와서,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대한민국 건국기념일, 8월 15일은 성모 마리아 승천대축일이다, 이 날은 천진암 성지에서 겨레의 꽃 무궁화의 날로도 기념하며, 천진암 성지의 8월은 겨레의 꽃, 무궁화 사랑의 달 이기도 하다. 낮 12시에 미사가 봉헌된다. 
 
좀더 알고자 하는 분은 柳洪烈 박사  著, 한국천주교회사, 下권, <제111장, 민족의 해방과 교회 발전> 1962. 가톨릭출판사 발행, 및 CATHOLIC ENCYCLOPEDIA FOR SCHOOL & HOME, vol. 10.  1965, McGRAW-HILL BOOK COMPANY, New York, London, etc.,,,를 보시기 바랍니다. -
 
< Msgr. Byon>

Writer : Msgr. Byon    Date : 2013-08-10 21:04   Hit. 3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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