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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풍경소리

  • 이번주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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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번주 풍경소리


오늘의 한국사회 言論 淨化를 위하여, 오늘 가톨릭 言論人들의 主保 聖人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축일에 !
오늘은 가톨릭 言論人들의 主保 聖人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축일인데,,,!
 
1월 24일 오늘은 聖 프란치스코 살레시오(François de Sales, 1567~1622) 주교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그는 프랑스의 알프스 산맥 서남 쪽 Geneva 아래에 위치한, 매우 아름다운 名勝地, Annecy의 저명하고 부유한 公爵의 名文家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매우 聰明하여, 天才的인 두뇌와 聖賢다운 德望으로 出衆하였다. 1984년(?) Annecy에 며칠 머물면서, 그의 기념대성당과 기념관, 그가 창립한 방문회 수도원과 Chantal 聖女 기념 성당, 등을 참배하면서 필자는, 아직도 이 거룩하고 위대한 聖人 學者 주교의 흔적과 자취를 조금이나마 체감할 수 있었는데, 1800년대 중반 이태리 TorinoDon  Bosco 신부가 불우한 청소년들 교육을 위하여 자신이 새로 창립하는 수도회 이름을, 왜, “살레시오회(Salesiani)"라고 하였으며,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聖人 주교를 자기 수도회의 主保로 모시었는지 알만 하였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아직 젊은 소년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당시 열심하고 박학한 예수회 신부들이 가르치는 학교가 있던 클레르몽Clairemonts을 거쳐, Paris로 아들을 보내어 공부하게 하였다. 당시는 1525년 전후 마틴 루터 신부, 등의 종교 혁명 계절이라서 유롭 교회 전체가 대혼란에 빠져 허덕이던 시절이었는데, 그는 1540년, 새로이 창립된 예수회 신부들한테서 많은 영향을 받으며 공부하여, 20세 후반에 이미 법률학 박사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으나, 변호사 개업을 바라고 있던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神學을 배워, 천주교회의 司祭가 되었고, 후에 교구장 주교가 되었다.
 
400여년 전, 聖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로 정기간행물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인쇄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한 그 시절, 어지간히 애를 먹었을 것으로 상상된다. 처음에는 몇 페이지 안되는 週報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내용은 거의가 다 자신이 집필하는 자신의 주일 강론과 신도들의 모임이나, 행사에 관한 알림 정도였다. 주일이 지나면 월요일부터 한주간 내내 주보 발행 준비가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일반 신도들이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聖經 名句에 대한 풀이를 추가하면서, 점차 틀이 잡힌 週報로, 또 한 때 합본 月刊誌로도 발전하였다. 당시 사방에 퍼져있던 프로테스탄트 소속의 牧師들과 논쟁이 불가피하였으나, 이미 갈라져 나갔던 신자들이 그의 談論을 읽고 적지 않게 다시 천주교회로 되돌아 왔다.
 
그는 博學多識한 神學知識으로 아주 방대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信心生活의 入門", 즉, Philothea (Introduction à la vie dévote)에 뒤이어, ”神愛論“, 즉, Theotimo (Les traites de l'Amour de Dieu)를 비롯하여, 珠玉같은 명문장으로 쓰여진 名著들은 지금까지도 神學人들과 靈性人들의 큰 길잡이가 되고 있다.
 
1622년 그의 死後, 30여년이 지난 후, 1661년에 교황 Alexander 7세는 그를 福者로 선포하였고, 4년 후, 1665년에는 바로 諡聖하였으며, 1867년에, Pio 9세 교황은 그의 탄생 300주년 기념하는 해에, Rerum omnium 회칙을 발표하였다.1887년, Pio 9세 교황은 그를 천주교회 신학자 (Doctor Ecclesiae)로 선언하였다. 1923년에 와서, 교황 Pio 11세는, 聖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를, 전 세계 가톨릭교회 言論人들의 主保聖人으로 선포하였고,  1967년, 탄생 400주년에는 밀라노 대교구장이었던, 교황 Paulo 6세가, Sabaudiae Gemma 회칙을 발표하였으니, 어느 한 聖人 개인의 탄생을 기념하는 300주년과 400주년에 교황의 특별 회칙으로 두 번씩이나 그의 탄생을 되새기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경우도 처음이었다. (神愛論 서문 참조).
 
더욱이 博學多識하였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지식과 정신과 교훈이, 천주교회 현대화와 쇄신의 큰 分水嶺이 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에 끼친 400년 전 그의 思想은, 특히, 매스 메디아에 관한 교령(Inter Mirifica)과 敎義憲章(Lumen Gentium) 작성에 끼친 淵源的인 공헌에 대하여, 훗날의 교회는 크게 감사하며 격찬하고 있다. 방대한 그의 전집은 영성신학과 사목신학 뿐 아니라 교의신학을 연구하는 神學人들에게는 일독필수의 명저라 하겠다.
 
그는 매우 善良하고 溫和하며, 상대방을 평화롭게 하는, 아주 良順한 사람이었으며, 늘 “모든이들에 대하여 항상 좋게 생각하고, 좋게 말하고, 좋게 대하여 주어라!하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오늘의 한국 가톨릭 언론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다. 오늘날 종종 TV의 뉴스나 인터넽을 보다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려야만 하는 보도를 접할 때가 너무 잦은 편이다.
 
근대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言論人이었던 故 윤형중 신부님이, 지난 1950년 6.25 사변 중, 특히, 1.4. 후퇴 이후, 경향잡지 편집을 맡고 있을 때, 당시 천주교회의 소유였던 京鄕新聞의 천주교신자 기자들을 만나면 종종, “천주교 신자인 記者들이나 文人들은, 이마를 물로 씻는 領洗만 하여서는 부족하며, 글 쓰는 펜 촉도 領洗하여야 한다”고 말버릇처럼 말씀하였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일이다.

우리 모두가, 특히 언론에 종사하는 신자들은, 오늘 가톨릭 言論人들의 主保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聖人 주교의 축일을 맞아서, 오늘의 한국사회 言論 淨化를 위하여 앞장서기로 다짐하고, 率先垂範할 수는 없을까? 그리하여, 모두가 오늘의 聖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가 되어보자! 

최근 우리사회는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을 핑게와 명분으로, 일부  TV나 인터넽 공간에서는 말과 글로 참으로 듣고 보기 힘든 내용과 표현이 너무 극심한 경우가 허다하다. 불순한 목적과 지시된 목표 달성을 위하여인지, 너무나 상쓰럽고, 잔인하며, 아주 저속한 표현과, 특히 虛僞 造作이나 誇張을 심하게 반복함으로써 진실을 변질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보인다. 귀가 아프게 반복하는 바람에 시청자들은 조작이나 과장을 알면서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물이 들고, 전염되고 있다. 때로는 言論이 아니라, 惡論이라고 혹평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언론]이 아닌, 이러한 [억론]이 우리 사회와 우리나라에 얼마나 무섭고, 그릇된, 엄청난 나쁜 결과를 내는지, 모르지 않을텐데,! 함혈분인이면 선오기구(含血吩人 先汚其口)로다!
 
우리 모두가, 특히 언론에 종사하는 신자들은, 오늘 가톨릭 言論人들의 主保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聖人 주교의 축일을 맞아서, 오늘의 한국사회 言論 淨化를 위하여 앞장서기로 다짐하고, 率先垂範할 수는 없을까? 그리하여, 모두가 오늘의 聖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가 되어보자-Msgr. Byon

Writer : Msgr. Byon    Date : 2015-01-24 16:04   Hit. 2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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